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trinity)에 관한 이런 저런 생각...

삼위일체는 정통 기독교의 특징적인 교리입니다. 우상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단일신론의 이슬람교 - 유대교도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 는 삼위일체를 다신론적이고 우상적인 관념으로 간주하면서 저주하고, 기독교 중에서도 단일신론을 견지하는 유니테리안(Uniterian)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답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소수 종파들도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죠. 즉,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삼위일체 사상이 헬라적 “삼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더군요...

삼위일체에 반하는 사상으로 대표적인 뿌리가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와 헬라적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전자는 단일신적 관념을 가진 유대교적인 관점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양자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고, 후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인물로 이 땅에 출현하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양자 모두 결국 삼위일체와는 다른 “단일신론”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전자는 동적인 단일신론으로, 후자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으로 빠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단으로 정죄받은 바 있는 ‘양태론’의 묵은 때는 아직도 서방교회 전통을 이어받은 기독교에는 완전히 벗어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하네요... 아타나시우스, 아퀴나스, 신교와 구교를 각각 대표하는 신학적 거장들인 칼 바르트와 칼 라너 조차도 양태론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강단에서도 양태론적 설교는 비일비재합니다. 최근 연세 중앙교회에서 윤석전 목사가 행한 설교도 양태론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구요... 또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내놓은 신앙선언서(1972)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 에서도 양태론적인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좀 아리까리 합니다만 그렇다네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란 것은 “밀가루로 만든 쌀밥” 처럼 아예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태론은 단일신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양태론은 물이 영하에서는 얼음이 되고, 상온에서는 물이며, 끓는 점 이상에서는 증기가 된다는 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물의 분자 구조는 똑같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론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한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더 알고 싶어서 글을 찾던 중, 총신대 차영배 박사님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 그 계열의 특성인 색깔논쟁 즉, 내용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자기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 자유주의로 설정하고 이래서 틀리고, 저래서 틀리기 때문에, 우리가 옳다는 그런 식의 흑백 논리가 느껴졌고, 그 내용 증명도 “성경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뭐” 식으로 그냥 내용적으로는 별개로 보일 수도 있는 성서의 구절구절들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증명하듯 하는 그런 순환 논리에 빠져버린 감이 없지 않아서 끝이 좀 식상했습니다.

교수님의 결론은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성부 성자 성령 모두 개체적인 하나님으로 그냥 믿고 경배 드리자는 식으로 끝나더란 말입니다.

삼위일체론이 그냥 덮어놓고 믿어야 하는 문제일까 의문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슬람에 의해서는 삼신론적 개념이라고 그렇게 저주받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이해도 안되는 삼위일체론 개념이 신비라는 이름으로 불합리하게 포장되어서 신주단지처럼 모셔지는 것은 말도 안된다’ 는 비판을 받는 형편에서 도대체 삼위일체론만이 가진 정당성이 어떻게 확보되어질 수 있을까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치 증산도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개벽”의 원리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인 것처럼, 그들만이 인정하는 정당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특수 지평에서만이 아닌 보편적 지평에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있어야 정말 참 진리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삼위일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카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가 엄밀히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일단 동방정교회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까? ‘삼위’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일체’보다 ‘삼위’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 하나님 -성령이 각각 독립된 인격적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pericoresis)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페리코레시스’ 는 상호침투, 상호소통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것은 비유하자면 심장과 폐와 간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있으면서, 하나의 유기체(organism)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삼위일체도 그와 같다고 동방정교회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11절, 17장 20-23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라는 말이 증명해주듯,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 페리코레시스란 말입니다.

몰트만은 이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서에 가장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과거 단일신론적인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성서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인 의미를 강하게 설파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신적 특성은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 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라는 말씀에서 보이는 것처럼...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의 독립성을 중요시 하는 패턴은 서방교회와 벌인 “필리오케(filioque.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논쟁에서도 그 특징이 드러납니다.

주후 381년 당시에 전 세계, 즉 그 당시 다섯 개 대교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함께 만든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님은 주님이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서방교회가 스페인으로 가서는 일방적으로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시는(필리오케)“ 이라고 문구를 삽입한 것에서 논쟁이 촉발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큰 권력으로 전 세계의 서울을 자임했던 로마를 기반으로 해서, 주류의식에 젖어있던 서방교회의 결정에 나머지 네 곳의 교회 - 지금의 동방정교회의 뿌리 - 는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게 교회는 서방과 동방으로 분열되어 버렸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야기인 즉슨, 성령이 아버지께로 부터도 나오고, 아들로 부터도 나온다고 하면, 결국은 성령은 어떤 종속된 것이 되어버려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하나님일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삼위가 페리코레시스를 통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삼위는 각각 개별적이고 독특한 위치와 사역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아들은 영원 전에 아버지께로부터 나시고... 성령은 주님이시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이라고 원래대로의 니케아 신조를 고백한다고 해도 “성자와 성령의 기원에 있어서의 성부 의존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표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은 마치 별개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정교회에서는 “성부 하나님만이 성령을 내쉬시지만 성부 하나님은 또한 성자 하나님을 낳은 아버지시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내쉴 때 항상 그 곁에서 함께 하신다” 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를 넘어서 교회 정치의 문제로도 볼 수 있는데, 5개 대교구에 속한 모든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므로 코이노니아를 통한 화합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했던 나머지 네 개 교회와, 수장(首長)적인 권리를 주장하며 교황권을 요구했던 로마의 서방 교회의 입장 차이도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필리오케 문제를 두고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가 1978년 10월과 79년 5월에 두 차례의 신학협의회를 가진 결과 동서방교회 모두가 ’필리오케‘ 없이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휴...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요...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몰트만이 말하는대로. “사랑” 이라는 매질의 페리코레시스를 통한 역동적 관계성, 연대성을 설명하는 교리인 것 같습니다.

앞서서도 요한복음 17장 21절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에서도 보이듯이,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삼위의 신적 리얼리티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관계성, 연대성을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보고 아무리 보아도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유대교, 회교의 단일신론과도 다르고, 헬라 종교의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하면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신론” 은 일반적인 유신론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습니다. 단일신론이든 다신론이든 서로 방향은 완전히 틀리지만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은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삼위일체적 기독교의 신론은 전혀 그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일신 개념과 단일신 개념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일신” 은 숫자적인 개념이 아닌 질적인 개념이란 것도...

신과 인간이 “사랑”이라는 매질을 통하여 전혀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으로, 또한 역동적으로 공명하는 신비... 그 신비의 정점에 “참 하나님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는 것이구요... 또한 그 것을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론” 이 아닌가 결론을 내리며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