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씨의 사태와 관련하여 볼테르가 했다는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언론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많이 인용되는 명구이다.

 

 

"나는 당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당신이 말할 권리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your right to say it.)

 

 

아마 이런 상황에서 매우 적절해 보이는 말처럼 보인다.

물론 프랑스에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볼테르의 말이라고 하니 더욱 이 말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볼테르가 한 말이 아니다.

적절하다고 해도 볼테르의 권위를 빌어 올수는 없다.

이 말의 배경에는 엘베시우스의 <정신론>이 있다.

이 책은 정부와 교회의 탄압을 받고 불태워졌다.

하지만 이 <정신론>은 볼테르나 루소 등 유명한 사상가들의 책을 짜깁기 한 책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볼테르는 엘베시우스에 대해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볼테르는 단순히 탄압을 받는다고 유명한 사상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조차 도매금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상의 자유를 위해 입장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런 볼테르의 애매한 입장을 에벌린 홀 이라는 영국의 작가가 <볼테르와 친구들>이라는 볼테르의 전기에 그의 입장을 반영해서 쓴 글이다.

더하여 중요한 것은 이 글의 문맥상 엘베시우스에 대한 못마땅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글을 이석기 씨에 대해 인용할 때는 당연히 사상의 자유와 함께 그들에 대한 '못마땅함'도 함께 전달되어야만 한다.

 

 

'못마땅함'은 그들이 북한을 추종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의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에게 금지된 것에 대한 환상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욕망하는 것을 금지한다.

금지에 의해서 권력은 유지하고 있으며 존재의 이유가 획득된다.

하지만 욕망은 법이 금지한 대상 때문에 부단히 활성화 된다.

금지된 대상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만들어 낸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금지가 생겨나자 이웃의 아내는 그때까지 몰랐던 쾌락을 감춘 대상, 접근할 수 없는 신비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치명적인 욕망을 주체 속에 불러일으킨다.

 

 

금지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 자체에서 쾌락을 찾는 위반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위반의 쾌락은 철저하게 금지의 법에 의존한다.

그동안 북한은 가장 강력한 금지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위반은 가장 강력한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의 근거가 된다.

아마도 80년대 이후 소위'주사파'라는 정치적 흐름이 득세하고 다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가장 강력한 쾌락'

정치적 측면에서 이들의 신앙의 근거를 찾기 힘들지만 이유를 정신분석학에서 찾아낸다면 이들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근거는 금지에 있다.

그러기에 금지의 주체인 국가와 국정원이 또한 이들을 탄생시킨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위반은 지배질서와 법질서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깊게 생각해 봐야만 한다.

해방을 어렵게 하는 것은 반동적인 탄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국정원의 억압성이 그런 위반의 존재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반은 역설적이게도 법과 국가기구의 억압성에 의존한다.

투쟁의 강도와 백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법적 금지의 강화가 이루어지며 위반의 욕망은 자신이 부정하는 법과 기구에 기생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국가의 기구와 법은 부정되지 않고 긍정된다.

국가기구와 법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하여 위반을 필요로 한다.

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금지된 대상은 주체에게 감당할 수 없는 환상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무한한 욕망을 생산하는 금지된 대상으로 주체의 환상 속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적인 과잉평가의 결과이다.

금지된 북한에 대한 신앙은 상상적인 과잉평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북한은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 이후 사회적 현실의 안으로부터 투사된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분단의 문제는 오래된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근대의 탄생과 더불어 생겨난 근대민족국가의 결여와 부재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전통처럼 착각하고 있는 스코트랜드 스커트, 아프리카 국가들의 건국 신화처럼 온전한 민족적 영토국가를 이루지 못한 근대 국가적 아쉬움과 결여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온 것의 상실로 착각되고 있으며 이런 착각은 상실 이전의 충만한 상태를 전제하고 되찾아야 할 대상이 된다.

오래된 한반도의 시간을 놓고 볼 때 분단의 상태, 혹은 통일의 상태 중 어떤 것이 '비정상'인지는 매우 모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진영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유지되어 온 것은 결여가 전도된 '상실'에 근거한다.

과거의 보다 아름답고 완벽한 시간의 복원.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 단일한 민족.

그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환상일 뿐이다.

 

 

욕망과 금지의 선차성을 논하기 애매하지만 금지가 금지된 대상에 대한 욕망을 낳는 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욕망은 더 강력하거나 다른 금지로 막을 수 없는 것들이다.

통합되지 못한 반쪽 민족에 대한 원한, 영토의 분단에 따른 혐오는 근대로부터 출발하는 근대적 동일화의 실패로 부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는 우리 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끊임없이 근대국가 혹은 민족에 대한 신앙을 생산하고 있는 것들이다.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주변에는 국가와 그것의 기관, 그리고 금지된 법에 근거해 존재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