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열 처녀 비유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열 처녀의 비유는 넓은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오심과 그에 따른 심판을 취급하고 좁은 의미로는 사람 내면을 이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열 처녀 모두등불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에 기름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조는 믿음의 두 부류 곧 사랑이 연합된 믿음과 사랑이 없는 지식만의 믿음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를 그 이해성으로 받되 이를 자신의 의지에 수용하는 자이고 후자는 진리를 그 이해성으로만 수용하는 자들인데 이 땅에서는 이들 모두 주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로 지칭되지만 주님 재림 시에는 각 영혼의 본질이 서로 다르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처녀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뜻하지만 성경 표현상 이는 신랑 되시는 주님과 영적 혼인에 들어가려 준비하는 예비신부가 되는 교회나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신랑을 위해 곱게 단장한 아리따운 처녀는 사랑과 진리로 자기 영혼을 잘 가꾸어온 사람들을 뜻하는데 이런 의미로 우리는 성경에서 예루살렘 혹은 유다의 딸이나 처녀 등등의 표현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요. 또 열이라는 숫자는 전체 혹은 모두 라는 의미가 있기에 열 처녀는 신랑이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각 영혼들 전체(외형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것은 교회에 속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모두 말씀에 있는 진리를 빛으로 삼아 주님과 천국을 추구해 가는 전 신앙 여정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천국의 빛나는 지혜는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실제 삶의 씀씀이(선용)에 응용하는데 존재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소유하되 그것을 삶의 씀씀이(선용)로 나타내지 못할 때는 신앙이나 믿음, 지혜 그 아무 것도 그에게 속한 것은 없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를 품을 때의 그 풍요로움 때문에 진리 자체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부요 해지지만 정작 주님 앞에 서면 이는 미련한 다섯 처녀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 17:24-26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슬기로운 자로 여김을 받고 반대로 듣고 준행 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로 여김을 받지요.

신랑이 오기 전 즉 심판이 있기 전에는 슬기로운 자나 미련한 자나 모두 외형적 교회 안에 함께 속하여 있게 됩니다. 또 밀과 가라지는 성장하는 기간 동안 함께 섞여 자라고 양과 염소 또한 같은 무리 속에 섞여 있게 되지만 심판 때에는 각 영혼의 색채가 서로 달라 분리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선을 사랑하는 자는 선한 부류와 어울리고 악을 사랑하는 자 또한 악한 부류와 어울려 각 영혼에 형성된 애정에 알맞게 선과 악은 분리됩니다. 이는 악으로부터 선을 분리하여 보호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심판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의미는 염라대왕 앞에 두 줄로 서서 판결을 기다리는 그러한 그림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심판의 진정한 의미는 결합과 분리인데 이를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함께 뒤섞여 살고 각 사람의 내면 역시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어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화사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성이지요. 하지만 심판은 선에서 악을 또 악에서 선을 분리시켜 선은 선과 악은 악과 서로 동질의 결합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상태로 나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곳은 이 세상과는 달리 사람이 자기 내면의 속과 겉을 서로 다르게 꾸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영혼의 애정이 선하지 않은 자가 자신의 겉만이라도 선으로 꾸미려는 치장을 하려는 것은 자신의 종교적 명예와 체면 때문인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나 저곳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비추이는 영적 빛 아래에서는 어느 사물이든지 그 본래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사람 내면에 형성된 믿음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의 애정도 반드시 선할 것이요 그것은 그대로 외부에 나타나게 되는 그런 상태가 바로 천국인 것이지요.

주님의 열 처녀 비유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참된 믿음(신앙)과 거짓된 믿음(신앙)이 함께 뒤섞여 있으면서 그 모두가 외관상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으나 심판이 닥쳐오면 그중 거짓된 것은 참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본래의 악과 거짓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 바로 이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님은 열 처녀 비유를 들고 계신 것이지요.

여기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였고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럼 등잔과 기름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언뜻 보면 빛을 발하는 것이 등잔인 것 같지만 실제 빛을 내는 것은 불에 타는 기름입니다. 등잔은 기름이 타 빛을 내도록 도움을 주는 수단이요 보조장치인 것이지요. 기름의 특성은 열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것이 신체에 들어갈 경우 몸을 따스하게 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공급하며 또 그것이 기계에 사용될 경우 각 부분의 마찰을 줄여 그들이 파손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기름의 특질로서 사랑의 원리를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사랑의 원리 때문에 기름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사용되었습니다.

기름이 타오를 때 열과 빛을 내는 것처럼 사람의 선한 삶 속에는 사랑의 뜨거움과 진리의 밝음이 함께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하다는 개념은 사랑 없는 진리나 반대로 진리 없는 사랑에 적용시킬 수는 없고 반드시 사랑과 진리가 또는 사랑과 믿음이 함께 하는 삶에서만 인정되기 마련이지요.

사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른 바 그의 가장 사랑하는 것이 곧 그의 생명이나 다를 바 없는 이치이지요. 사람 그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이 사랑은 사람에 따라 천국적 사랑과 지옥적 사랑으로 나뉘는데 그럴지라도 이 사랑들은 모두 그들의 생명을 구성하며 그들 삶의 기쁨이 되고 그들의 애정과 사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사랑이 어떠한 색채를 띠고 있는지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잘 탐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훗날 영혼이 주님 앞에 설 때 각기 형성된 애정과 사상 이 두 가지 요소가 주님의 모양이나 형상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본질은 선하신 사랑과 진리의 의로움이시기에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 사랑과 참 진리로 자기 영혼의 형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열 처녀 비유가 주는 교훈입니다. 사람은 말씀의 참된 진리와 이에서 나온 참된 교리를 바르게 알아 이것으로 자신의 지식을 삼고, 나아가 사상으로 굳히며 종국에 그것으로 믿음을 형성하고, 동시에 이렇게 깨달은 진리의 빛을 따라 선한 사랑의 삶을 사는 자만이 등잔과 기름을 함께 준비한 처녀가 됨을 이 비유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름이 준비되지 않은 빈 등잔은 안에 내용물이 없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기에 사용할 수가 없는 것처럼 각 교회 혹은 신자가 사랑의 삶은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지식 자체를 자기 믿음과 신앙의 척도인양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등잔의 역할은 기름이 원활히 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이 등잔의 역할과 같이, 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은 그 목적하는 바 선한 사랑의 삶이 나타나도록 하는 수단적 역할을 할 뿐이기에 진리를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 영혼의 참 생명으로 대표되는 것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은 이른 새벽 어둠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하면 그 빛의 인도를 받아 즉시 길을 떠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이해성으로 바른 진리를 배워 아는 것만큼 그의 의지로는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살려 노력하는 것이 신적 질서에 합당한 일임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다음은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는 동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내용을 살펴봅니다. 성경이 표면적으로는 신랑이 늦게 와 기다림에 지친 처녀들이 깜빡 잠이 든 것으로 표현하지만 이 속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실 교회 곧 우리 영혼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상에서 목말라 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악과 거짓이 참 진리이신 그분을 모독하는 것에 대한 표상이고 그분이 배고파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참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그림인 것입니다.

갈릴리 배 안에서 주님이 주무시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허약하여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떠나 있는 상태를 성경은 그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같은 이치로 포도원 주인이 멀리 떠나간 것이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돈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나는 것들은 모두 성경 글자의 겉 표현에서 읽는 바와 같이 주님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악으로 인해 주님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열 처녀 비유에서도 신랑이 늦게 오는 것과 처녀들이 잠든 것은 전반적으로 교회가 그만큼 어두워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 결과 그들 영혼의 상태가 현세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푹 빠져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어 들리는 신랑이 온다는 큰 외침의 소리는 주님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 각 자의 마음이 말씀의 진리와 거기 내포된 선을 접할 때 그것들을 지각하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큰 외침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각 사람이 자기 영혼에 형성된 애정과 이해성의 정도만큼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각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애정이나 사상 그리고 이에 따른 행동을 통해 매 순간 신랑 되시는 주님을 만나러 마중 나가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선한 삶은 없이 진리의 지식이나 이런 지식적 믿음만을 영혼에 간직하고 있던 자들은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을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의 기름을 나누어 가지려 하는데 이 뜻은 자기 영혼의 어떠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열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선한 삶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 등의 부요를 인하여, 또는 자신이 의존하는 신앙이 드높은 어떤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의지하여, 또는 주님을 믿고있다는 지식적인 신앙이나 성인들의 공덕에 편승하여 천국에 들어가려는 생각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분명 네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다고 말씀하심에도 그들은 남의 기름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주님 말씀에 더욱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어느 교파, 어느 신조, 어느 대단한 위인이든 간에 일생을 공들여 지어놓은 영혼의 형상을 그리 간단히 사고 팔 수 없는데 이는 영혼에 형성된 그의 형상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설령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친다고 해도 강제로 그것을 그 영혼에 심어줄 수 없는 것은 사람의 이해성과 의지가 가진 자유 때문이고 사랑 또한 내 것을 남에게 강제로 심어줄 수 없는 것은 서로가 지닌 애정의 빛깔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들어 진리를 배우고 배운 것을 매일 삶에 적응하며 영혼을 가꾸어온 사람과 일시간에 머리 속 사고관념을 변화시켜 구원을 단숨에 얻으려는 사람과 어느 쪽이 주님 가르침에 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기름은 나누어줄 수가 없고 기름을 파는 자들에 가서 사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기름을 파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해석상의 문제가 중요시됩니다. 왜냐하면 종교 역사상 많은 종파들이 스스로를 이런 부류라 여기며 기름을 사려고 달려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손쉽게 나누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의 주장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확실한 근거를 둔 것이기에 참으로 믿을 만한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시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잘 생각해보면 대부분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저장되어온 사고관념이나 사상의 변화만을 시도할 뿐 실제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야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보다 더욱 강조하지는 않아요. 그러므로 그들은 단지 등잔만을 자꾸 새것으로 바꾸어 줄 뿐 그 실체가 되는 영혼의 질에 변화를 가져다줄 기름을 파는 자들은 아닌 것입니다.

영혼은 그 특성상 온갖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선한 이의 영혼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생명으로 삼고 악한 이의 영혼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그 생명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이 악으로부터 벗어나 선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섭리하시는 인간 구원의 길인 것이지요. 물론 그 힘은 주님에게서 얻지만 신비롭게도 그 나타남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외부 세계에 펼쳐져 보이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악과 싸우는 수고를 할 때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온갖 즐거움을 버려야 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일생을 통하여 자기 속의 악을 내다 버리고 선을 장만하는 장사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성경은 받은 달란트로 장사를 잘 하여 이문을 남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삶은 참으로 인생이라는 장사를 잘한 것이 됩니다. 여기 성경이 말하는 사고 팔거나 장사한다는 의미는 일생을 통하여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셈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이런 연유로 성경에는 해안 가에 위치하여 무역하는 상업도시들과 나라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인생이라는 장사를 성경은 다른 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으로, 또 낮 동안 일을 하고 저녁에는 쉬는 것으로도 표현하며 또 한 주일간 일하고 주일에는 안식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하거나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악과의 철저한 싸움을 뜻하고 이것을 승리로 이끌면 저녁이나 거룩한 주일에 평화를 누리는 안식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의미 역시 자기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의 싸움이 종식되어 선이 악을 지배하는 평온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요. 아울러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는 악을 제거하려는 싸움을 하실 필요가 없어 일손을 놓고 쉬시게 되기에 인간의 안식은 곧 하나님의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진실한 마음으로 읽는다면 그 속에 이 모든 일이 쓰여져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세상에 기름을 파는 자는 많아요. 그들은 나름대로 각 자 우리의 선생이 되어 영혼에 유익이 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주님을 비롯하여 위대한 성인들의 삶은 물론 어린 아이의 사소한 행동이나 심지어는 악인의 악한 행동에서까지 우리는 보고 배울 것이 무척이나 많기에 우리가 살 마음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그 가게의 문은 늘 우리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은 때로 그것이 귀한 것일수록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할 만큼 어렵고 힘이 들어 보다 손쉬운 길로 돌아서려는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적 눈은 진리나 믿음만을 기쁨으로 반기지만 이와는 달리 그의 영적 손은 쉽사리 선한 삶을 움켜쥐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사랑 없이 진리의 지식이나 믿음만을 지니는 것은 텅 빈 등불을 지키는 것이요 일상생활에서 자기의 지식을 지켜줄 사랑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문을 두드릴 날을 고대하며 사는 자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주님과 결합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과의 혼인이란 주님과의 결합을 말하는 것이기에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이런 결합을 이룬 자는 선과 진리 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지로는 선한 삶을 살고 그의 이해성으로는 진리에 의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이 두 가지를 그의 영혼이 동시에 취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새로운 품질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지혜를 먹여 키우고 우리는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식을 사용하는 상태에 있을 때 거기 천국은 이루어집니다. 이를 증거 하듯이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지요. 사실 천국과 지옥은 공간적 개념이 아닌 마음 안에 존재하기에 그것들은 사실 영혼의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천국과 지옥은 각 자의 인격 속에 존재하고 인격은 인간의 이해성과 의지의 어떠함으로 말미암기에 매사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 생각과 의지에 일어나는 온갖 선과 악의 갈등 속에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결국 우리가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각 자의 영혼이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잘 탐색해보고 그곳에 악과 거짓을 발견하면 버리고 선과 진리를 발견하면 이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영혼이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겠는지요. 물론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임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그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두운 저녁에 오실 지, 한 밤중에 오실 지, 새벽에 오실 지, 아침에 오실 지 아니면 봄에 오실 지, 겨울에 오실 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 쓰인 시간의 개념 즉 하루 동안의 시간의 변화나 계절의 변화는 모두 우리 영혼의 상태 변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표현된 보이는 외적 세계의 어떠함은 기실 영혼 내면의 어떠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와 같은 의미로 주님은 천기(날씨)는 구분할 줄 알면서 자기 내면에 가득한 악은 볼 줄을 모른다고 지적하셨음을 상기해 본다면 성경의 시간이라는 것 역시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떠할 때 주님을 모셔들일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맞게될 그 날과 그 시간이란 우리 의지와 이해성에서 오는 애정과 생각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우리는 너무나 감각과 쾌락에 젖어 살기에 마음 속 깊은 데에서 일어나는 심정상태에 관심을 두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척이나 깊다고 여기는 생각들조차 사실은 겉 사람에 속한 감각적인 깊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하지만 영혼의 본질은 속 사람이 지닌 사상과 애정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 겉 사람이 지닌 모든 것들은 벗겨지지만 속 사람은 그 애정과 사상을 그대로 간직하며 저 세계 안에서 살게 되지요.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매사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잘 관찰하여 자기 생각과 의지 속에 담긴 목적과 동기, 결과 그 어느 하나에라도 악한 것이 없이 모두 선한 기쁨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으라는 주님 가르침을 받드는 시초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어려울지라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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