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와도 같은 멍텅구리 인생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하루살이와 배짱이. 둘은 첫눈에 반해 깊은 사랑에 빠졌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베짱이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 루살이님.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우리 내일 여기서 또 만나요.”

하루살이는 선뜻 그러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돌아서서 생각하니 ‘내일’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루살이의 번뇌가 시작되었다. 하루살이는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제일 똑똑하다는 박사급 하루살이들도 ‘내일’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내일’이 뭔지 몰라 사랑하는 베짱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다니! 슬픔에 빠진 하루살이는 그만 밤길을 밝히고 있던 가로등불 속으로 몸을 던지며 절규했다. “아! ‘내일’, 도대체 내일이 뭐란 말인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다른 하루살이들이 등불 앞에 모여 들었다. “우리가 ‘내일’이 뭔지 알아내어 그의 한을 풀어줍시다.”

하루살이들은 “내일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연구도 하고, 세미나도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답을 알 수는 없었다. “참으로 바보로다. ‘내일’도 모르면서 살아 무엇 한단 말인가.” 그들은 한탄을 하며 먼저 죽은 하루살이를 따라 하나 둘 등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침이면 가로등 아래 허옇게 떨어져 있는 하루살이들. 그건 회의 하다 삶에 회의를 느낀 하루살이들이 등불 속으로 계속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벌레로 3년을 살아야만 겨우 하루를 날 수 있다는 하루살이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 대를 이어 살아온 생명체 중 하나이다. 긴 기다림에 비해 너무도 짧은 생을 살기에 우리는 삶이 허망하다 싶을 때면 하루살이 인생 같다고 말하곤 한다.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허무도 알고 보면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성을 깨치고 살아가는 삶에선 오늘이 그냥 내일이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는 것이 순리이다. 하루살이에겐 하루가 십년이고 백년이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그대로의 삶이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로 3년을 기어다니며 살다가, 오직 하루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다 죽는 하루살이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인간으로 치면 일평생이다. 그러므로 하루살이의 내일이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 이후를 의미할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같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종교는 삶과 죽음,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의문, 내일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을 다룬다. 불교인들은 ‘하루살이에게 애벌레의 전생이 있듯 인간도 윤회의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모든 중생은 죽고 또 다른 세계에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끝없는 윤회를 계속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 영혼도 함께 생긴다’고 생각한다. 영혼은 생이 지속되는 동안 몸속에서 살다가 몸이 죽으면 하나님이 데려가, 거듭난 영혼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고 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서 고통 받게 한다고 믿고 있다.

종교가 없는 타고난 자연인들은 “골치 아프다, 그런 거 생각하기 싫다,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몸 건강하게 걱정 없이 살고, 가능하면 남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얻고 더 많은 재물을 얻고 자식이 잘 된다면 그것이 최고의 인생 아닌가.”라고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산다.

그런 사람들도 누구나 죽음 앞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인생이 허망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하고 여자가 많고 권세가 있던 솔로몬왕이 말년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자조적인 말을 하였다. ‘헛되다’란 공허하다란 뜻이니 어떤 인생도 그가 어떤 사람을 살았든지 간에 공허하기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천국으로, 부처님이 극락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라할지라도 그가 죽을 때에 편안히 눈 감는다고 해도, 깨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확연히 깨닫지 못한 다음에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다한 궁금함이 조금이라도 없을 수 있을까?

깨친 삶에서는 삶과 죽음이 달리 있음이 아님을 안다. 오늘이 그냥 내일이다. 마음을 완전하게 닦은 삶에서는 죽어서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윤회도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 달리 있음이 아니므로 거기 갈 일도 없다. 그냥 이대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사는 지상의 삶’, 몸 없어져도 내 마음 안에 그냥 이대로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안다.

깨친 사람에게는 그래서 인생이 허망하거나 공허하지 않다. 그러나 깨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허망하거나 공허하지다. 그들의 인생은 멍텅구리 인생이다.

불문에서 나오는 멍텅구리라는 노래가 있다.

멍텅구리 멍텅구리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온 곳을 모르는 인간들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누나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올 때에 빈손으로 왔으면서
갈 때에 무엇을 가져갈까
공연한 탐욕을 부리누나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백 년도 못 사는 그 인생이
천만 년 죽지를 않을 것처럼
끝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세상에 학자라 하는 이들
동서에 모든 걸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누나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진공묘유(眞空妙有: 순수허공의 우주정신) 못 간 그 인생이
어떻게 영생을 논할 손가
끝없는 윤회만 하는구나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하루살이 이야기처럼, 이 구수한 노랫가락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노래하고 있다.

듣는 이들 모두 절로 웃음과 흥이 나도록 구수하고 재미나게 이 노래를 부르는 어떤 한 할머니는, 칠십 평생 치성으로 절에 다니며 이 노래를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절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흥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평생을 그토록 치성을 바친 스님이나 신도들도 누구도 깨친 자가 없고 깨침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모두가 멍텅구리하는 자탄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어찌 흥이 날 수 있었겠는가.

이제 할머니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주문하면 마다 않고 이 노래를 불러준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깨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깨치게 되니 꿈만 같다” 고 기뻐하면서 말이다.

하루살이와 사람살이-반진(返眞)

하루살이는
하루만에
모든 것을 다 보고
더 볼 것도 없는 양
눈을 감으며
만유를 포함한 알을 낳고 죽었는데

사람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도
또 볼 것이 있는 양
눈도 감지 못하고
쓰레기 같은 배설물만 배설하고 죽더라

“한 조각 좁은 배를 타고 술을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간에 하루살이 인생이요, 창해에 한 알갱이 좁쌀이로다.” 판소리 <적벽부>에서 하루살이는 좁쌀과 함께 그저 덧없는 인생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장자에게 하루살이는 매미나 참새 사마귀와 함께 소견머리 없고 어리석은 자를 상징한다.

“하루살이가 밤과 새벽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는 눈과 얼음을 알 리 없다.”(<장자> ‘소요유’) ‘구름에 올라 해와 달을 타고, 사해 밖을 노닐고’ ‘하늘에 올라 안갯속을 노닐고 무극을 배회하며’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옆에 낀’, 시공과 생사를 초월한 신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장자였으니, 평생 날개 한 번 접지 못하고 버둥대며 살다가 죽어가는 하루살이가 소인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건 이해할 만하다.

사실 먹고 마실 입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오히려 길지 모른다. 하루살이는 오로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은 뒤 삶을 끝낸다. 물론 하루살이도 매미 유충처럼 애벌레로 물속에서 1~3년 동안 산다. 하지만 유충 때나 성충 때나 하루살이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저 종족을 번식시키고, 다른 곤충의 먹이가 되어줄 뿐이다.

올해 지용회는 하루살이를 소재로 한, 승려시인 조오현의 시조 ‘아득한 성자’를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야말로 시인에게는 성자였다. 반면 평생 도를 닦았다는 자신은 ‘죽을 때가 지나도록 살아왔지만 …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인생이라고 했다. 장자가 이마를 치겠다. 하루살이를 감히 덧없는 인생, 소인배, 정치인, 기업가에 빗댈 일이 아니다.

하루살이가 멍텅구리인가? 사람이 멍텅구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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