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 비판 4 - 제논의 패러독스

 


제논의 패러독스

아킬레스는 조금이라도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위치에 닿았을 때, 거북이는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와 느려터진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 시합은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보다도 더 불공정해 보입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얼마간 앞선 위치에서 출발을 하지만, 상식적으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아킬레스가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시간은 최소의 단위인‘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간은 더 이상 분할할 수가 없다. 쏘아진 화살은 움직이든가, 아니면 멈춰 있든가 둘 중의 하나다. 만일 화살이 움직인다면 화살은 어느 순간의 시작 점인 동시에 어느 순간의 끝 점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이것은 순간을 분할할 수 있다는 얘기가 돼 모순이 되므로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만 된다.

또 날아가는 화살은 극히 짧은 순간에는 일정한 지점에 있고, 다음 순간에도 다음의 일정한 지점에 있다. 이렇게 날아가는 화살은 각 순간마다 정지해 있고, 정지가 겹쳐 쌓이면 운동은 없다.

화살을 쏘면 화살은 정지해 있지 않고 날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화살은 쏘아지지만 운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다는 황당한 결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야기와 순위를 다툴 정도로 비상식적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결말의 이 이야기들은 유명한 ‘제논의 패러독스’입니다. 패러독스란 주장하는 결론을 보면 황당할 정도로 비상식적이지만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매우 건전하고 합리적이어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를 말합니다.1) 따라서 앞뒤가 맞지 않고 추론과정이 엉성한 궤변과는 구별됩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제논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논변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최소 단위인 ‘순간’으로 쪼갤 수 있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위치까지 도달하는 동안에 거북이도 느리게나마 조금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므로 둘 사이의 간격만 좁혀졌을 뿐 따라잡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무한히 반복되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 마찬가지로 쏘아진 활도 시간이 최소의 단위인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원히 정지하게 됩니다. ‘순간’이라는 최소 단위의 시간 단위가 존재한다면 그 단위에 물체는 정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지가 무한대로 더해져봤자 정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미세할지언정 ‘0’이 아닌 시간을 무한히 여러 번 합치면 무한히 많은 시간이 된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양들을 무한히 더하면 값이 한없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값에 이른다는 무한급수의 수렴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패러독스’는 최소 단위의 수 개념과 최소 단위의 물질 개념이 틀렸음을 효과적으로 입증한다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 패러독스들은 ‘황당한 결론이 사실임’을 우기는 것이 아니라 ‘최소 단위의 수 개념이나 최소 단위 물질과 허공간을 전제로 삼으면 황당한 결론에 도달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3) 분명, 최소 단위의 수 개념과 최소 단위 물질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참이라면 제논의 논변대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제논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와 움직이지 않는 화살이라는 패러독스를 통해 피타고라스학파의 최소 단위의 수 개념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주의 패러독스

‘제논의 패러독스’를 문자주의 성경 해석에 응용하면 다음과 같은 일명 ‘문자주의 패러독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문자는 틀림이 없고 오류가 없다. 따라서 예수는 기원전 4년과 서기 14년에 두 번 태어났다. 예수는 첫 번째 제자인 시몬과 안드레를 요한이 잡히기 전 처음 만났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 고기잡이하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고 처음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또한 예수는 같은 성전을 두 번 방문하여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 후 예수는 고난 받아 죽고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동시에 부활했다.


이 이야기도 ‘제논의 패러독스’ 못지않게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가 두 번 태어났다, 제자를 만났던 사실을 잊고 있었다, 두 군데서 부활했다 등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는 이상 말할 수 없는 결론들  투성이 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문자가 무오하다는 전제가 참이라면 이 황당한 결론들은 모두 참이 됩니다. 제논의 패러독스가 피타고라스의 최소 단위의 수 개념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알려 주었다면, 이 패러독스는 성경이 문자 그대로 무오하다는 주장이 오류가 있음을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오류가 가득한 틀려먹은 책일까요? 그리고 기독교는 진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거짓으로 가득한 종교라는 것을 대변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 문자의 오류들은 성경이 주장하는 진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단지 문자주의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하나님의 뜻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담은 그릇입니다. 따라서 문자주의 해석에서 벗어나 성경을 폭넓게 바라보고 묵상할 때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자라는 그릇만 바라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찾아갈 때에도, 역시 그 안에서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 디모데후서의 구절 역시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으로 삼는 이상, 성경의 문자주의 해석 역시 필요합니다. 문자주의 해석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결국 모든 성경 구절을 의심하는 결과를 초래해 예수가 이 땅에 살았다는 역사성과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등의 핵심적인 성경 구절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직 문자주의 해석만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자주의 해석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다른 해석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해석들의 건강한 비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앉아있어야 할 진리의 자리에 일개 해석에 불과한 문자주의 해석이 대신 앉아 하나님 행세를 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자주의 비판 1부는 여기서 마칩니다.
이제 이어서  2부를 연재할게요.
2부는 동성애와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문자주의 비판)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