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교회에 구원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단이 아닌 교회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예배당 생활을 제법 오래 한 집사가 물어온
끈질기고 당혹스런 질문에 엄청 곤혹스러웠습니다.
모범답안지 읽듯 답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어제의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 같은 무지랭이한데... 지리산에서 잡은 아침이슬 바라보며 묵상 하다가...
이단이 아닌 교회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예배당 생활을 제법 오래 한 집사가 물어온
끈질기고 당혹스런 질문에 엄청 곤혹스러웠습니다.
모범답안지 읽듯 답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어제의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 같은 무지랭이한데... 지리산에서 잡은 아침이슬 바라보며 묵상 하다가...
2007.02.24 09:50:50
정말 본질적인 물음인 것 같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정통 브랜드를 달고 있지않은 교회들만 이단이다... 라는 모범답안(?)을 듣기가 일쑤겠죠... 그런데 솔직히 설교들을 들어보면 100% 정통인데가 있을까 싶네요... 사회보다도 더 진상(?)들이 많은 모인 교회를 보면 교회에 구원이란 것이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말로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 이라고 하는데 자기 변명인 것 같구요...
2007.02.24 09:55:22
솔직히 종교적 수사법으로 " 이 몹쓸 죄인" 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자신의 죄성, 한계성을 정말 진지하게 성찰해 들어가는 모습들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편견이거나 속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02.24 10:10:47
마치 유대인들처럼 종교적 "선민"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모습들이라고나 할까요?
땅에서 해를 바라보면 마냥 해가 자기 것인 것같은 착각에 사로잡히지만, 땅을 넘어서서 태양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지구는 거대한 태양계를 돌아가는 하나의 작은 행성일 뿐이라는 리얼리티를 접하게 되면서 한없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의식의 혁명적인 전환이 크리스찬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자기부정... 정말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해를 바라보면 마냥 해가 자기 것인 것같은 착각에 사로잡히지만, 땅을 넘어서서 태양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지구는 거대한 태양계를 돌아가는 하나의 작은 행성일 뿐이라는 리얼리티를 접하게 되면서 한없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의식의 혁명적인 전환이 크리스찬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자기부정... 정말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02.24 10:40:09
이 진부한 모범답안 "사람을 보지말고 예수만 바라보며 신앙하라."
그 친구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붙잡기 위한 답안 " 세상 어느 예배당엘 가도 도토리 키재기일 것이다."
그 친구에게 더 큰 실망감만 준 것 같았습니다.
좀 더 고급스럽게. "말씀에 천착하고 예배당 일에는 신경을 꺼라."
그 친구가 고개는 끄덕이지만 마음으로 동의 하겠습니까?
이 물음이 그 친구만의 물음이 아니라 저의 원초적 물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저는 의식적으로 교회와 예배당을 한사코 분리해 지칭합니다.
그 친구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붙잡기 위한 답안 " 세상 어느 예배당엘 가도 도토리 키재기일 것이다."
그 친구에게 더 큰 실망감만 준 것 같았습니다.
좀 더 고급스럽게. "말씀에 천착하고 예배당 일에는 신경을 꺼라."
그 친구가 고개는 끄덕이지만 마음으로 동의 하겠습니까?
이 물음이 그 친구만의 물음이 아니라 저의 원초적 물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저는 의식적으로 교회와 예배당을 한사코 분리해 지칭합니다.
2007.02.24 11:25:15
질문을 저는 이렇게 해석해서 다시 듣습니다.
소중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죠.(그것은 카톨릭의 원리)
하지만, 교회는 우리의 구원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단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곳이죠.
교회에서 이 단합회가 불가능하다면, 그건 교회의 몰락이지요.
가정/가족이 단합회를 못하면, 개인의 정체(구원)도 모호해 지는 것이겠죠.
소중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죠.(그것은 카톨릭의 원리)
하지만, 교회는 우리의 구원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단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곳이죠.
교회에서 이 단합회가 불가능하다면, 그건 교회의 몰락이지요.
가정/가족이 단합회를 못하면, 개인의 정체(구원)도 모호해 지는 것이겠죠.
2007.02.24 11:32:51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친교, 통공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고 사귀는 장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2천년간 늘 고백해 온 신앙고백(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교회에 대한 항목과 성도의 교제(성인의 통공)가 들어있다는 점,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조직으로서의 교회에 구원이 있다기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 안에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는 현상이고,
이 '반석' 위에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
라는 전통적 명제는 유효하다고 저는 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요)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고 사귀는 장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2천년간 늘 고백해 온 신앙고백(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교회에 대한 항목과 성도의 교제(성인의 통공)가 들어있다는 점,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조직으로서의 교회에 구원이 있다기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 안에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는 현상이고,
이 '반석' 위에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
라는 전통적 명제는 유효하다고 저는 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요)
2007.02.24 11:35:40
정세웅님.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죠.(그것은 가톨릭의 원리) '라고 하셨는데, 가톨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즉, 가톨릭에서도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가 구원을 준다고 말합니다. 더이상 가톨릭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2007.02.24 14:04:55
바우로님, 교회에 출석하는 유무가 카톨릭에서 중요하지 않나요?
성직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신학이 카톨릭 아닌가요?
그래서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고,
결국, 구원이 교회와 신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루터의 만인사제직은 죄는 각자가 하나님과 알아서이고..
카톨릭은 죄는 사제만이 사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요? 사제가 대리자이기 때문에...
사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가 구원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성직자는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신학이 카톨릭 아닌가요?
그래서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고,
결국, 구원이 교회와 신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루터의 만인사제직은 죄는 각자가 하나님과 알아서이고..
카톨릭은 죄는 사제만이 사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요? 사제가 대리자이기 때문에...
사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가 구원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2007.02.24 15:12:34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는, 천주교(로마가톨릭)적인 언설임은 분명합니다.
천주교의 교회관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승하는 것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주교라 해서, 제가 위의 댓글에서 말씀드린,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통공의 공동체로서의 '근본적' 교회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천주교 역시 이 점을 교회의 터전으로 소중히 여기지요.
또한, 개신교 역시,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정통을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중의 보수파는,
사도계승이라는 점을 필수 요소로 취급하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 하시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목양의 책무를 주셨으며,
땅에서 풀고 매는 권한을 주셨다고 믿는 것인데요,
즉, 사도계승으로서의 사제권의 정통성이란,
사제가 사도로부터 안수(사제서품. 축성)로 내려온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움받았다는 뜻이며,
이 사도와 그의 계승자들은 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이니,
정세웅님이 지적하신 바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천주교는 개신교에 대하여,
갈라져 나간 이단이라는 질시에서부터, 잘 봐야 '교회적 공동체'라는 정도의,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사도계승으로 세움받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사제는,
즉, 그가 성사와 전례, 사목을 집행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효론, 사효론 문제도 제기되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흠결이 있거나 심지어 이단적인 면이 있는 사제라 할지라도,
정당하게 사제로 축성되었다면,
그가 베푸는 성사와 전례는 유효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개인의 자격으로 베푼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직접 받는 것이니까.
즉, 고해성사도,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직접 하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대죄'(소죄와 대죄의 분류가 있지요)의 경우에만 고해가 필수로 되어 있고,
단지 신자 개개인의 영성적 건강성과 발전을 위해, 고해를 자주 보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제가 이같은 '한정적' 차원에서 권위를 가지며,
그나마도 자신이 잘나서 부여받은 권위가 아닌, 순전히 그리스도의 권위일진대,
이러한 사도계승의 권위마저도 부당하다고 철폐한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이,
목사는 주님의 종이고 사자이니 순종하라는 식의 공갈을 치는 것은,
이같은 역사적 맥락도 모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웃기는 작태지요.
그런데, 천주교 역시 현대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통공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계승에 근거한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제도적 교회,
교도권을 행사하는 행정적, 하향적 의미에서의 사목을 하는 교회라는 인식은
여전히 천주교 내에 뿌리깊고,
또,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당연한 전제로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라고 사정이 나으냐? 아니라고 봅니다.
제도적 교회, 교권으로서의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교회관,
개신교, 특히 한국의 주류 개신교 역시 더 말도 안되게 강화시켰으면 시켜왔지,
나을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교권 자체가 교회는 아닌데도, 신구교 공히
그렇게들 착각해 오지 않았던가요?
특히, 개신교의 경우,
하느님의 말씀(케리그마)을 선포(일방적인)의 관점으로만 생각했던 탓에,
이같은 권력화, 하향화,
평신도 대중들의 피동화, 익명화,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이
발생하고, 더욱 심화되어 오지 않았던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일방적 선포란, 대화가 아니며,
대화가 아니면, 소통, 즉 온전한 언어가 아니라고 봐야 됩니다.
성령으로 하나되어 하느님과의 만남, 인간과 인간과의 속깊은 만남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이어야 될 교회가,
권력과 복종의 기구로 타락했다는 겁니다.
이 맥락에서, 우물가님의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한 군데의 교단 신학교밖에 경험하지 못했습니다만,
짐작컨대, 한국의 개신교 신학교들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를 지식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르트, 불트만이 그렇게 목놓아 외쳤던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실존,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들의 혁명적 시각 전환,
한국 개신교 신학 교육이 그걸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성서비평학의 연구방법론과 성과들을 배우면서도,
과연 그것이 역동성과 깊이를 더하는 성서 텍스트 읽기로 이어지고 있냐 말이지요.
사실, 신학(지성)과 영성은 분리할 필요도 없고,
인간 및 세계를 이분법이 아닌 통전적으로 보는 것이 성서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과연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냐는 회의가 듭니다.
신학 교육의 이런 문제점을 안은 채 공부하고 목회 현장으로 나갔을 때,
현장 교회에는 또 그 곳의 문제들이 쌓여 있지요.
말씀하셨다시피, "교인들이 그것을 원ㅎ"ㅏ는 욕망들도 팽배해 있지 않습니까?
신학이 영성과 세계를 읽는 해석학적 시각으로 체화되지 못한 채,
목회 서비스(알아들으시기 쉽도록 일부러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의 수요자들인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 현장(시장)으로 나갔을 때,
거기에 영합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팔색조 형제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천주교는 외형상 하나로 일치하고 있을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개신교 만큼이나, 어쩌면 더 이상으로,
여러 유파와 상이한, 대립하는 세력, 견해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2천년을 이어온 종교입니다. 게다가 전세계적이고,
풀뿌리 민중신심으로부터 최첨단의 지성까지 그야말로 극과 극의 스펙트럼이고,
의사결정과 교도권을 가진 교회의 최고위층 안에도 이같은 양상은 그대로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각 문서들을 확정할 때,
그 진통과 논쟁의 과정들, 주교님들의 표결 투표 숫자의 대립,
개신교인들은 그저 천주교를 밖에서 바라보면서
도매끔으로 쉽게 생각합니다만,
절대로 그렇지 않답니다. 개신교 이상으로 더 복잡하고 엉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하여 이교적이니, 이단이니 욕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무식의 폭로지요.
천주교의 교회관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승하는 것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주교라 해서, 제가 위의 댓글에서 말씀드린,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통공의 공동체로서의 '근본적' 교회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천주교 역시 이 점을 교회의 터전으로 소중히 여기지요.
또한, 개신교 역시,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정통을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중의 보수파는,
사도계승이라는 점을 필수 요소로 취급하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 하시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목양의 책무를 주셨으며,
땅에서 풀고 매는 권한을 주셨다고 믿는 것인데요,
즉, 사도계승으로서의 사제권의 정통성이란,
사제가 사도로부터 안수(사제서품. 축성)로 내려온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움받았다는 뜻이며,
이 사도와 그의 계승자들은 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이니,
정세웅님이 지적하신 바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천주교는 개신교에 대하여,
갈라져 나간 이단이라는 질시에서부터, 잘 봐야 '교회적 공동체'라는 정도의,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사도계승으로 세움받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사제는,
즉, 그가 성사와 전례, 사목을 집행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효론, 사효론 문제도 제기되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흠결이 있거나 심지어 이단적인 면이 있는 사제라 할지라도,
정당하게 사제로 축성되었다면,
그가 베푸는 성사와 전례는 유효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개인의 자격으로 베푼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직접 받는 것이니까.
즉, 고해성사도,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직접 하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대죄'(소죄와 대죄의 분류가 있지요)의 경우에만 고해가 필수로 되어 있고,
단지 신자 개개인의 영성적 건강성과 발전을 위해, 고해를 자주 보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제가 이같은 '한정적' 차원에서 권위를 가지며,
그나마도 자신이 잘나서 부여받은 권위가 아닌, 순전히 그리스도의 권위일진대,
이러한 사도계승의 권위마저도 부당하다고 철폐한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이,
목사는 주님의 종이고 사자이니 순종하라는 식의 공갈을 치는 것은,
이같은 역사적 맥락도 모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웃기는 작태지요.
그런데, 천주교 역시 현대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통공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계승에 근거한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제도적 교회,
교도권을 행사하는 행정적, 하향적 의미에서의 사목을 하는 교회라는 인식은
여전히 천주교 내에 뿌리깊고,
또,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당연한 전제로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라고 사정이 나으냐? 아니라고 봅니다.
제도적 교회, 교권으로서의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교회관,
개신교, 특히 한국의 주류 개신교 역시 더 말도 안되게 강화시켰으면 시켜왔지,
나을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교권 자체가 교회는 아닌데도, 신구교 공히
그렇게들 착각해 오지 않았던가요?
특히, 개신교의 경우,
하느님의 말씀(케리그마)을 선포(일방적인)의 관점으로만 생각했던 탓에,
이같은 권력화, 하향화,
평신도 대중들의 피동화, 익명화,
교회의 공동체성 상실이
발생하고, 더욱 심화되어 오지 않았던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일방적 선포란, 대화가 아니며,
대화가 아니면, 소통, 즉 온전한 언어가 아니라고 봐야 됩니다.
성령으로 하나되어 하느님과의 만남, 인간과 인간과의 속깊은 만남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이어야 될 교회가,
권력과 복종의 기구로 타락했다는 겁니다.
이 맥락에서, 우물가님의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한 군데의 교단 신학교밖에 경험하지 못했습니다만,
짐작컨대, 한국의 개신교 신학교들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를 지식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르트, 불트만이 그렇게 목놓아 외쳤던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실존,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들의 혁명적 시각 전환,
한국 개신교 신학 교육이 그걸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성서비평학의 연구방법론과 성과들을 배우면서도,
과연 그것이 역동성과 깊이를 더하는 성서 텍스트 읽기로 이어지고 있냐 말이지요.
사실, 신학(지성)과 영성은 분리할 필요도 없고,
인간 및 세계를 이분법이 아닌 통전적으로 보는 것이 성서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과연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냐는 회의가 듭니다.
신학 교육의 이런 문제점을 안은 채 공부하고 목회 현장으로 나갔을 때,
현장 교회에는 또 그 곳의 문제들이 쌓여 있지요.
말씀하셨다시피, "교인들이 그것을 원ㅎ"ㅏ는 욕망들도 팽배해 있지 않습니까?
신학이 영성과 세계를 읽는 해석학적 시각으로 체화되지 못한 채,
목회 서비스(알아들으시기 쉽도록 일부러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의 수요자들인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 현장(시장)으로 나갔을 때,
거기에 영합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팔색조 형제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천주교는 외형상 하나로 일치하고 있을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개신교 만큼이나, 어쩌면 더 이상으로,
여러 유파와 상이한, 대립하는 세력, 견해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2천년을 이어온 종교입니다. 게다가 전세계적이고,
풀뿌리 민중신심으로부터 최첨단의 지성까지 그야말로 극과 극의 스펙트럼이고,
의사결정과 교도권을 가진 교회의 최고위층 안에도 이같은 양상은 그대로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각 문서들을 확정할 때,
그 진통과 논쟁의 과정들, 주교님들의 표결 투표 숫자의 대립,
개신교인들은 그저 천주교를 밖에서 바라보면서
도매끔으로 쉽게 생각합니다만,
절대로 그렇지 않답니다. 개신교 이상으로 더 복잡하고 엉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하여 이교적이니, 이단이니 욕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무식의 폭로지요.
2007.02.24 15:26:44
무명재님께서 구체적으로 잘 말씀해주셨네요..^^
제가 제대로 모르고 있는 부분들도 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름이 직분으로서 혹은 직무로서의 사제직을 넘어 신분질서 안에서 계급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인 것은 분명한듯 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언설이 현재도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2차바티칸공의회 문헌은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는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공의회문헌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는 식의 완곡한 표현을 하지만, 급진적인 신학자들은 공의회문헌에서 '종교다원'을 끌어내기도 한답니다. 한국의 경우 이제민신부님이 그런 분중의 한 분입니다.
www.rijemin.com 이제민신부님의 홈인데요, 한 번 들러보시라고 무명재님께 추천합니다.^^
제가 제대로 모르고 있는 부분들도 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름이 직분으로서 혹은 직무로서의 사제직을 넘어 신분질서 안에서 계급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인 것은 분명한듯 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언설이 현재도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2차바티칸공의회 문헌은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는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공의회문헌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는 식의 완곡한 표현을 하지만, 급진적인 신학자들은 공의회문헌에서 '종교다원'을 끌어내기도 한답니다. 한국의 경우 이제민신부님이 그런 분중의 한 분입니다.
www.rijemin.com 이제민신부님의 홈인데요, 한 번 들러보시라고 무명재님께 추천합니다.^^
2007.02.24 15:52:41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님은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분이십니다^^
홈페이지도 가끔 들어가서 많은 걸 배운답니다.
신학과 사목(목회), 영성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시는,
패기와 열정, 속깊은 고뇌,
(신학적인 이유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지요)
정말 존경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한국 교계에서 피상적으로, 또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고 봅니다만,
이 문제는 또 논할 기회가 있겠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 대한 해석,
현대 가톨릭 신학에 있어 쟁점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보-혁간의 알력입니다.
심지어, 근본주의적 천주교우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요한23세, 바오로6세 교황님 등은
언급하기조차 기피하더군요. 똑같은 공의회이고 사도좌에 계시던 분인데,
왜 그러시는지??^^ 기회주의가 아닌 바에야??
한국 개신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는 또 나름의 근본주의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성모 공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잘 본받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성모 공경을,
분절적으로 따로 떼어서, 성모님께 신성을 투사시키는 그런 모습들,
물론, 한스 큉 신부님께서 [그리스도교](분도출판사, 이 책 정말 강력 추천입니다!!!)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셨다시피,
사실상의 숭배였던 성모 공경, 교도권의 강화(로마화, 교파화)는
종교개혁 이후 반개신교적 의도에서 비롯된 반종교개혁이었지요.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러한 과오를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도 다시금 새롭게 이해해야 되리라 봅니다)
온갖 어려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천주교회의 공식적 차원에서는 척결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불가능을 이뤄낸 성령의 역사였다고 봐야 됩니다.
요한 23세, 바오로 6세 교황님 또한 성령의 종이었구요.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은 ,
하느님의 축복과 순교자들의 피에 비롯한 것이겠습니다만,
선교 초기부터 뿌리깊었던, 반종교개혁 전통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유난히 깊었던 성모 신심,
그리고, 1950년대에 도입되어 각 본당에 급속히 보급, 정착된
레지오마리애의 성모신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의 원인을 단지 성모 신심에서 찾는 것은 부당하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만,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가 '마리아교'라고 인식되고,
(정통적인 천주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많은 신자 대중들이 하느님의 구원사(구세사)의 맥락은 잘 모른 채,
대중신심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성모신심에 더 친밀감을 가지고,
하느님을 가부장적, 위압적인 존재로 그려왔던 대신, 성모님께
신적 모성을 투사시켜왔던 그리스도교의 역사 등이 중층적으로 쌓여,
(이 점은 천주교우이면서 여성신학자인 로즈매리 류터가
[가이아와 하느님](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왜곡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볼 때,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의 어두운 면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비정상적으로 강조되는 성모신심이 반개신교적 적대감,
교권 및 성직자에 대한 복종 등,
(물론 '순명'은 당연한 덕목입니다만)
로마가톨릭 근본주의의 특징들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한국 천주교 내부의 근본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분석과 반성이
한국 천주교회 내부에서도, 비록 천주교의 특성상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제기되고, 공론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홈페이지도 가끔 들어가서 많은 걸 배운답니다.
신학과 사목(목회), 영성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시는,
패기와 열정, 속깊은 고뇌,
(신학적인 이유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지요)
정말 존경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한국 교계에서 피상적으로, 또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고 봅니다만,
이 문제는 또 논할 기회가 있겠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 대한 해석,
현대 가톨릭 신학에 있어 쟁점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보-혁간의 알력입니다.
심지어, 근본주의적 천주교우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요한23세, 바오로6세 교황님 등은
언급하기조차 기피하더군요. 똑같은 공의회이고 사도좌에 계시던 분인데,
왜 그러시는지??^^ 기회주의가 아닌 바에야??
한국 개신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는 또 나름의 근본주의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성모 공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잘 본받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성모 공경을,
분절적으로 따로 떼어서, 성모님께 신성을 투사시키는 그런 모습들,
물론, 한스 큉 신부님께서 [그리스도교](분도출판사, 이 책 정말 강력 추천입니다!!!)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셨다시피,
사실상의 숭배였던 성모 공경, 교도권의 강화(로마화, 교파화)는
종교개혁 이후 반개신교적 의도에서 비롯된 반종교개혁이었지요.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러한 과오를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도 다시금 새롭게 이해해야 되리라 봅니다)
온갖 어려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천주교회의 공식적 차원에서는 척결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불가능을 이뤄낸 성령의 역사였다고 봐야 됩니다.
요한 23세, 바오로 6세 교황님 또한 성령의 종이었구요.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은 ,
하느님의 축복과 순교자들의 피에 비롯한 것이겠습니다만,
선교 초기부터 뿌리깊었던, 반종교개혁 전통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유난히 깊었던 성모 신심,
그리고, 1950년대에 도입되어 각 본당에 급속히 보급, 정착된
레지오마리애의 성모신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의 원인을 단지 성모 신심에서 찾는 것은 부당하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만,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가 '마리아교'라고 인식되고,
(정통적인 천주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많은 신자 대중들이 하느님의 구원사(구세사)의 맥락은 잘 모른 채,
대중신심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성모신심에 더 친밀감을 가지고,
하느님을 가부장적, 위압적인 존재로 그려왔던 대신, 성모님께
신적 모성을 투사시켜왔던 그리스도교의 역사 등이 중층적으로 쌓여,
(이 점은 천주교우이면서 여성신학자인 로즈매리 류터가
[가이아와 하느님](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왜곡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볼 때,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의 어두운 면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비정상적으로 강조되는 성모신심이 반개신교적 적대감,
교권 및 성직자에 대한 복종 등,
(물론 '순명'은 당연한 덕목입니다만)
로마가톨릭 근본주의의 특징들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한국 천주교 내부의 근본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분석과 반성이
한국 천주교회 내부에서도, 비록 천주교의 특성상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제기되고, 공론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2007.02.24 16:03:10
무언가 오해들을 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캐톨릭이 문제가 많다고 한 적이 없는데..
개신교에 비해서,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권한이 강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티칸 2 이후에도 변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가진 성직자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의 그 성직내용중심이 아닌.
대기업의 CEO적인 것이기에, 신학적인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교회가 사람의 구원을 판단/부여할 권한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바우로님께서 카톨릭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셔서
다시 댓글을 단 것인데, 팔색조님의 말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 틀은 바티칸 2 이후에도 변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권한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신학적으로 캐톨릭은 교회와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황의 절대적 위치/권한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증거 아닌가요?
교황이 몇 백년만에 갈릴레오를 천국가게 사면했는데,
그 동안은 갈릴레오를 천국에 못가게 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와서 그 일을 하신 건가요?(교황을 통해)
물론 저 그렇다고 카톨릭에 대해 반감이 있거나, 이단시 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중에 신부많아요. 정기적으로 만남도 갖고, 같이 목회/사목 고민도 하지요.
저는 캐톨릭이 문제가 많다고 한 적이 없는데..
개신교에 비해서,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권한이 강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티칸 2 이후에도 변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가진 성직자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의 그 성직내용중심이 아닌.
대기업의 CEO적인 것이기에, 신학적인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교회가 사람의 구원을 판단/부여할 권한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바우로님께서 카톨릭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셔서
다시 댓글을 단 것인데, 팔색조님의 말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 틀은 바티칸 2 이후에도 변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권한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신학적으로 캐톨릭은 교회와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황의 절대적 위치/권한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증거 아닌가요?
교황이 몇 백년만에 갈릴레오를 천국가게 사면했는데,
그 동안은 갈릴레오를 천국에 못가게 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와서 그 일을 하신 건가요?(교황을 통해)
물론 저 그렇다고 카톨릭에 대해 반감이 있거나, 이단시 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중에 신부많아요. 정기적으로 만남도 갖고, 같이 목회/사목 고민도 하지요.
2007.02.24 16:03:20
괜히 반갑네요..무명재님^^
이제민신부님은 제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신부님중의 한 분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구요.
위 댓글에 님께서 쓰신 한국천주교에 대한 견해에 거의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특히나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보이는 성모신심 문제는
정말 크게 우려되는 문제지요.
이제민신부님은 제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신부님중의 한 분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구요.
위 댓글에 님께서 쓰신 한국천주교에 대한 견해에 거의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특히나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보이는 성모신심 문제는
정말 크게 우려되는 문제지요.
2007.02.24 16:13:17
가톨릭 논쟁은 이만 쯤에서 단락을 짓고, 신학을 하신 분들께 궁금해서 묻습니다.
성경보기에서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예배당에서 가르치는 것의 괴리가 있습니까?
배우기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목사면허증만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Yes해야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이단 판별식'이 무엇입니까?
성경보기에서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예배당에서 가르치는 것의 괴리가 있습니까?
배우기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목사면허증만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Yes해야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이단 판별식'이 무엇입니까?
2007.02.24 16:27:56
우물가님의 질문에는 제가 위의 긴 댓글에서 따로 한 단락을 할애해서 나름의 답을 드렸는데요.
(직접적으로 예, 아니오라고 답을 드려야 됩니까?)
'이단 판별식'은, 제가 뵙기에 이미 우물가님께서 파악하고 계신 걸로 생각합니다.
사전적으로만 따지면야, 개신교에 있어 '이단'이란, 종교개혁 전의 보편공의회를 통해 제정된
교회의 정통 교리에 벗어나는 교설 및, 그 가르침을 펴는 개인이나 집단이 되겠지요.
'교회에 구원이 있다'는 언설의 뜻과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서,
천주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구요.
(본래 개신교의 언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이것을 완전폐지했느냐?
아니오. 또 다른 의미로 유지 계승했으며, 오히려 강화했다고 봅니다)
정세웅(목사님 맞으시죠?^^)님의,
"개신교가 가진 성직자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의 그 성직내용중심이 아닌.
대기업의 CEO적인 것이기에, 신학적인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라는 말씀, 정말 신랄하고 옳습니다.
가톨릭적 모델에서는, 사목자의 권위가 사도계승에 근거하므로 그나마 근거라도 있지만,
개신교는 그것도 아니니 더 참담한 꼴인 겁니다.
특히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에서 이같은 자본주의적 폐해는 극심하다고 보는데요,
(본래 개신교가 자본주의적 종교 아닙니까)
개신교의 자승자박인가, 그런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종교개혁이 전적으로 부당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팔색조 형제님,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다비아도 그러하지만, 천주교우님들 가운데도
주체적 자각, 복음 및 그리스도교 전통에 바탕한 개혁을 지향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시다는 데 안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더 가톨릭(로마가톨릭이 아니라)적이 되어야 하고,
개신교는 더 개신교적이 되어야 하며,
반대로, 가톨릭은 개신교적이, 개신교는 가톨릭적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교는 더 그리스도교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생명지향적, 우주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직접적으로 예, 아니오라고 답을 드려야 됩니까?)
'이단 판별식'은, 제가 뵙기에 이미 우물가님께서 파악하고 계신 걸로 생각합니다.
사전적으로만 따지면야, 개신교에 있어 '이단'이란, 종교개혁 전의 보편공의회를 통해 제정된
교회의 정통 교리에 벗어나는 교설 및, 그 가르침을 펴는 개인이나 집단이 되겠지요.
'교회에 구원이 있다'는 언설의 뜻과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서,
천주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구요.
(본래 개신교의 언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이것을 완전폐지했느냐?
아니오. 또 다른 의미로 유지 계승했으며, 오히려 강화했다고 봅니다)
정세웅(목사님 맞으시죠?^^)님의,
"개신교가 가진 성직자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의 그 성직내용중심이 아닌.
대기업의 CEO적인 것이기에, 신학적인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라는 말씀, 정말 신랄하고 옳습니다.
가톨릭적 모델에서는, 사목자의 권위가 사도계승에 근거하므로 그나마 근거라도 있지만,
개신교는 그것도 아니니 더 참담한 꼴인 겁니다.
특히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에서 이같은 자본주의적 폐해는 극심하다고 보는데요,
(본래 개신교가 자본주의적 종교 아닙니까)
개신교의 자승자박인가, 그런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종교개혁이 전적으로 부당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팔색조 형제님,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다비아도 그러하지만, 천주교우님들 가운데도
주체적 자각, 복음 및 그리스도교 전통에 바탕한 개혁을 지향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시다는 데 안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더 가톨릭(로마가톨릭이 아니라)적이 되어야 하고,
개신교는 더 개신교적이 되어야 하며,
반대로, 가톨릭은 개신교적이, 개신교는 가톨릭적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교는 더 그리스도교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생명지향적, 우주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참교회를 구분했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참교회는 하느님을 참으로 만난 이들의 모임이라 그들도 구별했습니다.
문제는 구원의 열쇠를 교회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따른다고 하는
'그분'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