먼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 부주의로 인해서 이글을 다시 올리게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독수리 타법과 빈약한 컴 실력으로 처음에 올린글을 미처
다듬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생업관계로 시간차이가 있다보니
뒤늦게야 다비아에 들어왔구요 관심갖고 여러 의견들을
남겨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헌데 제가 올린글이 읽기가 좀 부담스러워서 나름 수정을 하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내용은 동일하고 단지 글의 배열을 좀더 여유롭게)
그런데 글의 말미가 잘린채로 수정이 되어서 수차례 바꾸려고 했지만
어찌된것이 수정완료버튼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마침 토요일이라서 손님은 계속 들이닥치고...
운영자님께 긴급 구조 쪽지를 보냈으나
오늘따라 확인을 늦게 하시네요

하여 좀더 기다려보다가
할 수 없이 새로 빈공간을 차지하는
나쁜넘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굽어 살펴 주소서 -()-;;;

다비아 사상 초유(?)의 사태를 유발시켜서
다시한번 죄송함을 금할길 없아오니
해량하여 주시옵소서

나중에 운영자님의 도움으로 본 글이 수정완료되면
이글은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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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루기 힘든 제목이다. 과연 모든면에서 부족한 내가 이 국직한 주재를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요리조리 피해가려고 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게속 회자되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강단에서 ‘전도’에 대한 집중적인 설교를 듣지 않은적이 없기에 아마도
웬만한 성도들에게는 ‘기피현상’ 내지는 ‘노이로제’ 라는 곱지않은 수식어가
붙을 정도이니 말이다.

실제적으로 교회성장의 주된 프로그램으로‘총력전도’나 ‘전도특공대’라든지
여러가지를 동원해서 성과를 거둔 사례가 많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관심이 아닐수가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 부흥’과 ‘교회 성장’ 과는
사뭇 그 내용이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전도” 라는 말은 여간 부담이 아닐 수가 없겠다.
대다수의 비 신자들마저도(물론 그 내용을 모른채로) 새벽기도, 십일조,와 함께
전도에 대하여 머리를 흔드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당연하게도
과거 길거리나 전철안에서의 “예수 천당 불신지옥” 에
깜짝놀란 충격이 아닐까 싶다.

다분히 선동적인 구호에 질겁을 한 나머지
전도에 대한 회의론마저 불거지는 것을 볼때 안타까움을
가눌길이 없다. 얼마전에 이미 사랑채 공간에서 치열하게 논의가 됐던
사안이기에 다시 그 불길을 끄집어 내려고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그 당시 적절하게 생각을 표현할 시기를 놓쳐서 그냥
지나가는 상념한자락 끄적거려볼 따름이다.

그당시의 대부분의 의견이란
전도자들의 최소한의 인격과 지성과 타자에 대한 겸손한 배려가
요구된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대안으로 나온것의 큰 틀이라면 생활전도,
혹은 관계전도로 정리가 되면서 전도 자체를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방법론에서 이제는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좀 세련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고 보는데 시간이 지나버려서 정확하게
이해를 한것인지는 모르겠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의견들이다.
이왕이면 부드럽고 거부감이 없이 전도를 한다면 금상첨화겠다.
전도를 받는 혹은 당하는 불특정 다수들에게 최대한의 거부감과
불쾌감을 줄이면서 “예수”를 전한다는데 무슨 딴죽을 걸겠는가?
그렇게 할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좋은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꼭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본래 심성이 비뚤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른생각도 한번
피력하고자 한다.

내생각만 절대 옳고 그것은 틀리다가 아닌
다양성속에서의 한 발상이라는점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어느분이 매우 적절한 화두를 제공했던것이 생각이 난다.
거기에서부터 한번 진행해봐야 겠다. “전도에 치명적인 허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셨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대부분 공감하는 글이었다.
이 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면서 야릇한 생각이 드는것은 왜일까?

내가 본 두가지 글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에
편의상 같이 묶어서 다룬것을 용서하시라.
“전도” 하면 떠오르는것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니 어쩌겠는가?
오늘날은 그렇게 대놓고 하지는 않는것으로 본다.
물론 내가 직접 못봐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한가지 조심스러운 점은
어쩔수 없이 먼저 글을 올리신분들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전개하기에 필요해서 불쾌하시더라도 살짝 인용을 했으니
과히 허물치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요한복음의 내용중에 아마도 4장부분인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나온다.

사마리아와 유대인과의 반목관계는 다 아는거라
따로 설명은 피하려고 한다. 문제는 우물가에 와서 물길으러온 여인의 삶이다.
이 여인은 대부분 남편을 여럿 바꿔가며 살아가는
아주 부정한 여인으로 설명이 된다.

그 동네에서 이 여인의 과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누구보다 더 잘알것이다.
동네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그렇게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란점을
지금 말하는 것이다.

이 여인이 오늘 예수님을 만났고
그 만남가운데 메시아로 인식을 했다.
다시말해서 구원을 경험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겠다.
그 여인의 다음 행동을 한번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물길으러 왔다가 물길으는것조차 잊어버린채로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는 마을로 뛰어갔다.

- 여인은 물 항아리를 내버려둔 채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와서 내 과거를 모두 말해 준 사람을 보십시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와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

구원을 경험한
여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단순하였고 놀라움이었고
기쁨이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등떠미시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원해서 환호를 지르며
달려갔다는 것이다. 이 여인이 따로 전도에 대하여 훈련을 받았다거나
세미나에 참석해서 수료를 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본질은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났다”는게 중요하겠다.

위에서 미리 말했지만
그 동네에서 이 여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여인의 인격이나 삶의 모양이 썩 좋은 평판이었겠는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방방뜨며 뛰어오는 여인을 보고서
동네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드디어 미쳤구나‘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여인은 지금 “예수”를 전하고 있는것이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메시아를 기다려 온것이 사실인데
여인의 말이 “와서 내 과거를 모두 말해 준 사람을 보십시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그리스도를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기가막히는 것은 마을사람들의 반응이었다.

“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와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

계속해서 여인의 말에 마을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다음 장면을 따라가 보자.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이
‘그분이 내 과거를 모두 말해 준 사람이다’라고 증거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 나아와
그들과 함께 머물 것을 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 이틀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믿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듣고 보니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심을 알게 됐소.”

일단 여인이 먼저 예수를 만난 경험이 있었고
그 여인의 일방적인 전도를 듣고 나온 마을 사람들이
또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예수의 말을 듣고 구주라고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보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빌립과 안드레가 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전도했고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에게
전도를 했다. 그 외에도 많지만 더이상은 줄이겠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름에따라서
전도에 대한 형태가 다르게 진행이 되어갔다.
처음 예수를 만난사람들은 제자들이건 사마리아 여인이건
병고침을 받은사람이건간에 “예수”를 전도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이었기에 예수께서 친히 자기를 들어내시면서 전도를 하셨다.

제자들은 따로 전도를 훈련 받거나
그런적이 없이 무조건 예수를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아나셨다. 그리고는 또 얼마 동안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다. 제자들만 덩그러니 남겨놓은채로 사라지신 것이다.

부활의 증인이요 제자들이었지만
성령의 영이 오셔서 그들에게 임재하기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완전 두려움과 무기력에 사로잡혔던 그들에게
오순절날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경험은 제자들을  변화시켜놓았다.
불과 얼마전까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꼭꼭 숨어있었던
갈릴리의 촌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성문앞에서 거리에서
당당하게 전도를 하고 있는것이다.

예수이름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처에서 혹은 외국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이 운집해있었다.

베드로의 거리전도에 대한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라고 조롱하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

또다른 반응이 있었는데 그것은 좀전과는 다른 것이다.
얼마전에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그 예수가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러자 그들이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성령에 의한 제자들의 거리전도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이다.
숫자를 말하려는게 아니라 복음선포에 대한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에 삼천명만 있었겠는가?

모두가 들었지만
모두가 반응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것이다.
또 다른 곳을 보기로 하자.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를 알 것이다.
“스데반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하여서 예수를 전하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 그를 고소했다.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아부라함 때로부터
구약역사를 정리하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는
스데반집사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을 하였는가?

“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

세상에서 복음은 이렇게
상반되는 반응을 가져온다는 성경의 증언이다.
그리고 이제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당시 사도들은(바울도 마찬가지)
다시오시겠다던 주님의 약속을 믿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오실거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없지 않은가? 급할 수 밖에 없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던
주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한 사도들에게 마음이
급한것 아니겠는가?

너무 괘변인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자들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것인가?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시한부 종말론식으로 겁을 주거나
호도하기위해 그러는게 아니라 현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가 듣기 좋을리 없다.
어쩌면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는 기쁜소식이 세상에서는
듣기싫은 소리가 아닐까?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담고있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말로하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기쁜소식을
별로 듣고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축복설교로 가고 재미와 인간적인 감성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는게 그런이유아니겠는가?

설교자는 회중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직설적인 십자가를 피하는 모양세다. 세상의 성공과
업적이 회중들에게 잘 먹히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교회안에서
“복음”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복음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 원색적이라고 무조건
멀리할 필요까지 있을까?

어떤이는 공원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전도지를 나눠주는것이 비효율적이라고도 한다.
그는 이미 구원을 얻었기에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이들을 함 생각해보자.

생각이외로 많은이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없는 것이다. 교회로 오지도 않는현실에서
전도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어떤이가 공원에서 우연히 전해준 전도지를 읽고서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만났다면 그것보다 좋은일이 있겠는가?

한사람을 얻기위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내려오신 예수께서
아흔아홉마리 양보다 길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기위해
험한길을 가셨다. 그것이 과연 효율적이라고 누가 그럴까?

전도란 효율만이 능사가 아니다.
집나간 탕자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달라져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없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으려고 비록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전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세상이 환영하지 않아도 해야 한다.
방법론이나 원리차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만난 예수를 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울의 권면처럼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오늘도 내일도 전해져야 한다.

이시대에도 세례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가까이 왔다”라는 외침이 그리워진다.
너무 포장과 세련된 디자인에 매료된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원시적인 선지자는 가히 신선한 충격이지 않을까?

글이 두서가 없다.
역시 난 논리적이지 못하다.
자꾸 감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그저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라며
궁색하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