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적인 기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귀찮게 졸라대는 한밤중의 친구 눅 11:5-13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있는데 한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여, 빵 세 덩어리만 빌려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나에게 왔는데 나에게는 그를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이미 문이 닫혔고 내 자식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가 없네.'라고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사람이 자기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일어나서 주지 않겠지만 끈질긴 간청 때문에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그에게 주리라.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너희 가운데 누가 아비된 자가 있어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더라.>

이 비유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글 후반부에 실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빵 세 덩어리를 빌려달라는 친구의 간청을 뿌리친 자는 어찌보면 무척 냉정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찾아와 부탁하는 친구에게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이미 문이 닫혔고 내 자식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가 없네” 라며 친구를 불쌍히 여김은 없이 외면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실 매정하게 보이는 그 친구는 주님을 상징하는데 여기에 이 비유를 해석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성경을 읽는 시각은 물론 기도를 이해하는 시각과도 큰 관련이 있어 결코 사소히 다룰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주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듯이 그분은 비유 속의 매정한 친구와는 현격히 다릅니다. 인간이 어려운 처지에서 부르짖을 때 그를 무관심하여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주님은 언제나 인간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심을 아래 성경 구절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너희 가운데 누가 아비된 자가 있어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13)

따라서 비유 속 잠자리에 들어있던 친구의 냉정해 보이는 모습과 주님의 자비로운 성품 사이에는 글자적 의미만으로 보면 그가 주님을 상징할만한 유사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언행은 사실 이웃 사랑에도 위배되고 나아가 친구 간에 정상적으로 있어야 할 우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인간과 같지 않은 신적 사랑을 지니신 주님은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실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늘의 태양이 언제나 쉼없이 그 빛과 열을 세상에 보내어 만물을 살리듯 주님은 모든 이에게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고자 애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그 사랑과 지혜를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분으로부터의 문은 언제라도 열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편에서 그 문을 닫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할 때 그분께서 분명히 하시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기도는 그 내용물의 부피 여하에 따라 주님께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 그에게 형성된 애정의 품질로 응답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6:7) 주님의 들으심이 없을 때 우리는 자꾸 이러저러한 말을 덧붙이게 되고 때로 떼를 쓰듯 강청하면 들으실 것 같아 주님의 마음을 지극정성으로 감동시켜 응답을 얻어내려는 시도를 하게됩니다.

우리의 열심있는 간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응답이 신속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듯 여겨지는 상황을 실제 현실에서 자주 경험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생각하기를 ‘주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자들만을 도우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도와주지 않으시는데 현재의 나 자신의 처지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만 하지 못하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과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 사랑과 긍휼에 기대어 간절히 부르짖는다면 주님의 마음은 억지로라도 움직여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라는 결론에 스스로를 몰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와 같을 경우 위의 본문에 대한 해석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을 때 끈질기게 졸라댐으로 주님께 강청하면 마침내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의 바라는 바대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신앙의 올바른 원리인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인데 그럼에도 성경이 그런 식으로 읽혀지는 이유는 그동안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만 갇혀 성경을 피상적으로 대한 결과 말씀의 본질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주님과 성경과 기도에 대한 교리적 정립이 그 안에서 바르지 못하게 세워진 탓이지요. 예를 들어 봅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이사야 1:15-16)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이사야 59:2)

여기 성경의 직접적인 표현은 우리에게 죄악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또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리신다고 하십니다. 결국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에게 있는 사정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으신다는 결론에 도달되겠지요. 하지만 이는 마치 부모가 떼를 쓰며 반항하는 그의 아이를 고분고분해지도록 하기 위해 다소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강압적으로 그를 다루는 방식과 같기에 그 표현 속에는 자식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부모의 본 모습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가르침의 본질을 분명히 하자면 그 무슨 이유에서든지 주님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 경우는 도대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떠한 열악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도움의 손길을 주님편에서 거두시는 경우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는 설령 인간이 아주 극악할지라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것이 그분의 본질적 성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편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여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 속에 있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은 언제나 끊임없이 베풀어지지만 그것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 그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음의 주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처럼 주님은 언제, 어느 경우라도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주님께서 무관심하여 자신을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항상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은 한껏 주늑들어 주님과의 사이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또 주님 앞에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믿음없음에 마음이 불편해져 있는 경우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영혼은 안절부절하여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이 생각 저 생각을 동원하여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주님께 떼를 쓰면서라도 자신의 원하는 바를 간절히 구한다면 처음에는 듣지 않으셨으나 끈질긴 애원에 감복하여 사랑이 많으신 주님의 마음이 움직여지리라는 생각에서 그리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가르치는 바 강청에 못이겨 귀찮아서라도 그의 호소를 들으시시리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면 주님을 전연 이상한 방향으로 이해하게 되어 우리 신앙에 크나큰 타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본질적 성품은 그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의 간구에 신속히 응답하지 않으시는 구절을 예로 들어봅니다.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 들린 가나안 여자의 간청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매정히 말씀하십니다. “...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1-28)

하지만 우리가 그 결과를 이미 알다시피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향한 주님의 도우심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여기 잠시 주님의 도우심이 유보된 것조차 사실은 주님편에서 도우심을 그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그 도우심을 받을 형편이 되도록, 그리하여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도록 주님께서 적당한 때를 기다려 주신 것 뿐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5-28)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도움심을 받을만한 형편으로 그의 믿음을 조금씩 인도하시고 난 후 마침내 만족스러울 때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이지요.

주님께서 치료를 더디하신 이유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시려했기 때문이고 여인의 믿음이 강해짐으로 그녀에게 줄 도움을 받을 조건을 갖추게 하시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은혜를 받을 상태가 되지도 않았음에도 얼른 받기만을 고대하지만 그것이 우리 내면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는 곧 더 큰 탈을 내리라는 것을 아시는 주님은 더딤의 불평을 들으시면서도 때이른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여러 종류의 영적 어려움들은 주님편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의 손길을 차단하고 있는 자기 속의 악들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대하던 도움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그때 역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계심을 단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그 기도의 응답이 없는 듯 여겨지는 괴로운 때에 주님은 간구 중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더욱 간절히 원하도록 우리의 열정이 불타오를 때를 기다리고 계시고 또 정말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면 자신을 돌아보아 당신의 도움의 손길을 차단하고 있는 내면의 악들을 치우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하도록 시간을 벌어주시며 그런만큼 믿음 또한 종전보다 더욱 강하여지도록 이끌어주시는 등 먼저 기도하는 자의 영적 변화를 이끌어 내신 후 그에 맞추어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변화시켜 은혜를 받아내려는 작업이 아니고 거꾸로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 항상 주어지고 있는 주님의 은혜가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유입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 곧 주님의 은혜가 막힘없이 우리에게 부어져 선한 씀씀이를 낼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이 해야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한 밤중에 끈질기게 귀찮게 졸라댐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지혜인 것이겠지요. 주님의 자비를 외치며 입술로만 간절히 부르짖는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음은 그동안 우리가 흔히 경험해 온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기도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우리의 열심과 끈덕짐이 주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는 자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설사 이런 내용을 모른 채 그저 막무가내로 주님께 부르짖고 졸라대면 주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을 올바로 아는 기도는 그만큼 신앙에 더한 유익을 주리라는 말이지요.

이제 본문의 비유를 살펴봅니다.

여행하다가 한 밤중에 친구의 집에 들른 사람은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에 접근하시어 거기 불을 밝히고 거처를 두시려는 진리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각 사람의 마음 이곳저곳을 진리로 여행하며 문을 두드리십니다. 혹 문을 열어주는 이가 있으면 진리는 그의 기억을 통과하고 이해성에 되씹어진 후 심정 안으로 들어가 그의 선한 애정과 하나 되기를 고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우리를 찾아주실 때는 한밤중일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한밤중은 우리 영혼이 어둠과 무지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새벽이 가까움과 같이 무언가 칠흑같이 어두울 때 비추이는 빛은 영혼의 방을 더욱 환하게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참빛을 갈망하는 마음은 더욱 강렬하여지고 그때야말로 우리 영혼의 아름다움이 한 단계 더 높이 솟아오를 수 있도록 최상의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 진리의 빛이 정작 우리 마음을 비추이게 되면 우리가 돌연 깨닫는 것은 주님의 그 환한 진리의 빛이 거하기에는 우리 영혼의 집이 너무나 누추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받쳐줄 기초로 쓸 수 있는 선함이 우리 속에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진리가 집으로 여길만한 선함, 그 진리가 아늑히 기댈만한 사랑을 영혼에 형성해 놓은 것이 없어 집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자각을 스스로 하게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나에게 왔는데 나에게는 그를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 라는 가난한 영혼의 하소연하는 소리입니다.

정작 진리는 모셔들였으나 그 진리가 원하는 것은 자기 짝이 되는 사랑의 선과의 결합인데 그 선함이 없으니 진리는 그 영혼 안에서 그만 질식하고 말 것은 자명할 터 이 위급함을 깨달은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주님께 있는 선함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런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분의 선함을 진지하게 구하는 것이 바로 빵 세 덩어리를 친구에게 구하는 자의 간절한 모습입니다. 이는 진실로 자신에게 진리는 조금 있으나 그에 따른 사랑이 전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등 위기의식 속에 젖은 자일수록 그 구함의 강도는 더욱 강렬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생각해볼 것은 사랑의 선함과 진리를 주님께 공급받는 방법인데 그중 진리는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주님은 책이나 사람의 글과 말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가르침을 주시지만 선함의 경우는 먼저 우리 스스로 그 진리를 사용하여 삶 속에서 선함을 실천한 연후에야 비로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선함을 우리 생명의 일부로 고정시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함은 인간이 먼저 자신의 노력으로 최상의 실천을 하도록 한 후에야 그 선을 영혼의 습관적인 성품으로 자리하도록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내심과 믿음이 없는 우리로서는 주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선한 마음을 주시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나름대로는 일말의 각오를 가지고 여러 번 도전도 해보았지만 그동안의 기억으로는 실로 어렵기만 한 일이었을 뿐이어서 이제는 다시 시도해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기억과 함께 마음은 날이 갈수록 가라앉고 그만큼 주님의 자취는 멀어져가면 결국 주님은 자신처럼 믿음 없어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를 결코 도와주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굳히며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에 이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심정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님께 다가간다면 우선 우리에게 느껴지는 그분의 이미지는 본문의 자비없는 친구처럼 ‘귀찮게 굴지말게!’ 라며 우리의 요청에 무관심한 듯 보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으로부터 스스로 멀리 떨어진 우리의 외적 측면의 느낌일 뿐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도 않으시고 한사코 어떤 이유에서든 도움을 거절하지도 않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자까지도 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다하시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돕는 방법을 인간이 이해 못할 때 인간은 주님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스스로 낙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는 구절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주님 앞에 잘한 것이 없음을 느끼게 되는 그의 안쪽 사고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투덜대며 하나님은 죄인들은 사랑스럽게 쳐다보려 하시지 않는 분이라고 언제나 선한 그분의 성품을 스스로 변질시켜 마음에 정립합니다. 인간이 죄악 가운데 있을 때는 실상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 마련인 것이지요.

이것이 죄의 권세로 그것은 주님의 선하심으로부터 그를 떼어놓으려 자꾸 사람의 마음을 충동하여 자포자기에 들도록 설득합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주님과 인간 사이 주님편에서는 언제나 문이 열려있고 반대로 인간편에서 그 문을 닫고 있으나 인간은 그것을 거꾸로 주님편에서 그리하신 것으로 여기며 늘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대목을 읽어보면 빵을 가진 친구는 처음 이렇게 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이미 문이 닫혔고 내 자식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가 없네” 이 비유를 풀어봅니다.

여기 자식들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새 생명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내적 의미는 옛 상태로부터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앙의 새로운 이해가 새롭게 싹트는 것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아이들과 주인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기에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깨어있지 않고 여전히 옛 상태 그대로 잠들어 있기에 그런 인식으로는 주님이 일어나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실제 주님이 잠자리에 든 것이 아니라 우리편에서 주님을 그런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잠자리에 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바로 우리의 잘못된 이해성에 있는데 그만큼 주님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 선함을 주실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먼저 그분의 길을 평탄케 하는 작업을 우리가 반드시 해야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과 아이들의 몸을 누이는 잠자리는 우리 영혼이 언제나 그곳에 편히 기식할 수 있는 주님의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 잠자리가 아늑할 때는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을 때이고 만일 거짓을 진리인양 인식하고 있을 때에는 영혼은 거기서 편한 잠자리를 마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할 우리의 영적 지각들이 옛 상태의 주인과 함께 깨어있지 못하고 여전히 잠자리에 들어 있으니 그런 상태에서 어찌 주님의 선함을 얻을 수 있으리요! 사 28:20에 “이는 침상이 짧아서 사람이 자신을 그 위에 펼 수도 없으며, 이불이 좁아서 자신을 그것으로 쌀 수도 없음이라.” 라는 구절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는 주님의 도우심을 우리 스스로 차단하고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빵을 빌리러 온 자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 곧 ‘그 사람이 자기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일어나서 주지 않겠지만’ 이 부분의 해석이 쉽지 않은데 이를 설명해 봅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이십니다.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고 놀라운만큼 그분에게는 인간의 어떤 악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도 없습니다. 악인도 선인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런 사랑을 지니신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다정한 친구가 되는 주님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

이렇게 주님께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편에서 마음의 문을 여는 정도만큼만 주님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마음을 열지 못한다면 친구로서의 주님도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친구로서는 일어나서 빵을 줄 수 없다’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인간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또 그와 친구로서의 우정을 아무리 단호히 해도 주님의 은혜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공급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준비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고 그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도록 자기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을 치우는 작업을 말함은 두 말활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구하는 것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지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끈질긴 노력과 성실로 자신을 깨끗이 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설마 풍성하신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입술로만 주님께 절실히 구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가 실제로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가르치는 구절이 바로 ‘끈질긴 간청 때문에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그에게 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위 기도의 효과적인 응답을 받기 위해 간청을 말로만 하지 아니하고 실제적으로 몸으로 뛰고 또 뛰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기도와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진지한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열심과 진실을 다한 것일지라도 결코 주님을 변화시키지도 또 주님이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시도록 만들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노력은 인간 자신을 변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는 수단일 뿐 주님은 항시 더 할 수 없이 좋은 것들만을 인간 그 어느 누구에라도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기도와 그에 수반하는 노력을 하는 중에 그의 마음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 말라 하는 상태로 들어올려져 마침내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양식을 채움받게 됩니다.(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아무리 선하신 주님이라고 해도 선함에 배고파 하지 않고 진리에 목말라하지 않는 자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주님은 기도를 통하여 인간 속에서 일하시되 먼저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원하도록 강한 바램을 주시고 그 뒤 그가 온 마음으로 선함을 갈망하도록 하여 그가 진지하게 선해지기를 노력할 때 비로소 그로 하여금 주님께 선함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달라고 보채는 것 그 자체가 기도의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그 사람이 정작 바랬어야 할 바램과만 호흡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의식 세계 안에서 스스로 솔선하여 살아갈 때 주님은 선함을 요청한 그의 기도에 응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가 요청한만큼 또 그가 요청한 것에 맞추어 스스로 그것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된만큼만 당신의 선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선을 받는 정도는 스스로 악을 금하는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상속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인간이 악에 기울어지기를 잘하는 자기 모습에 저항하고 그것을 금할 때 주님은 그의 마음과 삶 속에 선함을 위한 방을 마련하게 되시는 것이지요.

기도에 있어서 응답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림에 무척이나 피곤해하며 결과를 얼른 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급함은 오히려 그분의 계획이 지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인즉 기다리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지만 사실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변하여 그분의 은혜를 받을만한 처지로 변화되는 때를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정립한다면 이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입술로만 간절히 구하며 주저앉아 주님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을 괴롭게 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주님의 선을 원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원인들을 찾아 제거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성급하게 당장 이루어지기를 고대하지 말고 기도가 지체되는 원인을 찾아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는 법도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생각해 볼 것은 무릎을 꿇고 드리는 외적 형태상의 기도 시간만이 최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처럼 우리가 처한 곳 어디서든지 주님과의 내적 교류가 끊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 그런 삶의 순간순간이 곧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릎을 꿇는 기도가 우리 삶에 절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기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주님의 뜻이 우리의 선한 삶 속에 이루어질 때 거기 존재한다는 것이 참으로 합당한 가르침임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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