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믿음의 속성에서
계산하지 않는 믿음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계산하지 않는 믿음과 분별력 없는 믿음을
왜 동일선상에서 두려하지요?
예수님은 이해관계 득실관계를 따지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순수하셨죠)
그러면서 또한 분별력 있고 성숙한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잘못 된거 있으면 하나라도 말씀해보세요
지금까지 제가 쓴 꼬리글 다 살펴보시구요
일단 정용섭 목사님이 제 꼬리글에 대한 댓글 부터 볼까요?
콰미 님이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믿음까지 상대화하는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했나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괜찮지요.
어른이 그렇게 믿으려고 하니까 문제지요.
실제로는 아주 영역하고 노회하면서
무늬만 어런아이 흉내를 내는 걸 어린아이같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네요.
=> 어른이 그렇게 믿는게 문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이 왜 순수하게 믿으면 안됩니까?
그럼 예수님도 문제지요 순수하게 믿으셨으니까요
자 여기서 예수님은 예외다 이중적 잣대를 들이 미실런지요
저는 무늬만 어린이 다워지라고 한적도 없습니다.
그것의 실현 가능여부를 떠나서 (어른이 어린이 다워지는 것)
-성숙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순수해 지는 것 -
목사님께서 오히려 그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은 회원분들 역시 성숙하면서 순수한게 어딨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꼬리글을 달면서
저를 순수만을 강조하는 오류
(강조의 오류라고 하지요?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네 이웃이 아닌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겠네 )
에 빠진 사람 취급을 하시네요
순수하면서 성숙한게 불가능합니까?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룰모델 예수님이 계신되요
순수하면서 성숙한게 불가능하니까 그런 주장 하지마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말은 곧 예수님처럼 될 수 없으니
예수님 본받지 말자는 말과 같습니다.
제가 계속 어린아이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니까 하는 말이에요
이글은 제발 옮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12 07:22)
계산하지 않는 믿음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계산하지 않는 믿음과 분별력 없는 믿음을
왜 동일선상에서 두려하지요?
예수님은 이해관계 득실관계를 따지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순수하셨죠)
그러면서 또한 분별력 있고 성숙한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잘못 된거 있으면 하나라도 말씀해보세요
지금까지 제가 쓴 꼬리글 다 살펴보시구요
일단 정용섭 목사님이 제 꼬리글에 대한 댓글 부터 볼까요?
콰미 님이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믿음까지 상대화하는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했나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괜찮지요.
어른이 그렇게 믿으려고 하니까 문제지요.
실제로는 아주 영역하고 노회하면서
무늬만 어런아이 흉내를 내는 걸 어린아이같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네요.
=> 어른이 그렇게 믿는게 문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이 왜 순수하게 믿으면 안됩니까?
그럼 예수님도 문제지요 순수하게 믿으셨으니까요
자 여기서 예수님은 예외다 이중적 잣대를 들이 미실런지요
저는 무늬만 어린이 다워지라고 한적도 없습니다.
그것의 실현 가능여부를 떠나서 (어른이 어린이 다워지는 것)
-성숙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순수해 지는 것 -
목사님께서 오히려 그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은 회원분들 역시 성숙하면서 순수한게 어딨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꼬리글을 달면서
저를 순수만을 강조하는 오류
(강조의 오류라고 하지요?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네 이웃이 아닌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겠네 )
에 빠진 사람 취급을 하시네요
순수하면서 성숙한게 불가능합니까?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룰모델 예수님이 계신되요
순수하면서 성숙한게 불가능하니까 그런 주장 하지마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말은 곧 예수님처럼 될 수 없으니
예수님 본받지 말자는 말과 같습니다.
제가 계속 어린아이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니까 하는 말이에요
이글은 제발 옮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12 07:22)
2007.05.11 17:53:47
계산과 분별은 다른 것이죠 계산은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주면 저사람도 나에게 잘해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구요 분별은 이것은 아닌데 .. 하는 양심의 소리지요
신앙적 성숙은 계산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계산과 분별을 이젠 혼동하시는군요
생각하는 것이구요 분별은 이것은 아닌데 .. 하는 양심의 소리지요
신앙적 성숙은 계산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계산과 분별을 이젠 혼동하시는군요
2007.05.11 17:57:38
계산적인 믿음을 가져라 - 설교제목으로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그 어린아이는 잘 못한거겠죠? 상황을 계산하지 않았으니까요
도시락을 꺼내봤자 간에 기별도 안갈텐데 도시락을 꺼내서 나눠 먹을 생각을 했으니까요
이제는 계산한다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까지 해야 되다니 ~
아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그 어린아이는 잘 못한거겠죠? 상황을 계산하지 않았으니까요
도시락을 꺼내봤자 간에 기별도 안갈텐데 도시락을 꺼내서 나눠 먹을 생각을 했으니까요
이제는 계산한다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까지 해야 되다니 ~
2007.05.11 17:59:47
어린아이가 순수하다는 것이 교회의 사고가 아니다 =>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또 어디에서 왔는지요?
또한 예수님이 순수하다라는 말이 모호하다구요 예수님은 창녀와 세리와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상대방을 직업이나 재산 혹은 학력 사회적 인지도 부 명예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안았으니까요 이런 모습들을 보고 예수님을 순수하다고 말하기 어렵다구요?
또한 예수님이 순수하다라는 말이 모호하다구요 예수님은 창녀와 세리와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상대방을 직업이나 재산 혹은 학력 사회적 인지도 부 명예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안았으니까요 이런 모습들을 보고 예수님을 순수하다고 말하기 어렵다구요?
2007.05.11 18:09:59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시니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인데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계산적이었군요
기도할 때 이렇게 드려 되겠군요 사랑이 많고 계산적인 예수님 ( 안어색한가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인데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계산적이었군요
기도할 때 이렇게 드려 되겠군요 사랑이 많고 계산적인 예수님 ( 안어색한가요?)
2007.05.11 19:03:06
때로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해서 문제가 될 때가 있는데....
제가 쓴 '계산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정확하다'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시고 정확하신 하나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병이어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실은 문맥상 어떤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목사들이 하도 뭔가 그럴듯한 이슈 내지는 드라마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빨리 뭔가 적용의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서 너무 과도한 해석을 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맥락과 상관없이 결정적 충성의 모습처럼 설명하는데
각 복음서들의 이 부분을 잘 살펴보면 여기 어린아이의 등장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거의 무시하는 것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콰미님과 저의 관건은 결국 '어린아이를 어떻게 보는냐?' 인데요.
어린아이가 정말 순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순수하다는 말과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말의 차이를 간과하셨습니다.
위에서도 그렇게 설명했는데,
예수님이 순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셨다는 말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의미입니다.
즉 예를 들어 콰미 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에
"어린아이처럼 상대방을 직업이나 재산 혹은 학력 사회적 인지도 부 명예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안았으니까요"
어린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다기 보다는 아직 뭘 모르기 때문입니다.
뭘 모르는 상태를 순수하다고 보기는 그렇죠.
예수남의 그런 행동은
그런 어린아이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쉽게 말해서 사랑이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해 순수할 수 있지만
절대적 순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일반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흰 종이와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리는대로 그려진다."
뭐 그런 설명을 하면서 교육의 원리로 삼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저는 어린아이도 역시 죄의 속성을 지니고 출생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도 역시 구원이 필요한거죠.
물론 그 구원이 어떤 방법이냐는 논외로 하구요.
제가 쓴 '계산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정확하다'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시고 정확하신 하나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병이어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실은 문맥상 어떤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목사들이 하도 뭔가 그럴듯한 이슈 내지는 드라마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빨리 뭔가 적용의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서 너무 과도한 해석을 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맥락과 상관없이 결정적 충성의 모습처럼 설명하는데
각 복음서들의 이 부분을 잘 살펴보면 여기 어린아이의 등장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거의 무시하는 것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콰미님과 저의 관건은 결국 '어린아이를 어떻게 보는냐?' 인데요.
어린아이가 정말 순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순수하다는 말과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말의 차이를 간과하셨습니다.
위에서도 그렇게 설명했는데,
예수님이 순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셨다는 말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의미입니다.
즉 예를 들어 콰미 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에
"어린아이처럼 상대방을 직업이나 재산 혹은 학력 사회적 인지도 부 명예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안았으니까요"
어린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다기 보다는 아직 뭘 모르기 때문입니다.
뭘 모르는 상태를 순수하다고 보기는 그렇죠.
예수남의 그런 행동은
그런 어린아이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쉽게 말해서 사랑이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해 순수할 수 있지만
절대적 순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일반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아이들의 마음을 흰 종이와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리는대로 그려진다."
뭐 그런 설명을 하면서 교육의 원리로 삼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저는 어린아이도 역시 죄의 속성을 지니고 출생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도 역시 구원이 필요한거죠.
물론 그 구원이 어떤 방법이냐는 논외로 하구요.
2007.05.12 01:36:36
김인범님의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공간 복음에 언급된 "어린 아이"같은 믿음의 의미를
"성도 역시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절대 의존하는 존재"라는 의미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부족 하나마 저는 조금더 진지하게 의미를 좁혀 본래 성경 저자들이
언급하였던 근본적인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고 이러한 항상 이러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바른 성경이해가
따라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인범님의 해석은 무난하며 무리가 없고 현대정인 의미로
잘 해석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본질적의미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서는 좀더
협의의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성경저자들이 사용한 "어린 아이"라는
용어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겸손"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라고 봅니다. 그리고 좀더 의미를 좁히 자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겸손"의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려 볼 수 있는 본문을 조금만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마태복음 11장20절로부터 30절 까지의 말씀을 보면 어리아이에 대한
언급은 11장 25절에 나옵니다.
주님게서는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대립되는 개념인 어른을 지혜롭고 슬기
로운자로 언급하고 있으며 20절로 24절을 연결하여 묵상해 보면 권능을
많이 행하셨으나 예수의복음을 듣고 회계치 아니한 자들을 언급 하시고
있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말씀앞에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계하고 교회세대로 추수되어진 제자들을 의미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자의 반대에는 항상 예수 께서 옳은
천국복음을 아무리 가르쳐도 그 복음을 인정하지 않은 목이 뻣뻣한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결단코 포기 할 수 없는 교만한 백성들이
있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본래의 의미의 범위내에서 이 말씀을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기복주의자들에게 아무리 복음에는 기도하면 잘되고 부자되고 성공하고
하는 말씀이 없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결단고 올바른 회계를 촉구하는 말씀에 순종치 않는 교만한 자들이 있을
것 이며, 열매맺지 못하는 신앙인들을 향해 너희 삶이 그래서는 도저히
천국 못가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하나님이 입술의 신앙을 심판하실거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 믿음으로 구언받았다고 외치는 자들이 오늘날의
어른들, 교만한자들, 지혜자들이 될 것 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이란 본질적으로 회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열매맺는
믿음을 말씀한다고 보면 어떨까 합니다..
두서없는 부족한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공간 복음에 언급된 "어린 아이"같은 믿음의 의미를
"성도 역시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절대 의존하는 존재"라는 의미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부족 하나마 저는 조금더 진지하게 의미를 좁혀 본래 성경 저자들이
언급하였던 근본적인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고 이러한 항상 이러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바른 성경이해가
따라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인범님의 해석은 무난하며 무리가 없고 현대정인 의미로
잘 해석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본질적의미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서는 좀더
협의의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성경저자들이 사용한 "어린 아이"라는
용어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겸손"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라고 봅니다. 그리고 좀더 의미를 좁히 자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겸손"의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려 볼 수 있는 본문을 조금만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마태복음 11장20절로부터 30절 까지의 말씀을 보면 어리아이에 대한
언급은 11장 25절에 나옵니다.
주님게서는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대립되는 개념인 어른을 지혜롭고 슬기
로운자로 언급하고 있으며 20절로 24절을 연결하여 묵상해 보면 권능을
많이 행하셨으나 예수의복음을 듣고 회계치 아니한 자들을 언급 하시고
있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말씀앞에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계하고 교회세대로 추수되어진 제자들을 의미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자의 반대에는 항상 예수 께서 옳은
천국복음을 아무리 가르쳐도 그 복음을 인정하지 않은 목이 뻣뻣한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결단코 포기 할 수 없는 교만한 백성들이
있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본래의 의미의 범위내에서 이 말씀을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기복주의자들에게 아무리 복음에는 기도하면 잘되고 부자되고 성공하고
하는 말씀이 없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결단고 올바른 회계를 촉구하는 말씀에 순종치 않는 교만한 자들이 있을
것 이며, 열매맺지 못하는 신앙인들을 향해 너희 삶이 그래서는 도저히
천국 못가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하나님이 입술의 신앙을 심판하실거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 믿음으로 구언받았다고 외치는 자들이 오늘날의
어른들, 교만한자들, 지혜자들이 될 것 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이란 본질적으로 회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열매맺는
믿음을 말씀한다고 보면 어떨까 합니다..
두서없는 부족한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린아이의 순수성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쉽게 어린아이를 순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교회의 사고라기 보다는
일반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 근원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저들의 절대 의존성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아이라는 존재는
부모나 어른이 없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성도 역시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절대 의존하는 존재가 되라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할 때도
어린아이 같다는 표현은
물론 순수하다는 표현도 있지만
어른스럽지 않은
즉 자존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순수하게 믿으셨다는 말은
해석이 필요한 의미라는 생각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거든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어린아이를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이란 분명히 계산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라구요.
그러나 계산이 부정적 의미만은 아닐겁니다.
어린아이도 나름으로 계산하는데
아마도 바울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어린아이같이 계산하는것을 버렸다는 의미일 겁니다.
어른처럼 냉정하게 분명하게 계산해야지요.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겁니다.
주님은 굉장히 계산적이셨다고 봅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이렇게 계산할 것을 계산한다는 말이기도 할거구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는 생각입니다.
계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신앙은 계산하는 능력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주님의 비유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아닐까요?
"세상의 불의한 자들도 나름대로 이렇게 계산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의 지혜를 받는 너희가 그렇게 계산할 줄 모르냐?"
그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