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 만에 집안꼴이 엉망 되었다.
화가나서 보던 책을 놓아 버렸다.
어디로 나가버려야겠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갈까?
됐다. 이바구나 하러 가자.
어디가서 수다부리지? 됐다. 대구 아카데미로 가자. 거기는 좀 이성(理性)적인 곳이니까 이바구하고 또 욕이나  먹자.

자연히 과거의 일들이 생각난다.
나처럼 과거를 잘 잊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 경험들은 너무나 생생했기에 잘 잊혀지지 않는다.
적으려니까 뒷집 의섭이가 와서 자꾸 말을 건다.
“어이, 형님 글 좀 적자. 형님이 공부할 때는 조용히 하라고 했제? 커피 한잔 빨리 하고 조용히 있거라”
요사이는 의섭이에게는 무리한 말로 달랜다.
작년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당최 말하지 못한 녀석이었는데
가까이 해 주니까 이제는 말문이 열려서 까불고 나를 때리기까지 하니......
누구를 탓하랴.....너무 가까이 해준 내가 잘못이다.
분위기가 이러니 적어야할 줄거리가 어디로 갔는지 다 날아갔다.
잠시 쉬자.

나는 왜 이렇게도 고독한가?
오늘 따라 까불고 싶지 않다.
나도 이렇게 심각할 때가 있는 것이다.

왜 오늘과 같은 다툼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겠다.
믿음 생활이 제자리에서 머물고 있다는 고독과 조급함,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구원 받기 전의 답답함이 구원 받고 나서도 또 도전한 것이며 하나의 정거장에서 너무나 지루한 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보지만 도무지 해답이 없다.
아니 해답은 기도라는 것을 안다.
내가 할 일은 기도인 것을 알기는 아는데  당최 기도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기도란 당연한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러나 웬지 기도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답이 없다. 교만인가 무지인가 미련 떠는 일인가?
그래서 내 스스로 많은 답을 얻어 보지만
누구라도 내 답에 대한 평가라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기도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더 얻기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다녀보지만 도무지 만족하지 못했다.
기도를 하라고만 할 뿐이지 그 이상의 해결은 없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아마 기도를 하라는 그들이나 그들의 말을 듣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과연 기도다운 기도를 하고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었다.
한 때는 “선도기공 단전호흡”이라는 책도 읽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기도에 근접(根接)할 수 있는 참고를 그들에게서라도 혹시 얻을 수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포기하였다.
그들의 자세(姿勢)조차도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에게 있어서의 많은 묵상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수록 세상을 이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기도의 부재현상은 나의 삶을 무척이나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도 도사(道士)가 없다니!!

그러나 이건 내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도할 수 있는 인격(人格)이 부족하다는 점도 깨달았다.
기도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의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가꾸어질 때
비로소 마음에 품고 있던 기도에 대한 성경말씀도
생명의 싹이 돋아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묵상도 기도요 마구잡이 기도도 기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기도도 성장해야할 것이다.
이것도 또한 믿음의 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되겠다.
그러니까 이러한 답답함과 갈급함은 올바른 절차일지도 모르겠다.
믿는다고 갑자기 기도의 영을 주시겠는가?
기도할 만한 때가 되면 주시지 않겠는가.

과연 무언가 발견되었다.
기도에 대한 5권의 책을 구입하여 심도 있게 읽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저자에 대한 비평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편적인 글을 읽고 마구잡이로 비평을 하는 사람과 휩싸여서 함께 박수 칠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내가 그 분의 책을 구입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첫째로 회심한 동기와 나와 비슷하니까 마음이 좀 끌렸다.
둘째, 기도에 대한 단편적인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 일단 읽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분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할 자격도 없다. 찍 소리 못하고 무조건 읽어야 한다.
읽고 난 다음에 비평을 하든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든지 결정할 일이다.
드디어 택배가 왔다.
한권을 손에 쥐고서 반쯤 읽을 때 까지는 별 반응을 느끼지 못했지만, 다 읽은 후에는 배울 점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이 없잖아 있겠지만 그건 내게 맞도록 갖추면 되는 것이다.
다시 읽을 때는 애매한 부분은 내가 고쳐서 내게 맞는 내용으로 수정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기도란 믿음에 있어서의 마지막 정상이다.
기도는 마지막 코스이며
기도만이 진정한 안식처인 것이다.
(나는 기도를 해 보았자 한 줄이면 끝난다. 기도하기도 힘들고 군소리는 싫다)
비록 기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많은 묵상에 의하여 그러한 답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날의 부활도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아 때처럼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새 세상이 눈 깜박 사이에 드러나고
성도들은 새 사람으로 부활할지도 모른다.
혹시 베드로가 말한 불의 예언이 이 때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친 사람이라고 하든 말든 나는 믿는다.
이보다 더한 말씀이라도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이보다 더욱 놀라운 일일 것이다.
피난처는 어디인가?
과연 이 세상에서 피해야할 피난처는 어디인가?
나는 기도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 마지막 때가 되어도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먹었어도 그 말씀이 살아나서 부활체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라고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현재로서 믿는 바는 이러한 관점이기에 오랜 기간동안 기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건은 드디어 터졌다.
과거에는 아내와 싸우거나 내가 윽박지르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싸우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한 2년 전부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만 계속 되었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였다.
그렇게도 복잡한 교회출석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도 서로 참고 인내로 무난히 넘길 수 있었으니 행복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감정적인 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아내는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나는 한글학교도 힘겨우니 그건 당신이 벌어서 그 돈은 당신이 내!”
(지금 시골에서 어르신들 한글 공부를 가르치고 잇고, 얼마 전부터는 나눔과 기쁨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눔과 기쁨" 일에는 도무지 방해할 수 없는 일인데도 오늘 따라 갑자기 아내는 돌변한 것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병원이나 약국에 공문을 보내라니 뭐니 하면서 간섭을 하더니 오후에는 웬 날벼락인가?!
그리고 나도 웬만한 기분이라도 단 5분이면 끝난다. 아니 잊어버린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무조건 잊어 먹는다.
그런데 이 기분은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어도 영 아니다. 꺼질 줄 모른다.
앞 집 새댁 불신자가 있는데도 싸움이나 잔뜩 하고 화해시키는 것도 마다했으니 웬일인가?

과거 생각이 났다.
우연히 십 원짜리 동전이 눈에 띄였다.
음식도 있고 촛불도 있었다.
“아니, 이 좋은 돈을 왜 버려? 참 나,  돈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면서 십 원짜리 동전만 골라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 했다.
(내가 이렇게 아프다니.....귀신이 열 받았나?진짜로 귀신이 거기 있었나?)
도무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혹시 그 동전 때문인가?)
지금 기억하건데..동전을 버린 것 같다.
몸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십여 년 후에
위와 같은 경험을 똑같이 하였다.
너무나 아팠기에 십 년 전의 일이 기억났다.
동전을 버렸더니 몸이 낫기 시작하였다.

또 지난겨울 누구의 이삿짐 사이에 과자가 있었다.
깨끗하였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꺼내서 먹고 또 먹었다.
먹고 있는 중에 제사상에 올리는 과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상 하더라 싶었다.
입에서 우물거리는 것이라도 뱉아 버렸으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입에 있는 것은 마저 먹어버리고 주머니에 넣었던 것은 버렸다.
다음 날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 했다. 옛날 동전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미 똥으로 사용 해 버린  것을 다시 주워다 버릴 수는 없는 일.
한달 동안이나 목감기로 고생을 했다. 지금은 한달동안 누워 있으면 난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아시고 적당히 고생 시켰나? 싶기도 하다.

아니 이 얘기는 좀 빗나간 얘기일 것 같다.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낫겠다.

믿음에 있어서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희안하게도 나쁜 일이나 혼줄 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 한다.
교회를 그냥 가보는 사람과 진짜로 잘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겉으로도 좀 표가 난다.
그냥 가는 사람은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데 반하여
믿겠다고 결단을 하는 사람은 집에서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일을 많이 보았다.

어제 집안 사태로 또 생각나는 25년 전의 일.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최 귀신의 존재 여부는 잘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 특히 마태,마가,누가복음에는 귀신이란 단어만 해도 70개가 넘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존재성에 대해서는 잘 믿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과거의 일인가? 아니면 지금도 유효한 내용인가?
나는 당연히 믿는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이 신념이라는 것을 내 양심은 알고 있었다.
믿지 못하는 것은 공관복음은 전부 믿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믿으려고 무척이나 애섰다(믿음이란 믿으려고 할 때만이 하나님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 구절을 보며 믿어지지 아니하는 내 미련을 무척이나  책망하였다.
며칠 아니 한 두 달쯤 되었을까?
갑자기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믿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그 시각에 내 아들이 화물차에 깔릴뻔 하였다.
좁은 골목에서 공 줏으러 총알 같이 튀어나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내려오던 화물차 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운전수는 아이가 죽은 줄로 알았다.
차에서 내려서는 한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믿음에 변동이 있을 때는(특히 성장의 기미가 있을 때) 이러한 경험을 수시로 하기 때문에
미리 기도를 해야 한다는 법을 스스로 정해 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잊었다.
기도를 잊었으니 찢어져 있는 그 틈새로 마귀가 들어온 것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기도의 사람으로 진입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마귀는 미리 알고 방해를 일삼았을 것이다.

싸운 지 하루가 다 되었건만 아직도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길고 긴 분이다.
(내가 잘못 했다고 빌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에 참는다든지 용서를 구하면 신비한 은혜도 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용서를 구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스운 일이지.....
타협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너무 무리한 일을 보인 것 같다. 미안하다)라고 타협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제부터 자기는 자기대로 자라도록 놔두는 거다.
김치를 아무리 길게 놔두어도  일생을 내가 참았듯이
뜨거운 것도 “아, 시원하다”는 무식한 말을 할 때마다 웃어 주듯이(결혼 초, 그런 말을 두 세 번 들었을 때 나는 화를 벌컥 내었다)
모든 것에 참으며 넘기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사랑에 정화 되어 아름답게 작품화 되는 것이다.  

따분한 시간에 괜시런 넋두리로 아까운 한 줄을 허비 한 것 같아서 미안네요.
이러한 일을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경험하는 일들이기에..... 싸움을 계기로 생각 해 보았습니다.
가슴 아픈 사람 사연 들어 준 걸로 여기시고 참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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