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있어서 보속과 화목제물의 관점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십자가의 의미의 정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것에 대해 이의를 다는 것은 불신앙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제가 한의사 게시판에서 신앙적인 글을 많이 올리던 중에 - 워낙에 기독교가 심하게 비판당하고, 비판을 넘어서서 억울하게 모욕당하는 것이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면서 교인 비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인 공감을 얻었습니다. -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신심 깊으신 선배뻘 되시는 분이었는데,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정규 코스를 밟은 분이었습니다. 역시나 이해도가 깊으신데다가, 저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도 상당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그 분이 나의 아킬레스건을 잡듯이 하시는 말씀은, 아무리 은혜를 말하고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해도 - 그 분은 저의 글과 생각에 대해서 내용적으로 적극 공감하셨습니다. -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완전히 헛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예수의 십자가를 그냥 대수롭지않게 취급한 적은 없는데, 그 분은 그렇게 느끼셨던가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선생님의 죄가 완전히 씻겨서 의롭게 되신 것을 믿습니까?"

저는 무작정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저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저 선배님께서는 나에 대해서 저런 의심을 품으셨던 것일까? 제 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죄를 사함, 의롭게 됨의 이야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단지 고전적인 해석에만 고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바울의 유대종교의 제의적 의미인, 화목제물 유비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되어오다가,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배상 만족설" 같은그런 견해들이 압도적이었는데, 칼빈에 이르러서  "penal substitution" (형벌 대체론, 왕의 아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는데 그 나라 법에 따르면 두 눈을 뽑아야 하는데, 왕이 자기 눈 하나 뽑고 아들 눈 하나 뽑아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그런 비슷한 레파토리입니다)인가 해서  형법적인 해석으로 급변하게 되는데, 그 것이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보이듯이 십자가의 구원론적 해석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더 명확한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구원의 관계에 있어서 그냥 그러한 해석적인 관점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가 나의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가 쉽기는 쉬운 것일까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 것은 앞에서도 말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나의 죄 씻음, 의롭게 됨을 그냥 머리로 이해하고 그 관념을 지적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의 삶의 방식과 행동 생각 등등이 실제로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의 삶은 십자가를 부인하기가 일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십자가" 라는 시에서 쓴 것처럼 나에게도 십자가는 너무나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예수의 삶과 존재가 결국 그 쪽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엇이냐는 물음을 항상 자신에게 던져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