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6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것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글을 쓸까말까 쓸까말까 망설이다가, 서로 개념의 뜻을 명확히 해두는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에 망설이며 글을 씁니다.
아 저는 어머니와 서울예배때 늘 앞에서 목사님 말씀을 듣는 학생입니다.
우선 어떤분이 질문하시면서 기독교 변증과 변증법에 대해서 동일시 하시며 기독교 성경의 논리가 서구 철학과 동일한 변증법 아니냐 질문하셨는데
실은 변증이라는 한글어가 동일해서 그렇지 뜻은 다른 동음이의(homonym)어입니다.
변증(apologetics)는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변호해서 옹호하는 작업을 가리키고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apologetics)을 흔히 그래서 기독교 변증이라고 자주 부르죠,
기독교 변증가들은 따라서 초기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과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와 같이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해 지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들 입니다. 어거스틴의 저서 자유의지론, 파스칼의 팡세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술들 같은 것들이 바로 기독교 변증서들입니다.
이에 반해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법을 어원적으로 살펴본다면 변증법은 우리가 알듯이 그렇게 복잡하고 거창하지 않습니다.
dia 두사람이- lektikē 대화한다. 즉 두사람의 대화라는 희랍어 dialektikē디알렉티케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간단한 변증법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있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변증법에 관한 도식보다 명료한 뜻을 알려줍니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두사람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근데 대화는 항상 무엇에 관한것 입니다. 일상적 대화, 농담 뭐 기타 잡스러운 것들이 있겠죠.
그중 진리에 관한 대화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모든 대화를 다루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다루는 대화는 진리에 관한 대화입니다.
철학이 다루는 진리에 대한 대화가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적 기원의 변증법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항상 두항(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서 말할땐 처음에는 서로의 소박한 견해의 모순점을 짚어내며 비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순을 계속 발견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둘이 동의하는 합의점을 찾을 것입니다. 물론 그 합의점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모순 투성이 였던 초견보다는 좀더 진리에 가까워졌겠죠.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추상적인 변증법 도식 정-반-합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도식으로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변증법은 기계적인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인 정반합의 도식에 맞춰본다면 이 대화는 정반합의 도식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정과 반은 항상 두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 대화하면서 서로 모순되었던 주장을 극복하고 새로운 합의점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합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진리를 향한 대화를 통해 모순점을 발견하고 극복해나가는 논리가 다름아닌 변증법이고,
이것이 다름아닌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입니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기술하고 있는것이 다름아닌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 입니다.
플라톤은 Eidos 즉 형상 혹은 이데아 Idea를 바로 이러한 진리에 관한 대화 즉 변증법을 통해 알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서 플라톤에게서 변증법은 '진리의논리학'(the Logic of Truth)이 됩니다.
그후 변증법은 여러 철학사적 변천과정을 겪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해 혹평을 받은후 변증법은 그 의미가 격하되게 됩니다.(보통 우리말로 변증론, 변증술로 옮겨진 것은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자들을 번역할때 그렇게 합니다. 원어는 dialectic으로 변증법과 같습니다.)
이 변증법이 독일 관념론철학에 들어오면서 다시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주동자가 바로 헤겔입니다.
(대표적이란 말은 한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러한 행간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에 의해 격하된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시킵니다.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더이상 대화의 논리일 뿐만아니라 존재의 논리가 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며 동시에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면서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인 지양(Aufhebung)입니다.
Aufhebung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폐기하고 보존하고 고양된다는 세가지 모순된 뜻이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 세가지 뜻을 전부 차용합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스스로를 지양합니다. 다시말해 스스로를 폐기하면서 보존하고 동시에 고양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렵게 들립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갖는 존재자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생물체,즉 유기체입니다. 모든 유기체들은 성장과정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하는 가운데 자기동일성을 가지며 보존하면서 고양됩니다.
소년노무현이 어른노무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면서 고양되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헤겔의 변증법은 철저하게 유기체적 논리이며, 그런점에서 정용섭 목사님께서 즉문즉답시간에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바탕으로한 기계적인 인과성의 논리이다고 말씀하신건 헤겔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compeletely wrongheaded)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게 보통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증법에 관한 잘못된 편견이죠.
사실 헤겔 변증법이 정반합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헤겔의 삼대주저 정신현상학이나 논리의학(Wissenschaft der Logik), 법철학을 아무리 뒤져봐도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을 정반합이라는 기계적인 삼박자에 맞출 수 없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유기체적인 사태의 존재방식 그 자체에 집중하며 존재 그자체의 논리를 뽑아내기 떄문입니다.
하르트만이 독일관념론철학에서 논리의 학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의 형식만 무려49가지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해 지양Aufheben되는 존재의 변증법적 논리는 '대립된 것들의 통일' 이란 말로 더욱 명료하게 설명됩니다. 이 말에 아직도 우리가 처음에 파악한 디알렉티케의 어원적 의미가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반합의 기계적 도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확인 했습니다.
한가지 더 정목사님의 말씀 즉 헤겔이 기계론적인 인과론이라는 주장에 답하겠습니다. 헤겔의 논리가 기계론적 인과론이 아닌것은 그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유기체들은 마치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듯이 생장합니다. 지나가는 개가 상처를 입으면 그 유기적 조직은 마치 자기보존의 목적이 있는듯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새싹은 꽃을 피려는 목적이 있는듯이 생장해 나갑니다. 이렇게 유기체들의 생장은 목적론적입니다. 특히 자기보존의 목적성이 뚜렷이 발견될 수 있지요.
헤겔의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논리의 유기체적 역동성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특히 이점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는 존재와 인류역사의 이런 변증법적 활동이 절대정신의 실현, 자유의식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목적론은 기계론적 인과성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aitia)설에서 4가지 원인이 제시되는데 형상인 목적인 질료인 작용인이 그것입니다.
근대철학의 도래와 함께 데카르트-갈릴레이 근대역학은 작용인을 제외한 모든 원인을 세계설명에 있어 제거해 버립니다.
따라서 모든 원인은 기계론적인 작용인과로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와 정반대로 갑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방식을 변증법적인 논리를 통해서 복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에는 변증법적 생성이 향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절대정신으로의 복귀 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이 유기체에 기반을 둔 원인설이었다는 점에서 헤겔과의 유사성을 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목사님이 헤겔 법칙이 기계적이라고 한 데에서 저는 숨은 행간을 읽을랍니다.
그 뜻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헤겔의 이러한 논리가 특히 이러한 논리로서 설정된 역사발전의 목적론은 논리에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이세계에 내재해 있습니다. 나도 이글을 보시는 다비안 분들도 절대정신의 일부분입니다.(헤겔의 절대정신은 범신론적입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영향인데 자세한건 생략하겠습니다.) 절대정신은 자신의 부분들을 추동하여 자신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변증법적으로, 다시 말해 대립된 것들을 통일 시킴으로서 역사를 운영합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헤겔의 논리가 유신론을 가장한 무신론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여기서는 인류역사에 대한 어떠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개입도 허용치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한 헤겔의 절대정신은 어떤 인격적 신도 허용치 않습니다. 헤겔의 신은 개념적인 존재이고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이 불가능해 집니다.
헤겔에게서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목격하고서 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헤겔이 20세기 신학에 끼친 영향은 이런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단초로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인류역사를 절대정신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필연적 법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실현되기 위한 발전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목사님의 숨은 행간이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변증(apologetics)와 변증법(dialectic),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위해 최대한 쉽게 서술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 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
아 저는 어머니와 서울예배때 늘 앞에서 목사님 말씀을 듣는 학생입니다.
우선 어떤분이 질문하시면서 기독교 변증과 변증법에 대해서 동일시 하시며 기독교 성경의 논리가 서구 철학과 동일한 변증법 아니냐 질문하셨는데
실은 변증이라는 한글어가 동일해서 그렇지 뜻은 다른 동음이의(homonym)어입니다.
변증(apologetics)는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변호해서 옹호하는 작업을 가리키고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apologetics)을 흔히 그래서 기독교 변증이라고 자주 부르죠,
기독교 변증가들은 따라서 초기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과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와 같이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해 지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들 입니다. 어거스틴의 저서 자유의지론, 파스칼의 팡세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술들 같은 것들이 바로 기독교 변증서들입니다.
이에 반해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법을 어원적으로 살펴본다면 변증법은 우리가 알듯이 그렇게 복잡하고 거창하지 않습니다.
dia 두사람이- lektikē 대화한다. 즉 두사람의 대화라는 희랍어 dialektikē디알렉티케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간단한 변증법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있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변증법에 관한 도식보다 명료한 뜻을 알려줍니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두사람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근데 대화는 항상 무엇에 관한것 입니다. 일상적 대화, 농담 뭐 기타 잡스러운 것들이 있겠죠.
그중 진리에 관한 대화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모든 대화를 다루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다루는 대화는 진리에 관한 대화입니다.
철학이 다루는 진리에 대한 대화가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적 기원의 변증법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항상 두항(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서 말할땐 처음에는 서로의 소박한 견해의 모순점을 짚어내며 비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순을 계속 발견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둘이 동의하는 합의점을 찾을 것입니다. 물론 그 합의점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모순 투성이 였던 초견보다는 좀더 진리에 가까워졌겠죠.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추상적인 변증법 도식 정-반-합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도식으로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변증법은 기계적인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인 정반합의 도식에 맞춰본다면 이 대화는 정반합의 도식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정과 반은 항상 두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 대화하면서 서로 모순되었던 주장을 극복하고 새로운 합의점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합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진리를 향한 대화를 통해 모순점을 발견하고 극복해나가는 논리가 다름아닌 변증법이고,
이것이 다름아닌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입니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기술하고 있는것이 다름아닌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 입니다.
플라톤은 Eidos 즉 형상 혹은 이데아 Idea를 바로 이러한 진리에 관한 대화 즉 변증법을 통해 알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서 플라톤에게서 변증법은 '진리의논리학'(the Logic of Truth)이 됩니다.
그후 변증법은 여러 철학사적 변천과정을 겪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해 혹평을 받은후 변증법은 그 의미가 격하되게 됩니다.(보통 우리말로 변증론, 변증술로 옮겨진 것은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자들을 번역할때 그렇게 합니다. 원어는 dialectic으로 변증법과 같습니다.)
이 변증법이 독일 관념론철학에 들어오면서 다시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주동자가 바로 헤겔입니다.
(대표적이란 말은 한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러한 행간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에 의해 격하된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시킵니다.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더이상 대화의 논리일 뿐만아니라 존재의 논리가 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며 동시에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면서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인 지양(Aufhebung)입니다.
Aufhebung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폐기하고 보존하고 고양된다는 세가지 모순된 뜻이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 세가지 뜻을 전부 차용합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스스로를 지양합니다. 다시말해 스스로를 폐기하면서 보존하고 동시에 고양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렵게 들립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갖는 존재자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생물체,즉 유기체입니다. 모든 유기체들은 성장과정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하는 가운데 자기동일성을 가지며 보존하면서 고양됩니다.
소년노무현이 어른노무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면서 고양되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헤겔의 변증법은 철저하게 유기체적 논리이며, 그런점에서 정용섭 목사님께서 즉문즉답시간에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바탕으로한 기계적인 인과성의 논리이다고 말씀하신건 헤겔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compeletely wrongheaded)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게 보통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증법에 관한 잘못된 편견이죠.
사실 헤겔 변증법이 정반합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헤겔의 삼대주저 정신현상학이나 논리의학(Wissenschaft der Logik), 법철학을 아무리 뒤져봐도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을 정반합이라는 기계적인 삼박자에 맞출 수 없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유기체적인 사태의 존재방식 그 자체에 집중하며 존재 그자체의 논리를 뽑아내기 떄문입니다.
하르트만이 독일관념론철학에서 논리의 학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의 형식만 무려49가지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해 지양Aufheben되는 존재의 변증법적 논리는 '대립된 것들의 통일' 이란 말로 더욱 명료하게 설명됩니다. 이 말에 아직도 우리가 처음에 파악한 디알렉티케의 어원적 의미가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반합의 기계적 도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확인 했습니다.
한가지 더 정목사님의 말씀 즉 헤겔이 기계론적인 인과론이라는 주장에 답하겠습니다. 헤겔의 논리가 기계론적 인과론이 아닌것은 그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유기체들은 마치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듯이 생장합니다. 지나가는 개가 상처를 입으면 그 유기적 조직은 마치 자기보존의 목적이 있는듯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새싹은 꽃을 피려는 목적이 있는듯이 생장해 나갑니다. 이렇게 유기체들의 생장은 목적론적입니다. 특히 자기보존의 목적성이 뚜렷이 발견될 수 있지요.
헤겔의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논리의 유기체적 역동성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특히 이점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는 존재와 인류역사의 이런 변증법적 활동이 절대정신의 실현, 자유의식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목적론은 기계론적 인과성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aitia)설에서 4가지 원인이 제시되는데 형상인 목적인 질료인 작용인이 그것입니다.
근대철학의 도래와 함께 데카르트-갈릴레이 근대역학은 작용인을 제외한 모든 원인을 세계설명에 있어 제거해 버립니다.
따라서 모든 원인은 기계론적인 작용인과로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와 정반대로 갑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방식을 변증법적인 논리를 통해서 복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에는 변증법적 생성이 향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절대정신으로의 복귀 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이 유기체에 기반을 둔 원인설이었다는 점에서 헤겔과의 유사성을 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목사님이 헤겔 법칙이 기계적이라고 한 데에서 저는 숨은 행간을 읽을랍니다.
그 뜻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헤겔의 이러한 논리가 특히 이러한 논리로서 설정된 역사발전의 목적론은 논리에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이세계에 내재해 있습니다. 나도 이글을 보시는 다비안 분들도 절대정신의 일부분입니다.(헤겔의 절대정신은 범신론적입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영향인데 자세한건 생략하겠습니다.) 절대정신은 자신의 부분들을 추동하여 자신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변증법적으로, 다시 말해 대립된 것들을 통일 시킴으로서 역사를 운영합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헤겔의 논리가 유신론을 가장한 무신론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여기서는 인류역사에 대한 어떠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개입도 허용치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한 헤겔의 절대정신은 어떤 인격적 신도 허용치 않습니다. 헤겔의 신은 개념적인 존재이고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이 불가능해 집니다.
헤겔에게서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목격하고서 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헤겔이 20세기 신학에 끼친 영향은 이런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단초로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인류역사를 절대정신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필연적 법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실현되기 위한 발전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목사님의 숨은 행간이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변증(apologetics)와 변증법(dialectic),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위해 최대한 쉽게 서술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 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
2009.02.10 16:38:35

와, 철학도가 역시 다르긴 다르군.
음호빈 군,
잘 읽었네.
많이 배웠네.
내 말의 행간까지도 다 풀어주는 친절을 베풀어주다니,
고맙네.
헤겔의 보편사는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 대목이라네.
그는 그 보편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신학의 물꼬를 터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
음호빈 군의 글을 읽다보니
다시 헤겔의 책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군요.
좋은 하루.
음호빈 군,
잘 읽었네.
많이 배웠네.
내 말의 행간까지도 다 풀어주는 친절을 베풀어주다니,
고맙네.
헤겔의 보편사는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 대목이라네.
그는 그 보편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신학의 물꼬를 터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
음호빈 군의 글을 읽다보니
다시 헤겔의 책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군요.
좋은 하루.
2009.02.10 18:34:11
NEGADETH 님의 글 역시 연거푸,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읽게 됩니다.
마치 강연안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쉼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G.K. Cheterton은 헤겔을 "최악의 허무주의적(nihilistic) 독일인 철학자"라고 악평했죠.
그 Chesterton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Apologia를 욥기에서 찾았습니다. Christian apologetics의 뿌리를 헬라-철학에 의지하지 않고, 구약성경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비슷한 말을 유대교 철학자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이 여러번 언급했습니다. 헤셀은 성서에 접근하는 기독교신학의 방법에 있어서, 유대교의 "예언자" 정신이 헬라-철학의 논리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헤셀은 사도행전 26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자기 변론의 언어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평소 주위에서, 소위 'Christian Apologetics' 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 뿌리인 구약의 흐름이 끊겨버린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설마 여기에서까지 제가 친이스라엘이라고 문제삼지는 않겠지요?)
여하튼 깊은 글 감사합니다.
2009.02.10 21:00:51

음호빈 학생,
우선 다비아 가입을 축하 드려요.
반갑고 기쁘네요.
호빈학생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골치아픈 철학 용어들이
가깝게 다가오네요. 쉽게 이해 되고요.
앞으로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우선 다비아 가입을 축하 드려요.
반갑고 기쁘네요.
호빈학생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골치아픈 철학 용어들이
가깝게 다가오네요. 쉽게 이해 되고요.
앞으로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2009.02.12 14:30:41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설명해주신 질문을 했던 신도입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그러한 철학적사유로 귀납된 진리도출 방법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
지난주와 이번주 말씀에 똑같이 적용됬다는 인상을 받아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이부분은 어쩌면 제가 본질까지 닿지 못해서 생긴 질문일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신학적방법으로 규명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인간이 사유하는 철학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는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제 의문의 촛점이였습니다
(신학의 변증과 철학의 변증법의 차이를 아직 구별할수 없지만
키르케고르와 헤겔의 차이는 구별되네요)
그래서 어제 저는 키르케고르의 책을 하나 주문하게됬는데...오늘 이런 글을 읽게되서 참 기쁩니다
인간의 사유와 학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같은 메세지를 전하신다는 제믿음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실증되기를 기원합니다
음호빈학생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설명해주신 질문을 했던 신도입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그러한 철학적사유로 귀납된 진리도출 방법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
지난주와 이번주 말씀에 똑같이 적용됬다는 인상을 받아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이부분은 어쩌면 제가 본질까지 닿지 못해서 생긴 질문일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신학적방법으로 규명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인간이 사유하는 철학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는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제 의문의 촛점이였습니다
(신학의 변증과 철학의 변증법의 차이를 아직 구별할수 없지만
키르케고르와 헤겔의 차이는 구별되네요)
그래서 어제 저는 키르케고르의 책을 하나 주문하게됬는데...오늘 이런 글을 읽게되서 참 기쁩니다
인간의 사유와 학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같은 메세지를 전하신다는 제믿음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실증되기를 기원합니다
음호빈학생 정말 감사합니다
2009.02.13 12:26:01
너무 너무 좋은 글이라 일단 댓글을 한 번 달고 다시 읽어보려고요... 용어가 약간 어렵긴해도 의미가 파악이 되도록 너무 너무 배려해서 쓰신 글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2009.02.13 13:39:46
변증법이란 것을 헤겔은 그냥 대화와 논리학의 기술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닌 한 유기체가 존재하고 발전하고 변화해가는 방식으로 보았다는 말이군요... 그 과정 속에 있는 작용하는 법칙을 "절대정신"으로 표현한 것인가요? 그 절대정신을 헤겔은 신으로 본 건가요? 그 절대정신은 표정이 없다는 점에서 정 목사님은 "기계적" 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군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것이겠구요...
그런데 "하나님" 은 인격적 개입을 하시지만, 인격을 가지신 분은 아닌 것 아닌가요???
제가 말을 시작해놓고도 밑도 끝도 없군요...
그런데 "하나님" 은 인격적 개입을 하시지만, 인격을 가지신 분은 아닌 것 아닌가요???
제가 말을 시작해놓고도 밑도 끝도 없군요...
2009.02.13 14:01:26

헤겔이 말한 변증법이란 단순한 논리학의 기술은 아닙니다.
헤겔은 우주의 절대 유일한 실재로서 '절대정신'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절대정신은 그 안에 모순을 본질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절대정신 안의 내적 모순의 전개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그 패턴이 바로 정-반-합으로 불리는것이지요.
그러니까 헤겔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정신의 존재 스타일의 추적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 정신은 '신'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예수가 전한, 바울이 설교한 그 '하나님'이냐..
이 부분에서는 많은 논의와 고민이 필요하겠지요.
물론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 속에서 언급되는 신적 존재로서 절대정신은
범재신론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 안에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절대정신은 그 스스로 외화, 소외되고, 그 결과
만물이 형성되지요. 이런 점에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모두 절대정신의 파생 결과로 볼 수 있기에
지극히 범재신론적 특성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간극을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형성된 기독교 정통신학에서는 좀 거리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구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세계관을 꼭 집어 반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즉문즉답 시간에 정목사님께서 언급한 '기계론적'이라는 표현은 헤겔의 변증법을
좀 쉽게 일반화시킨 경향도 있습니다.
헤겔 사상도 그리 녹녹치는 않거든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헤겔 역시 그의 철학적 과업을 칸트가 구분한 현상계와 본체계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절대정신을 통해 본체계를 끌어안으려고 했었던 것이구요~
음.. 대충 이렇습니다. 말이 넘 길어지니.. 이쯤에서 정리해두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인문학 단기강좌로 <철학적 세계관>을 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럼~
헤겔은 우주의 절대 유일한 실재로서 '절대정신'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절대정신은 그 안에 모순을 본질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절대정신 안의 내적 모순의 전개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그 패턴이 바로 정-반-합으로 불리는것이지요.
그러니까 헤겔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정신의 존재 스타일의 추적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 정신은 '신'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예수가 전한, 바울이 설교한 그 '하나님'이냐..
이 부분에서는 많은 논의와 고민이 필요하겠지요.
물론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 속에서 언급되는 신적 존재로서 절대정신은
범재신론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 안에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절대정신은 그 스스로 외화, 소외되고, 그 결과
만물이 형성되지요. 이런 점에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모두 절대정신의 파생 결과로 볼 수 있기에
지극히 범재신론적 특성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간극을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형성된 기독교 정통신학에서는 좀 거리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구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세계관을 꼭 집어 반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즉문즉답 시간에 정목사님께서 언급한 '기계론적'이라는 표현은 헤겔의 변증법을
좀 쉽게 일반화시킨 경향도 있습니다.
헤겔 사상도 그리 녹녹치는 않거든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헤겔 역시 그의 철학적 과업을 칸트가 구분한 현상계와 본체계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절대정신을 통해 본체계를 끌어안으려고 했었던 것이구요~
음.. 대충 이렇습니다. 말이 넘 길어지니.. 이쯤에서 정리해두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인문학 단기강좌로 <철학적 세계관>을 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럼~
2009.02.13 17:39:14
이 목사님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 안에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절대정신은 그 스스로 외화, 소외되고, 그 결과 만물이 형성되지요. 이런 점에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모두 절대정신의 파생 결과로 볼 수 있기에 지극히 범재신론적 특성이 강합니다. "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장에서 설명하는 것은 "영지주의" 아닌가요? 범재신론과 영지주의가 통하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범재신론은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읽었는데... 그리고 성서 안에도 범재신적 표현들이 아주 많이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어느 구절인가요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하신다" 라는 구절이 있죠?
그리고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에크하르트 같은 영성가들도 범재신론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구요...
에크하르트를 범신론자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panentheism)은 그 어원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하늘과 땅 차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범신론은 pan (모든 것) = theos(신) 이라는 입장이고, 범재신론은 pan (all) + en(in) + theos(God), 즉 "모든 것이 하나님 속에 있다" 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초월적 신관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마땅히 주고 받아야 할 호흡 자체를 끊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께 바랄 수 없는 것까지 무리하게 바라도록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는 패턴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범재신론의 의미가 아주 크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그 안에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절대정신은 그 스스로 외화, 소외되고, 그 결과 만물이 형성되지요. 이런 점에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모두 절대정신의 파생 결과로 볼 수 있기에 지극히 범재신론적 특성이 강합니다. "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장에서 설명하는 것은 "영지주의" 아닌가요? 범재신론과 영지주의가 통하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범재신론은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읽었는데... 그리고 성서 안에도 범재신적 표현들이 아주 많이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어느 구절인가요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하신다" 라는 구절이 있죠?
그리고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에크하르트 같은 영성가들도 범재신론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구요...
에크하르트를 범신론자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panentheism)은 그 어원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하늘과 땅 차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범신론은 pan (모든 것) = theos(신) 이라는 입장이고, 범재신론은 pan (all) + en(in) + theos(God), 즉 "모든 것이 하나님 속에 있다" 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초월적 신관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마땅히 주고 받아야 할 호흡 자체를 끊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께 바랄 수 없는 것까지 무리하게 바라도록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는 패턴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범재신론의 의미가 아주 크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올리신 글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철학적인 용어 앞에 갖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오해들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명해 주셨음 감사하겠습니다 (ex: 담론, 실존,해체, 에피스테메...)
다비아와 샘터교회에 철학도가 계시니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