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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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란이 국 내.외에서 간간이 문제 제기가 됐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여기서도 이 문제를 이미 다룬 적이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참고로, 샘터교회 주보를 살펴보니 이 사도신경 암송 순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게 로마시대 당시 교회에서 많은 논란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확정(혹은 그 당시 여러 지역 교부들에 의해 각각 만들어지고 사용되던 다수의 신경들의 내용들을 선정,통합)되어 내려온 것, 즉 성경에는 없는 형태의 것이고 그 이후에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입된 신앙적 산물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예배시마다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도와 혼동되게 눈을 감고서 암송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도신경은 그 분량마저 상당하여서 저처럼 머리 별로인 사람들이 교회라는 곳에 새롭게 입단?하기에 큰 장애로 작용할 소지마저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아마도 골프장에 나갈 준비하기는 쉽고 즐거워도 그거 앉아서 외우고 있을려면 속 터질 것입니다.
어렸을 때 외웠으니 망정이지, 지금의 저라도 그걸 새로 받어 외울려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구나, 제아무리 명석한 교부들이 당시 한자리에 모여 확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도신경은 어디까지나 성경 외적인 것이라서 열린 신앙적 자세로 본다면 그 내용들에 관해 언제든지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실제로 이를 확정할 당시 큰 반론과 그에 따른 파장이 있었지요.) 저는 이러한 획일적인 주입식 내용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성령에 관해 보다 깊이있게 사고하고 묵상할 수 있는 동기와 가능성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제거시켜서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신경이라는 게 그 내용이 너무 도식적입니다. 어떻게 절대적인 대상을 그렇게 도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로마 카톨릭이 절대적인 교권을 확립하는데 있어 사도신경이 무엇보다도 큰 공헌을 해줬을 것입니다.
물론 초기 기독교에서 엄청나게 많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범람하는 교리들을 보다 명확화 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에 관한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은, 도저히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에 관해서 오히려 이에 관한 미완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 평생동안 끊임없이 사고하고 묵상하는 것이 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일 듯합니다.(요즘 새로운 정신으로 새롭게 다시 읽고 있는 왓치만 니의 저술들에 의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제 스스로 점차 확인 / 검증되어 나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제가 어릴적 당시에는 감리교회에서는 언제까지인가 - 그게 아마도 1970년 전후가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고(그냥 신도들은 사도신경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대신에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교독했던 어렸을 적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때 갑자기 모두가 사도신경을 외워서 예배시에 암송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감리교 교리적 선언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게 로마시대 당시 교회에서 많은 논란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확정(혹은 그 당시 여러 지역 교부들에 의해 각각 만들어지고 사용되던 다수의 신경들의 내용들을 선정,통합)되어 내려온 것, 즉 성경에는 없는 형태의 것이고 그 이후에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입된 신앙적 산물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예배시마다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도와 혼동되게 눈을 감고서 암송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도신경은 그 분량마저 상당하여서 저처럼 머리 별로인 사람들이 교회라는 곳에 새롭게 입단?하기에 큰 장애로 작용할 소지마저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아마도 골프장에 나갈 준비하기는 쉽고 즐거워도 그거 앉아서 외우고 있을려면 속 터질 것입니다.
어렸을 때 외웠으니 망정이지, 지금의 저라도 그걸 새로 받어 외울려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구나, 제아무리 명석한 교부들이 당시 한자리에 모여 확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도신경은 어디까지나 성경 외적인 것이라서 열린 신앙적 자세로 본다면 그 내용들에 관해 언제든지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실제로 이를 확정할 당시 큰 반론과 그에 따른 파장이 있었지요.) 저는 이러한 획일적인 주입식 내용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성령에 관해 보다 깊이있게 사고하고 묵상할 수 있는 동기와 가능성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제거시켜서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신경이라는 게 그 내용이 너무 도식적입니다. 어떻게 절대적인 대상을 그렇게 도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로마 카톨릭이 절대적인 교권을 확립하는데 있어 사도신경이 무엇보다도 큰 공헌을 해줬을 것입니다.
물론 초기 기독교에서 엄청나게 많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범람하는 교리들을 보다 명확화 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에 관한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은, 도저히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에 관해서 오히려 이에 관한 미완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 평생동안 끊임없이 사고하고 묵상하는 것이 보다 더 신앙적인 모습일 듯합니다.(요즘 새로운 정신으로 새롭게 다시 읽고 있는 왓치만 니의 저술들에 의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제 스스로 점차 확인 / 검증되어 나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제가 어릴적 당시에는 감리교회에서는 언제까지인가 - 그게 아마도 1970년 전후가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고(그냥 신도들은 사도신경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대신에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교독했던 어렸을 적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때 갑자기 모두가 사도신경을 외워서 예배시에 암송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감리교 교리적 선언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9.11.14 21:13:21
성서에 명시적으로 나와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그렇게 거부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성서가 기독교 전통의 핵심이긴 하지만, 그와 함께 지난 2000년 기독교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신앙고백일테니까요.
개인적으론 사도신경에 대한 책으로는 판넨베르크보다는 한스 큉의 '믿나이다'가 좋긴 합니다.(해석의 차이가 있긴하지만) 신조 논란에 있어 가장 좋은 해법은 각 교회(혹은 교단)별로의 독창적인 신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닌게 문제긴 하지요. (대중성 면에서는 니케아 신조보다는 사도신조가 낫긴하지요. 니케아 신조는 용어들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개인적으론 사도신경에 대한 책으로는 판넨베르크보다는 한스 큉의 '믿나이다'가 좋긴 합니다.(해석의 차이가 있긴하지만) 신조 논란에 있어 가장 좋은 해법은 각 교회(혹은 교단)별로의 독창적인 신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닌게 문제긴 하지요. (대중성 면에서는 니케아 신조보다는 사도신조가 낫긴하지요. 니케아 신조는 용어들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2009.11.14 22:42:39
두분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어떻든, 사도신경의 지나친 교조적 분위기가 신앙의 자유로운 확대 재생산 가능성(즉, 유기적인 확장성)을 억제할 소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심지어 중세 카톨릭은 신앙 교리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인이 성경을 갖고 읽는 것 자체를 엄격히 불허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전의 기독교가 그토록 강요적이고 일방적이고 통제적이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모습이지요.
과거 정복시대 때 스페인계 기독교가 남미 지방에 신앙을 강요해서 (종교적인 측면의) 항복을 얻어 내기도 했고 지금 남미 전지역에 카톨릭 문화가 편만하게 퍼져있지만,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남미 쪽이 제대로된 기독교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얼마전 티비에서 보니 그쪽에서는 온갖 잡신상들과 십자가를 나란히 놓고 종교의식을 진행하더군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참담한, 절망적인 모습인 것이지요.
한편, 왓치만 니의 견해에 따르면 천지창조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언시대를 거치고 그리스도 직접사역 시대를 통과해 사도시대에 이르렀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시대 이후 앞으로도 주님의 "사역"은 정체적이고 고착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적인 범위가) 계속해서 확장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원문에서 언급했듯이, 한번 제정된 사도신경의 '수용 강요 방식' 그게 지난 약 2천년 동안은 보편적인 측면에서 유효적절한 수단(성경 외적인 것이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의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나, 지금 그리고 이후 시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지금은 종교개혁 이후 시대이고 또한 자유이성의 시대이니까요.
한편 사고해보면, 만약에 신경과 같은 내용의 가르침이 필요했다면 예수님께서 왜 주기도만 가르쳐주시고 그런 걸 가르치시지 않았을까요? 요한 사도가 모든 성경의 마무리인 그의 계시록에서 분명히 경고하기도 했지요. 누구든지 이 말씀에서 더이상 가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신경>이라는 게, 역사 /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시대적인 칙령이나 혹은 훈령 비슷한 것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종합적이며 모범적인 한 편의 어떤 설교내용 같은 성격(정체성)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과연 시대적인 한 명설교가 사역적인 측면에서 영구적으로 유효한 것인지는 그에 관한 쟁점이 생기게 될 개연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이든 지금이든 앞으로든, 기독교는 요한 사도의 앞의 이러한 경고를 심중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어떻든, 사도신경의 지나친 교조적 분위기가 신앙의 자유로운 확대 재생산 가능성(즉, 유기적인 확장성)을 억제할 소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심지어 중세 카톨릭은 신앙 교리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인이 성경을 갖고 읽는 것 자체를 엄격히 불허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전의 기독교가 그토록 강요적이고 일방적이고 통제적이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모습이지요.
과거 정복시대 때 스페인계 기독교가 남미 지방에 신앙을 강요해서 (종교적인 측면의) 항복을 얻어 내기도 했고 지금 남미 전지역에 카톨릭 문화가 편만하게 퍼져있지만,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남미 쪽이 제대로된 기독교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얼마전 티비에서 보니 그쪽에서는 온갖 잡신상들과 십자가를 나란히 놓고 종교의식을 진행하더군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참담한, 절망적인 모습인 것이지요.
한편, 왓치만 니의 견해에 따르면 천지창조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언시대를 거치고 그리스도 직접사역 시대를 통과해 사도시대에 이르렀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시대 이후 앞으로도 주님의 "사역"은 정체적이고 고착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적인 범위가) 계속해서 확장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원문에서 언급했듯이, 한번 제정된 사도신경의 '수용 강요 방식' 그게 지난 약 2천년 동안은 보편적인 측면에서 유효적절한 수단(성경 외적인 것이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의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나, 지금 그리고 이후 시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지금은 종교개혁 이후 시대이고 또한 자유이성의 시대이니까요.
한편 사고해보면, 만약에 신경과 같은 내용의 가르침이 필요했다면 예수님께서 왜 주기도만 가르쳐주시고 그런 걸 가르치시지 않았을까요? 요한 사도가 모든 성경의 마무리인 그의 계시록에서 분명히 경고하기도 했지요. 누구든지 이 말씀에서 더이상 가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신경>이라는 게, 역사 /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시대적인 칙령이나 혹은 훈령 비슷한 것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종합적이며 모범적인 한 편의 어떤 설교내용 같은 성격(정체성)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과연 시대적인 한 명설교가 사역적인 측면에서 영구적으로 유효한 것인지는 그에 관한 쟁점이 생기게 될 개연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이든 지금이든 앞으로든, 기독교는 요한 사도의 앞의 이러한 경고를 심중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2009.11.16 01:51:43
많은 부분에서 공감합니다만, 요한계시록에 '그 문제 의식'과 신조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밑에서 언급했듯, 신조라는 것은 당 시대의 산물일 뿐더러, 그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이 그 전통의 역사를 포용한(혹은 포용당한?)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일테니까요. 쉽게 말하자면, '그때' 어떤 신조를 고백했던 이들과 '오늘' '그' 신조를 고백하는 '우리'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는 신앙고백의 차원이지요. 이와 같은 차원을 수용 강요로 보기에는 뉘앙스나 해석의 문제가 있지 않나 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라도, 그 전 시대와 완전히 담을 쌓은 것이 아니고, 정체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확장되어 가지만 그 중심에는 구심점이 있어야 할테니까요.
2009.11.14 23:24:06
저는 샘터교회 교우입니다.
저희 샘터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매주 첫주 성찬식 때에는 <니케아 신경>으로 대신하고 있지요.
* <신학마당>에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강의가 녹취록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저희 샘터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매주 첫주 성찬식 때에는 <니케아 신경>으로 대신하고 있지요.
* <신학마당>에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강의가 녹취록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2009.11.16 00:06:42
사실 사도신경은 교리를 교조화 시키는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교조화 시키고 매번 쇄뇌(?)시키고.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재판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오히려 예수님에게 고난을 준 이들은 유대인이죠.
권력의 욕망에 포섭된 유대인들 말입니다.
신앙이 접속되어 있는 부분에 대한 무엇인가를 항상 강제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외운다는 것 조차가 사실은 부당한 일이죠.
왜냐하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의 믿음이 동일한 접속으로 계열화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요.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의 신앙이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고는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신앙도 무엇인가에 서로 다는 것에 포섭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 까요?
예를 들면 정치.종교권력 혹은 통일 같은 것 말입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하나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이것은 전혀 다르게 배치되어 있으며 상이한 것을 생성시키고 있습니다.
조찬기도외, 거대교회 순복음, 우익집회에 동원된 교인, 한기총 그리고 통일운동, 만남, 남북평화와 같이 다른 생성 말입니다.
MB의 신앙이 생성하는 것도 포함하고 싶네요. '주차관리' '장로' '나라바치기' '4대강 죽이기' '민간 파시...'
저도 교회에서 주차관리하고 있는데 이 사람과 비교되면 참 기분 묘하더군요.
그래도 대통령은 할 수 있으려나 에고~
꼭 사도신경을 낭독하겠다면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바꾸는게 더 정확할 듯 하긴 한데 왠지 '나치' '히틀러' '학살' '아우슈비츠' '인종차별' 등의 표상과 접속되면서 엄청 부담스럽긴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혼자서 주기도문은 성경에 나와있는 부분 까지만 외우고요 사도신경은 낭독하지 않습니다.
참 소극적이죠.
에이~ 하지 맙시다.
교조화 시키고 매번 쇄뇌(?)시키고.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재판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오히려 예수님에게 고난을 준 이들은 유대인이죠.
권력의 욕망에 포섭된 유대인들 말입니다.
신앙이 접속되어 있는 부분에 대한 무엇인가를 항상 강제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외운다는 것 조차가 사실은 부당한 일이죠.
왜냐하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의 믿음이 동일한 접속으로 계열화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요.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의 신앙이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고는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신앙도 무엇인가에 서로 다는 것에 포섭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 까요?
예를 들면 정치.종교권력 혹은 통일 같은 것 말입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하나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이것은 전혀 다르게 배치되어 있으며 상이한 것을 생성시키고 있습니다.
조찬기도외, 거대교회 순복음, 우익집회에 동원된 교인, 한기총 그리고 통일운동, 만남, 남북평화와 같이 다른 생성 말입니다.
MB의 신앙이 생성하는 것도 포함하고 싶네요. '주차관리' '장로' '나라바치기' '4대강 죽이기' '민간 파시...'
저도 교회에서 주차관리하고 있는데 이 사람과 비교되면 참 기분 묘하더군요.
그래도 대통령은 할 수 있으려나 에고~
꼭 사도신경을 낭독하겠다면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바꾸는게 더 정확할 듯 하긴 한데 왠지 '나치' '히틀러' '학살' '아우슈비츠' '인종차별' 등의 표상과 접속되면서 엄청 부담스럽긴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혼자서 주기도문은 성경에 나와있는 부분 까지만 외우고요 사도신경은 낭독하지 않습니다.
참 소극적이죠.
에이~ 하지 맙시다.
2009.11.16 01:47:03
먼저 (이미 아시는 내용 또 반복이겠지만) 하나의 전통에서 공인된 신조는 그 전통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산물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비록 후대(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세부적으론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형성 과정에서의 역사와 상황에 의존하고 있기에 배제되는 것이 바른 접근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도신경(신조)에 대한 연구에서 거의 공통된 의견으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다라는 것은 단지 '누구'에게 예수의 수난이 비롯되었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수난이 비롯되었는가라는 문제 의식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개인-혹은 유대인을 비롯한 특정 세력의 과를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 치하라는 특정한 시기에 존재했던 수난의 이야기가 사도신조에서 다루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뭐, 이 정도의 정서가 아닐까 하구요.
사실 많은 분들의 지적처럼 사도신경이 주문화(따지고 들면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지만)되는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신조를 통하여 취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묘미'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도신조가 '오늘날'의 상황과 완전히 어우러지긴 어렵기 때문에, (위에 언급했듯) 개별 공동체만의 신조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사도신경(신조)에 대한 연구에서 거의 공통된 의견으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다라는 것은 단지 '누구'에게 예수의 수난이 비롯되었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수난이 비롯되었는가라는 문제 의식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개인-혹은 유대인을 비롯한 특정 세력의 과를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 치하라는 특정한 시기에 존재했던 수난의 이야기가 사도신조에서 다루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뭐, 이 정도의 정서가 아닐까 하구요.
사실 많은 분들의 지적처럼 사도신경이 주문화(따지고 들면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지만)되는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신조를 통하여 취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묘미'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도신조가 '오늘날'의 상황과 완전히 어우러지긴 어렵기 때문에, (위에 언급했듯) 개별 공동체만의 신조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2009.11.16 20:39:43
그렇습니다.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한 것은 당시의 유태인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빌라도한테 고난 받았다는 것은 허구적인 역사적 시실일 뿐이지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만만한 사람한테 "둘러씌우기"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가지 콕 집어서 지적하자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 이건 결국 로마 교회의 권위를 신적인 절대성까지 격상시킨다라는 그런 표현인 것이지요. 정말로 큰일 날 얘기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지금껏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해 들은 "삼위일체 론"이 혹 쟁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 이러한 도식이 성립되지는 않는다는데 대해 요즘들어서 저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왓치만 니의 책(말씀의 사역)을 읽으니 그에 관한 사고가 스스로 정립이 돼요. (물론 저자가 그 책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일이 없지만 말입니다.) 통상적인 "삼위일체 설"이 틀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이상의 것을 분명한 한계속에 가둬놓고 있다는 게 문제점으로 보인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로마 교회는 이걸 거의 등식으로 설명해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에 기인하여 기성교인들 대부분도 '뭔지 몰라도 대충 그냥 모두 똑같은 분으로 알면 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한테 고난 받았다는 것은 허구적인 역사적 시실일 뿐이지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만만한 사람한테 "둘러씌우기"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가지 콕 집어서 지적하자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 이건 결국 로마 교회의 권위를 신적인 절대성까지 격상시킨다라는 그런 표현인 것이지요. 정말로 큰일 날 얘기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지금껏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해 들은 "삼위일체 론"이 혹 쟁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 이러한 도식이 성립되지는 않는다는데 대해 요즘들어서 저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왓치만 니의 책(말씀의 사역)을 읽으니 그에 관한 사고가 스스로 정립이 돼요. (물론 저자가 그 책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일이 없지만 말입니다.) 통상적인 "삼위일체 설"이 틀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이상의 것을 분명한 한계속에 가둬놓고 있다는 게 문제점으로 보인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로마 교회는 이걸 거의 등식으로 설명해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에 기인하여 기성교인들 대부분도 '뭔지 몰라도 대충 그냥 모두 똑같은 분으로 알면 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2009.11.16 09:52:25
전통을 긍정하기 전에 '전통에서 공인된 신조'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도 동의 하지만 어떤 역사였는지에 대해서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는 나무와 같습니다. '수목형 역사'라고나 할까요.
모든 나무가지들이 하나의 뿌리로 귀결되는 그런 형태입니다.
만물에는 근원이 있으며 역사 역시도 원인과 결과로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역사에는 항상 본질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사건은 무엇인가의 외부적 접속을 통하여 다양화 할 수 있습니다.
입은 숟가락과 만나면서 밥먹는 기계가 되고, 언어와 접속되면서 말하는 기계가 됩니다.
또한 다른 입과 만나면서 사랑하는 기계가 되기도 하지요.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항상 중간에 있는 과정이고 이것은 외부의 것과 접속되면서 다양한 생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가지로 부터 하나의 가지와 결국 뿌리로 귀결되는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수 많은 것들과 얽혀있어 그것이 만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생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항상 의도적 만남이 있으며 그 중 강력한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교리가 로마권력과 만나고 다시 종교권력과 만나면서 기독교를 권력으로 계열화시키는 교조적 교리로 생성됩니다.
그리고 이 생성물은 다시금 기독교를 교조화 시키고 권력화 시키는 의미로 예배에서 '외움'과 만나는 것입니다.
권력은 항상 이를 자기에게로 동일화 시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권력으로 포섭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전통입니다.
이러한 권력을 제거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을 것이고 진보라면 진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n-1, 즉 무수히 많은 접점 n중 그것을 권력으로 동일화 시키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바로 n-1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바로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의 말씀이 권력으로 계열화 하게된 1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상징하는 의미가 넓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기독교의 전통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넓게 해석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교조화된 내용의 광범위한 해석은 결국 그것을 다양화 시킬 것이며 그것이 글자 그대로 외워지는 교조적 전통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도 동의 하지만 어떤 역사였는지에 대해서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는 나무와 같습니다. '수목형 역사'라고나 할까요.
모든 나무가지들이 하나의 뿌리로 귀결되는 그런 형태입니다.
만물에는 근원이 있으며 역사 역시도 원인과 결과로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역사에는 항상 본질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사건은 무엇인가의 외부적 접속을 통하여 다양화 할 수 있습니다.
입은 숟가락과 만나면서 밥먹는 기계가 되고, 언어와 접속되면서 말하는 기계가 됩니다.
또한 다른 입과 만나면서 사랑하는 기계가 되기도 하지요.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항상 중간에 있는 과정이고 이것은 외부의 것과 접속되면서 다양한 생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가지로 부터 하나의 가지와 결국 뿌리로 귀결되는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수 많은 것들과 얽혀있어 그것이 만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생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항상 의도적 만남이 있으며 그 중 강력한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교리가 로마권력과 만나고 다시 종교권력과 만나면서 기독교를 권력으로 계열화시키는 교조적 교리로 생성됩니다.
그리고 이 생성물은 다시금 기독교를 교조화 시키고 권력화 시키는 의미로 예배에서 '외움'과 만나는 것입니다.
권력은 항상 이를 자기에게로 동일화 시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권력으로 포섭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전통입니다.
이러한 권력을 제거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을 것이고 진보라면 진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n-1, 즉 무수히 많은 접점 n중 그것을 권력으로 동일화 시키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바로 n-1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바로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의 말씀이 권력으로 계열화 하게된 1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상징하는 의미가 넓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기독교의 전통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넓게 해석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교조화된 내용의 광범위한 해석은 결국 그것을 다양화 시킬 것이며 그것이 글자 그대로 외워지는 교조적 전통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2009.11.16 20:58:29
유형 무형의 모든 사안들을 반드시(기필코) 체계화해서 사고하고(다양했던 경제논리들처럼 그게 맞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교조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게 특히 서양인들의 특성이지요.(종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서 그사람들이 현대 기계론도 집대성 시켜냈고요. 그런 사고체계는 적어도 인류사의 흐름 가운데서 우리가 아는 정도에서 지금까지는 빛을 발하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유용한 작용을 수행할 수 있었어요. 사실 중동 지방의 우수한 수학이나 화학이론의 기초 혹은 중국의 독특하고도 다양했던 실용문화 이런 것들이 모두 서양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과학문명으로 확대 재생산되지 않았습니까? 서양인들이 그렇게 체계화시키는데 도가 텃다는 말이지요. 또 하나의 예로, < 피타고라스의 '평균율' >에서부터 발전된 서양인들의 고도의 음악학 체계와 오케스트라의 코스모스적인 하모니를 놓고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렇게 우수한 서양인들이 종교는 하나도 생각해내지를 못했지요. 그게 아마도 서양적인 지나친 체계화 메카니즘 사고의 어떤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된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어떻게 신을 뛰어난 기계론적 사고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기계론이라는 게 일종의 '인과응보'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이유없는 무한대의 사랑" 등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분의 손수 희생이 전혀 이치에는 맞지 않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신조나 산학도 결정적인 헛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역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들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갖고 태어난, 한계성을 가진 인간일 뿐이니까요.
중언부언 했는데, <사도신경>이라는 게 단지 로마 교회의 잔재일 뿐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렇게 우수한 서양인들이 종교는 하나도 생각해내지를 못했지요. 그게 아마도 서양적인 지나친 체계화 메카니즘 사고의 어떤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된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어떻게 신을 뛰어난 기계론적 사고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기계론이라는 게 일종의 '인과응보'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이유없는 무한대의 사랑" 등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분의 손수 희생이 전혀 이치에는 맞지 않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신조나 산학도 결정적인 헛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역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들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갖고 태어난, 한계성을 가진 인간일 뿐이니까요.
중언부언 했는데, <사도신경>이라는 게 단지 로마 교회의 잔재일 뿐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그 말씀입니다.
----------------<관련 기사>-------------------
사도신경, 고백내용 수용여부가 문제 -
예배시간 중 사도신경 고백순서 유무 관련
2006/06/15 ㆍ추천: 0 ㆍ조회: 598
▲ 사도신경이라는 명칭은 예수의 12제자(사도)가 각기 1구절씩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 전승은 신약성서나 초대 교부, 그리고 고대교회 총회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여 부정되고 있다.(사진은 푸신 작 '최후의 만찬')
지난 11일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박종화 목사)와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박경조 주교)간의 교환예배가 드려졌다. 지난 2000년부터 시작된 양 교회의 교환예배는(지난해를 제외하고) 매년 성령감림절에 이루어져 왔다.
이날 성공회의 예전(禮典)에 따라 미사를 드린 경동교회 성도들은 ‘니케아신경’으로, 장로교 예전에 따라 예배를 드린 서울대성당 성도들은 ‘사도신경’으로 각각 신앙을 고백했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있어서의 사도신경 고백 관련 궁금증을 갖게 됐다. 최근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서 생략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궁금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중요한 것은 예배시간에 사도신경 또는 니케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 순서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신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내용의 수용여부이다.
사도신경, 예배시간에 고백만 하지 않을 뿐
교단 차원에서 예전에 따라 예배 중에 사도신경으로 고백을 하지 않고 있는 교단들이 있으며, 이들 중 니케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성공회를 제외하고는 예배순서 중에 아예 들어 있지 않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는 “침례교는 처음부터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고백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사도신경의 내용은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교수는 “최근에는 장로교회 중에도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곳이 많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미 (한기총에 가입됐든 KNCC에 가입됐든) 기독교로 인정되고 있는 교단은 사도신경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교단으로 신학적 문제는 이미 검증된 사항”이라며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해당 교단 헌법에 따른 ‘예전’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장로교출판사가 발간한 <21세기 한국장로교의 신앙과 신학의 방향>도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제자의 교회 등은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을 예배시에 고백은 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여기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이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ㆍ사도적 신앙전통에 해당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용복 교수는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이 신조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작용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간주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실제로 사도신경을 예배 때 암송한다고 응답한 침례교 목회자들 가운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마지못해 암송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김 교수는 이어 “침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신경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사실 그 내용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며 “침례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다양성을 훼손하고 획일성을 조장하는 ‘신조’로서의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침례교회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도들의 직접적인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사도신경을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성공회, 주일 미사 외엔 사도신경ㆍ니케아신경 함께 고백
성공회는 주일 미사시엔 예전에 따라 니케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하지만 타 미사시엔 사도신경으로도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서울대성당의 한 관계자는 “주일 미사시에는 모든 교회가 니케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 외의 미사에서는 집전자의 결정에 따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또한 1888년 전 세계 성공회 주교들이 모인 람베스 회의에서 ‘성공회의 신앙기준’으로 정리된 4개 조항 중, 제 2항은 “(성공회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1889년 11월1일 영국 킨터베리 대주교로부터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으로 주교 서품을 받음으로써 그 역사가 시작된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회원 교단으로 대한성공회 서울대교구장인 박경조 주교가 현재 KNCC의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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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신경과 사도신경
사도신경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했을 무렵,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을 조장할 것을 걱정하여 325년 여름에 자신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바로 니케아신경이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니케아신경
사도신경이라는 명칭은 예수의 12제자(사도)가 각기 1구절씩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 전승은 신약성서나 초대 교부, 그리고 고대교회총회가 이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었다 하여 부정되고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내용은 2세기 후반 성립된 '로마신조'를 바탕으로 5~6세기경에 갈리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이단적(異端的)인 주장에 대해 이 신조를 기준으로 이단ㆍ정통 여부를 가렸으므로 상징(symbolum)이라는 호칭이 붙기도 했다.
그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신성ㆍ수난ㆍ부활ㆍ심판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니케아신경 전문(全文)
우리는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 즉 천지의 창조자이신 한분의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중의 신이며 빛 중의 빛이고 참 신 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받아 인간이 되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장사되었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 생명의 부여자와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세계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주시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