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실제 사목(목회)을 하지 않는 대신, 평신도로서
여러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설교를 폭넓게 들으려 애쓰는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본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며,
교회가 간직하고 전승해 온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과 가르침을 말씀의 전례에서 선포하고,
그 이후에 그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의 육화(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기억하며,
그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성찬의 전례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말씀의 전례)에 있어,
그 중심은, 독서대(강단)에서 봉독되는 성서 말씀 그 자체이지,
성서 말씀의 해설인 설교가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대단히 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 즉 전례의 정신은,
(개신교 신학에서는 '전례'를 예배의 형식, 규범 정도로 생각합니다만,
협소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라고 봅니다)
과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잔치(성찬의 양식과, 이를 조명하는 말씀의 양식)라는 축제성,
하느님의 선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하느님 백성의 응답,
하느님의 임재와 선포 앞에서의 겸허한 침묵의 영성,
하느님과 백성, 집전자와 회중, 회중과 회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적 통공(교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에 비추어서 작금의 개신교, 특히 한국의 다수 개신교회들의 예배의 상황을 말하자면 끝이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말씀'을 놓고 본다면,
목사의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인식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 선포를 밀쳐내고 인간의 말로 대체해 버리는,
하느님을 높인다면서 실상은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 아닐까요.
그리스도교 예배의 전통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구약성서의 핵심 메시지인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를 백날 강조하면 뭘합니까?
물론, 설교를 현재적 선포로서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바르트 같은) 신학자도 계시지만,
저는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는 그것의 조명이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 안수받은 목사의 설교를 선포, 즉 '케리그마'로 보는 개신교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도를 계승한 사제의 자격과 권한, 즉,
성사와 말씀이라는 전례적, 사목적 차원에서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그리스도교가 견지해왔던 사제권의 개신교적 변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정작 여전히 역사적 사도계승을 사제직의 근거로 삼는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등은
사제의 설교를 하느님의 말씀 선포라는 차원으로까지 높여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좀 모순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까닭은 나름대로 이해가 가긴 합니다.
개신교가 사제직 및 사제권을 한편으로는 부정했으면서도,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권위를 유지해 왔다는 것입니다.
주교가 베푸는 성품성사에 의한 사도계승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회 직제인 목사직을 만들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권위', '권력'이라는 유산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개혁파 교회가 예배에서 성찬의 전례를 삭제한 것은,
(하지만 칼뱅은 적어도 매 주일은 성찬을 베풀어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츠빙글리와 제네바 시는 성찬을 1년에 두번, 네번 정도로 축소했는데,
종교개혁 이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공경한 탓에 거의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영성체하도록
교회가 규정을 정한 데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범했던 성체성사(성찬)의 참뜻을 훼손한 오류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로써 결국,
교회 및 그리스도교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인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가 중심으로 부각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연히, 설교는
목사의 권위, 권력을 수립, 생산, 강화하는
가장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왔던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너무 반개신교적이고 부정적인 평가인가요?
그리스도교 및 신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오직 성서 말씀이지,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설교가 텍스트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마저 성서와 더불어, 또는 이보다 정도를 지나쳐
성서보다 설교가 텍스트의 자리를 찬탈해 버린다면,
자신의 절실하고 구체적인 실존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되며,
심할 경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아무개목사교'로 타락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서 말씀 그 자체를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중심으로 받들기 위해서는,
성서 말씀을 듣는 회중들 모두가 그 말씀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기본적으로 전제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적, 즉 공동체적, 사도적(역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나와의 의미 생성이라는 실존적 차원의 문제일테니까요.
'이런 차원'에서 설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혼자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뜻을 몰라 답답해 하다가
필리포스의 가르침을 받아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었듯이 말입니다.
그럴진대, 설교에 길고 많은 내용을 담는다고 좋은 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생선을 주려는 설교보다는,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교와 교회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비록 평신도이지만,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교회와 신학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는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일단 국어 교사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어 교육, 즉 사고와 소통의 교육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준비하는 국어 교사의 길 또한
사제 또는 목사 못지 않은 성소(聖召)라고 봅니다.
이것은 주체적 자아를 세우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보다 의미있는 행동과 삶을 선택하게끔 도울 것이라 믿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성숙의 가장 기초이기도 하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교회 교육도 이와 같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이거 순전히 그분의 은총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하며,
인간의 입장에서 주체적, 실존적 결단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영역에 속해 있을진대,
하향적, 일방적, 강압적, 권위적 언어의 주입과 재생산이라는 인간적 방법으로
믿음이 생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칼뱅주의 신학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만,
인간의 자유, 즉 주체적 선택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건 은총이 아닌 강압과 주입이니, 모순 명제가 됩니다.
그리고, 주입하는 권위적 명제로서 믿음이 생기지 않고,
도리어 반그리스도교, 반교회적 정서와 근본주의적 폭력성 등의
복음의 정신에 반하는 역작용만을 불러일으켰다는 역사적, 결과론적 측면을 생각해 봐도,
이 주장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자유,
이 두 축이 설교와 교회 교육의 중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중심점 가운데에서 정녕 나에게 절실한
'의미'가 생성된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맞춘 교회의 전례주년을 따라
성서일과대로 성서를 읽고, 설교와 교회 교육만 한다 해도
주일 예배에서만 3년에 성서를 한 번 통독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구원사의 맥락을 관통해서 인식시키는 데 훨씬 효율적일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신학과 성서학, 교회사에 대한 기초 지식과 방법론을 알기 쉽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서 공부 시간이라든지, 설교 중에 녹아들게 해서 익숙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텍스트에 걸맞는 올바른 해석학이 아닌, 엉뚱한 방법론을 갖다붙여 읽는 것은,
마치 나사 푸는 데 드라이버 대신 장도리를 갖다대는 상식 이하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는 그러한 일이 편만해 있다는 말이지요.
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당연하고 유일하게 맞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심각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사에 장도리를 갖다대면 나사가 풀리지는 않지만,
언어로 된 성서 말씀은 엉뚱한 해석 방법을 갖다붙여도 어떻게든 말은 만들어지니,
이게 더 위험하고, 사람 잡는 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야,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말씀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겠습니까?
저는 아직 사목(목회)자도, 설교자도 아닌 탓에 생각만 있지,
아직 구체적으로 어찌할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갖추도록 힘써야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시켜 보고 싶은 소원은 늘 갖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든, 사목(목회)의 장에서든...
여러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설교를 폭넓게 들으려 애쓰는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본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며,
교회가 간직하고 전승해 온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과 가르침을 말씀의 전례에서 선포하고,
그 이후에 그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의 육화(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기억하며,
그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성찬의 전례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말씀의 전례)에 있어,
그 중심은, 독서대(강단)에서 봉독되는 성서 말씀 그 자체이지,
성서 말씀의 해설인 설교가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대단히 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 즉 전례의 정신은,
(개신교 신학에서는 '전례'를 예배의 형식, 규범 정도로 생각합니다만,
협소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라고 봅니다)
과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잔치(성찬의 양식과, 이를 조명하는 말씀의 양식)라는 축제성,
하느님의 선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하느님 백성의 응답,
하느님의 임재와 선포 앞에서의 겸허한 침묵의 영성,
하느님과 백성, 집전자와 회중, 회중과 회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적 통공(교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에 비추어서 작금의 개신교, 특히 한국의 다수 개신교회들의 예배의 상황을 말하자면 끝이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말씀'을 놓고 본다면,
목사의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인식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 선포를 밀쳐내고 인간의 말로 대체해 버리는,
하느님을 높인다면서 실상은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 아닐까요.
그리스도교 예배의 전통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구약성서의 핵심 메시지인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를 백날 강조하면 뭘합니까?
물론, 설교를 현재적 선포로서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바르트 같은) 신학자도 계시지만,
저는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는 그것의 조명이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 안수받은 목사의 설교를 선포, 즉 '케리그마'로 보는 개신교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도를 계승한 사제의 자격과 권한, 즉,
성사와 말씀이라는 전례적, 사목적 차원에서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그리스도교가 견지해왔던 사제권의 개신교적 변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정작 여전히 역사적 사도계승을 사제직의 근거로 삼는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등은
사제의 설교를 하느님의 말씀 선포라는 차원으로까지 높여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좀 모순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까닭은 나름대로 이해가 가긴 합니다.
개신교가 사제직 및 사제권을 한편으로는 부정했으면서도,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권위를 유지해 왔다는 것입니다.
주교가 베푸는 성품성사에 의한 사도계승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회 직제인 목사직을 만들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권위', '권력'이라는 유산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개혁파 교회가 예배에서 성찬의 전례를 삭제한 것은,
(하지만 칼뱅은 적어도 매 주일은 성찬을 베풀어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츠빙글리와 제네바 시는 성찬을 1년에 두번, 네번 정도로 축소했는데,
종교개혁 이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공경한 탓에 거의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영성체하도록
교회가 규정을 정한 데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범했던 성체성사(성찬)의 참뜻을 훼손한 오류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로써 결국,
교회 및 그리스도교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인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가 중심으로 부각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연히, 설교는
목사의 권위, 권력을 수립, 생산, 강화하는
가장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왔던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너무 반개신교적이고 부정적인 평가인가요?
그리스도교 및 신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오직 성서 말씀이지,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설교가 텍스트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마저 성서와 더불어, 또는 이보다 정도를 지나쳐
성서보다 설교가 텍스트의 자리를 찬탈해 버린다면,
자신의 절실하고 구체적인 실존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되며,
심할 경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아무개목사교'로 타락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서 말씀 그 자체를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중심으로 받들기 위해서는,
성서 말씀을 듣는 회중들 모두가 그 말씀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기본적으로 전제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적, 즉 공동체적, 사도적(역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나와의 의미 생성이라는 실존적 차원의 문제일테니까요.
'이런 차원'에서 설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혼자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뜻을 몰라 답답해 하다가
필리포스의 가르침을 받아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었듯이 말입니다.
그럴진대, 설교에 길고 많은 내용을 담는다고 좋은 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생선을 주려는 설교보다는,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교와 교회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비록 평신도이지만,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교회와 신학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는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일단 국어 교사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어 교육, 즉 사고와 소통의 교육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준비하는 국어 교사의 길 또한
사제 또는 목사 못지 않은 성소(聖召)라고 봅니다.
이것은 주체적 자아를 세우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보다 의미있는 행동과 삶을 선택하게끔 도울 것이라 믿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성숙의 가장 기초이기도 하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교회 교육도 이와 같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이거 순전히 그분의 은총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하며,
인간의 입장에서 주체적, 실존적 결단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영역에 속해 있을진대,
하향적, 일방적, 강압적, 권위적 언어의 주입과 재생산이라는 인간적 방법으로
믿음이 생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칼뱅주의 신학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만,
인간의 자유, 즉 주체적 선택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건 은총이 아닌 강압과 주입이니, 모순 명제가 됩니다.
그리고, 주입하는 권위적 명제로서 믿음이 생기지 않고,
도리어 반그리스도교, 반교회적 정서와 근본주의적 폭력성 등의
복음의 정신에 반하는 역작용만을 불러일으켰다는 역사적, 결과론적 측면을 생각해 봐도,
이 주장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자유,
이 두 축이 설교와 교회 교육의 중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중심점 가운데에서 정녕 나에게 절실한
'의미'가 생성된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맞춘 교회의 전례주년을 따라
성서일과대로 성서를 읽고, 설교와 교회 교육만 한다 해도
주일 예배에서만 3년에 성서를 한 번 통독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구원사의 맥락을 관통해서 인식시키는 데 훨씬 효율적일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신학과 성서학, 교회사에 대한 기초 지식과 방법론을 알기 쉽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서 공부 시간이라든지, 설교 중에 녹아들게 해서 익숙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텍스트에 걸맞는 올바른 해석학이 아닌, 엉뚱한 방법론을 갖다붙여 읽는 것은,
마치 나사 푸는 데 드라이버 대신 장도리를 갖다대는 상식 이하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는 그러한 일이 편만해 있다는 말이지요.
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당연하고 유일하게 맞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심각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사에 장도리를 갖다대면 나사가 풀리지는 않지만,
언어로 된 성서 말씀은 엉뚱한 해석 방법을 갖다붙여도 어떻게든 말은 만들어지니,
이게 더 위험하고, 사람 잡는 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야,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말씀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겠습니까?
저는 아직 사목(목회)자도, 설교자도 아닌 탓에 생각만 있지,
아직 구체적으로 어찌할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갖추도록 힘써야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시켜 보고 싶은 소원은 늘 갖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든, 사목(목회)의 장에서든...
2007.02.08 18:50:35
대한성공회의 전례 및 사목, 교회 교육에 대해서는 비록 짧으나마 저 나름의 생각이 있긴 합니다.. 별로 긍정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번 주 성공회신문 사설에서도 말하다시피, 대한성공회 신자들은 주일을 지켜야 된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해이한 게 사실입니다(이런 부분은 제가 상당히 보수적이기도 합니다). 침체와 부실을 극복해 보기 위해 보수복음주의적 개신교의 문화와 요소,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는 모습들이 근자에 많이 보이지만, 저는 도리어 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나름의 생각'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따로 글을 써 올리겠습니다^^*
2007.02.08 21:22:53
저도 님의 의견에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성공회는 성공회 교유의 미사예절 즉, 예전이 있는데, 제자훈련, 개신교의 멀티미디어 예배, 간증 등 개신교의 교회 문화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칫 성공회 고유의 교회문화들을 잃어버리지 않을지 우려가 됩니다.
물론 주일성수를 게을리 하는 냉담자들이 있다는 것도 신문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지만, 개신교나 가톨릭도 냉담자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으니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주일성수를 게을리 하는 냉담자들이 있다는 것도 신문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지만, 개신교나 가톨릭도 냉담자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으니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좋겠습니다.
2007.02.09 03:27:54
와우,, 이곳의 논의는 아주 구체적이고 생산적이군요.
기독교 전례에 대한 저의 무지와 무관심이 마구 부끄러워집니다. ^^
이런 논의가 성공회 아닌 다른 교단에서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독교 전례에 대한 저의 무지와 무관심이 마구 부끄러워집니다. ^^
이런 논의가 성공회 아닌 다른 교단에서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007.02.09 13:01:14
토머스 모어님의 말씀을 잘 읽었습니다. 성공회 기도서에 문제가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정확성을 기해야 할 라틴어번역까지 틀리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지요. 다행히 전례학을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중인 주낙현(요셉)신부님이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만요.
'교회'란 전체로서의 교회이지, 개별 성당을 '교회'로 부르는 것은 좀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하셨는데,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보편교회 즉, 거룩한 공교회를 지향하는 우리 성공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파를 초월한 보편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당을 교회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를 천주교로 오해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오해가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로 성공회 대성당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목사들이 와서 같이 감사성찬례를 봉헌한 적이 있는데, 그 기사를 읽은 어느 개신교 신자가 우리 성공회를 "진리를 왜곡한 집단"이라고 헐뜯더라고요. 성당이라는 말만 보고, 성공회를 천주교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성공회 성당이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성공회 교회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대한성공회에 대해서 우려하는 점은 교회출판이 너무 빈약하다는 겁니다.
통합측 장로교의 출판부인 한국 장로교출판사에서 노년교재를 편집하는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 성공회의 출판부인 선교교육원에서 나온 어린이 공과와 너무 비교가 되더라고요. 물론 내용은 우리 성공회의 공과교재가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더 낫지만, 디자인과 인쇄방식은 비교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절제된 서체를 사용한 고급 디자인이 장점인 한장사의 교재를 접한 저로서는 마스터인쇄로 만든게 분명한 성공회 어린이공과가 너무 초라해보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정문제가 해결되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란 전체로서의 교회이지, 개별 성당을 '교회'로 부르는 것은 좀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하셨는데,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보편교회 즉, 거룩한 공교회를 지향하는 우리 성공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파를 초월한 보편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당을 교회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를 천주교로 오해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오해가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로 성공회 대성당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목사들이 와서 같이 감사성찬례를 봉헌한 적이 있는데, 그 기사를 읽은 어느 개신교 신자가 우리 성공회를 "진리를 왜곡한 집단"이라고 헐뜯더라고요. 성당이라는 말만 보고, 성공회를 천주교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성공회 성당이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성공회 교회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대한성공회에 대해서 우려하는 점은 교회출판이 너무 빈약하다는 겁니다.
통합측 장로교의 출판부인 한국 장로교출판사에서 노년교재를 편집하는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 성공회의 출판부인 선교교육원에서 나온 어린이 공과와 너무 비교가 되더라고요. 물론 내용은 우리 성공회의 공과교재가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더 낫지만, 디자인과 인쇄방식은 비교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절제된 서체를 사용한 고급 디자인이 장점인 한장사의 교재를 접한 저로서는 마스터인쇄로 만든게 분명한 성공회 어린이공과가 너무 초라해보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정문제가 해결되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2007.02.09 14:25:08
주신부님은 제가 많은 얘기를 나누는 분입니다.
그런데, 전례에 관한 주신부님의 의견들이 교단의 의사결정 과정 가운데서 묵살되기 일쑤였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교회의 민주화를 강하게 희망하면서도,
전문가의 권위는 대단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대한성공회의 분위기가 과연 그런가 모르겠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서울대성당 청년들이
마포 한국정교회 대성당과 새문안장로교회,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순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정동제일교회 청년회가 서울대성당에 답방을 왔더군요.
아무래도, 우리나라 개신교의 상황에 있어 성공회가 소수 교파이고,
대다수의 개신교우들이 가톨릭적 전통을 잘 모르니 질문과 설명이 많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어떤 청년들은,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분파된 것도 모르고,
(성공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사실은 아마 그 청년들의 거의 전부가 몰랐겠습니다만)
도리어 거꾸로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근본주의적 분파들보다,
차라리 천주교가 백배 건전합니다.
다만, 천주교는 그 구조적 특성상 교파가 갈라지지 않았을 뿐이지,
알고보면 천주교 안에도 개신교 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흐름이 대립, 공존하고 있답니다.
게다가,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회가 개신교 및 현대사조의 도전 앞에서
반동종교개혁으로써 성모 숭배,
(성모님 공경과는 다르다는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교황권 강화, 장엄한 전례 형식 등의 요소를 강화해 나갔던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천주교의 입장에 있어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전기를 통해 일소했고, 반성, 쇄신했습니다.
마리아주의자, 전례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들은 개신교의 근본주의자, 세대주의자 등과 비슷한 부류의 열광주의자로 치부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천주교 평신도들은
이같은 요소들을 천주교의 본질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천주교 내의 양식있는 평신도, 사제, 수도자 등은 그에 반발하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며,
교회가 정한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모델로 끊임없이 쇄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니,
천주교를 도매끔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장로교출판사, 책 잘 만들지요.
특히 기독교교육 쪽 책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교육신학 전문서들도 그렇고, 평신도 교재들도 역시요.
대한성공회는 재정도 문제지만, 인력이 너무 없어요.
그렇기에, 작은 교파일수록 타 교파의 '좋은' 점들을
(보수복음주의의 감상적, 열광적 요소들은 좋은 점들에 속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일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흥강사 초빙하고, 온누리 두란노 따위에 가거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그런 초교파적 참여 말고요.
예컨대, 사순, 대림, 부활, 성탄 때 같은 복잡한 전례의 경우,
당장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실제 전례의 구성과 복사 예절, 행렬의 순서와 동선 등까지,
상세하게 파일로 작성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집니다.
말씀하신 평신도 교재들도, 시중의 천주교 서점들에 널렸잖습니까?
(개신교 쪽 교재들은 그리 좋은 걸 못 봤습니다)
이런 것, 컨닝하고 빌려써도 안 잡아갑니다.
교세가 작고 가난한만큼, 안목과 활동의 지평을 넓혔으면 좋겠는데,
대한성공회는 옛날부터 체질인지, 교파의 울타리에 구속되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한 열정과 관심, 성의가 부족해서인지,
그렇게 움직이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런데, 전례에 관한 주신부님의 의견들이 교단의 의사결정 과정 가운데서 묵살되기 일쑤였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교회의 민주화를 강하게 희망하면서도,
전문가의 권위는 대단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대한성공회의 분위기가 과연 그런가 모르겠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서울대성당 청년들이
마포 한국정교회 대성당과 새문안장로교회,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순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정동제일교회 청년회가 서울대성당에 답방을 왔더군요.
아무래도, 우리나라 개신교의 상황에 있어 성공회가 소수 교파이고,
대다수의 개신교우들이 가톨릭적 전통을 잘 모르니 질문과 설명이 많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어떤 청년들은,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분파된 것도 모르고,
(성공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사실은 아마 그 청년들의 거의 전부가 몰랐겠습니다만)
도리어 거꾸로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근본주의적 분파들보다,
차라리 천주교가 백배 건전합니다.
다만, 천주교는 그 구조적 특성상 교파가 갈라지지 않았을 뿐이지,
알고보면 천주교 안에도 개신교 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흐름이 대립, 공존하고 있답니다.
게다가,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회가 개신교 및 현대사조의 도전 앞에서
반동종교개혁으로써 성모 숭배,
(성모님 공경과는 다르다는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교황권 강화, 장엄한 전례 형식 등의 요소를 강화해 나갔던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천주교의 입장에 있어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전기를 통해 일소했고, 반성, 쇄신했습니다.
마리아주의자, 전례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들은 개신교의 근본주의자, 세대주의자 등과 비슷한 부류의 열광주의자로 치부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많은 천주교 평신도들은
이같은 요소들을 천주교의 본질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천주교 내의 양식있는 평신도, 사제, 수도자 등은 그에 반발하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며,
교회가 정한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모델로 끊임없이 쇄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니,
천주교를 도매끔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장로교출판사, 책 잘 만들지요.
특히 기독교교육 쪽 책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교육신학 전문서들도 그렇고, 평신도 교재들도 역시요.
대한성공회는 재정도 문제지만, 인력이 너무 없어요.
그렇기에, 작은 교파일수록 타 교파의 '좋은' 점들을
(보수복음주의의 감상적, 열광적 요소들은 좋은 점들에 속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일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흥강사 초빙하고, 온누리 두란노 따위에 가거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그런 초교파적 참여 말고요.
예컨대, 사순, 대림, 부활, 성탄 때 같은 복잡한 전례의 경우,
당장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실제 전례의 구성과 복사 예절, 행렬의 순서와 동선 등까지,
상세하게 파일로 작성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집니다.
말씀하신 평신도 교재들도, 시중의 천주교 서점들에 널렸잖습니까?
(개신교 쪽 교재들은 그리 좋은 걸 못 봤습니다)
이런 것, 컨닝하고 빌려써도 안 잡아갑니다.
교세가 작고 가난한만큼, 안목과 활동의 지평을 넓혔으면 좋겠는데,
대한성공회는 옛날부터 체질인지, 교파의 울타리에 구속되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한 열정과 관심, 성의가 부족해서인지,
그렇게 움직이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네요.
2007.02.09 17:53:48
예. 그런데, 성공회가 자랑하는 '전례'는, 그리스도교 전례, 더 좁혀 말해 서방교회 공통의 전례이지, 성공회만이 가진 독특한 무엇은 아닙니다. 주제넘은 평이 되겠으나, 제 소견에 대한성공회는 전례의 전통과 영성, 정신, 신학은 없이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형식의 껍데기만을 전례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전례란 한낱 예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고 영성이며, 정신, 그리고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축제입니다. 12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대한성공회 안에 전례신학자가 한 사람도 없고(아직 박사학위 중이신 주신부님이 계시긴 합니다만), 2004년 개정판 공동기도서만 놓고 봐도 전례학적 오류와 부적절성, 그리고 기본적인 라틴어 전례문 부분의 번역과 우리말 표현의 틀림과 부적절함이 정말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신부님도 인식을 못하고 있다는 것,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긴, 공동기도서 개정 때에 정당한 의견들은 묵살되고 시쳇말로 목소리 큰 분들의 의견대로 강행되었다는 뒷말들이 이유 없지는 않나 봅니다. 매 미사 때마다 행렬십자가를 앞세우고 행렬촛대와 향을 사용한다고 전례가 되는 건 아니죠(이러한 제구들이 필요한, 특별히 성대하게 드릴 예배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전례의 축제성, 공동체성보다는, 장엄함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인간적인 생각의 발로일 뿐이라고 봅니다.
전례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다른 점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은 많을 것입니다만, 이같은 대한성공회의 내적 허약성 및 빈곤과, 작은 교세에 기인하는 한계점,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요소들과 그 출신의 분들께서 대거 들어오고 있는 상황 등이 맞물려서, 대한성공회의 보수복음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역사적 사도계승과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보편교회 체제를 견지하는 성공회는, 개별 사목자와 성당 중심으로 흘러가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보편교회 모델에 있어서 '교회'란 전체로서의 교회이지, 개별 성당을 '교회'로 부르는 것은 좀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데(그래서 제가 굳이 '성공회 OO교회'라는 대신 'OO성당'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개별 교회는 교회가 아닌, 본당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아무튼, 가톨릭성(보편교회성)과 개신교성의 중도를 가는 입장은, 그만큼 확실한 자기정체성 인식과 가톨릭성-개신교성 양자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금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지 않느냐는 제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다른 점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은 많을 것입니다만, 이같은 대한성공회의 내적 허약성 및 빈곤과, 작은 교세에 기인하는 한계점,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요소들과 그 출신의 분들께서 대거 들어오고 있는 상황 등이 맞물려서, 대한성공회의 보수복음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역사적 사도계승과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보편교회 체제를 견지하는 성공회는, 개별 사목자와 성당 중심으로 흘러가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보편교회 모델에 있어서 '교회'란 전체로서의 교회이지, 개별 성당을 '교회'로 부르는 것은 좀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데(그래서 제가 굳이 '성공회 OO교회'라는 대신 'OO성당'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개별 교회는 교회가 아닌, 본당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아무튼, 가톨릭성(보편교회성)과 개신교성의 중도를 가는 입장은, 그만큼 확실한 자기정체성 인식과 가톨릭성-개신교성 양자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금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지 않느냐는 제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