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단언컨데 아무리 성경의 영감설을 주장한다해도
단한가지 이것만은 분명히 영감으로 된것이 아니라 사람이 삽입한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몇장몇절> 곧 장.절로 나누어 놓은것이라 생각합니다.
장절이 뭡니까?
허망한 지식을 뽐낼려는 자들이 자신의 앎을 자랑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직 말씀을 소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까짓 장절까지 외우기를 강요하고 또한 자신의 말과 글을 쓸때
꼭 장절을 붙이는 경우를 볼때 그들은 쓸데 없는 지식은 높은지 몰라도
영적 수준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슴니다..
영적 수준이 높은 사람은 그러한 시시콜콜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의 영감설에 대한 가르침에만 관심을 가질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퀴즈게임에는 장절이 쓰일지 몰라도
하나님앞에서 하나님께 온 정성을 쏟는자에게 그것이 필요함은 전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리란 오직 영혼에 대한 이야기외에는 전혀 해당되는 부분이 없다하면 억지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절을 따지는 사람은 그래도 자신은 지식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자는 무식하다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 모든 지식이 오직 성경을 이해하고 배우고 참고하기 위한 용도외에
쓰고져 하는 사람은 장절을 따지는 사람하고 무엇이 다를까 더불어 생각해 봅니다..
왜냐면 우린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죠....
우린 오직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든 논쟁은
오직 영혼의 소리. 진리(오직 성경)의 소리를 배우고
깨달기 위해 필요하고 그곳에 포커스를 맞춰야 비로써
우리(기독교인)의 대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직도 장절을 외우는 것이 신앙적이라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단한가지 이것만은 분명히 영감으로 된것이 아니라 사람이 삽입한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몇장몇절> 곧 장.절로 나누어 놓은것이라 생각합니다.
장절이 뭡니까?
허망한 지식을 뽐낼려는 자들이 자신의 앎을 자랑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직 말씀을 소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까짓 장절까지 외우기를 강요하고 또한 자신의 말과 글을 쓸때
꼭 장절을 붙이는 경우를 볼때 그들은 쓸데 없는 지식은 높은지 몰라도
영적 수준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슴니다..
영적 수준이 높은 사람은 그러한 시시콜콜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의 영감설에 대한 가르침에만 관심을 가질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퀴즈게임에는 장절이 쓰일지 몰라도
하나님앞에서 하나님께 온 정성을 쏟는자에게 그것이 필요함은 전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리란 오직 영혼에 대한 이야기외에는 전혀 해당되는 부분이 없다하면 억지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절을 따지는 사람은 그래도 자신은 지식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자는 무식하다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 모든 지식이 오직 성경을 이해하고 배우고 참고하기 위한 용도외에
쓰고져 하는 사람은 장절을 따지는 사람하고 무엇이 다를까 더불어 생각해 봅니다..
왜냐면 우린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죠....
우린 오직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든 논쟁은
오직 영혼의 소리. 진리(오직 성경)의 소리를 배우고
깨달기 위해 필요하고 그곳에 포커스를 맞춰야 비로써
우리(기독교인)의 대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직도 장절을 외우는 것이 신앙적이라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2007.06.05 20:02:32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다면 도끼를 살인하는데에 쓴 살인자의 잘못이지, 애초에 도끼를 만든 사람은 잘못이 없죠. 그저 도끼는 나무를 자르기 위해 편리하라고 만든 도구일뿐.
2007.06.05 20:12:35
원래 있는 그대로의 나무가 아름다운데 쓸데 없이 도끼를 만들어 합리성.편리성.유용성을 내세워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를 두고 노자가 말씀하시길
대저 "꾸미지 마라.아름다움도 꾸미지 말고. 선도 꾸미지 마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애당초 도끼를 만들지 말아야 할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합리성.유용성으로 꾸미고 있으니.....
하긴 꾸밈이 이곳 뿐이겠습니까?....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를 두고 노자가 말씀하시길
대저 "꾸미지 마라.아름다움도 꾸미지 말고. 선도 꾸미지 마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애당초 도끼를 만들지 말아야 할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합리성.유용성으로 꾸미고 있으니.....
하긴 꾸밈이 이곳 뿐이겠습니까?....
2007.06.05 21:44:26
순빈한 발상이군요. 우리가 꾸미지않고 살려면 네발로 기어다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겁니다.
이건 볼테르가 "고귀한 야만"을 주창한 루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노자가 말했던 의중은 인간문명 전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니 도끼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죠.
노자 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노자의 메세지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이란 인식 자체도 없애는 경지입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시선이니까요. 노루와 물고기 비유 아시죠?
암튼, 굉장히 초보적인 수준의 해석이시네요.
장, 절을 나눈 사람들은 애초부터 지식의 과시용으로 만든 것이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과 발명의 시초는 실용성에서 시작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더욱 정교화 복잡화되고 의미부여가 가중되는 거죠.
처음엔 내용별로 문단을 단락지어놓아서 읽기 편하도록 하는 것이 소박한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말씀하신 부작용도 속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만든 의도를 비난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위에서 예를 든 도끼의 예가 그러한 뜻인데, 아예 도끼 무용론을 주장하시니 난감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초기 카타콤에서 성서 사본을 비밀리에 읽을 때 촛불이 필요했답니다. 어둠 속에서 남들 눈을 피해 읽으려면 최소한의 광자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성서봉독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중세 까막눈이었던 민중들이 그러한 촛불의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진짜 신비한 힘이 깃든 성물인양 생각했던 것처럼, 즉 그것을 상징 이상의 어떤 신비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즉,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초기에 카타콤에서 전기도 없던 시절에 촛불을 만들어 성서를 읽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어둠 속에서 성서를 읽기 위한 소박한 그러면서도 절박한 실용성의 문제였으니까요.
이건 볼테르가 "고귀한 야만"을 주창한 루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노자가 말했던 의중은 인간문명 전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니 도끼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죠.
노자 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노자의 메세지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이란 인식 자체도 없애는 경지입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시선이니까요. 노루와 물고기 비유 아시죠?
암튼, 굉장히 초보적인 수준의 해석이시네요.
장, 절을 나눈 사람들은 애초부터 지식의 과시용으로 만든 것이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과 발명의 시초는 실용성에서 시작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더욱 정교화 복잡화되고 의미부여가 가중되는 거죠.
처음엔 내용별로 문단을 단락지어놓아서 읽기 편하도록 하는 것이 소박한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말씀하신 부작용도 속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만든 의도를 비난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위에서 예를 든 도끼의 예가 그러한 뜻인데, 아예 도끼 무용론을 주장하시니 난감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초기 카타콤에서 성서 사본을 비밀리에 읽을 때 촛불이 필요했답니다. 어둠 속에서 남들 눈을 피해 읽으려면 최소한의 광자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성서봉독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중세 까막눈이었던 민중들이 그러한 촛불의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진짜 신비한 힘이 깃든 성물인양 생각했던 것처럼, 즉 그것을 상징 이상의 어떤 신비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즉,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초기에 카타콤에서 전기도 없던 시절에 촛불을 만들어 성서를 읽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어둠 속에서 성서를 읽기 위한 소박한 그러면서도 절박한 실용성의 문제였으니까요.
2007.06.06 07:05:35
꾸미지 않기 위해 네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꾸밈의 뜻을 상당히 왜곡하는 경우인것 같습니다
꾸미지 않음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그대로를 뜻함인데 지금 두발로 다니는 것이 무위자연이겠습니까?
다시 억지로 네발로 다니는 것이 무위자연이겠습니까?..
저는 초보적 수준의 해석이고 님께서는 너무 심오한 수준의 해석을 하시니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비유도 그것은 엄연히 성경책밖의 일이요 장절은 분명한 성경책안의 일인데 어찌 비유가 되는지.
곧 촛불은 밖의 일이기에 때와 장소의 규제를 받겠지만 장절은 안의 일이기에 때와 장소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데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한참 옆길로 흘렸습니다.
왜냐면 우린 현재에 살고 있고 미래를 꿈꾸는 살아 있는 자들인데
과거의 이야기를 자꾸할 필요성이 뭐가 있겠습니까?
곧 과거 누가 어떤 이유로 장절을 만들었건. 촛불로 책을 읽었건...
문제는 지금현재 우린 성경책을 보면서 장절을 함께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그 쓸데 없는 장절에 <멈춧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을 알기쉽게 확대해서 표현해보면
"지금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책에 있는 장절을 없앱시다"라는 메세지를 나타낼려고 하는데
자꾸 과거의 이야기로 시간 낭비해야 되겠습니까?
행여나 과거를 무시하지 말자. 현재와 미래의 거울삼자..라는 식으로의 반론은 경청하지 않겠습니다...
옆길로 빠질것이 염려되어서 다시 한번 단독집입적으로 구체화 하면
님의 주장은 장절을 만든사람을 탓할필요없다 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의 주장은 어쩨껀 지금 현재 부작용이 있으니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각차이가 상당히 많다고 봐야겠죠..
말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곧 장절의 불필요성
이에 대한 대답은 예 필요하다. 아님 필요없다.아님 중간이다....등으로 나와야 마땅하거늘 ,,
장절을 만든사람을 탓하지 말자 라고 나오니 그야말로 동문서답 아니겠습니까?
꾸미지 않음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그대로를 뜻함인데 지금 두발로 다니는 것이 무위자연이겠습니까?
다시 억지로 네발로 다니는 것이 무위자연이겠습니까?..
저는 초보적 수준의 해석이고 님께서는 너무 심오한 수준의 해석을 하시니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비유도 그것은 엄연히 성경책밖의 일이요 장절은 분명한 성경책안의 일인데 어찌 비유가 되는지.
곧 촛불은 밖의 일이기에 때와 장소의 규제를 받겠지만 장절은 안의 일이기에 때와 장소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데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한참 옆길로 흘렸습니다.
왜냐면 우린 현재에 살고 있고 미래를 꿈꾸는 살아 있는 자들인데
과거의 이야기를 자꾸할 필요성이 뭐가 있겠습니까?
곧 과거 누가 어떤 이유로 장절을 만들었건. 촛불로 책을 읽었건...
문제는 지금현재 우린 성경책을 보면서 장절을 함께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그 쓸데 없는 장절에 <멈춧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을 알기쉽게 확대해서 표현해보면
"지금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책에 있는 장절을 없앱시다"라는 메세지를 나타낼려고 하는데
자꾸 과거의 이야기로 시간 낭비해야 되겠습니까?
행여나 과거를 무시하지 말자. 현재와 미래의 거울삼자..라는 식으로의 반론은 경청하지 않겠습니다...
옆길로 빠질것이 염려되어서 다시 한번 단독집입적으로 구체화 하면
님의 주장은 장절을 만든사람을 탓할필요없다 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의 주장은 어쩨껀 지금 현재 부작용이 있으니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각차이가 상당히 많다고 봐야겠죠..
말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곧 장절의 불필요성
이에 대한 대답은 예 필요하다. 아님 필요없다.아님 중간이다....등으로 나와야 마땅하거늘 ,,
장절을 만든사람을 탓하지 말자 라고 나오니 그야말로 동문서답 아니겠습니까?
2007.06.06 08:53:36
동문서답이 아니라
장절을 없앨 필요가 없다고 읽혀지는데요?
참고로 댓글을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가만있었지만,
야고보님이 설명한 내요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기에
쉽게 알아듣게 쓰는 것입니다.
장절을 만든 사람을 탓하지 말거나, 부작용이 없다가 아니라
장절을 오용하는 일부의 사람이 있고, 또 부작용이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장절로 구분되어 읽혀지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므로
오히려 유지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다비안들은 댓글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안쓰고 있을겁니다.
(물론 저의 짐작이지만 저도 아직은 의미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장절을 없앨 필요가 없다고 읽혀지는데요?
참고로 댓글을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가만있었지만,
야고보님이 설명한 내요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기에
쉽게 알아듣게 쓰는 것입니다.
장절을 만든 사람을 탓하지 말거나, 부작용이 없다가 아니라
장절을 오용하는 일부의 사람이 있고, 또 부작용이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장절로 구분되어 읽혀지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므로
오히려 유지해야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다비안들은 댓글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안쓰고 있을겁니다.
(물론 저의 짐작이지만 저도 아직은 의미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보신후 반론을 올려 주신다면 감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