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성서를 읽으면서, 특히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예수를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과 유대인들의 ‘야훼’는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한으로 배척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타산지석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조잡한 글을 올려봅니다.
바울은 지금의 터키의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의 뛰어난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본토 출신이 아닌 해외파 출신이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유대의 종교정치계에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싶은 야망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같은 혈통이라고 하지만 재미 교포와 본토 출신의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문화적 풍토의 차이 때문에 상당히 달라지는 것처럼 해외파 바울은 본토인들과는 어쩌면 많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사고는 헬레니즘을 통해서 민족적이거나 국수적이지 않고 세계적이고 전우주적일 수 있는 토대가 이미 보이지 않게 마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본토에 들어와 위대한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면서, 본토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에 관해서는 소문을 들었거나 어쩌면 스스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주류의 길을 가고 있던 바울에게 반대편 대척점에 서있는 “예수”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는 화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천지개벽, 경천동지할 사건과 맞닥드려집니다.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내에서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경위가 두 가지로, 서로 완전히 일치된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엄청난 예수의 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간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아나니아라는 예수의 제자에 의해서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고나서 세례를 받는 줄거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늘은 바울의 민족적 종교적 폐쇄주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실은 무엇이며, 예수를 통해서 만난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은 “야훼”를 자신들의 틀 속에 가두어서 자신들만의 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독점은 자기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신’으로 인해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line) - 율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입니다 - 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선은 넘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선 안에 있는 사람이 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선 밖에 있는 사람이 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똑같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 의인과 죄인, 선민과 이방인, 악성 피부병 걸린 사람과 아닌 사람, 병자와 건강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 (그렇게 갈라서 규제를 가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사회를 유지하는 한 방편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사람’에겐 선이란 것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사회 지배 질서를 문란케 하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
예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잘 것 없어서 무시당하던 ‘죄인’들, ‘병자’들과 천연덕스럽게 어울리고 식탁에서 빵을 먹으면서 당시의 거룩한 종교인들처럼 그들에게 ‘죄인’임을 각인시키거나 값싼 동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액면 그대로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자각시켜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불꽃을 보듬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민족적으로는 반목과 질시로 대해야 할 로마에서 온 이방인들과 그 끄나풀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받을 오해와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응했고 그들조차도 친구로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반목 구도를 허물어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위선적인 종교적 권위와 폭력적인 정치 체제의 거센 물결을 자신의 작은 한 몸으로 막으려고 저항하고 버티어 서 있다가 휩쓸려 죽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힘의 원천이었고,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숨 쉬었으며, 예수를 살려내기까지 한 ‘아버지’ - 바울은 그 당시 통용되던 헬라적 신 개념인 ‘테오스’(하나님)로 표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테오스’의 범주에 가두게 되는 어쩔수 없는 상황을 초래합니다만 - 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예수가 살았던 당시 유대의 ‘야훼’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님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 -또한 온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야훼”("I am that I am")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표현한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명명이 되어버리면서부터 “대상화”(objectified),“개체화”(individualized)되는 과정을 통해 자연히 우상으로 귀결되는 수순을 밟게 되거나, 유대의 민족신으로서 굉장히 편협하고 폐쇄적인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촉매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모든 예언자들의 정수(精髓)로서, 완전히 “하나님”의 본질 속을 꿰뚫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던 이유는, 그 분이 유대민족만이 아닌 바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들의 존재의 근원임을 실제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동떨어진 대상이거나 개체가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또한 예수는 그 것을 자신의 전존재 속에서 가장 뚜렷이 느끼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 예수가 말과 몸으로, 자신의 존재로 보여준 그 하나님의 본질을 뚜렷이 보게 된 것입니다. 어느 것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고, 인간이 만든 어떤 ‘규정’이나 ‘선’이 진리의 본질 - 사랑 -을 훼손할 때엔 거침없이 넘나드는 한없는 자유를 가졌던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본질과 바로 통하는 존재라는 그 깨달음 말입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은 유대주의에서 하나님이 해방되는 자각을 얻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주의에서 해방됩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분입니다. 로마서 초반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율법을 가진자나 율법을 가지지 않은 자,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상관없이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만물 속에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 보인 원초적인 분입니다. 단지 율법을 가지고 안가진 것은, 의식적으로 ‘자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점만 있을 뿐 인간은 다 똑같다는 성서의 말씀이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두 사람이 사과를 먹을 때 한 사람은 ‘사과’ 라는 이름을 알고 지식을 가지고 의식하고 먹느냐,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고 먹느냐의 차이일 뿐 그 맛은 똑같은 그런 이치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런 원초적인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당하고, 살기(殺氣)어린 죽음의 위협을 받습니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저는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옛날의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말이 너무 앞서는 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관념의 우상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또한 한없이 열려있고, 또한 절대의 자유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했던 예수는 이상하게도 현재 성경 구절들 묶음과 함께 폐쇄회로(closed-circuit)화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로체계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봅니다. ‘예수 구원의 배타성’도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가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예수 구원의 ‘질’적인 배타성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의 존재론적인 패턴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일반인들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더 분파주의적이고, 더 권위적이며 경직된 사고 패턴, 삶의 모습들... 이 이야기는 거꾸로 말하면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실재하시는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유대주의에서 해방되셨듯이, 기독교라는 ‘새장’에서 똑같이 해방될 때 진짜 하나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기독교를 해체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도 성서에서 율법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화두를 한 번 던져 봅니다.
바울은 지금의 터키의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의 뛰어난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본토 출신이 아닌 해외파 출신이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유대의 종교정치계에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싶은 야망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같은 혈통이라고 하지만 재미 교포와 본토 출신의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문화적 풍토의 차이 때문에 상당히 달라지는 것처럼 해외파 바울은 본토인들과는 어쩌면 많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사고는 헬레니즘을 통해서 민족적이거나 국수적이지 않고 세계적이고 전우주적일 수 있는 토대가 이미 보이지 않게 마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본토에 들어와 위대한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면서, 본토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에 관해서는 소문을 들었거나 어쩌면 스스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주류의 길을 가고 있던 바울에게 반대편 대척점에 서있는 “예수”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는 화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천지개벽, 경천동지할 사건과 맞닥드려집니다.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내에서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경위가 두 가지로, 서로 완전히 일치된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엄청난 예수의 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간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아나니아라는 예수의 제자에 의해서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고나서 세례를 받는 줄거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늘은 바울의 민족적 종교적 폐쇄주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실은 무엇이며, 예수를 통해서 만난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은 “야훼”를 자신들의 틀 속에 가두어서 자신들만의 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독점은 자기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신’으로 인해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line) - 율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입니다 - 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선은 넘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선 안에 있는 사람이 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선 밖에 있는 사람이 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똑같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 의인과 죄인, 선민과 이방인, 악성 피부병 걸린 사람과 아닌 사람, 병자와 건강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 (그렇게 갈라서 규제를 가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사회를 유지하는 한 방편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사람’에겐 선이란 것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사회 지배 질서를 문란케 하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
예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잘 것 없어서 무시당하던 ‘죄인’들, ‘병자’들과 천연덕스럽게 어울리고 식탁에서 빵을 먹으면서 당시의 거룩한 종교인들처럼 그들에게 ‘죄인’임을 각인시키거나 값싼 동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액면 그대로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자각시켜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불꽃을 보듬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민족적으로는 반목과 질시로 대해야 할 로마에서 온 이방인들과 그 끄나풀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받을 오해와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응했고 그들조차도 친구로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반목 구도를 허물어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위선적인 종교적 권위와 폭력적인 정치 체제의 거센 물결을 자신의 작은 한 몸으로 막으려고 저항하고 버티어 서 있다가 휩쓸려 죽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힘의 원천이었고,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숨 쉬었으며, 예수를 살려내기까지 한 ‘아버지’ - 바울은 그 당시 통용되던 헬라적 신 개념인 ‘테오스’(하나님)로 표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테오스’의 범주에 가두게 되는 어쩔수 없는 상황을 초래합니다만 - 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예수가 살았던 당시 유대의 ‘야훼’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님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 -또한 온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야훼”("I am that I am")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표현한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명명이 되어버리면서부터 “대상화”(objectified),“개체화”(individualized)되는 과정을 통해 자연히 우상으로 귀결되는 수순을 밟게 되거나, 유대의 민족신으로서 굉장히 편협하고 폐쇄적인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촉매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모든 예언자들의 정수(精髓)로서, 완전히 “하나님”의 본질 속을 꿰뚫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던 이유는, 그 분이 유대민족만이 아닌 바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들의 존재의 근원임을 실제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동떨어진 대상이거나 개체가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또한 예수는 그 것을 자신의 전존재 속에서 가장 뚜렷이 느끼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 예수가 말과 몸으로, 자신의 존재로 보여준 그 하나님의 본질을 뚜렷이 보게 된 것입니다. 어느 것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고, 인간이 만든 어떤 ‘규정’이나 ‘선’이 진리의 본질 - 사랑 -을 훼손할 때엔 거침없이 넘나드는 한없는 자유를 가졌던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본질과 바로 통하는 존재라는 그 깨달음 말입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은 유대주의에서 하나님이 해방되는 자각을 얻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주의에서 해방됩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분입니다. 로마서 초반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율법을 가진자나 율법을 가지지 않은 자,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상관없이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만물 속에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 보인 원초적인 분입니다. 단지 율법을 가지고 안가진 것은, 의식적으로 ‘자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점만 있을 뿐 인간은 다 똑같다는 성서의 말씀이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두 사람이 사과를 먹을 때 한 사람은 ‘사과’ 라는 이름을 알고 지식을 가지고 의식하고 먹느냐,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고 먹느냐의 차이일 뿐 그 맛은 똑같은 그런 이치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런 원초적인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당하고, 살기(殺氣)어린 죽음의 위협을 받습니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저는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옛날의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말이 너무 앞서는 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관념의 우상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또한 한없이 열려있고, 또한 절대의 자유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했던 예수는 이상하게도 현재 성경 구절들 묶음과 함께 폐쇄회로(closed-circuit)화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로체계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봅니다. ‘예수 구원의 배타성’도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가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예수 구원의 ‘질’적인 배타성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의 존재론적인 패턴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일반인들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더 분파주의적이고, 더 권위적이며 경직된 사고 패턴, 삶의 모습들... 이 이야기는 거꾸로 말하면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실재하시는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유대주의에서 해방되셨듯이, 기독교라는 ‘새장’에서 똑같이 해방될 때 진짜 하나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기독교를 해체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도 성서에서 율법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화두를 한 번 던져 봅니다.
2007.08.17 08:17:16
'구원'에 관한한 예수와 바울은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기독교(예수,바울)의 사랑, 용서, 화해같은 독특한 속성들은 배타적 '구원'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요.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신앙고백을 '절대 사랑'이라던가 기타 윤리적 속성으로 환치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2007.08.17 11:21:58
논점의 차이를 확실히 드러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눈엔 예전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 지금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가진 태도가 상당히 유사하게 보입니다.
또한 바울의 예수 체험, 하나님 체험은 축 자체가 이동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제 역량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또한 바울의 예수 체험, 하나님 체험은 축 자체가 이동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제 역량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2007.08.17 23:36:41
첫날처럼 님,
신학 에세이를 작성하시느라 수고했습니다.
학점을 매겨볼까요? ㅎㅎ
예수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하셨군요.
좋은 착상이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비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 것입니다.
남이 시도했다고 해서 무조건 진부하다는 게 아닙니다.
내용이 새로우면 형식이 진부해서 괜찮겠지요.
예수 당시의 유대교와 오늘의 기독교가
폐쇄적인 종교 체제 안에 갇혔다고 보시는군요.
그런 부분이 많겠지요.
그런 건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구요,
인간의 모든 문화도 그런 방어기재가 작용할 겁니다.
첫날처럼 님의 위 아티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대목은
예수의 하나님 이해와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교이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강조하셨네요.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그렇게 단선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모두 할 수는 없겠네요.
나도 말하려면 책을 들어야보아야 하구요.
어쨌든지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는 독창적인 게 아니라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답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교의 아들이지요.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수도승이요, 사제요, 교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등등 처럼
나사렛 파로 남을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위에서 첫날처럼 님이 거론한 바울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꾸 말이 많아지는군요.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 당시의 유대교처럼
자기 독선에 빠지면 안 된다는 첫날처럼 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배타적 구원론에 함몰되면 안 된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나의 아내가 소중하면 남의 아내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자기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종교를 뒤섞어놓아도 좋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멸시하는 한
그는 창조자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타종교에서 구원이 있는가, 하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한국교회가 벗어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감사.
수고.
아자!
신학 에세이를 작성하시느라 수고했습니다.
학점을 매겨볼까요? ㅎㅎ
예수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하셨군요.
좋은 착상이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비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 것입니다.
남이 시도했다고 해서 무조건 진부하다는 게 아닙니다.
내용이 새로우면 형식이 진부해서 괜찮겠지요.
예수 당시의 유대교와 오늘의 기독교가
폐쇄적인 종교 체제 안에 갇혔다고 보시는군요.
그런 부분이 많겠지요.
그런 건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구요,
인간의 모든 문화도 그런 방어기재가 작용할 겁니다.
첫날처럼 님의 위 아티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대목은
예수의 하나님 이해와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교이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강조하셨네요.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그렇게 단선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모두 할 수는 없겠네요.
나도 말하려면 책을 들어야보아야 하구요.
어쨌든지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는 독창적인 게 아니라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답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교의 아들이지요.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수도승이요, 사제요, 교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등등 처럼
나사렛 파로 남을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위에서 첫날처럼 님이 거론한 바울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꾸 말이 많아지는군요.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 당시의 유대교처럼
자기 독선에 빠지면 안 된다는 첫날처럼 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배타적 구원론에 함몰되면 안 된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나의 아내가 소중하면 남의 아내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자기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종교를 뒤섞어놓아도 좋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멸시하는 한
그는 창조자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타종교에서 구원이 있는가, 하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한국교회가 벗어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감사.
수고.
아자!
2007.08.18 00:23:40
제가 너무 단편적으로만 보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글을 쓰다 보니 사실 관계에 있어서 오류도 있었구요 ㅋㅋ...
목사님 말씀 마따나 그 당시 유대교는 종교이면서도 또한 삶의 양식, 문화에 가까워서 예수님이든, 바울이든 유대교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었다고 보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단지 예수님과 바울은 유대교라는 색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근원적인 존재자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어떤 경우엔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데 걸거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서요.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구요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는 말씀도 완전히 공감합니다. 구약 속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충분하게 계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울은 성서 -구약- 을 통해서 읽어냈으니깐요. 구약도 하나의 완전한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그가 베푸시는 구원을 맛본다는 것은 율법이나 종교라는 '틀'을 넘어 서서 액면 그대로의 궁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 도 하나의 율법적 체계 되어있는 현실은 어쩌면 예수 구원의 본질을 흐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심과 애정으로 댓글 달아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
목사님 말씀 마따나 그 당시 유대교는 종교이면서도 또한 삶의 양식, 문화에 가까워서 예수님이든, 바울이든 유대교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었다고 보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단지 예수님과 바울은 유대교라는 색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근원적인 존재자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어떤 경우엔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데 걸거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서요.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구요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는 말씀도 완전히 공감합니다. 구약 속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충분하게 계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울은 성서 -구약- 을 통해서 읽어냈으니깐요. 구약도 하나의 완전한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그가 베푸시는 구원을 맛본다는 것은 율법이나 종교라는 '틀'을 넘어 서서 액면 그대로의 궁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 도 하나의 율법적 체계 되어있는 현실은 어쩌면 예수 구원의 본질을 흐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심과 애정으로 댓글 달아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