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없이 맑고 투명한 얼을 가진 사람이 “한 빛(般若波羅蜜多)” 속 깊이 들어갔을 때 그는 그 “한 빛” 속에서 비춰보건대 모든 것들이 실상은 비어있음을 알게 되면서 모든 괴로움과 슬픔, 불행을 건너 뛰었다.

눈 맑은 사람아, 보이는 것(色)은 알고 보면 텅 비어있어 보이지 않는 것(空)과 다름이 없고,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은 실상은 꽉 차서 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비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은 보이는 것보다 더 뚜렷하며, 보이는 것이 실상은 텅 비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감각으로 느껴서 뭔가가 머리에 떠오르고 그것을 실제로 해보아서 알게 되는 인지의 과정(受想行識)도 역시 이와 같다.

눈 맑은 사람아, 모든 만사에 깃들인 “한 빔”(空)이 어떠한지 말하자면,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때가 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한 빔” 속에는 뭔가 보이거나 잡히는 것이 없으므로, 일반적인 수상행식의 인지의 과정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자세히 말하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의 감촉으로 느끼거나 하는 그런 차원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의식의 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한 빔” 속에는 어두움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어두움이 다하여 없는 것도 아니고, 늙어서 죽는 것도 아니지만, 늙어서 죽는 것이 다하여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한 빔” 속에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알고, 그 집착을 소멸시켜서 궁극적인 길에 이른다는 사성제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머리의 지식으로 알아서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깨달음을 얻는 자는 “한 빛”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거리낌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비뚤어지고 거꾸러진 허황한 생각에서 멀리 떠나고, 결국에는 궁극의 희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옛날, 그리고 지금, 또한 훗날의 완전한 깨달음 속으로 들어간 자들은 이 “한 빛”을 의지함으로 “더 없이 크고 똑바른 자각”을 얻었다.

그러므로 알찌니, 이 “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보다 더 신비한 기도는 없으며, 더 밝은 기도는 없으며, 더 나은 기도는 없으며, 비스므리한 기도조차도 없으니, 이 기도는 능히 모든 고통을 없애준다. 이 기도는 진실하며 허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한 빛”으로 들어가는 기도의 뜻을 풀어 밝히 읽어보면

“가자 가자 저 너머로 가자 함께 저 너머로 가자 그래서 ‘참’ 을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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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심경을 최대한 종교색을 빼고 번역해보았습니다...



한 빛, 한 빔으로 번역한 "한" 은 우리나라 말 뜻으로 "큰, 장엄한, 절대의" 라는 뜻을 가집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자는 아니지만 반야심경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맛이 너무나 묘해서 흥분으로 가슴이 뜁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 불자들은 반야심경을 그냥 주술적인 주문으로 외는 경우가 많더군요... 반야심경을 외면 자신과 가정의 안전이 보장되고, 병과 악귀가 물러가며, 재물이 따라온다는 식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재물이 따라온다는 식으로까지 믿는다는 것은 불자들을 폄훼한, 제가 많이 오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교도 근본정신과 대중신심 사이의 괴리가 아주 큰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주로 자력 해탈을 이야기 많이 하는데, 반야심경을 보면 자력이니 타력이니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교를 또한 서양 사상의 "유신론 대 무신론"의 관점으로 "무신론"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을 것 같구요...

제가 "한 빔" 이라고 번역한 "空"이 "허무주의" 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어떤 스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은 이야긴데요... 불교에서 無, 空 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없음, 비어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 현상계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그래서 여백으로 남겨놓음을 이야기한다고 하더군요

또한 "색불이공 공불이색" 과"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두  문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空과 色이 현실 속에서는 어우러져 있는 "내재적 초월"의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고, 후자는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空은 절대적이고 色은 한계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 합니다 ... 불교 믿는 분들은 "신" 이라는 말과 함께 "초월" 이란 말을 참 싫어하시던데... 제가 만나본 분들만 그랬던 것인지...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 는 이야기는 受想行識의 과정이 색에서 시작해서 공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是諸法空相" 이라고 해서 유한한 만물 속에 나타난 절대적인 空이 드러나는 양상이 어떠함을 이야기 하는데, "공"은 마치 "하나님의 속성" 처럼 느껴집니다, 기독교인인 저에게는... 생겨났거나 소멸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하다거나 때가 묻었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에서 피조 세계의 유한성을 넘어서 있는 그런 느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공"이란 것은 인간의 한계적인 오감과 의식으로 알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 속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지만, 또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늙어서 죽음이 없지만, 또한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좀 뚱딴지 같은데... 앞에서는 공의 초월성을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공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은 물이 쏟아지지 않고 담겨 있기 위해서는 깨질지도 모르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겨야 하듯, 공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인간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의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연로하셔서는 오후에 먹은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 처럼...

그 담에는 불교의 수행의 과정인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부정하는 듯한 말이 나오는데요... 결국 수행은 필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내가 무엇을 이룬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그릇을 비워서 空이 와서 담겨지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공이란 것은 인간의 머리 지식으로, 또한 자발적으로 알아지는 과정이 아니므로, 깨달음을 얻는 자는 반야바라밀다, 즉 지혜의 빛에 의지하여 마음속의 거리낌과 두려움, 轉倒夢想에서 벗어나고, 결국 궁극적 희열(열반) 에 이른다고 합니다... 三世의 諸佛들 또한 이 지혜의 빛인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무상정등정각(아눗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신비한 기도, 고통을 없애주는 기도, 진실하고 허황됨이 없는 기도는 바로 "가테 가테 파라 가테 파라삼가테 모디 스바하" 가자 가자 저 너머로 가자 함께 저 너머로 가자 그래서 도를 이루자."

기독교인으로서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고,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견지에서 기독교가 특별계시라고 한다면 반야심경에 나타난 불교 사상은 너무나도 훌륭하고 위대한 영적 통찰을 담은, 일반계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초월한다" 라는 명제를 신적 초월성의 리얼리티라고 했을 때, 기독교는 명사적인 종교, 주어의 종교라면 불교는 형용사적 종교, 술어의 종교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전자는 의미가 없거나 화석화된 종교적 명사의 나열과 말잔치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크고, 후자는 가도 가도 끝없이 무언가를 잡을 수가 없어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크다고 보입니다...

어떤 선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구요... 色에 집착해서도 안되지만, 空에 빠져서도 안된다...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