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우리는 그것이 우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창조물임을 안다. 그러한 앎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창세기 개념적인 생물이 갖는 모습은 신의 창조물로서의 '아름다움'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의 지금의 실상은, 모든 생명은 하나같이 고통과 신음과 처절함의 존재이니,
그것들 모두가 생.노.병.사의 구속을 받고 있으며 또한 아픔과 제한성을 숙명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들이 그러한 '처절함'을 숙명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때는 이미 아름다운 것이
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지독히도 역설적인 개념이다.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에 수억개의 별로 이루어진 약1000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정확할지 어떨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게 실제로 어느정도라도 맞는 개념이라면 과연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대강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렇게 큰 우주 안에서 "생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각각의 생명체는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하나의 생명체에 속해 있는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일찌기 창세기는 높아지려는 인간을 향하여 '너는 티끌이다.' 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영이
본모습이 아니라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그저 광대한 우주 안의 하나의 띠끌일
뿐이다.
신앙을 떠나서 님의 합리적인 글에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되고 또 배우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네 아니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 님의 글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 논쟁 자체가 그렇다는 겁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저는 어느 쪽으로라도 과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닭에서 달걀이 나왔는지 달걀에서 닭이 나왔는지 보셨습니까? 아무도 답은 모릅니다. 다지 서러 자신이 옳다고 추론할 뿐이죠.
님은 무신론인것 같은데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아마 제게 꼭 같은 질문을 하시겠죠. 신이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냐고요. 저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고요.
단지 믿음이지요. 믿는 사람이 있고, 아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 잘 아시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임재로 믿는 다고 믿습니다 -- 또한 안 믿는 사람도 있죠.
누가 옳을까요? 저는 제가 옳다고 보지만 님께서는 님이 옳다고 보시겠죠. 저는 제가 옳다고 믿기에 그리고 그것이 나누면 더 좋은 거라고 믿기에 님도 믿기를 바라지만 님 역시 제가 거짓을 믿지 말고 세상을 바로 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지도 모르죠.
제가 님의 글을 좋아하듯이 저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좋아합니다 -- 제 취미가 수학공식 증명하는 것입니다 *_*;
그렇지만 저는 저의 한계와 이 세상 지식의 한계를 또한 압니다. 한계에 부딪혀서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님께서는 싫어하시겠지만 부디 저의 성령님께서 님과도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실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신이 없다는 것은, 물론 증명됩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히 증명됩니다. ^^
특히나,
기독교나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없다는 것은, 굳이 거창하게 증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쉽게 보여질 수 있지요.
언급하신 "믿음"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해 볼 만한 토론주제가 있지않을까 싶은데,
이 증명문제와 믿음의 문제, 시간되는대로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류영모 선생님의 "없이 계신 하느님"의 글이 떠오르는군요.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만큼의 한계를 지닌 것 아닐까요?
진 예수만 님은 참 많은 것을 전하려하는데
그 취지는 높이 사지만 한자리만 내려오시면
좋은 글 나눌 수 있을듯 싶습니다.
저희 부친께서 늘 좋은게 좋은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좋은게 좋은건 진짜 좋을때만 가능하더군요.
"진리란 앎 그 자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 예수만님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에 잠시 머뭅니다.
사람이 태어나, 조금 자라서 뒤집기를 하고,
또 조금 더 자라면 기어다니다가 걷고.....어른이 됩니다.
걷는 단계로 올라갈 때의 사람은 기어다닐 때의 기존의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처절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린시절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없이 자란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 달나라에까지 가는 기술을 가질 만큼 위대해집니다.
위대해진 다음에도 인간은 또 다른 위대함을 생산해 내기 위해
끊임없는 고통을 시작합니다.
아이가 기고 있을 때, 고통스럽지만 걷기를 시도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인간도 손톱사이에 아주 작으마한 가시라도
박히면 그 가시의 아픔이 온 몸을 아프게 하여 어쩔줄 몰라 하기도 하고
너무 아파서 울기도 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다 두어도 쌓을 곳이 없을만큼 많은 아름다움중에서의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 하나하나는 어느각도에서 보더라도
그 각도에서의 차잇점은 이 세상에 다 두어도 쌓을 곳이 없을만큼
다양한 앎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앎이 이렇게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인 작은 부분일진데, 나의 아는 앎으로 누구의 앎을 재단할 수 있을까요?
사실 내가 아는 앎, 그것으로 아름다움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시시하고 한정된 것일까요?
나의 아는 앎을 세상에 내 놓아 다른사람들도 알게 하고
다른 사람의 앎도 내가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아, 삶을 풍부하고 윤택하게 한다면
인생이 더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실한 댓글에 음악으로 화답합니다.
안톤 브루크너(1824~1896) 7번 교향곡 2악장,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지휘, 베를린필 연주
- 1951.4.23 카이로 순회연주때의 역사적 녹음 -
http://blog.naver.com/jsmun21/90073310219
(* 위 음원주소에 링크하신 후, 동영상 말고 그 아래 음반문양의 유튜브 것을 감상하세요.
이게 푸르트뱅글러 것으로, '진짜음악' 입니다.)
일반적으로 '안다.'는 의미는 사실이나 진실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나 논리적 증명을 수반한 인식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문장은 '안다.'는 표현을 사용할 어떤 논리적 구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믿는다.'라는 단어를 '안다.'라는 단어로 바꿔치기 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바꿔치기를 통하여 믿음을 논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나 진실로 호도하는 언어의 구성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하지도 솔찍하지도 못합니다.
믿음을 인식으로 치환하기 보다는 믿음 자체로 고백하는 것이 정직할 것입니다.
만일 믿음을 강조하여 사용하고자 했다면 이는 비약된 선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니어야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창조주는 그냥 스스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ㅎ
창조의 개념은, "창조주의 창조"를 설명하지 못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