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한 주간 동안, 쟁토방에서 인간 이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상념이 교차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과연 신을 아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가?
또는 과연 인간의 이성이 신은 고사하고라도 인간 자체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고, 비록 서로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지점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단 소통가능성과 그 한계를 노정한 상태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제가 느낀 점은,
데미님은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합리적 이성이 자칫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문제를 형해화시키는 오류에 까지 다다를 것이 아닌가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진리 자체를 드러내기 보다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도출할 지 모른다는 생각은 일면 타당하고 곱씹어봐야할 대목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서 진리가 숨막히는 상황이 그간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소위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깊게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은 -인문학적 성서읽기- 그간의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운동이고, 엔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볼테르님의 입장은, 주로 데미님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양상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논리의 틀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열심히 지적하고 노출하려는 데미님에겐 좀 뼈아픈 상황인데, 볼테르님의 한결같은 주장은, 인식론적인 틀로는 존재론적인 인간 내지 신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보다는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자는 의견입니다.
제 짧은 생각은,
그렇다면, 인간의 합리적 이성은 진리 인식에 어떻게 복무하느냐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리로 이르는 상상력을 주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가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인문학적 성서읽기식으로 본다면, 진리 인식에로 인도(접촉점)하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진리 인식에 벗어나는 점에서 그 한계가 노정된다고 봐야할 겁니다.
과연 그 접촉점이 어딘지!
정목사님의 한결같은 설명은, 차원의 문제인데요.
자연과학은 인식론적 차원이고 신 이해나 인간이해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인식론적 차원인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인간의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서 신 이해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진입하는데, 그 접촉점이 인간의 자기 초월이라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자기초월 -생명 전반에- 가능성이 내재한 존재라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네요..
오해가 있으면 이해를 부탁드리면서...
숨고르기가 끝나면, 다시 토론에 임하실 데미님과 볼테르님 그리고 다비안들에게 한번 읽고 시작하면 어떨까해서 글을 좀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켄 윌버라고 세기연에 있는 글인데요. 정강길님이 올린 글입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g001/49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21 01:47)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과연 신을 아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가?
또는 과연 인간의 이성이 신은 고사하고라도 인간 자체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고, 비록 서로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지점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단 소통가능성과 그 한계를 노정한 상태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제가 느낀 점은,
데미님은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합리적 이성이 자칫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문제를 형해화시키는 오류에 까지 다다를 것이 아닌가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진리 자체를 드러내기 보다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도출할 지 모른다는 생각은 일면 타당하고 곱씹어봐야할 대목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서 진리가 숨막히는 상황이 그간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소위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깊게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은 -인문학적 성서읽기- 그간의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운동이고, 엔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볼테르님의 입장은, 주로 데미님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양상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논리의 틀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열심히 지적하고 노출하려는 데미님에겐 좀 뼈아픈 상황인데, 볼테르님의 한결같은 주장은, 인식론적인 틀로는 존재론적인 인간 내지 신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보다는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자는 의견입니다.
제 짧은 생각은,
그렇다면, 인간의 합리적 이성은 진리 인식에 어떻게 복무하느냐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리로 이르는 상상력을 주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가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인문학적 성서읽기식으로 본다면, 진리 인식에로 인도(접촉점)하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진리 인식에 벗어나는 점에서 그 한계가 노정된다고 봐야할 겁니다.
과연 그 접촉점이 어딘지!
정목사님의 한결같은 설명은, 차원의 문제인데요.
자연과학은 인식론적 차원이고 신 이해나 인간이해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인식론적 차원인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인간의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서 신 이해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진입하는데, 그 접촉점이 인간의 자기 초월이라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자기초월 -생명 전반에- 가능성이 내재한 존재라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네요..
오해가 있으면 이해를 부탁드리면서...
숨고르기가 끝나면, 다시 토론에 임하실 데미님과 볼테르님 그리고 다비안들에게 한번 읽고 시작하면 어떨까해서 글을 좀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켄 윌버라고 세기연에 있는 글인데요. 정강길님이 올린 글입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g0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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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1 13:21:31
제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가 여려웠던 점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믿으나 그 점접은 없다,라는
견해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결국 기독교만이 진정한 구원을 주는가 하는 질문 앞에 당연히도
아니라는 견해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를 이야기 하나 그 내용은 범신론적입니다.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써야 또 이와 관련한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경험에 의지하여...^^)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믿으나 그 점접은 없다,라는
견해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결국 기독교만이 진정한 구원을 주는가 하는 질문 앞에 당연히도
아니라는 견해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를 이야기 하나 그 내용은 범신론적입니다.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써야 또 이와 관련한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경험에 의지하여...^^)
2007.05.21 14:27:19
지금 인문학적이니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들으면 괭장히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기는 합니다만 사실은 이게 그렇게 어렵고 또 치밀한 말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하거나 '믿어야 할 어떤 대상이 믿을만하다'라는
말을 할 때 이런 말은 분명한 어떤 기준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뭔가 물으면 다들 그만 답이 궁해지는 것들입니다.
데카르트의 Cogito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를 낳아주셨다고 믿는 부모님이 우리의 친부모라
는 믿음을 확증해 줄 수 있는 아무 근거도 가지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내 눈으로 확인한 바도 없고
병원에서 바꿔치기 할 가능성에 대한 어떤 확증도 없고, 다들 쉬쉬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게 아니라는 확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근거없이 믿고 있습니다.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달나라에 암스트롱이 가서 발을 내딛었다는 그 허무맹랑한 것을
'아무 생각없이' 믿고 있고, 우리가 보는 하늘에는 전혀 없는 오로라를 그 소식을 전해 주는 여행객들이
있어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돈을 잔뜩 쳐박고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우주선이 화성에 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어떤 뼈다귀를 주워맞추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호모 에렉투스'라는 직립인이
있었으리라고 믿고 있고 게다가 그 뼈다귀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철썩같이 믿습니다.
결국 황우석 같을지도 모르는 과학자들이 논문으로 써댔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보면 물이 우리들의 말과 신념에 반응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밥을 두 공기 해 두고 하나에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에는 '죽여버릴꺼야'
하고 한 달 정도 말하면 두 밥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이야기에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실험으로 반복했을 때 그 결과가 나오면 그만 믿어버립니다. (나도 해 봤거든요.)
애굽 이스라엘 백성 틈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는 매일 같이 만나라는 희한한 먹거리가 이슬처럼 내리고... 만나는 딱 닷새가 지나면 기적이
아니라 그저 일상일 뿐입니다. 없던 하늘에 오로라가 생기는 것처럼.
구더기 같은 징그러운 물체에서 화려한 나비가 나온다는 것을 '납득하여'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저는 광주사태 때 신문 방송을 보면서 정말로 북한 괴뢰가 그 지방에 출몰한 줄 알았습니다.
신문 방송이 다 말하고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그걸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해 9월11일 방송에서 큰 건물 두 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봤습니다. 테러랍니다.
그런데 5년 지나서 이번에는 '911 루스체인지'라는 동영상을 보니 그게 다 조작같아 보였습니다.
펜타곤에 충돌했다는 비행기는 흔적이 없고 5년 동안 극비로 공개 안 하던 펜타곤 주차장 CCTV를 보니
비행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미사일이 펜타곤을 향해 날아가 충돌하는 장면이 잡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실 때 다들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계신지요?
우리는 어떤 것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토대로 행위할 뿐입니다.
그 판단의 근거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근거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취한 근거는 인식론적으로 타당한 두 가지 근거 중 하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인문학이 그걸 지지한다는 생각은 그동안 익숙하게 걸어온 습관에 불과합니다.
성경보다는 논문이 믿을 만하다는 습관...
주제를 이야기하기는 합니다만 사실은 이게 그렇게 어렵고 또 치밀한 말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하거나 '믿어야 할 어떤 대상이 믿을만하다'라는
말을 할 때 이런 말은 분명한 어떤 기준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뭔가 물으면 다들 그만 답이 궁해지는 것들입니다.
데카르트의 Cogito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를 낳아주셨다고 믿는 부모님이 우리의 친부모라
는 믿음을 확증해 줄 수 있는 아무 근거도 가지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내 눈으로 확인한 바도 없고
병원에서 바꿔치기 할 가능성에 대한 어떤 확증도 없고, 다들 쉬쉬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게 아니라는 확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근거없이 믿고 있습니다.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달나라에 암스트롱이 가서 발을 내딛었다는 그 허무맹랑한 것을
'아무 생각없이' 믿고 있고, 우리가 보는 하늘에는 전혀 없는 오로라를 그 소식을 전해 주는 여행객들이
있어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돈을 잔뜩 쳐박고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우주선이 화성에 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어떤 뼈다귀를 주워맞추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호모 에렉투스'라는 직립인이
있었으리라고 믿고 있고 게다가 그 뼈다귀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철썩같이 믿습니다.
결국 황우석 같을지도 모르는 과학자들이 논문으로 써댔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보면 물이 우리들의 말과 신념에 반응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밥을 두 공기 해 두고 하나에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에는 '죽여버릴꺼야'
하고 한 달 정도 말하면 두 밥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이야기에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실험으로 반복했을 때 그 결과가 나오면 그만 믿어버립니다. (나도 해 봤거든요.)
애굽 이스라엘 백성 틈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는 매일 같이 만나라는 희한한 먹거리가 이슬처럼 내리고... 만나는 딱 닷새가 지나면 기적이
아니라 그저 일상일 뿐입니다. 없던 하늘에 오로라가 생기는 것처럼.
구더기 같은 징그러운 물체에서 화려한 나비가 나온다는 것을 '납득하여'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저는 광주사태 때 신문 방송을 보면서 정말로 북한 괴뢰가 그 지방에 출몰한 줄 알았습니다.
신문 방송이 다 말하고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그걸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해 9월11일 방송에서 큰 건물 두 채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봤습니다. 테러랍니다.
그런데 5년 지나서 이번에는 '911 루스체인지'라는 동영상을 보니 그게 다 조작같아 보였습니다.
펜타곤에 충돌했다는 비행기는 흔적이 없고 5년 동안 극비로 공개 안 하던 펜타곤 주차장 CCTV를 보니
비행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미사일이 펜타곤을 향해 날아가 충돌하는 장면이 잡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실 때 다들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계신지요?
우리는 어떤 것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토대로 행위할 뿐입니다.
그 판단의 근거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근거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취한 근거는 인식론적으로 타당한 두 가지 근거 중 하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인문학이 그걸 지지한다는 생각은 그동안 익숙하게 걸어온 습관에 불과합니다.
성경보다는 논문이 믿을 만하다는 습관...
2007.05.21 20:34:28
안녕하세요. 섬돌님 덕에 다시 글을 쓰는군요. 하지만 섬돌님이 제의하신 토론이 지금으로선 별로 달갑지않은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번에 토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작 본론에는 다가가지 못했던 논의)한 범위 내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염려스러워 토론의 방법을 바꾸자고 제안드렸었구요. (지난번 글 마지막 댓글즈음에 적은 것이 있을 겁니다)
데미님이 길게 적으신 글에 여러 철학의 개념이 자기모순적으로 얽혀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다시 지적하면서 논의를 끌다간 다시 저번같은 양상이 재방송 될 공산이 큰 것 같군요. 좀 더 다이렉트하고 직접적인 논증방식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학의 얘기가 들어가야겠지요. 인문학으로 성서읽기가 과연 신학의 방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것의 당위성이나 가치는 무엇인지 말입니다. 분명히 제가 보건대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부터 현대신학의 여러갈래들까지의 얘기가 필요할겁니다.
물론, 철학적으로도 이야기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용 혹은 남용되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수정하면서 나가다간 제풀에 지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주 잠깐 데미님의 글을 살펴보았는데도 논리적 오류는 물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서양근대철학의 주요한 개념들이 마구 섞여져잇습니다)
저는 비록 학부이지만 철학전공자입니다. 자랑하려는게 아니라 원래 전공자의 눈으로 보면 자기 분야를 말하는 사람들의 언명에 헛점이 많이 보이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제가 연구하는 뇌과학분야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합동연구하는 분야로서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신천지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전공이 무엇이든, 철학은 필수라는게 이 동네 사람들의 특이한 점이라면 특이한 점입니다. 일반 공학분야에는 찾아보기 힘들죠. 그리고 여태까지 짧지만 철학을 놓지않고 살아왓다는 점에서도 철학이나 과학의 개념이 여러 담론과 뒤섞여 오용되어지는 것은 논의를 시작함에 있어 굉장히 큰 리스크 내지는 미스가이드를 지니고 시작하는 거라는 점도 익숙할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제안합니다. 만약 논의를 시작하신다면 먼저 틀을 합의해야 합니다.
본 회담전의 예비회담처럼 의제와 방법론에 관해서 먼저 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p.s
사실 오늘부터 하계 상황훈련기간이라 참여가 힘들 것이 예상됩니다. 휴가가 코앞인데 정신이 없군요. 따라서 만약 저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참여에 대해서는 100% 장담은 못드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이 업데이트 되는대로 꼬박꼬박 읽어내려가며 가능한한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 다른 분들이라면 굳이 제가 제안한 내용에 동의를 하지 않으시더라도 여러분들끼리 진행하실 수 있는 것이고, 제가 제안한대로 하셔도 굳이 반대하시지 않는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경독하겠습니다.
데미님이 길게 적으신 글에 여러 철학의 개념이 자기모순적으로 얽혀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다시 지적하면서 논의를 끌다간 다시 저번같은 양상이 재방송 될 공산이 큰 것 같군요. 좀 더 다이렉트하고 직접적인 논증방식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학의 얘기가 들어가야겠지요. 인문학으로 성서읽기가 과연 신학의 방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것의 당위성이나 가치는 무엇인지 말입니다. 분명히 제가 보건대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부터 현대신학의 여러갈래들까지의 얘기가 필요할겁니다.
물론, 철학적으로도 이야기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용 혹은 남용되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수정하면서 나가다간 제풀에 지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주 잠깐 데미님의 글을 살펴보았는데도 논리적 오류는 물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서양근대철학의 주요한 개념들이 마구 섞여져잇습니다)
저는 비록 학부이지만 철학전공자입니다. 자랑하려는게 아니라 원래 전공자의 눈으로 보면 자기 분야를 말하는 사람들의 언명에 헛점이 많이 보이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제가 연구하는 뇌과학분야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합동연구하는 분야로서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신천지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전공이 무엇이든, 철학은 필수라는게 이 동네 사람들의 특이한 점이라면 특이한 점입니다. 일반 공학분야에는 찾아보기 힘들죠. 그리고 여태까지 짧지만 철학을 놓지않고 살아왓다는 점에서도 철학이나 과학의 개념이 여러 담론과 뒤섞여 오용되어지는 것은 논의를 시작함에 있어 굉장히 큰 리스크 내지는 미스가이드를 지니고 시작하는 거라는 점도 익숙할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제안합니다. 만약 논의를 시작하신다면 먼저 틀을 합의해야 합니다.
본 회담전의 예비회담처럼 의제와 방법론에 관해서 먼저 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p.s
사실 오늘부터 하계 상황훈련기간이라 참여가 힘들 것이 예상됩니다. 휴가가 코앞인데 정신이 없군요. 따라서 만약 저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참여에 대해서는 100% 장담은 못드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이 업데이트 되는대로 꼬박꼬박 읽어내려가며 가능한한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 다른 분들이라면 굳이 제가 제안한 내용에 동의를 하지 않으시더라도 여러분들끼리 진행하실 수 있는 것이고, 제가 제안한대로 하셔도 굳이 반대하시지 않는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경독하겠습니다.
2007.05.21 21:43:45
쉬었다가 한다는 것이 그만 섬돌님 글 때문에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칫 지난 번 같은 쳇바퀴를 돌릴 가능성도 있고.
voltaire 님 말씀처럼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전공자의 말이 언휘 선택이나 개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주제를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다이렉트로 정리하겠습니다.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의 출발이 성경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은 믿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믿을 수 없는지 그 분명한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간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연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 각자 어떤 지점에 이르렀는지를 가급적 쉬운 말로 설명하는 방식.
어떨까요?
왜냐하면 내가 파악하기에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갈림길인 듯 싶어서...
그리고 자칫 지난 번 같은 쳇바퀴를 돌릴 가능성도 있고.
voltaire 님 말씀처럼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전공자의 말이 언휘 선택이나 개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주제를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다이렉트로 정리하겠습니다.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의 출발이 성경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은 믿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믿을 수 없는지 그 분명한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간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연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 각자 어떤 지점에 이르렀는지를 가급적 쉬운 말로 설명하는 방식.
어떨까요?
왜냐하면 내가 파악하기에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갈림길인 듯 싶어서...
2007.05.21 23:04:12
여기서 다시 토론을 시작하자는 것은 아니구요.
휴~ 저 지금 기독교 변증론에 관한 책만 몇 개 구해서 지금 책상위에 놓고 읽고 있습니다. 짐 뭐하는 건지 저도 종잡을 수 없네요...
서론만 읽고도...
느끼는 점은, ‘먼저 합리적 이성으로 논증하라. 그러면 믿을 수 있으리라.’라는 말은 애시당초 잘못된 길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네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통한 신 인식과 증명은 -철학적 논증- 잘해야 범신론적인 존재의 가능성만 확인할 뿐이고, 그 조차도 그 일자가 기독교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논증을 통해, 신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겁니다. 사유의 틀이 애시당초 잘못됬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지는 것인데...
어렵네요. 진리로 인도하는 오솔길은 고사하고 접촉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고백뿐이니...
그렇다면, 이성과 신 존재는 그 대칭선에선 결코 접촉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인데, 비대칭 선위에서 만난다고 보여지네요.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시, 부트스트랩핑 포인트로 돌아가서, 모색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인데요.
위에서 데미님이 잘 지적했듯이, -사실 켄 윌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요- 어찌보면 모순된 것 같은 성서의 고백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선의 세계에서는 면의 세계가 이해가 되지 않고, 면의 세계에서는 공간의 세계가 이해되지 않지만, 반대로, 공간의 차원에서는 면의 차원이 이해되고, 선의 차원도 이해되는 것처럼요.
켄 윌버는 이걸 홀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순 또는 이율배반을 전초인지오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고요.
데미님이 즐겨 애용하는 ‘삼각형이면서도 사각형인 것은 원기둥’이라는 설명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면의 차원에서는 삼각형과 사각형인 것은 모순이고 이율배반입니다. 그러나 공간의 차원에서는 그 모순이 해소되죠. 원기둥이라고...
이성으로 어떻게 신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은 사실, 언어유희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면의 차원에서는 공간의 차원이 이해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다시 또 차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인식론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죠.
다시 생각의 프로세스를 리붓해보죠.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론적인 방법으로는 신 이해가 불가능한가?
접촉점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전제로, 드러나지 않은, 모순된, 이율배반적인 설명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 또는 계시로 여길 수 있는 열린 마음만 있다면요.
모순은, 이율배반적인 사건은 드러나지 않은 -더 큰- 합리성이다라는 전제 또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 존재론적인 탐구가 시작되고, 신 이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순되 보이는 성경의 말씀을 성급히 해석하지 말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기에 받아들 일 수 없다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의 차원의 글이다라고 생각하자는 겁니다.
방법론적으로는, 성경의 글을 문자적으로 규범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고, 유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기실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가능성은 바로 성경을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유비의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일의적(univocal)의미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접근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을 네 개의 다리가 달린 털이 많이 나 있는 동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을 정확하게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리하여 자연적인 출산의 과정을 통해 세상 가운데 오신 인간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즉 종교적 또는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위의 어린양이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전혀 다른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유비하는 겁니다.
만일 종교적인 진술이 후자의 범위(즉 인간적인 인식론적인 차원만의)에 속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고 객체 또는 존재가 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반면에. 종교적인 진술이 전자의 범주(즉 종교적인 차원에만)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종교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말했던지 간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행하는 말과 전혀 다르게 되기 때문이죠.
즉, 유비적인 진술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인간적인 아버지와 전적으로 닮은 분도 아니요, 또 전적으로 닮지 않은 분도 아니요, 다만 유사성이라는 면에 참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언어가 진리에 이르는 통로로써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의 빛 또는 선한 목자로 선포하는 것은 다 유비적인 것이구요.
그렇다면 왜 유비적인 것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는, 모든 존재의 신 또는 인간 인식의 시작이 인식론적인 범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애시당초, 신을 찾는 행위가 인식론적 문제의 해결을 얻고자하는데서 시작하지 않은 인간이 있었던가요?
다시 리붓해서 말하면,
이성의 끝에서, 한계에서 비로서 존재론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으로 봅니다.
한계에서 보다 큰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보고요.
보편성은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드러날 것으로 봅니다.
‘신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믿어’야 하는 이유이지요.
일단 켄 윌버의 사상을 좀 검토해보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하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문제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인간이 인식론적인 토대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대하여,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가 바로 접촉점이구요.
인식론적 탐구를 가능하게 친히 육체의 모습으로 신이 오셨네요.
이 성육신 문제도 부인한다면, 더 이상의 토론의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접촉점이기 때문입니다.
휴~ 저 지금 기독교 변증론에 관한 책만 몇 개 구해서 지금 책상위에 놓고 읽고 있습니다. 짐 뭐하는 건지 저도 종잡을 수 없네요...
서론만 읽고도...
느끼는 점은, ‘먼저 합리적 이성으로 논증하라. 그러면 믿을 수 있으리라.’라는 말은 애시당초 잘못된 길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네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통한 신 인식과 증명은 -철학적 논증- 잘해야 범신론적인 존재의 가능성만 확인할 뿐이고, 그 조차도 그 일자가 기독교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논증을 통해, 신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겁니다. 사유의 틀이 애시당초 잘못됬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지는 것인데...
어렵네요. 진리로 인도하는 오솔길은 고사하고 접촉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고백뿐이니...
그렇다면, 이성과 신 존재는 그 대칭선에선 결코 접촉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인데, 비대칭 선위에서 만난다고 보여지네요.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시, 부트스트랩핑 포인트로 돌아가서, 모색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인데요.
위에서 데미님이 잘 지적했듯이, -사실 켄 윌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요- 어찌보면 모순된 것 같은 성서의 고백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선의 세계에서는 면의 세계가 이해가 되지 않고, 면의 세계에서는 공간의 세계가 이해되지 않지만, 반대로, 공간의 차원에서는 면의 차원이 이해되고, 선의 차원도 이해되는 것처럼요.
켄 윌버는 이걸 홀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순 또는 이율배반을 전초인지오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고요.
데미님이 즐겨 애용하는 ‘삼각형이면서도 사각형인 것은 원기둥’이라는 설명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면의 차원에서는 삼각형과 사각형인 것은 모순이고 이율배반입니다. 그러나 공간의 차원에서는 그 모순이 해소되죠. 원기둥이라고...
이성으로 어떻게 신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은 사실, 언어유희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면의 차원에서는 공간의 차원이 이해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다시 또 차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인식론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죠.
다시 생각의 프로세스를 리붓해보죠.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론적인 방법으로는 신 이해가 불가능한가?
접촉점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전제로, 드러나지 않은, 모순된, 이율배반적인 설명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 또는 계시로 여길 수 있는 열린 마음만 있다면요.
모순은, 이율배반적인 사건은 드러나지 않은 -더 큰- 합리성이다라는 전제 또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 존재론적인 탐구가 시작되고, 신 이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순되 보이는 성경의 말씀을 성급히 해석하지 말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기에 받아들 일 수 없다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의 차원의 글이다라고 생각하자는 겁니다.
방법론적으로는, 성경의 글을 문자적으로 규범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고, 유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기실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가능성은 바로 성경을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유비의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일의적(univocal)의미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접근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을 네 개의 다리가 달린 털이 많이 나 있는 동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을 정확하게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인간, 그리하여 자연적인 출산의 과정을 통해 세상 가운데 오신 인간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즉 종교적 또는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위의 어린양이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전혀 다른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유비하는 겁니다.
만일 종교적인 진술이 후자의 범위(즉 인간적인 인식론적인 차원만의)에 속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고 객체 또는 존재가 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반면에. 종교적인 진술이 전자의 범주(즉 종교적인 차원에만)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종교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말했던지 간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행하는 말과 전혀 다르게 되기 때문이죠.
즉, 유비적인 진술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인간적인 아버지와 전적으로 닮은 분도 아니요, 또 전적으로 닮지 않은 분도 아니요, 다만 유사성이라는 면에 참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언어가 진리에 이르는 통로로써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의 빛 또는 선한 목자로 선포하는 것은 다 유비적인 것이구요.
그렇다면 왜 유비적인 것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는, 모든 존재의 신 또는 인간 인식의 시작이 인식론적인 범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애시당초, 신을 찾는 행위가 인식론적 문제의 해결을 얻고자하는데서 시작하지 않은 인간이 있었던가요?
다시 리붓해서 말하면,
이성의 끝에서, 한계에서 비로서 존재론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으로 봅니다.
한계에서 보다 큰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보고요.
보편성은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드러날 것으로 봅니다.
‘신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믿어’야 하는 이유이지요.
일단 켄 윌버의 사상을 좀 검토해보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하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문제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인간이 인식론적인 토대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대하여,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가 바로 접촉점이구요.
인식론적 탐구를 가능하게 친히 육체의 모습으로 신이 오셨네요.
이 성육신 문제도 부인한다면, 더 이상의 토론의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접촉점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이 차원이 달라 결코 조우할 수 없는 것인가와 관련된 난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인문학은 철저히 칸트-비트겐슈타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실천적인 것이 모종의 해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이전...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시공(時空)이라는 인식의 형식을 떠난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voltaire 님과 언어 소통이 잘 안되는 점이 바로 그 점인데, 물론 인식의 형식을 떠난 것은 우리 인식에게는
대상이 안됩니다. 그러나 인식의 형식이라는 법칙을 어긴 것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어려운 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인식할 수 없지만 시간의 한계를 어긴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언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귀인이 동쪽에서 온다는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어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심리적이 아닌 예언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돌님이 차원 이야기를 하셨는데, 예를 들어 2차원이 있고 3차원이 있다고 합시다.
3차원에 있는 어떤 존재가 2차원의 종이 위에 연필로 금을 긋습니다. 그런데 종이 위를 달리던 연필이
잠시 종이를 떠났다가 다시 종위 위에 안착해서 계속 금을 긋는다면 2차원 존재에게는 그어지던 선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2차원에 있어서 어떤 궤적이 사라졌다가 나타난다면 모순입니다.
그런데 3차원에 기반을 둔 이 현상은 모순으로 2차원에 인식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형식이란 규칙을 어긴 현상은 모두 모순으로 나타납니다. 즉 모순으로 인식(!) 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차원을 달리하여 인식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에게 모순으로 인식(!)되는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계속 이야기하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문학적인 연구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문학으로는 당연히 월권을 하는 것입니다.
voltaire 님이 비슷한 예를 들었지만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계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예수님) 그 나무를 저주했더니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면 그건 또다른 기적입니다.
내일 해가 뜰지 안뜰지 아무도 모르지만 경험에 의해 우리는 내일 해가 뜬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 어떤 것을 인식하다가 그것이 어그러지면 망연자실 할 것입니다.
여기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진화론에 대한 Kurt Noll 박사의 글도 내가 보기에는 중대한 오류를 안고
있습니다. 인문학적인 전통에 몸을 내맡기다 보면 그것이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기적을 목도하면 그것 자체의 논리로는 극복할 수 없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즉 인문학은 그 출발점에서 '하나의 가설'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원론이라는...
물론 이것은 시시때때로 용해되어 다른 표현으로 무수히 탈바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