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델포스님과의 '예수의 죽음-들뢰즈적 사유'라는 글에서 나눈 이야기를 확장해보고자 하는 글입니다.
'탈주의 신학'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만 어쩌면 '신학의 탈주'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탈주의 신학'을 이야기 한 것은 기존의 신학에 대립선을 그어 생성되고 재코드화되는 동일자적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말씀하신 정도의 진보 신학은 이미 많이 나와는 있죠...
어찌 보면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정도로도 파악되죠. 그만큼 많죠.'라고 말씀 하신 부분은 의도에 대한 정확한 지적은 아닌 듯합니다.
신학과 들뢰즈의 만남은 이 양자가 만들어내는 상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비-평형적 진화로 둘 사이에 있으면서 둘 바깥에 존재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하기에 권력화 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 이상으로 'n-1'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n-1'또는 중심의 제거, 바로 비중심화 된 체계로 신학의 중심으로 귀속되는 상위의 체계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이웃과 만나고 접속하는 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탈주의 신학'을 이야기 한 것은 본회퍼의 '비종교화'의 위로도 탈주의 선이 그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언급한 '편집증적 파라오'와 '정염적 히브리'로부터 이야기되는 성서에 '지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탈주의 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 사무엘과 사울왕 그리고 유대민족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 요나 등 그들이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성서에 내재적으로 흐르는 탈주와 영토화 이야기의 훔쳐내기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신학의 탈주'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학의 근거인 '존재의 제1원리'로부터 탈주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과 구분됩니다.
'존재의 제1원리'로부터 굳이 탈주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사를 통하여 만들어진 신으로 부터의 탈주를 의미합니다.
극명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이율배반에 빠진 원리로 부터의 탈주이고 이렇게 만든 의도와 영토화, 코드화로 부터의 도망치기입니다.
이율배반의 원리란 초월자인 신을 관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초월자의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고 스스로가 초월적이지 않음을 고백한다면 초월자를 온전히 관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개개의 사유들, 즉 이 사유 저 사유는 신의 본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들이다."(에티카)는 의미로 우리의 사유는 신의 본성을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인간적 사유의 부분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만큼만 신을 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지 초월자의 의지인지 역시도 모호해 지기 때문입니다.
즉, 피조물들에 상대적인, 단순히 부대적인 신적 질들과 명확히 경계를 획정하기가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존재하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서 발견되는 순간에 생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의 원리'는 만물들 속에 있지만 그 만물은 우리의 사고에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신은 그 사이를 흘러가는 흐름에서만 생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원리로 존재하거나 생성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화된 영토에는 의도를 가진 우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코드화에 맞추어진 초월하여 있지 않은 초월자일 뿐입니다.
종교화와 비종교화의 사이를 걸어가십시오.
기독교와 안티기독교의 중간에서 생성되는 것들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이 생성된 것들의 사이로 도망치십시오.
생성이란 없던 것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보다는 의미나 존재를 알 수 없던 것이기에 사용될 수 있는 의미입니다.
드러나다.
나타나다.
발견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생성이 초월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가를 묻는 다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성이 '존재의 제1원리'로 부터는 탈주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굳이 신학적 영역이라고 의미 지워 말한다면 여러 신학 중 한 부류가 아닌 그 내부를 면면히 흐르는 내재적 흐름 되기 - 거대 통일이론이 아닌 - 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만류와 왕의 옹립과 국가의 건설, 신의 물음-"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과 다윗의 성전건축, 이는 언약궤를 안정적인 장치로 체계화하는 것으로 국가적 규율이 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전의 파괴로 이어지는 얼굴돌리기의 이야기는 탈주와 배신의 선을 그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는 창세기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유대민족의 정통을 이어가는 '셋'보다는 우리들의 조상일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한'카인'이 '진정한 주체'일지 모르겠습니다.
다르싯으로 도망가려는 요나역시도 배신자이자 '진정한 주체'이며 예수 또한 마찬가지로 유태인의 신과 유태인을 배신하고 신으로부터 배신당합니다. -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물론 이 또한 유다의 배신의 결과입니다.
이렇듯 성서는 배반과 응답이 만들어내는 생성을 보여줍니다.
'탈주의 신학'은 배반의 선으로 부터 생성 합니다.
성서를 '모든 것이 담겨있으며 그것을 따르고 암송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떠한 새로운 해석도 배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배신만이 새로운 생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배신(trahison)의 체계, 보편적 배반의 체계로서, 거기서는 신이 인간을 배신하는 한, 새로운 긍정성을 정의하는 신의 분노 안에서 진정한 인간 역시 끊임없이 신을 배신한다."(천의 고원)
- [2010/08/31] 예수의 죽음 - 들뢰즈적 사유 (2277, 2) *7
배신(trahison)은 주체에 대한 반역을 포함합니다.
배제(exclusion)는 주체에 의한 제명, 축출, 소외, 배척을 의미합니다.
언어적 의미의 볼 때 배신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온당할 듯 보입니다.
즉 배신은 주체화되는 영토로 부터 탈주를 의미하고 배제는 스스로가 영토화되고 권력화되어 다른 것을 축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들뢰즈도 trahion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탈주후에는 당연이 또 다른 탈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생성시킬지 무엇이 생성될지에 대한 고민은...
물론 들뢰즈식 용어로는 배신, 배반이 자주 거론되죠.
그런데 그 부분이 탈주의 용어로는 좀 불만스럽거든요.
말씀하신대로 배신이 주체에 대한 배반이고 배제가 주체에 의한 제명이라면
전자의 주체와 후자의 주체는 서로 다르죠.
전자는 현 권력자, 코드자가 주체이지만 후자는 탈주가가 스스로 주체가 되죠.
(주체라는 용어를 썼지만 근대철학의 주체 개념이 아니라 중심을 표현하는 기표로 생각해 주십시오 )
전자는 여전히 주체의 이동이 없는 이전의 주체를 인정하게 되고 그 중심에서의 탈주에 불과하죠.
후자는 이전 주체를 중심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죠. 탈주하는 존재가 스스로 주체가 되는
주체조차도 이전시켜버리는 그런 탈주로 귀결되죠.
새로운 탈주자가 새로이 권력화, 코드화되는 우려가 있으나
들뢰즈의 탈영토화는 그냥 그대로의 탈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영토화를 이루어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새로운 영토화를 이루어 내는 순간 또다시 새로운 탈주가 시작된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래서 탈주와 생성은 유일회성이어서는 안되며 계속적이고 끊임없는 탈주와 생성이어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끊임없는 영토화의 탈주를 통해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 속도나 강도를 강화한다고 해서 도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지층적 형식에서 탈지층화하는 운동을 통해 공(空)이라고 불리는 디그리 제로(degree=0)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 혹은 모든 지층에 내재하는 공성(空性)을 보는 것 말입니다."
이는 일관성의 구도가 어떤 운동을 통해 도달하는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내재하는 잠재하는 현실성의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들뢰즈의 탈주를 중심이나 권력에 회피로 보는 것은 탈주가 가지고 있는 파괴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중심의 제거와 수목적 체계에 선을 그어 난도질 해대는 힘과 지층에 형성하는 균열의 선들에 대해 간과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게릴라적 움직임을 통한 배신과 반역의 가능성은 생성되지만 권력화된 주체를 어떻게 배제해 낼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이 중심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간에 이는 배제를 통한 끊임없는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군요.
그토록 탈주체화와 탈영토화를 원했건만 말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권력의 배제와 가능해 보이는 권력에 의한 배제는 배제의 논리상 두개 다가 무모순입니다.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배제의 판단을 주체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기를쓰고 벗어나고자 했던 주체주의를 다시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탈주 자체와 탈주 이후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은 듯합니다.
안티외디푸스에서의 들뢰즈의 탈주 전략은
물론 탈주 자체죠. 유목으로 나타나죠.
거기에서 탈주 자체는 절대적인 탈코드화, 탈영토화로 나아가죠.
이때, 말씀하신 바 '절대적'이란 말이 중요하죠. 이때의 절대적이란
탈영토화 때 기존 영토진영에서 일어나는 재영토화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하죠.
제가 논의하고자 했던 바는 탈주 중 기존 영토와 벌이는 의미에서
끊임없는 탈주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탈주가 완성된 후 그 이후 즉 다시 새로운 탈주를 궁금해 하는 것이죠.
들뢰즈의 욕망은 라깡의 실재계에 근거해 있는데 이 실재계의 욕망은
욕망 그 자체로 분열된 주체죠.
이 욕망은 상징계로의 진입이 허용되는 순간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남으로 반복되죠.
끊임없는 생성, 끊임없는 탈주라고 했던 이유였습니다.
들뢰즈는 '끝까지 유목하라'고 말하죠.
탈주의 신학, 신학의 탈주에서
들뢰즈의 탈주로 자꾸 빠져드는군요.
배반(trahison)은 단절(rupture)과 마찬가지로 탈주(fuite)와 상관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중심으로 부터의 회피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인 fuite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을 도망이나 도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며 탈주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개념의 회피성을 지양하기 위함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배반을 통한 탈주는 가타리나 들뢰즈의 실천적 영역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보다 반역의 강력한 의미의 rebellion이나 revolte를 사용하지 않고 배반과 반역의 복합적 의미인 trahison을 사용한 것은 통속적 맑스주의에 대한 탈출과 배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고민의 출발은 기존의 자본주의 세상을 뒤집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닌 스탈리주의나 주체사상의 모습에서 보여주듯이 혁명을 금욕적 실천으로 정의하는 맑스주의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혁명의 좌절과 몰락으로 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혁명은 욕망에 기초해야 하고 욕망의 힘을 통해 추동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배반과 탈주가 동시적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학문적 영역이나 예술적 영역 등에서의 기존의 학파와 사조를 벗어나는 탈주의 의미도 포함합니다만 그 출발은 통속적 맑스주의와 맑스주의의 근대성에 대해 배신과 탈주 그리고 권력에 대한 반역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반은 탈주, 단절, 배치, 탈영토, 탈코드, 탈지층, 기계, 기관없는 신체, 리좀 등 들뢰즈 철학을 이야기 하는 개념들과의 상관성 속에서 배치되어야만 합니다. 그 때야 적절한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trahison은 적절한 선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학부분은 저 역시도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에 더 이상 진전시킬 자신은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빈곤한 신학적 소양에 대한 저의 한계입니다. ㅎㅎㅎ
저는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신학을 다른 분들이 대신해 주기를 말입니다.
의미있는 고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 이름이 거론되어 댓글 답니다.
전보다 한층 진전된 정리네요.
좀 더 깔끔하고 명쾌해진 것 같습니다.
탈주가 중심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중심을 쫒아가는 헤겔적 변증법과 다를 바 없겠지요.
탈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습니다만
탈주 후가 궁금해지는군요.
드러나지 않은 것, 나타나지 않은 것, 발견되지 않은 것.
라캉적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실재계는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순간 또다시 감추어지거든요.
탈주 후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생성'의 개념을 좀 더 진전시키자면 '끊임없는 생성'이라 나타내고 싶네요.
유일회적 생성이 아니라 생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또다시 생성을 시작하는
화이트헤드적 '과정'이랄까...
이 부분 역시 진전된 정리가 필요할 것 같군요.
배반이란 말들이 나오네요. '배반'도 괜찮긴 한데 '배제'는 어떤가요.
기존의 신을 배제해내는....신을 배반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신을, 신의 가르침을
새롭게 생성해낸다는 의미는 배제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배반이란 말에는 여전히 중심을 포기하지 못함이 깔려 있는 것 같아서요.
사실 성서에서 최고의 탈주는, 신의 배제는 아담과 예수그리스도에서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만...
얘기가 너무 나가나요.
다비아님들께서 괜한 오해를 하실까...그저 톤론일 뿐일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