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제가 올렸던 글에 대해 정용섭 목사님이 장문의 댓글을 다시면서 실수로 제 글 본문이 지워지는 바람에 원문을 저장해 둔 것은 없고 하여,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서 새로 글을 적었습니다. 원래대로 쓴다고 써봤는데 아무래도 처음 글과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점 다비안 여러분께서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정 목사님께서 달아주신 댓글도 제 꼭지글 아래부분에 첨부하여 두겠으니 함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별과 달님께서 사랑채 게시판 글(3006번)에 댓글로 남기신 부분들 중에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부분에 대해 제 의견을 적고자 합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다비아의 운영진의 신학적 경향이 "극 진보" 적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비아의 입장이 과격한 진보적인 것으로 느껴질수도 있으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비교평가를 해보면 다비아의 스펙트럼은 오히려 중도보수적이거나 많이 양보하더라도 중도개혁 + 약간의 진보성 정도에 위치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때는 저별과 달님께서는 매우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장해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비아가 급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신앙관이나 혹은 위험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급진적이고 극 진보적인 사람들의 글들을 접해보신다면 다비아의 입장이 매우 중도적이고 온건함을 쉽게 아실 수 있을것입니다.

같은 교파안에서도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양측간에 많은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슴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별과 달님께서는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만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심지어는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성결교회 목사님이 맞나 의심이 들때도 있다" 고 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는 지나친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님들이 저별과 달님께서 중시하는 몇가지 사안들에 대해 100이면 100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목사님을 공격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보수적인 목회자나 신학자만 한국교회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별과 달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다른 것은 100번 양보해도 동정녀 탄생, 구약의 오실 메시아로서의 예언, 필연적인 대속의 죽으심, 성서가 가르키는 부활,내세의 보장 이런 것은 양보 할수가 없습니다." .. 저도 이 중 대부분을 동의하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동정녀 탄생에 관한 저의 견해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참고할때 그 대답은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흠없는 어린양의 대속적 희생" 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발끈하실 것이 예상되지만, 교리적 선입관을 떠나 성경 자체를 되돌아볼때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동정녀 탄생이 그토록 중요한 교리적 뒷받침이 된다면,
           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가?

     (2) 왜 두개의 복음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사나 그에 관한 암시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가? (하나는 최초의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개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
           로부터 기인하는 문서임)

사실,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록은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 두권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복음서는 초대교회 1세대가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 및 베드로서신, 유다서신, 야고보 서신 등에서도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최소한 1세대 초대교회에는 공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메시아의 탄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랬다기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신앙고백이 점차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면서 그 당시에 흔하게 통용되던 위대한 인물의 신비적 탄생이라는 형태의 사건보도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신학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비아에 신학마당 온라인 강의실에 정용섭 목사님이 쓰신 69번 글을 참조하십시오. 이른바 "가현설"과의 투쟁과정을 이해하여야 동정녀 탄생교리의 출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겠지요.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의 교리에 동정녀 탄생이 중요한 밑받침이 되는 사건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이를 복음서든 서신서든 중요하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초대교회 1세대에 통용되었다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 없이도 복음을 충실히 전했고 각지에 수많은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라는 명제는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을 해야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교리화하려 하면 수많은 문제점들을 파생하게 됩니다.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 그러한 폐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단적인 예를 들자면, 중세도 아닌 20세기에 교황청에서 믿을 교리로 반포한 "성모의 무염시태" 이론 같은 것이지요. 이는 성모께서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태어날때부터 원죄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원죄없는 깨끗한 어린양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깨끗하려면 그를 잉태한 자궁 또한 원죄에 오염되지 않아야 온전히 깨끗해질 것이라는 그런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데에 집착함으로써 벌어진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군요...

물론, 동정녀 탄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 당신의 생각을 뜯어 고쳐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상징적 표현이냐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복음의 완전성을 훼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 전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도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의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이해하시고 그에 대해 동의하지는 못하시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가능성을 포용하여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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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정용섭 목사님께서 제 글에 댓글로 달아주신 내용입니다)


닥터케이 님,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닥터케이 님 정도로만
신학적 소양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위에서 짧막하게 진술한 내용들은 아주 건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개론에 충실하다는 말씀이지요.
공부를 많이 하시는군요.
다른 길이 없어요.
바둑을 잘 두려며
정수공부와 고수들의 기보를 반복 학습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신학공부와 인문학 학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동정녀 탄생 문제는 이미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해>와
저의 <여성신학> 강의 노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여기 다비안들은 그런 글은 전혀 읽지 않는가봐요.

동정녀 탄생교리는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과의 투쟁에서
그들을 이단으로 배격한 교부들의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가 참된 신일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이라는,
<vere Deus, vere homo>라는 가장 중요한 도그마의 기초랍니다.
'교리'(dogma)는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한 틀이에요.
첫날처럼 님은 창문이라고 했는데, 좋은 표현이군요.

위에서 전개되는 논쟁은 무의미하답니다.
천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동성을 설명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본인의 사유 틀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진리를 못보는 것이지요.
플라톤 방식으로 말하면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쪽의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신학의 기초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어요.

이건 극단적 진보 쪽의 분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제가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글에서 밝혔지만
그들도 아주 교조적이거든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한국의 극단적인 보수와 극단적인 진보는 똑같아 보입니다.
말이 옆으로 흘렀군요.
제 말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가 보수냐, 진보냐 할 것 없이 결국 독단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니다.

동정녀 문제에서 하나 만 지적할께요.
예수가 동정녀에서 출생했다는 말과
다윗의 혈통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거에요.
남자 없이 마리아라는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요셉의 조상인 다윗의 혈통이 될 수 있을까요?
동정녀만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다윗의 혈통만을 주장해야 하는데,
이런 모순을 마태가 알고 있었지만 함께 주장하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거지요.
그걸 아는 게 바로 신학이랍니다.
그건 바로 앞에서 지적한 가현설과의 투쟁인 거지요.

이런 모든 것을 무조건 제쳐놓고
"너 이 사실을 믿어, 안 믿어?" 하고 따지고 든다면
그건 진리 논쟁이 아니라 우격다짐에 불과한 거에요.
2천년 기독교 신학은 우격다짐이 아니라 진리논쟁을 거쳐왔답니다.
그런 전통이 언젠부터인가,
특히 한국에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닥터케이 님,
천천히 여유를 갖고 길을 가세요.
당장 누구를 설득시킬 수는 없어요.
다비안들 중에서도 다비아를 통해서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무조건 계몽시키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일들은 보수나 진보 양쪽에서 그대로 나타난답니다.
작년에도 이런 비슷한 해프닝이 있었어요.
돌아가는 양상이 아주 비슷하답니다.
그때는 진보 연 하는 쪽이었고,
이번에는 보수 연 하는 쪽이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보기에 다비아에 목회자 운동과 평신도 운동의 두 흐름이 있는데,
물론 그것을 완전히 구분하는 건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구요,
닥터케이 님 같은 분들이 다비아에서 한쪽을 받치고 있어야 합니다.

사족으로 한 마디 하면,
역사적 예수로 편향된 책들,
특히 <예수 세미나> 유의 책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냥 한번 쯤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
신학의 메인 스트림이 아니니까 너무 크게 비중을 두지는 마세요.
그런 유의 책을 읽을 바에야
신비주의자들의 책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신학의 메인 스트림을 따라가는 거지요.
그게 왜 중요한지 알겠지요?
좋은 주일 하오.
(정용섭, 실수로 닥터케이 님의 꼭지글을 잃어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