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의 옳바른 삶은 중요합니다.
그의 인격도 중요합니다. 그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서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한번 곰곰히 살펴볼까요?
과연 그럴까요?

만일 그렇다면,
한나라의 총리나 대통령이 예수를 엄청 잘믿는사람이면
그 나라는 벌써 예수믿는 나라가 되었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있나요?

그리고,
위에서 말한 그러한 인격을 갗춘 사람이 있나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중요합니다. 그걸 모르거나 부인할 사람 없겠죠.
백번 옳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안되니까 어렵지요.
이것은 ‘구원’이라는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구원은 “무 조건” 적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생각이 인정되지 않죠.

한가지 성경의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때죠. 좌우편에 강도 두사람이
함께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어느쪽 인지는 모릅니다. 중요하지도 않지만)
한쪽 강도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예수를 저주하고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한편 강도는 똑같은 그 상황에서
“예수” 이름을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을 따라가볼까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욕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나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도 같은 벌을 받았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강도는 비난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그가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비난한 그 강도가 훨씬
현실을 똑바로 본겁니다.
그의 눈에는 예수역시 자기와 똑같은
죄인일 뿐 구원자나 메시아는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른 강도 보실까요?
그의눈에 뭐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지요.
지금 이상황에서 예수를 위한답시고
좋은말 한들 바뀌어질게 없지요.

그러나 다른 강도는 결코 예수를
비호하려고 그런것은 아닙니다.
그의 심령에 떨림을 느꼈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뭔가를 바란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인됨을 비로소 확인한거죠.
예수를 보면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아무리 포악한 강도라도
예수의 소문은 들었겠죠.
예수께서 불의한 일을 하지않았다는거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죽이라고
선동하는 그들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양심의 소리를
막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세상은
예수를 욕하지 않지만 거절합니다.
적당한 핑계를 절묘하게 들이댑니다.
기독교는 편협하다.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
예수믿는 사람 인격이 별루다. 안믿는 나보다
더 한심하다는식으로...

맞아요. 틀리지 않아요.

한편 강도는
그렇지만 예수를 바로 보고 자신의
추악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명에가까운
절규를 합니다.

“예수님,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안했지요.
주님을 믿는다고도 물론 안했지요.
그런데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라는 고백입니다.
당연하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신다는것을
고백한겁니다.

나는 그곳에 갈수 없지만,
주님은 가실겁니다 그때 다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이부분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날것을 꾹 참습니다.
그 강도가 바로 접니다.
구원이요?

다만 주께서 강도같은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두 강도의 삶이
얼마나 다를까요?
오십보 백보아닐까요?
그들의 지나온 삶이 얼마나 정직하고 개끗하였을까요?
언제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을 드러내놓은적 있을까요?
어쩌다 한두번은 그럴수도 있겠지요.
반성도 했겠지요.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지...어쩌다가요.

우리모두는 다 이런 강도와같은 존재아닙니까?

그러나
지금이 중요합니다.
어제까지 강도짓만 죽어라 했을망정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한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또다른 한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하시는
바로 그모습이야말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의 감추어진
전도 아닐까요?

세상에서 비참하게 내동댕이 처지고 괄세받고
욕을먹는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전도요 복음이요 구원이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고백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아직 구원이 이루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구원 선포가 주어졌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삶이나 인격이나 행위는
전혀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 적이고“일방” 적인 “하나님의 주권”일 뿐입니다.

분명하게도 성경은
구원얻은 자와 얻지못한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택자와 불택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말이 듣기 싫으신가요?
구원과 그렇지 않음의 중심에“예수” 가 존재합니다.

꼭 예수 믿어야만 구원 받는가? 라는 논의는 더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저의 일방적인 견해로는요)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예수믿는 조건인가? 라고 반문하신다면
“노” 라고 말하겠습니다.
구원은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일뿐입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올자가 없고
예수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감춰두셨고
그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건입니다.
구원이 조건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라해도 크게 문제될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가 절대로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공평하다는 겁니다. 불리하거나 유리하거나
억울할게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편에서
“예수 믿어”야 구원을 해주겠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항의하실건가요? 따지시게요?
많이 따지십시오.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와 신적 작정과 예정과 구원하심을
결단코 포기하시지 않으실 거니까요.

공산정권하에서
최고 통수권자에게“부당”하다고 따진들
소용없듯이
만일,
이 세상에서 모두가(나도 포함) 구원에서
비껴간다해도 방법이 없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하신 존재라 한다해도
어쩌실 건데요?
그래서 나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구요?
얼마든지 싫어하십시오.
얼마든지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이러이러한 하나님일 것이다
혹은 이런 하나님만 믿겠다라는 그런 하나님을

즉.
여러분 마음에 꼭 드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스스로 만들어서 잘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누가 뭐라 그럽니까?

이야기가 험악하지요?
제가 무식해서 요따우로 밖에는 표현을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지금 다시 하자는 예기가
아닙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세상에 많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단다.
예수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단다.
좀 점잖게 믿으면 어디가 덨나냐?

좋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구원”이 없습니다.
복음은 “회개” 와 “천국”과 “예수” 가 있습니다.

복된 주일 지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