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한국은 종교적으로 심히 오염된 상태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마치 한국이 기독교 국가라도 된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아직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전체 국민 중 30퍼센트를 못 넘긴 기독교인 비율 면에서도 그렇고(과거 유럽 최고 90%육박), 더욱이 사회 풍조 면에서 그렇다.
------------------------------------------------------------------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전북으로서 26.4%,가장 낮은 지역 은 제주로서 8.4%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통계청이 지난 19일 발표한 「인구센서스」에 의해 밝혀졌다. 통계청의 「인구센서스」는 지난 95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조사한 것으로 이는 한국의 종교인분포를 객관적으로 집계한 최근통계다. 시도별 복음화율을 보면 전북이 26.4%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서울(26.2%) ,인천(25.8%),경기(23.7%)순이다.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제주도로서 도민의 8.4%에 불과했다.경남이 9.1%,부산이 11.1%,대구가 11.6%로서 이 지 역은 인구 10명중 1명만이 기독교 신자인 것으로 집계됐다.이 지역의 복음 화율이 낮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타종교의 영향력이 높아서 기독교의 전파가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한국 땅에는 아직도 우상 “드라빔”이 지천에 깔려 있으며,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것들과 천연덕스럽게 동거해 왔는바, 기독교계 혹은 일부 기독교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용인하고 심지어 이제는 그것들과 아예 벗하려 들고 있다. 교회가 절간의 중을 초빙하기도 하고, 기독교도 대표인 목사가 이제 발 벗고 나서서 중들과 교통하고 함께 연합하려들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 선생 예수께서 언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이 있었는가.
할 짓이 없고 심심해서 이제는 교회와 절간이 교환예배라도 드릴 작정인가?
<드라빔을 땅에 묻어 폐기한 야곱>
야곱이 오랜 타지생활을 끝내고 고향 벧엘로 돌아가기 위해서 두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외삼촌 집을 빠져나온 후 대천지 원수진 형 에서와 담판한 다음에 세겜에 정착하려고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자리를 잡아갈 그 무렵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밖으로 사람 구경을 나갔다가 그 땅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 사건이 결국 부족 간 전쟁으로 비화되는 큰 화가 닥쳐오고 있음이 야곱 눈앞에 보였다. 이에 (창세기 35장)“야곱이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드라빔)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한국사회 버젓이 살아있는 “드라빔”들 ;
역법에서 나온 “8괘”로 그려낸 국기,
상하가 적색 / 청색 둘로 쪼개진 그것의 태극문양은 남북분단의 예단,
혹은 바램이었나 아니면 그러한 상징인가?
“띠” (나이 ; 열두 지지(地支)의 상징)
“손 없는 날”의 개념
궁합개념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기,
점보기
부적 붙이기
명태 실로 묶어서 걸어놓기(이게 뭣인지?)
장승, 솟대
단군숭배사상
골짜기, 산등성이, 골목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절간, 암자들과 그곳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한 불교의 소리들
한국의 국보, 보물, 사적이라는 것들은 거개가 다 불교유물이다.
(비근한 예로, 불탄 낙산사를 국고를 축내서 재건해준 것으로 안다)
얼마전까지 전국의 유명 산 등 국립공원 입장료의 대부분이 문화재 비용 명목으로
절간으로 흘러들어갔었다. 우리는 그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해온 교회를 보아 왔다.
이 땅 형편이 이런데도 지금 교계 지도자들 그리고 대형교회들은, '이제는 다 이루었도다' 라는 식이다.
----------------------------------------------------------------------------------------
음악첨부
프란츠 리스트(헝가리, 1811~1886), 헝가리안 랩소디 1~5번
음악접속 : http://kr.blog.yahoo.com/hanon8503/11810
변화의 패턴을 담고 있는 철학서이지요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해석의 오류일뿐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지는 문자주의의 폐단과도 유사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주역의 계사부분은 우주론에 관한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님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사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대한민국이 기독교 유일주의 국가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다양성을(다원주의가 아니라) 인정하는게 옳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꼭지글의 내용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
무조건적인 다원주의는 영성의 심화는 물론 종교간의 대화의 차원에서도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지난 대광고 사태의 조연격인 류상태 목사가 불교와 기독교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절에 가서 108배를 올리며 주일예배를 거행한 일은 아예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경거망동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급하신 '한국사회의 드라빔들'을 무조건 없애자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택하기보다는,
왜 그런 '드라빔들'이 생겼는지, 그런 종교적 표상들 너머의 영적인 리얼리티를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사회과학적, 종교학적, 철학적 검토를 비롯해 한국 민속 종교와의 진리논쟁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럴 때 기독교 영성도 토착적인 풍요로움을 얻고, 구원론적으로 드넓은 지평을 확보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종교학적 문제는, 다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라기보다는
타종교(특히 불교)와의 깊은 진리논쟁을 전개할만한 신학적 영성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배타적인 구원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종말론적 영성으로 승화되어야 할 기독교 배타주의가
겨우 교회성장학적 자폐증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이라고 봅니다.
' 말종 행동' 입니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지만) 윗 글에서 쓴 것처럼
저는 이미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을 얼마 전부터 예측했기 때문에 그런
말에 놀라 나자빠질 일도 없어요.
좀더 두고 봅시다. 아마도 국내 기독교계에 가관인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뭐지 않아서 이게 무슨 종교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현상이 생기게 될 것이며,
우리의 기독교가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에요. 벌써 그게 생겼네요.
"절대 유일한 하나님의 신적 구원을 변증하는 영성으로 승화되어야만 할
기독교의 배타적 특성이 고작 교회 성장학적 자폐증으로 전락해버린 상황"
훌륭한 지적이십니다.
여러 종교 속의 기독교적인 위상을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저는 언급하신 한국사회의 민속 종교 유산들을, 구약성서의 드라빔 표상과 동일하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대로 그건 고대인들의 유일신론적 세계관일 뿐이지, 시대를 초월한 절대사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절에 가서 108배를 올린 류 목사의 행위가 '우상숭배니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배타주의든지 다원주의든지간에, 영적인 리얼리티를 치열하게 파고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세계 속에 계신 하나님'에서 "하나님 나라의 공적 신학 정립을 위해 다원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대표적인 에큐메니컬 신학자로서 신학을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생명을 위한 변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부분적으로 그와 같은 생각 안에서 보수적인 뉘앙스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종교 속의 기독교적인 위상"은, 적어도 여기서는 제가 표현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만님께서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저런 '우상'들을 치워내야 한다"는 뜻으로 글을 쓰신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 그러한 지향성은 기독교의 고유한 영성이라기보다는 근본주의적 취향(taste)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한물간 문제에 글이 좀 길지만 제 생각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썼습니다. 논쟁은 사양합니다.
제 성향은 근본주의이고(그런 성향이 좋던 나쁘던 그걸 차치하고 말입니다),
또한 일종의 성서주의입니다. 성서를 깊이 모르면서도 뜻은 그래요.
신앙문제 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한 취향과 견해에 있어서도 근본주의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여러 글로 표현되어 짐작하셨겠지만, "신앙적 혹은 성서적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방황을 하고 있지요.
그러나 주님 하신 말씀 중에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분쟁케 하려 함이다"라는 말씀을 상기하며, 이러한 갈등과 방황 조차도 내
몫의 십자가일거라고 믿고 삽니다.
세상은 각본(drama)이 아니라 리얼리티(reality)이기 때문에,
민족마다, 인간의 계획을 넘어 역동적으로 신비롭게 운행하는 우연성을 종교 표상들로 표현했는데,
그 표상들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이 어떤 삶의 양상을 지시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작업이 성서 읽기와 종교간의 대화에서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수학을 공부하면서 계산방식에 묶이기보다 논리적 리얼리티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악령의 리얼리티든 성령의 리얼리티든간에 심층적인 심상(心像)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지요.
정 목사님께서 자주 강조하시는 말씀인데, 제 나름대로 정리해봤습니다. 안 맞는 답변이라면 죄송합니다.
종종 타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행동이 이슈가 되기도 하지요.
올라온 글, 그리고 댓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대놓고 극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뿐이지
속마음은 어찌보면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우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한 어울림, 화합은 절대로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신앙을 멋지게 표현한다한들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독교(혹은 그 풍습)안에 "우상"이 얼마나 많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보이는 우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론적으로는 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우상이랍니다.
가장 쉬운 예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우상이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우리에게도 사랑스러운 자녀, 빛나는 학벌, 넉넉한 재산, 자랑할 만한 집과 자동차,
내가 신봉하는 사상, 내가 애쓰는 세상의 단체활동, 내가 즐기는 음악이나 취미 등등등등...
어떤 서양인이 쓴 <기독교의 우상> 이라는 책도 있어요.
한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만한 책이지요.
오래 전에 그 책 내용에 많은 공감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우상"에 관해서 사고하고 평소 기독교적으로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필독서가 될 수도 있겠어요. 지금 저자 이름이 생각나네요.
아마, 제람 바즈 인가 그럴 겁니다.
말씀드리고자 했던 요지는,
우상은 그 개념의 폭이 기독교 밖에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그말씀입니다.
즉, 단지 배타적인 시각에 기인한 속 좁은 견해가 표출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즉 우상숭배)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걸 통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쯔빙글리 교파가 교회 내에서 파이프 오르간과 모든 화려한 집기, 장식품들을 모두
철거했던 그러한 일에 대해서도 "종교적 이념에 의한 현상"으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우상타파" 행동이었던 것이지요.
쉽게 이해하시는 것처럼 "우상문제"가 결코 배타적인 태도에서 기인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일부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어요)
이스라엘에서 나온 경전(성경)이나 종교적 형태만을 유일신앙의 모든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유대민족을 제외한 우리민족이나 다른 민족 - 민족국가 형성 이전까지의 의미로서 민족 - 에게는 유일신이나 유일신앙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않되니까요.
우리 민족이 믿던 유일신 - 천지신명 등으로 언표되는 - 과 유대인이 믿던 야훼신은 다른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다른 신이라면 진짜로 유대민족만이 선민일까요?
오히려 우리민족을 포함해서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이 믿었던 유일신에 대한 모습을 찾는 것이 유일신앙의 사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간의 교류는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에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듯이, 불교나 다른 종교도 여러 사람들이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