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계명을 지켜야 하나요?

영혼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까지를 포함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어떤 주장들은 본질상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계명을 지킬 능력이 있기에 어찌 그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이 진리를 소위 계명을 다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율법주의 식 계명 지키기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계명을 지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나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러한 한계를 알려주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이 마땅한 것은 하나님의 무한성, 영원성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인간이라는 본질상 한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먼저 살펴본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느 정도라는 사랑의 완성선을 그어놓으시고 이에 인간이 그 선을 보게 된다면 설령 어느 누가 이 세상에서 그 지점까지 다다른다 할지라도 그 후에는 추락의 길만이 그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실히 본다면 그때부터 그는 더욱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중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그의 타락의 길은 시작되겠지요. 조금만 방심해도 금새 우리의 마음은 자기 사랑과 세상적 즐거움으로 향하던 것을 너무도 흔히 느껴본 우리들 아니던가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무한, 영원성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속에 건설된 천국의 선과 진리는 그 모양 그대로 저 세상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의 천국의 선과 진리는 끝이 없을 정도로 무한히 증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천국의 개념입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의 삶 안에 있는 사람들이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욱 완전해져 거기서 얻는 평화와 기쁨은 더욱 정묘하고 월등해집니다. 온 우주, 온 은하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이해력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규모를 가진 것이 하나님의 천국의 개념이 아닐까요? 따라서 그분에게는 어느 정도까지 라는 선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랑과 믿음이라는 영적 원리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 끝을 보는 것이 아니고 저 영원의 세계로까지 이어져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지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느 정도까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 선까지 한계선을 설정하신다면 그 뒤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상과 벌의 거래관계로 유지하게 만들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만들겠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진실이지 어느 선까지의 분량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과 믿음은 어느 정도를 따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그 속성이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족하다면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하여 조금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그 모두를 지켜야 한다는 그런 식의 율법적 행위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의 삶에서 남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면 그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고 이는 또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8-10)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처럼 율법을 어느 한 가지라도 빼지 않고 그 모두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주님은 다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주님 앞에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진실은 머릿속으로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 진실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허다한 계명이 주님의 이 한 마디 곧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라는 말씀 안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바울은 알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원이 성취되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이 성취되느냐 또는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부분적이냐 아니면 온전한 것이냐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믿고 시인한다면 그분께서 명하신 바를 준행하려는 태도가 우선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주님께만 있는 그런 완전한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소 불완전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최선을 다할 수는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질 좋은 순수한 사랑은 아닐지언정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애를 쓰며 노력할 수는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할 때 우리 연약함의 한계를 아시는 분께서 보다 나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증거로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수한 사람을 접하다보면 그 중에는 특별히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타입의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다른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기는 쉬웠지만 이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일이 그리 쉽지 않겠지요. 이럴 때 우리는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떠올리며 어렵게나마 그를 용서하고 포용한다면 주님은 앞으로 더한 믿음과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실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인간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할지언정 그것이 주님의 참 사랑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할 수는 있어서 이는 주님께 열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눅 21: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과부의 헌금은 비록 상대적으로는 작은 것일지라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마음에 든 것이지요.

과부는 현재 가진 것이 다른 이에 비해 태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낙망치 않고 작으나마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주님과 맺어진 관계는 계명을 다 지켰느니 부분만 지켰느니 이런 것이 문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 이러한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면 그 결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후차적인 일에 속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 맡기면 되는 일입니다. 설마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 자를 주님께서 버리기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계명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이 습관으로 자리잡지 않을 때는 그처럼 살아가는 것이 심히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이것이 습관화되면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영적 상태는 한 걸음씩 주님 가까이 이르게 되겠지요.

주님께는 주님 자신이 짊어지신 십자가가 있고 우리 역시 나름대로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걷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약하여 뒷걸음질만치는 약한 군사가 되지 않고 주님 앞에 강한 군사가 되어 전심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지요. 능히 도와주실 줄을 믿고 믿음과 사랑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새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마음에 임하여 있을 것입니다. 이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4:26-27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일생을 통하여 형성된 사람 내면의 깊은 곳이 선악 간 어떠한 형상으로 굳어졌는지는 하나님 외에 알 자가 없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악과 거짓들이 우글거리고 있는지 또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된 선과 진리들이 그 안에서 어떠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상태 역시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듯 천차만별이어서 구원하는 믿음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선한 행위로 그의 삶을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하십니다. 그분만이 사람의 중심을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에 독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대를 향하여 온화하게 웃어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의 다정하던 겉모습은 그 영혼에 속한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여 사후에 그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고 속에 품고 있던 악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 영혼에 달라붙어 있다면 그것은 마침내 그 사람에 속한 본질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를 판별할 수 없지만 사후 심판이 행해지면 그 영혼에 속한 본질적인 것들은 - 이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주 조금 씩 그의 애정과 사상으로 굳어져 그의 삶이 끝남과 동시 다시는 수정을 가할 수 없는 것들인데 - 주님 앞에 확연히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사후에 우리 삶이 어떨지는 의로우신 주님께서 각자 행한 대로 처리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베드로전서 1:17) 우리는 그저 주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결국 신앙은 계명을 얼마만큼 지켰는가 라는 점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작은 계명일지라도 그것을 지키려던 마음이 진실이었는가 라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려는 마음의 농도, 그 색채와 그 질인 것이지요. 이렇게 잘못된 생각이 바로잡히면 그동안 우리의 마음이 계명을 율법주의 식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그리고 그러한 마음 상태 안에서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당하는 죄의 정죄에서 해방을 받아 개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