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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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기사를 이렇게 다시 올리는 것이 불법입니다만,
본문을 싣지 않고, 링크만 할 경우,
아마도 많은 분들께서 읽어보지 않으실 것 같아서,
부득이, 불법을 자행하겠습니다.
생명윤리에 관한 토론을 하자는 글인데, 글 자체가 불법이니,
참 뭣합니다만서도.
우리 다비아에, 자연과학자, 공학 등 관련 계통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도 많으시니,
조언과 의견 듣고 싶습니다.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920508028&cp=nv
인간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인공정자’ 첫 탄생
[쿠키뉴스 2007-04-13 16:49]
[쿠키지구촌] 인간의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인공정자’가 독일 연구진에 의해 탄생했다.
지금까지 쥐 등 동물의 줄기세포에서 난자 또는 정자를 추출해 인공 생산한 사례는 있었지만 인간의 유전자로 구성된 인공정자 배양은 처음이다.
영국일간 더타임스는 13일 독일 괴팅겐대학과 뮌스터대, 하노버대 공동 연구팀이 인간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로부터 정자로 자라날 부분을 분리,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자발적인 기증자들의 골수에서 수백개의 줄기세포를 추출, 이를 서로 다른 형질로 배양했다. 그런데 인간 신체와 장기의 각기 다른 부분 원형으로 자라던 줄기세포 가운데 일부가 정자의 원형 줄기세포로 바뀌었다. 연구팀은 현재 정자 원형 줄기세포를 특정 조건에서 계속 배양, 완전한 정자로 키울 계획이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카림 나예르니아 영국 뉴캐슬대 교수는 “완전한 정자로 자라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 연구는 수많은 불임 남성과 부부들에게 큰 희망을 던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인공정자가 양산되면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인한 불임부부는 타인 정자를 기증받지 않고도 아기를 가질수 있게 된다. 또 인공정자가 남자뿐 아니라 여자로부터도 만들어질 수 있는 만큼 여성 동성애 커플도 자신들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낳을 수 있다. 남자만 생산하는 자연정자와 달리 인공정자는 여성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에서도 배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연구에 대해 학계와 교계의 윤리적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영국 국교회는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진행되던 줄기세포 연구가 드디어 원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명복제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면서 “생명까지 만들어내겠다는 인간의 오만은 결국 대재앙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줄기세포의 생명복제 연구에 꾸준히 반대해온 해리 무어 셰필드대 생화학과 교수는 “어떤 유전적 결함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인공정자를 불임시술에 활용하려는 발상은 생명 존엄성을 파과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영국 BBC방송은 “일본에서는 이미 인공난자 생산 연구가 진행중”이라면서 “인공난자 역시 원리적으로 남자의 줄기세포에서 만들어질수 있는 만큼 남자의 인공난자와 여자의 인공정자가 결합해 아기가 탄생하는 일도 생겨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본문을 싣지 않고, 링크만 할 경우,
아마도 많은 분들께서 읽어보지 않으실 것 같아서,
부득이, 불법을 자행하겠습니다.
생명윤리에 관한 토론을 하자는 글인데, 글 자체가 불법이니,
참 뭣합니다만서도.
우리 다비아에, 자연과학자, 공학 등 관련 계통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도 많으시니,
조언과 의견 듣고 싶습니다.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920508028&cp=nv
인간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인공정자’ 첫 탄생
[쿠키뉴스 2007-04-13 16:49]
[쿠키지구촌] 인간의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인공정자’가 독일 연구진에 의해 탄생했다.
지금까지 쥐 등 동물의 줄기세포에서 난자 또는 정자를 추출해 인공 생산한 사례는 있었지만 인간의 유전자로 구성된 인공정자 배양은 처음이다.
영국일간 더타임스는 13일 독일 괴팅겐대학과 뮌스터대, 하노버대 공동 연구팀이 인간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로부터 정자로 자라날 부분을 분리,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자발적인 기증자들의 골수에서 수백개의 줄기세포를 추출, 이를 서로 다른 형질로 배양했다. 그런데 인간 신체와 장기의 각기 다른 부분 원형으로 자라던 줄기세포 가운데 일부가 정자의 원형 줄기세포로 바뀌었다. 연구팀은 현재 정자 원형 줄기세포를 특정 조건에서 계속 배양, 완전한 정자로 키울 계획이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카림 나예르니아 영국 뉴캐슬대 교수는 “완전한 정자로 자라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 연구는 수많은 불임 남성과 부부들에게 큰 희망을 던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인공정자가 양산되면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인한 불임부부는 타인 정자를 기증받지 않고도 아기를 가질수 있게 된다. 또 인공정자가 남자뿐 아니라 여자로부터도 만들어질 수 있는 만큼 여성 동성애 커플도 자신들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낳을 수 있다. 남자만 생산하는 자연정자와 달리 인공정자는 여성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에서도 배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연구에 대해 학계와 교계의 윤리적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영국 국교회는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진행되던 줄기세포 연구가 드디어 원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명복제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면서 “생명까지 만들어내겠다는 인간의 오만은 결국 대재앙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줄기세포의 생명복제 연구에 꾸준히 반대해온 해리 무어 셰필드대 생화학과 교수는 “어떤 유전적 결함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인공정자를 불임시술에 활용하려는 발상은 생명 존엄성을 파과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영국 BBC방송은 “일본에서는 이미 인공난자 생산 연구가 진행중”이라면서 “인공난자 역시 원리적으로 남자의 줄기세포에서 만들어질수 있는 만큼 남자의 인공난자와 여자의 인공정자가 결합해 아기가 탄생하는 일도 생겨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2007.04.15 11:01:55
정확히 분석해서 얘기해보자면 인공정자나 난자배양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야기될지도 모르는" 사회적 예견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겠죠. (사회적 예견들에 대해선 후술)
물론, 정자나 난자 자체를 어떤 하나의 생명체 단위로서 보는 입장에서는 정자,난자의 인공배양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구요.
(가톨릭이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수정-착상 직후를 생명체라고 인정하는 발언은 들었는데...정확한 교황성하 칙령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시는 분이 계시면 가르쳐주십시오)
영국의 소식이니만큼 켄터베리측에서는 공식입장(앵글리칸 온라인 참조)이 어떤지 아직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만 국민일보가 보도한 거니만큼,(그리고 그놈의 번역상의 뉘앙스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부정적 논조의 기사가 나갈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양비론도 양시론도 아닌 입장에서 분석을 최대한 시도해보자면,
그 부정적으로 예견되는 사회문제의 핵심은 동성애자들이 자녀를 가질 수 있고 양육할 수 있는 새로운 가정 형태와 세태에 대한 우려입니다. 동성애가 '제대로' 핍박받기 시작한 역사적 사례는 비교적 최근의 일로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정부의 형태가 강화되고 난 이후입니다. 국가라는 집합체가 경제활동으로 돌아가고 생산-소비의 틀이 톱니바퀴처럼 쉬지않고 소프트하게 (거시경제학에서 연착륙이라고 하죠) 돌아가는 것이 국가존재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구 수와 양육입니다.
구조주의적으로 (혹자는 파시즘의 형태라고 표현합니다만) 이런 근대적 사회체제가 동성애자들을 정신병, 사회악 등으로 낙인찍어 게토로 몰게 된 이유도 다 근대적 발상이며 거기서부터 나온 교육-형벌-법-종교 체제가 탄생한 것이죠. 미셸푸코의 놀라운 저작들은 그런 사회적 양태들을 "침묵의 고고학"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국가라는 집합체가 정부조직을 유지하면서 운영되는데에 필요한 안정적 하부구조로 적절한 생산계층의 재생산 (즉, 적절한 생산가능 인구 수 생산)과 그 유지(노동-생산계급의 양육)가 절대적이므로 재생산을 위해서는 결혼제도가, 양육을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필요하게 된 것이죠.
장광설을 이렇게 쏟아부은 이유는 이런 것들이 모두 동성애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그동안 생리학적 "사실"에 근거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동성애자들이 줄기세포로 (본문에서는 불성실한 번역 탓인지는 몰라도 배아줄기 세포인지, 성체줄기세포인지 조차 나오지 않습니다만 - 물론 인간의 골수에서 뽑아낸 줄기세포이므로 성체줄기세포임) 안전한 인공정자와 난자를 추출-배양해서 인공수정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여타 다른 이성애 부부의 인공수정 시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그 말은 다시, 적절한 인구유지를 위해 별 문제가 없다면 동성애 부부던 이성애 부부던 국가 성장동력 차원에서는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죠.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바, 기사 본문에서처럼 아직은 기술이 미흡하고 검증의 통계적 정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인공정자를 불임시술에 활용하려는 발상은 생명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려는 과학적으로 검증이 부재한 일이기에 위험하다는 경고로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만 켄터베리측의 "인간의 오만이 불러올 -생명복제로 인한- 대재앙" 운운은 별로 구체적이지 못한, 그런 점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존 체제에 잠식된 도그마를 가진 집단의 공허하고도 틀에 박힌 , 까닭없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외침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기사화된 줄기세포가 성인의 골수에서 추출해 낸 성체줄기 세포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 꼬입니다. 그간 가톨릭에서는 배아줄기세포의 체세포 복제가 아닌 성체줄기세포로 충분히 인류의 질병문제를 "윤리적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만 (국내에서는 정진석 추기경 예하의 직접 지시에 100억원 상당의 거액을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투자했죠, 이번 부활절 대미사 강론에서도 성체줄기세포 연구의 확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메시지를 발표하셨더군요) 이와같은 성체줄기세포의 연구업적 결과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본다면 크게 난감한 사건입니다. (물론 이 연구가 최종적으로 성공할지의 여부와 활성화 가능여부에 따라 가톨릭측의 논조가 달라지겠지만) 결국 가톨릭을 위시한, 줄기세포 연구에 부정적인 모든 종교단체들은 배아줄기보다 성체줄기의 선택같은 위장적 전술(?)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모든 줄기세포의 연구를 부정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어떤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될 겁니다.
본문 말미의 "남자의 난자와 여자의 정자로 아기가 탄생하는 일" 같은 사례에 대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이나 보수적 안정성을 희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남자의 난자와 여자의 정자로 만들어진 아기가 만약 현대기술로 안전한 하나의 생명체로 완성되어 질 수 있다면 그 생명체에 관해서 종교단체들은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 온전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지 혹은 일종의 키메라로서의 생명체적 지위라던지 등의 여부에 대해)에 대해 심각한 숙고를 해야 합니다.
그 숙고의 기준은 물론 성서적인 판단일 겁니다.
그러나 "성서적 말씀에 의거하여 어찌어찌 행동한다 혹은 정의한다" 라는 말은
1. 본래 생명체를 대하는 (윤리적)해석은 자의적으로 될 수 있기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으므로 구심적 구속력이 부족하며
2. 더구나 생명체, 특히 인간에 대한(정의적)해석은 그것에 대한 언구가 성서에 얼마나 산재해 있는지에 따라 그 범주, 외연이 결정되는 바 그것이 얼만큼 일종의 "종차"를 정의할 수 있을지, 즉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충분할지가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기독교측에서 이와같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헤게모니를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새로운 테제를 형성하고 과학계보다 한 발 앞서는 예지력을 풍부하게 내어놓는 것일 겁니다. 과학계에서 이미 벌여놓은 사건을 뒤에서 훈계하는 '꼰대' 역할로는 더이상 적극적 역할이 어렵겠죠.
-----------------------------------------------------------------------------------------------------------------------------------
군대도 주5일이라 주저리주저리 여유있게 써봅니다.
단순한 라이프사이클 가운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음을 새삼 느낍니다. ^^
물론, 정자나 난자 자체를 어떤 하나의 생명체 단위로서 보는 입장에서는 정자,난자의 인공배양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구요.
(가톨릭이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수정-착상 직후를 생명체라고 인정하는 발언은 들었는데...정확한 교황성하 칙령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시는 분이 계시면 가르쳐주십시오)
영국의 소식이니만큼 켄터베리측에서는 공식입장(앵글리칸 온라인 참조)이 어떤지 아직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만 국민일보가 보도한 거니만큼,(그리고 그놈의 번역상의 뉘앙스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부정적 논조의 기사가 나갈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양비론도 양시론도 아닌 입장에서 분석을 최대한 시도해보자면,
그 부정적으로 예견되는 사회문제의 핵심은 동성애자들이 자녀를 가질 수 있고 양육할 수 있는 새로운 가정 형태와 세태에 대한 우려입니다. 동성애가 '제대로' 핍박받기 시작한 역사적 사례는 비교적 최근의 일로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정부의 형태가 강화되고 난 이후입니다. 국가라는 집합체가 경제활동으로 돌아가고 생산-소비의 틀이 톱니바퀴처럼 쉬지않고 소프트하게 (거시경제학에서 연착륙이라고 하죠) 돌아가는 것이 국가존재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구 수와 양육입니다.
구조주의적으로 (혹자는 파시즘의 형태라고 표현합니다만) 이런 근대적 사회체제가 동성애자들을 정신병, 사회악 등으로 낙인찍어 게토로 몰게 된 이유도 다 근대적 발상이며 거기서부터 나온 교육-형벌-법-종교 체제가 탄생한 것이죠. 미셸푸코의 놀라운 저작들은 그런 사회적 양태들을 "침묵의 고고학"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국가라는 집합체가 정부조직을 유지하면서 운영되는데에 필요한 안정적 하부구조로 적절한 생산계층의 재생산 (즉, 적절한 생산가능 인구 수 생산)과 그 유지(노동-생산계급의 양육)가 절대적이므로 재생산을 위해서는 결혼제도가, 양육을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필요하게 된 것이죠.
장광설을 이렇게 쏟아부은 이유는 이런 것들이 모두 동성애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그동안 생리학적 "사실"에 근거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동성애자들이 줄기세포로 (본문에서는 불성실한 번역 탓인지는 몰라도 배아줄기 세포인지, 성체줄기세포인지 조차 나오지 않습니다만 - 물론 인간의 골수에서 뽑아낸 줄기세포이므로 성체줄기세포임) 안전한 인공정자와 난자를 추출-배양해서 인공수정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여타 다른 이성애 부부의 인공수정 시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그 말은 다시, 적절한 인구유지를 위해 별 문제가 없다면 동성애 부부던 이성애 부부던 국가 성장동력 차원에서는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죠.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바, 기사 본문에서처럼 아직은 기술이 미흡하고 검증의 통계적 정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인공정자를 불임시술에 활용하려는 발상은 생명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려는 과학적으로 검증이 부재한 일이기에 위험하다는 경고로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만 켄터베리측의 "인간의 오만이 불러올 -생명복제로 인한- 대재앙" 운운은 별로 구체적이지 못한, 그런 점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존 체제에 잠식된 도그마를 가진 집단의 공허하고도 틀에 박힌 , 까닭없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외침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기사화된 줄기세포가 성인의 골수에서 추출해 낸 성체줄기 세포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 꼬입니다. 그간 가톨릭에서는 배아줄기세포의 체세포 복제가 아닌 성체줄기세포로 충분히 인류의 질병문제를 "윤리적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만 (국내에서는 정진석 추기경 예하의 직접 지시에 100억원 상당의 거액을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투자했죠, 이번 부활절 대미사 강론에서도 성체줄기세포 연구의 확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메시지를 발표하셨더군요) 이와같은 성체줄기세포의 연구업적 결과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본다면 크게 난감한 사건입니다. (물론 이 연구가 최종적으로 성공할지의 여부와 활성화 가능여부에 따라 가톨릭측의 논조가 달라지겠지만) 결국 가톨릭을 위시한, 줄기세포 연구에 부정적인 모든 종교단체들은 배아줄기보다 성체줄기의 선택같은 위장적 전술(?)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모든 줄기세포의 연구를 부정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어떤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될 겁니다.
본문 말미의 "남자의 난자와 여자의 정자로 아기가 탄생하는 일" 같은 사례에 대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이나 보수적 안정성을 희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남자의 난자와 여자의 정자로 만들어진 아기가 만약 현대기술로 안전한 하나의 생명체로 완성되어 질 수 있다면 그 생명체에 관해서 종교단체들은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 온전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지 혹은 일종의 키메라로서의 생명체적 지위라던지 등의 여부에 대해)에 대해 심각한 숙고를 해야 합니다.
그 숙고의 기준은 물론 성서적인 판단일 겁니다.
그러나 "성서적 말씀에 의거하여 어찌어찌 행동한다 혹은 정의한다" 라는 말은
1. 본래 생명체를 대하는 (윤리적)해석은 자의적으로 될 수 있기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으므로 구심적 구속력이 부족하며
2. 더구나 생명체, 특히 인간에 대한(정의적)해석은 그것에 대한 언구가 성서에 얼마나 산재해 있는지에 따라 그 범주, 외연이 결정되는 바 그것이 얼만큼 일종의 "종차"를 정의할 수 있을지, 즉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충분할지가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기독교측에서 이와같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헤게모니를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새로운 테제를 형성하고 과학계보다 한 발 앞서는 예지력을 풍부하게 내어놓는 것일 겁니다. 과학계에서 이미 벌여놓은 사건을 뒤에서 훈계하는 '꼰대' 역할로는 더이상 적극적 역할이 어렵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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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도 주5일이라 주저리주저리 여유있게 써봅니다.
단순한 라이프사이클 가운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음을 새삼 느낍니다. ^^
2007.04.15 21:08:22
천주교는, 정자에 의해 수정된 난자, 즉 수정란부터 인간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교파가 많고, 교파 안에서도 각 신학자들의 입장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긴 합니다.
천주교와 같이 보는 견해도 있고, 수정 착상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부터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부류도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웬만한 신학 책들은 다 박스 안에 포장해서 쌓아 놓았기 때문에,
참조할 수 없어서 가물가물합니다만,
후자에는,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미국장로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 꽤 여러 교파가 있던 걸로 압니다.
정확한 정보가 아니니, 그냥 흘려 들으셔도 되겠습니다. 제 기억이 부정확합니다.
볼테르님의 말씀은, 대단히 즉물주의적으로 첫 단추를 꿰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여전하군 야고보... (-.-)+ )
기사의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반대하는 까닭은,
그 자체로서 인간 생명의 시작이냐 아니냐, 성체줄기세포냐, 배아줄기세포냐의 문제가 아니라,
위 기사 내용의, 영국국교회의 반응에서 보다시피,
인간이 인간 생명 자체를 발생시키고, 기술적 조작을 가하려는 동기, 의도의 발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가치론적 차원인 것입니다.
영국국교회의 반응을 원문 그대로 읽으려고,
Church of England, Anglican Online, 이 두 사이트를 뒤져 봤는데,
저의 찾는 솜씨가 영 젬병이어서인지, 못 찾았습니다 -.- 끙...
즉, "인공정자나 난자배양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 하신 말씀은, 제가 보기에,
"정확"한 "분석"이라기보다, 예의 볼테르님의 즉물적인 시각으로(제가 맞게 느낀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볼테르님의 관점을 개입시켜(이건 누구나 그럴 겁니다)
본 것이라고 말해야 옳겠지요.
"정확"한 "분석"이라고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실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야기될지도 모르는" 사회적 예견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겠죠.
(사회적 예견들에 대해선 후술)"
- 흠.. 역시, 경험론자, 즉물론자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니냐고 다시금 느낍니다만^^
하지만, 생명 복제와 조작에 있어, 그러한 작업 그 자체와 더불어,
그로 인한 결과적 측면 또한, 윤리학적 논의의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예견들에 대해" "후술"하실 게 아니라,
이렇게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이바구를 해 봄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 사안에 있어, 이 맥락에서,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의 문제를 굳이 도드라지게 부각할 필요가 있을지요.
왜 그렇게 보시는지,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동성애자들과 연대하려는 의식은 대단히 강하고,
동성애자 분들께서 처한 상황과 삶과 마음의 고생을 그들을 통해 직접 겪어봐서 꽤 안다고 자부합니다.
(본 쟁토방의 23번 제 졸문과 댓글을 참조 바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인위적 생명 복제와 조작에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호모포비아적인 낡은 억압적 엄포가 깃들어 있다고 보시는 시각 또한, 저로서는 의아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그러한 권력보수적인 집단으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침묵의 고고학", "생산계층의 재생산" 등의 언급도 하셨다시피,
이같은 권력보수적 담론의 저변에는, '순수한 종교적 의도'가 아닌,
그러한 담론이 요구되는, 다분히 유물론적인 원인이 깔려 있다는 것 또한 저도 압니다.
영국국교회의 공식 반응을 원문으로 찾아봤지만, 아직 못 찾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위의 기사의 요약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인위적인 생명 복제와 조작이라는 행위 자체의 반윤리성과,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론적 측면,
이 모두에 대하여 비판과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볼테르님께서 원문을 읽고,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쉽게 단언하실 것이 못 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확실히 볼테르님은 저보다 독서도 많고 해박하시죠.
(비꼬는 것 아님. 진.심.임.)
그런데, 깊이 생각하셔서 성의있게 말씀해 주신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편벽되어 있지 않느냐는 인상을 받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윤리신학에 있어(일반 윤리학이 아니라), 원천적이며 최고의 준거는 성서지요.
그러나, 역시 지적하셨듯이, 신학이란 어차피 해석학이므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견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보편성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보편'이라 해서, 억압의 논리가 아니라,
(율법과 교권이 '보편'으로 둔갑한 예는 지금껏 끊이지 않았잖습니까!)
인간의 자아지향성을 극복, 뛰어넘어, 생명 그 자체를 생각하고, 인간과 생명을 섬기려는 자세로,
사유하고 노력한다면, 비록 자기지향적 속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보편'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회와 역사를 조망하고,
자연과학과 기술, 타 문화와 학문, 예술, 생업의 각 분야들까지 다 조망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겠지요.
(그렇다고, 자연신학이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망상은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일을 먼저 벌여놓고,
종교가 뒷짐지고 마른 헛기침, 잔소리나 늘어놓아서는 안되겠다라는 말씀에도 역시 동의합니다만,
브리즈 교수님 말씀과 같이,
인간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도로 분화되고, 그 각 분야가 대단히 발전한 현대에 있어,
신학 안에서도, 전공간 단절의 현상은 심각합니다.
신학이, 윤리학과 철학이, 자연과학과 기술의 미래를 전망하고,
FTA 같은 경우, 경제학적 예측까지 하려면,
대단히 어렵지 않느냐,
이 점은, 신학을 조금 맛본 저 또한 대단히 답답하고, 고민하는 바입니다.
신학이 종말론적으로 정향된 희망의 학문이고, 예언자적 전통을 잇고 있다면,
이렇게 지식적으로, 지성적(사유적)으로 치열해야 될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테르님같은 분이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군 생활 반틈 정도 했나요?
부디, 본업과 전공에 매진하시더라도, 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개신교는 교파가 많고, 교파 안에서도 각 신학자들의 입장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긴 합니다.
천주교와 같이 보는 견해도 있고, 수정 착상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부터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부류도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웬만한 신학 책들은 다 박스 안에 포장해서 쌓아 놓았기 때문에,
참조할 수 없어서 가물가물합니다만,
후자에는,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 미국장로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 꽤 여러 교파가 있던 걸로 압니다.
정확한 정보가 아니니, 그냥 흘려 들으셔도 되겠습니다. 제 기억이 부정확합니다.
볼테르님의 말씀은, 대단히 즉물주의적으로 첫 단추를 꿰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여전하군 야고보... (-.-)+ )
기사의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반대하는 까닭은,
그 자체로서 인간 생명의 시작이냐 아니냐, 성체줄기세포냐, 배아줄기세포냐의 문제가 아니라,
위 기사 내용의, 영국국교회의 반응에서 보다시피,
인간이 인간 생명 자체를 발생시키고, 기술적 조작을 가하려는 동기, 의도의 발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가치론적 차원인 것입니다.
영국국교회의 반응을 원문 그대로 읽으려고,
Church of England, Anglican Online, 이 두 사이트를 뒤져 봤는데,
저의 찾는 솜씨가 영 젬병이어서인지, 못 찾았습니다 -.- 끙...
즉, "인공정자나 난자배양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 하신 말씀은, 제가 보기에,
"정확"한 "분석"이라기보다, 예의 볼테르님의 즉물적인 시각으로(제가 맞게 느낀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볼테르님의 관점을 개입시켜(이건 누구나 그럴 겁니다)
본 것이라고 말해야 옳겠지요.
"정확"한 "분석"이라고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실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야기될지도 모르는" 사회적 예견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겠죠.
(사회적 예견들에 대해선 후술)"
- 흠.. 역시, 경험론자, 즉물론자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니냐고 다시금 느낍니다만^^
하지만, 생명 복제와 조작에 있어, 그러한 작업 그 자체와 더불어,
그로 인한 결과적 측면 또한, 윤리학적 논의의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예견들에 대해" "후술"하실 게 아니라,
이렇게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이바구를 해 봄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 사안에 있어, 이 맥락에서,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의 문제를 굳이 도드라지게 부각할 필요가 있을지요.
왜 그렇게 보시는지,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동성애자들과 연대하려는 의식은 대단히 강하고,
동성애자 분들께서 처한 상황과 삶과 마음의 고생을 그들을 통해 직접 겪어봐서 꽤 안다고 자부합니다.
(본 쟁토방의 23번 제 졸문과 댓글을 참조 바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인위적 생명 복제와 조작에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호모포비아적인 낡은 억압적 엄포가 깃들어 있다고 보시는 시각 또한, 저로서는 의아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그러한 권력보수적인 집단으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침묵의 고고학", "생산계층의 재생산" 등의 언급도 하셨다시피,
이같은 권력보수적 담론의 저변에는, '순수한 종교적 의도'가 아닌,
그러한 담론이 요구되는, 다분히 유물론적인 원인이 깔려 있다는 것 또한 저도 압니다.
영국국교회의 공식 반응을 원문으로 찾아봤지만, 아직 못 찾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위의 기사의 요약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인위적인 생명 복제와 조작이라는 행위 자체의 반윤리성과,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론적 측면,
이 모두에 대하여 비판과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볼테르님께서 원문을 읽고,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쉽게 단언하실 것이 못 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확실히 볼테르님은 저보다 독서도 많고 해박하시죠.
(비꼬는 것 아님. 진.심.임.)
그런데, 깊이 생각하셔서 성의있게 말씀해 주신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편벽되어 있지 않느냐는 인상을 받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윤리신학에 있어(일반 윤리학이 아니라), 원천적이며 최고의 준거는 성서지요.
그러나, 역시 지적하셨듯이, 신학이란 어차피 해석학이므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견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보편성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보편'이라 해서, 억압의 논리가 아니라,
(율법과 교권이 '보편'으로 둔갑한 예는 지금껏 끊이지 않았잖습니까!)
인간의 자아지향성을 극복, 뛰어넘어, 생명 그 자체를 생각하고, 인간과 생명을 섬기려는 자세로,
사유하고 노력한다면, 비록 자기지향적 속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보편'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회와 역사를 조망하고,
자연과학과 기술, 타 문화와 학문, 예술, 생업의 각 분야들까지 다 조망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겠지요.
(그렇다고, 자연신학이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망상은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일을 먼저 벌여놓고,
종교가 뒷짐지고 마른 헛기침, 잔소리나 늘어놓아서는 안되겠다라는 말씀에도 역시 동의합니다만,
브리즈 교수님 말씀과 같이,
인간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도로 분화되고, 그 각 분야가 대단히 발전한 현대에 있어,
신학 안에서도, 전공간 단절의 현상은 심각합니다.
신학이, 윤리학과 철학이, 자연과학과 기술의 미래를 전망하고,
FTA 같은 경우, 경제학적 예측까지 하려면,
대단히 어렵지 않느냐,
이 점은, 신학을 조금 맛본 저 또한 대단히 답답하고, 고민하는 바입니다.
신학이 종말론적으로 정향된 희망의 학문이고, 예언자적 전통을 잇고 있다면,
이렇게 지식적으로, 지성적(사유적)으로 치열해야 될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테르님같은 분이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군 생활 반틈 정도 했나요?
부디, 본업과 전공에 매진하시더라도, 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2007.04.16 21:45:59
아아....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컴에 앉으니 썰을 풀 곳이 다있어서 행복합니다...ㅎㅎㅎ
물론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서도 말이죠.
오히려 약간 아쉬운 듯 그런 느낌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가톨릭의 생명체 발생시점건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말씀하신바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다른 교단과의 생명체 발생시점에 대한 미묘하고도 분명한 차이에 따른 신학적 논리가 어디있는궁금했었던 건데 제 질문 표현이 너무 간소한 것 같았습니다.
(혹시 아시면 자세히 부탁드립니당 ^^;)
무명재님께서 말씀하시려던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한편으로는 제 글의 의중을 잘 집어주신 것 같아 기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통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제글에서 생명현상에 대해 인간이 인공적 기술을 가지고 통제, 조작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가치론적 언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타당한 지적이십니다. 가치론을 다루어야 한다는 무명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치론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짚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의도적으로" 가치론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알면 더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 위에 배아줄기세포이냐, 성체줄기세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저의 "가치론 함구"의 의도를 몰라주신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이유는 밑에서 천천히 서술하겠습니다.
일단,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겁니다.
"가치론적인 부분도 중요한데, 왜 일부러 함구하는가?"
대답을 먼저 드리기 전에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에 관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준이 되는지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분명, 교회의 입장은 (비록 일관되고, 통합된 것은 아니지만) 배아줄기세포라면 윤리적 문제가 있고 성체줄기세포라면 윤리적 문제가 없는 것으로 입장이 표명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제가 댓굴에서 말씀드린 주된 내용중 하나는 지금까지 이런 기독교의 입장이 기사본문의 연구로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측에서의 가치론적인 질문 즉, "의도적인 인간생명에 대한 조작기술"에 대한 윰리성이 어떤 줄기세포 연구에는 있고 다른 줄기세포 연구에는 없는, 제가보기에는 약간 모호성이 있는 나름의 가치론적 기준 (가치론에서 "기준"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는 아실겝니다만)을 준거로 삼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단 댓글에는 "차라리 (생명과학 기술 전반에 대한 태도에 대해) 솔직해지라, 그리고 대응논리를 구축하라"라는 뉘앙스의 언급을 했었죠.
이런 허술하고도 쓸모없는 기독교측의 생명연구에 대한 미봉책같은 윤리적 준거는 그동안 기독교를 위시한 규범윤리학 측의 "가치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댓글의 말미에서 밝힌 "꼰대"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므로 breeze님의 의견과 같은 자조섞인 비탄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기 위해 기사 본문부터 분석해보겠습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
일단 기사의 본문은 "타임즈"라는 유수의 언론기사입니다. 이 언론기사에서 무명재님이 언급하신 "생명에 대한 연구-조작 행위자체에 대한 반윤리성"과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론적 측면"모두를 다루고 있다고 보시는 것은 오히려 제가 볼 때 무명재님의 가치관이 덧씌워진 독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게재하신 타임즈의 어떤 논조에도 "연구 행위 자체"에 대한 반윤리성 언급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것에 대한 반론으로 기사 본문의 영국국교회측의 의견과 BBC 방송의 멘트를 언급하실 수도 있겠지만 영국국교회 측의 반응은 "연구-조작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라기 보다는 ...이며, BBC의 반응은 "연구 행위에 대한 결과론적 측면"에 대한 우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재님의 댓글을 볼 때, 무명재님의 입장은 "가치론을 다루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왜 규범윤리학적 측면의 "생명복제 기술자체에 대한 가치론적 질문"이 쓸모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리신학을 위시한 그간의 규범윤리학의 "가치론"은 대개가 다음과 같은 실정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꼰대"노릇 밖에 못하는 거죠. 그래서 거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는 인간의 수명에서 초기 아동기, 고작 7~8년이라는 자조섞인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적은 댓글 말미에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고답적인 규범윤리학에서 벗어나 utilitarianism 즉, 공리주의적 윤리학 관점을 가지자는 겁니다. 공리주의적 윤리학은 그럼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현대 경제학-심리학을 위시한 행동과학-정치학-게임이론을 위사한 수학의 일부에 적용되는 학제적 "패러다임"으로 영미 행정부에서는 각종의 막강한 의사결정 위원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개 윤리학 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하면 공리주의 윤리학 관점을 가진 학자이며, 이들은 철학교수라고 불리기보단 윤리학 교수라고 불린답니다. 유명한 인물로는 노벨 경제학상의 받은 "무지의 베일론" 을 주창한 존 롤즈 교수를 들 수 있겠네요)
이 공리주의 윤리학적 가치론에서는 "의도적 생명 조작-연구 자체"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없습니다. 연구 자체보단 연구가 가져올 공리적 계산이 윤리성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한다면 어떤 행위 자체보단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들에 대해 집중하여 보자는 겁니다. 어떤 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은 그 행위 자체의 시비판단이 도그마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계산은 도그마에 기댈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공리주의적 윤리학에 대해 거칠게 소개한 측면이 다분히 존재합니다만(공리주의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논리는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합니다) 대강의 경우가 그렇다는 겁니다. 행동의 결과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관은 형이상학적 도그마들이 개개인의 취향이라는 입장이죠.
어쨋든, 저의 의도적인 "가치론에 대한 함구"는 결국,
(기존의 종교적 윤리관이 지배하고 있는) 규범주의적 윤리의 "가치론"에 대한 무용성을 나타내기 위한 소극적 "함구"였습니다. 물론 무명재님에 의해 이젠 적극적 "배제"로 표현되어야 할 것 같지만요. ^^
이러한 저의 의도와 기본적 태도를 쭈욱~ 확장시켜서 동성애 언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명재님은 저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왜 꺼내야만 하는가? 동성애 언급에 대한 당위성이 부족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을 피력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는 제가 제일 처음 꺼낸 것도 아니고 기사 본문에도 나와있죠. 잠깐 생각해보죠. 타임즈 기사에서는 왜 동성애를 취급했을까요? BBC는 왜 남-녀 성적역할의 스위칭에 대해서 언급했을까요? 대체 줄기세포연구와 동성애랑 뭔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은 규범주의적 윤리관을 가지신 분들에겐 그다지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규범주의 윤리학의 포커스는 "연구 행위" 그 자체의 당위성-타당성-합목적성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공리주의적 윤리관점에서 보면 동성애문제는 아주 연관성이 큰 문제입니다. 바로 줄기세포 "연구 행위의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불임부부와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이죠.
먼저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몇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아들로서 로베스피에르를 한 때 존경했고, 공화정의 이상을 꿈꾼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거쳐 통령정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왕정이냐 공화정이냐는 국가운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리고 현재 프랑스 유수의 교육기관인 에꼴 폴리떼끄닉을 사관학교로 만들면서 사상적 도그마나 주워섬기는 "이데올로그"들을 경멸하는 연설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에꼴 폴리떼끄닉은 그랑제꼴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죠. 이공계인 에꼴 폴리떼끄닉이 그랑제꼴 1순위이며 더구나 사관학교 라는 사실은 나폴레옹이 개교기념식에서 연설한 바보같은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습니다. "이데올로그"들은 프랑스 혼란기인 혁명정부에서 이념 논쟁만 일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들의 무능함은 나폴레옹을 결국 "황제"로 만들었죠.
저는 21세기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그런 그림을 봅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의 왜곡된 좌우익 (서양과 달리, 좌익은 민족주의적이고 우익은 외세의존적인)형성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단 선거의 한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의 선거지형은 대단히 독특한 모양새인데, 만약 유권자들이 자신의 계층에 따라 철저한 정책의 손익계산에 따라 선거를 한다면 통계적 평균치는 대략, 상위 소득계층은 한나라당, 중산층은 열린 우리당, 하위 소득계층은 민노당에 선거 분포가 몰려야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다시피 선거결과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책에 대한 결과예측, 즉 철저한 자기 계층에 대한 손익계산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념성향에 따른 투표를 하는 것이죠.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은 케인즈 주의적인 열린우리당의 정책으로서 부동산에서 소득이 별로 없는 계층이 그에 대한 지지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시장에서 혹은 노동판에서 노조에 가입도지 않은 우리의 평범함 소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민노당의 정책보단 이념적으로 안정적인 한나라당을 찍었습니다. 이야말로 쓸데없는 도그마에 함몰된 정치관념의 실종인 것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크죠.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다시 동성애 얘기로 넘어가야겠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성당이나 교회에 계신 어르신들이 아니라, 당장 불임으로 인해 고통받는 부부들과 양육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동성연애자 부부들일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얘기가 왜 나오는가에 대한 당위성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연구 행위 자체의 심각하고 형이상학적인 고찰은 오히려 덜 연관있어 보입니다. 차라리 줄기세포 연구 행위의 결과가 과연 얼마나 해당되는 많은 이들에게 결과적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스도교에서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이제 "그 행위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규범주의적인 관점을 떠나 성서적 관점에서 (해석의 다양함을 전제로 하여) 행위 결과가 공리적인가에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관점으로 인위적인 생명에 대한 연구-조작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의문은 행위 자체에 대한 고찰과 그 고찰의 결과로 나온 부정적 입장표명보다는 행위 결과가 가져올 공리적 계산이 과연 그리스도교적 성서해석에 비추어 타당한가를 논해야 하는 길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교계는 규범주의적 윤리관에 갇혀 성서를 해석함으로서 "호모포비아적인 낡은 억압과 엄포"수준에 머무른 부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 뭔가 더 쓸 것이 있었는데 10시면 군인은 자야해서...ㅋㅋㅋ
더 많은 논의를 부탁드리며...
물론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서도 말이죠.
오히려 약간 아쉬운 듯 그런 느낌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가톨릭의 생명체 발생시점건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말씀하신바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다른 교단과의 생명체 발생시점에 대한 미묘하고도 분명한 차이에 따른 신학적 논리가 어디있는궁금했었던 건데 제 질문 표현이 너무 간소한 것 같았습니다.
(혹시 아시면 자세히 부탁드립니당 ^^;)
무명재님께서 말씀하시려던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한편으로는 제 글의 의중을 잘 집어주신 것 같아 기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통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제글에서 생명현상에 대해 인간이 인공적 기술을 가지고 통제, 조작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가치론적 언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타당한 지적이십니다. 가치론을 다루어야 한다는 무명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치론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짚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의도적으로" 가치론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알면 더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 위에 배아줄기세포이냐, 성체줄기세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저의 "가치론 함구"의 의도를 몰라주신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이유는 밑에서 천천히 서술하겠습니다.
일단,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겁니다.
"가치론적인 부분도 중요한데, 왜 일부러 함구하는가?"
대답을 먼저 드리기 전에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에 관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준이 되는지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분명, 교회의 입장은 (비록 일관되고, 통합된 것은 아니지만) 배아줄기세포라면 윤리적 문제가 있고 성체줄기세포라면 윤리적 문제가 없는 것으로 입장이 표명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제가 댓굴에서 말씀드린 주된 내용중 하나는 지금까지 이런 기독교의 입장이 기사본문의 연구로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측에서의 가치론적인 질문 즉, "의도적인 인간생명에 대한 조작기술"에 대한 윰리성이 어떤 줄기세포 연구에는 있고 다른 줄기세포 연구에는 없는, 제가보기에는 약간 모호성이 있는 나름의 가치론적 기준 (가치론에서 "기준"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는 아실겝니다만)을 준거로 삼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단 댓글에는 "차라리 (생명과학 기술 전반에 대한 태도에 대해) 솔직해지라, 그리고 대응논리를 구축하라"라는 뉘앙스의 언급을 했었죠.
이런 허술하고도 쓸모없는 기독교측의 생명연구에 대한 미봉책같은 윤리적 준거는 그동안 기독교를 위시한 규범윤리학 측의 "가치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댓글의 말미에서 밝힌 "꼰대"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므로 breeze님의 의견과 같은 자조섞인 비탄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기 위해 기사 본문부터 분석해보겠습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
일단 기사의 본문은 "타임즈"라는 유수의 언론기사입니다. 이 언론기사에서 무명재님이 언급하신 "생명에 대한 연구-조작 행위자체에 대한 반윤리성"과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론적 측면"모두를 다루고 있다고 보시는 것은 오히려 제가 볼 때 무명재님의 가치관이 덧씌워진 독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게재하신 타임즈의 어떤 논조에도 "연구 행위 자체"에 대한 반윤리성 언급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것에 대한 반론으로 기사 본문의 영국국교회측의 의견과 BBC 방송의 멘트를 언급하실 수도 있겠지만 영국국교회 측의 반응은 "연구-조작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라기 보다는 ...이며, BBC의 반응은 "연구 행위에 대한 결과론적 측면"에 대한 우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재님의 댓글을 볼 때, 무명재님의 입장은 "가치론을 다루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왜 규범윤리학적 측면의 "생명복제 기술자체에 대한 가치론적 질문"이 쓸모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리신학을 위시한 그간의 규범윤리학의 "가치론"은 대개가 다음과 같은 실정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꼰대"노릇 밖에 못하는 거죠. 그래서 거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는 인간의 수명에서 초기 아동기, 고작 7~8년이라는 자조섞인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적은 댓글 말미에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고답적인 규범윤리학에서 벗어나 utilitarianism 즉, 공리주의적 윤리학 관점을 가지자는 겁니다. 공리주의적 윤리학은 그럼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현대 경제학-심리학을 위시한 행동과학-정치학-게임이론을 위사한 수학의 일부에 적용되는 학제적 "패러다임"으로 영미 행정부에서는 각종의 막강한 의사결정 위원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개 윤리학 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하면 공리주의 윤리학 관점을 가진 학자이며, 이들은 철학교수라고 불리기보단 윤리학 교수라고 불린답니다. 유명한 인물로는 노벨 경제학상의 받은 "무지의 베일론" 을 주창한 존 롤즈 교수를 들 수 있겠네요)
이 공리주의 윤리학적 가치론에서는 "의도적 생명 조작-연구 자체"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없습니다. 연구 자체보단 연구가 가져올 공리적 계산이 윤리성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한다면 어떤 행위 자체보단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들에 대해 집중하여 보자는 겁니다. 어떤 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은 그 행위 자체의 시비판단이 도그마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계산은 도그마에 기댈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공리주의적 윤리학에 대해 거칠게 소개한 측면이 다분히 존재합니다만(공리주의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논리는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합니다) 대강의 경우가 그렇다는 겁니다. 행동의 결과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관은 형이상학적 도그마들이 개개인의 취향이라는 입장이죠.
어쨋든, 저의 의도적인 "가치론에 대한 함구"는 결국,
(기존의 종교적 윤리관이 지배하고 있는) 규범주의적 윤리의 "가치론"에 대한 무용성을 나타내기 위한 소극적 "함구"였습니다. 물론 무명재님에 의해 이젠 적극적 "배제"로 표현되어야 할 것 같지만요. ^^
이러한 저의 의도와 기본적 태도를 쭈욱~ 확장시켜서 동성애 언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명재님은 저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왜 꺼내야만 하는가? 동성애 언급에 대한 당위성이 부족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을 피력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는 제가 제일 처음 꺼낸 것도 아니고 기사 본문에도 나와있죠. 잠깐 생각해보죠. 타임즈 기사에서는 왜 동성애를 취급했을까요? BBC는 왜 남-녀 성적역할의 스위칭에 대해서 언급했을까요? 대체 줄기세포연구와 동성애랑 뭔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은 규범주의적 윤리관을 가지신 분들에겐 그다지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규범주의 윤리학의 포커스는 "연구 행위" 그 자체의 당위성-타당성-합목적성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공리주의적 윤리관점에서 보면 동성애문제는 아주 연관성이 큰 문제입니다. 바로 줄기세포 "연구 행위의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불임부부와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이죠.
먼저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몇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아들로서 로베스피에르를 한 때 존경했고, 공화정의 이상을 꿈꾼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거쳐 통령정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왕정이냐 공화정이냐는 국가운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리고 현재 프랑스 유수의 교육기관인 에꼴 폴리떼끄닉을 사관학교로 만들면서 사상적 도그마나 주워섬기는 "이데올로그"들을 경멸하는 연설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에꼴 폴리떼끄닉은 그랑제꼴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죠. 이공계인 에꼴 폴리떼끄닉이 그랑제꼴 1순위이며 더구나 사관학교 라는 사실은 나폴레옹이 개교기념식에서 연설한 바보같은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습니다. "이데올로그"들은 프랑스 혼란기인 혁명정부에서 이념 논쟁만 일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들의 무능함은 나폴레옹을 결국 "황제"로 만들었죠.
저는 21세기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그런 그림을 봅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의 왜곡된 좌우익 (서양과 달리, 좌익은 민족주의적이고 우익은 외세의존적인)형성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단 선거의 한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의 선거지형은 대단히 독특한 모양새인데, 만약 유권자들이 자신의 계층에 따라 철저한 정책의 손익계산에 따라 선거를 한다면 통계적 평균치는 대략, 상위 소득계층은 한나라당, 중산층은 열린 우리당, 하위 소득계층은 민노당에 선거 분포가 몰려야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다시피 선거결과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책에 대한 결과예측, 즉 철저한 자기 계층에 대한 손익계산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념성향에 따른 투표를 하는 것이죠.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은 케인즈 주의적인 열린우리당의 정책으로서 부동산에서 소득이 별로 없는 계층이 그에 대한 지지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시장에서 혹은 노동판에서 노조에 가입도지 않은 우리의 평범함 소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민노당의 정책보단 이념적으로 안정적인 한나라당을 찍었습니다. 이야말로 쓸데없는 도그마에 함몰된 정치관념의 실종인 것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크죠.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다시 동성애 얘기로 넘어가야겠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성당이나 교회에 계신 어르신들이 아니라, 당장 불임으로 인해 고통받는 부부들과 양육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동성연애자 부부들일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얘기가 왜 나오는가에 대한 당위성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연구 행위 자체의 심각하고 형이상학적인 고찰은 오히려 덜 연관있어 보입니다. 차라리 줄기세포 연구 행위의 결과가 과연 얼마나 해당되는 많은 이들에게 결과적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스도교에서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이제 "그 행위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규범주의적인 관점을 떠나 성서적 관점에서 (해석의 다양함을 전제로 하여) 행위 결과가 공리적인가에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관점으로 인위적인 생명에 대한 연구-조작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의문은 행위 자체에 대한 고찰과 그 고찰의 결과로 나온 부정적 입장표명보다는 행위 결과가 가져올 공리적 계산이 과연 그리스도교적 성서해석에 비추어 타당한가를 논해야 하는 길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교계는 규범주의적 윤리관에 갇혀 성서를 해석함으로서 "호모포비아적인 낡은 억압과 엄포"수준에 머무른 부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 뭔가 더 쓸 것이 있었는데 10시면 군인은 자야해서...ㅋㅋㅋ
더 많은 논의를 부탁드리며...
2007.04.17 18:40:12
각 교파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제가 가진 몇 권 안 되는 책들조차 박스 안에 묶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참조 불가능이네요-.-
제 거처 바로 앞이 저희 학교라, 학교 도서관에서 더 좋은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겠지만,
(이럴 때면, 그 녀석의 강권에 순응해서,
그냥 교회 쪽에서 일할걸~ 하는 후회도 들어요^^)
볼테르님이 일부러 가치론적 사유 내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괄호 안에 꽁꽁 묶어두고 있는 의중은,
저도 어느 정도 헤아립니다.
종교 언어란,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이랄까, 게토 언어 중에서도 자기도취적인 성격이 강하죠.
이것 탈피하기가 참 힘듭니다.
저도,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을 괄호 안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늘 강조합니다만,
신앙 그 자체가 자아의 사유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는 말이지요.
'원리'의 수준도 넘어, 아예 '언어'지요.
볼테르님이 파악한, 천주교회의 생명윤리적 입장은, 충분히 그렇게 볼 소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지엽적인 문제라고 봐요.
천주교회가, 성체줄기세포냐, 배아줄기세포냐라는 구분으로, 생명과학 연구를 양분해서 가치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배아줄기세포에 의한 연구가, 여성 및 여성의 난자를 소모품화하고,
그 난자로써 수정란을 인공으로 만들어, 거기서 줄기세포만 체취하여 죽여버리는 근본적인 부도덕성 때문에,
이같은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지지하는 것일 뿐,
이것이, 질병 치료의 목적이 아닌, 생명 복제로 넘어갈 경우에는,
배아든, 성체든, 다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천주교회는, 지금까지 생명과학의 연구와 사회의 맥락 가운데서,
배아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배격하고, 성체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생명윤리적으로 문제가 없고, 현실성과 가시적 유익성도 있다고 지지, 후원했기 때문에,
볼테르님과 같은 시각으로 판단하게끔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설령 교회라 하더라도,
대사회적 홍보는, 심도있고 진지한 논의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적하는 바는,
볼테르님께서, 배아냐 성체냐라는 범주화를 시켜놓고,
(이것은 천주교회의 잘못일 수도 있겠으나, 말씀드렸다시피, 대중 홍보의 한계입니다)
거기에 따라 사유를 전개하시니까, 그같은 이의를 제기하시는 것이라 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셨다는 저의 딴지가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논의되는 생명윤리에 대하여,
"허술하고도 쓸모없는 기독교측의 생명연구에 대한 미봉책같은 윤리적 준거는 그동안 기독교를 위시한 규범윤리학 측의 "가치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 하신, 단언은,
너무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 볼테르님 자기 판단의 강요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이죠.
(볼테르님,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니, 노여워 마시고^^,
신학 계통의 생명윤리 논의에 대하여 좀 보셨나요?
보긴 했니? 라고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저도 별로 본 게 없어요.
하지만, 윤리신학 역시, 일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학문이고,
바티칸의 신학자들조차, 예상되는 상황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적 고려를 한다네요.
하지만, 앞서가는 현실에 소극적으로 뒤따라가기 급급하다는 아쉬움은 크죠.
근대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 전반의 위기가 아닐까요?)
일단, 영국국교회의 공식 발표문과, BBC의 논평 The Times의 기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기사의 인용만으로 판단하는 건 넘어가십시다.
사실, 영국국교회와 BBC, 해리 무어 교수의 언급은,
위의 텍스트에서 생략해도 좋은, 부수적 사안입니다.
(참고로서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참고로서도, 전체 그리스도교계의 반응도 아니고,
한 언론사와, 비판적인 생명과학자 한 사람의 논평일 뿐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죠)
제가 물었던 것은,
"독일 괴팅겐대학과 뮌스터대, 하노버대 공동 연구팀이 인간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로부터 정자로 자라날 부분을 분리,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는 사실에 대하여, 회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였습니다.
위의 텍스트의 주어는 바로 이 대목이죠.
영국국교회니, BBC니, 해리 무어니, 이런 것들은, 없어도 되는 단순 수식 성분입니다.
규범윤리학이, 철저히 탈신화화된 '솔직한' 현대 사회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당연합니다.
그제와 어제 사이에, 사랑채 게시판에서 New York 선생님께서 'Politically Correct'을 소개해 주셨기도 합니다만,
비가시적 주관의 영역인 가치론적 측면이,
이미 사회 지배 이념이 사라지고, 복잡하게 중층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킬 위험도 크고,
이 지배 이념 대신, 고도의 자본주의화, 산업화(정보화도 결국 산업화의 진화된 연장 아닐까요)의 원리가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시적이고 계량적인 공리주의적 윤리학이 실제 정책 수립 과정과 행정의 집행에 준거로 초빙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비단 도그마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즉, 계량적 내지 논리적(논리실증주의에서 말하는 식의)으로 규명할 수 없는
모든 개념과 사유들은, 개인의 취향에 정초되었겠지요.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자연과학조차도 이 점은 완전히 피해가기 어렵지 않나요?
(여기서 쿤의 주장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요. 이 대화의 대목이, 그럴 맥락도 아니고)
그리고, 행위에 따른 결과 또한, 후행 행위의 원인이 되는데,
결과만을 놓고, 순수하게 계량적으로 윤리적 측정, 판단이 가능하겠느냐 의문입니다.
(제가 윤리학 또는 윤리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솔직히, 대화를 이어나갈 추동력이 딸립니다 -.-)
볼테르님이, 가치론적 사유를 괄호 안에 유폐시킨 점에 대하여,
저는 굳이 '적극적 배제'로 보지 않습니다.
볼테르님과 초면이라면 그렇게 보고도 남았겠지만,
매 주일마다 볼테르님을 보면서 살아왔던 내 처지에, 어찌 그렇게 보겠습니까~
(솔직히, 그래서 더 신기하고,
야고보 네가 하는 말에 성급히 대꾸하려 들지 않는 것이야~^^
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으이구 저 인간~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만 ㅋ)
다만, 저는,
현대 사회의 지배 원리와, 현대 사회를 지배, 제어하는, 정치와 자본의 논리에, 동의해야만 되겠는가,
그런다면, 그들의 주술에 함몰되는 꼴이 아닌가 의문이 들구요,
그러나, 그러한 논리와 담을 쌓고만 사는 태도는, 더 시대착오적일 것입니다.
이에 관한 얘기는, 조금 아래에서 더 할 수 있을테지요.
결과론적, 현실적 차원에서, 줄기세포를 이용한 인공 정자와 난자 배양은,
불임 부부 및, 사회적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에게 가장 직접적인 사안인 점은 당연합니다.
다만, 제가, 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의 우려 표명 속에,
호모포비아적 도그마가 깔려 있다고 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여쭈었냐면,
여기에까지 교회의 생각이 미쳤겠느냐,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미국성공회, 미국장로교회 등처럼, 동성애자 서품/안수를 시행 또는 가결하는 등,
동성애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적 입장을 표명하는 교파라 하더라도,
인위적인 생명 복제와 조작에 관하여, 용인하는 입장은 표명하지 않을 것 같기에,
왜 굳이, 그리스도교가 고수해 온 호모포비아적 편견까지 들먹여야 하느냐는 딴지를 걸었던 게지요.
나아가 부연하자면, 전통적으로 존속해 온 그리스도교에 관한 볼테르님의 불만이,
(이 불만에 대해서는 저 역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좀 지나치게 파급된 것 아닌가 싶고,
이 지나친 파급은, 말씀드렸다시피,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 원인이 있고,
이 첫 단추 잘못 끼움은, 볼테르님의 경험론적, 계량적으로 정향된 사유 체계에
(아직까지는 그렇게 판단했음.
그러고보니, 지금껏 서로 익숙하게 보며 지냈던 것 같지만,
속깊은 얘기는 서로 별로 안 하고 살았구먼)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정치 및 대중 여론에 있어, 계량적으로만 접근하는 게 대단히 순진하다는 건 볼테르님도 아실텐데요.
그런데, "쓸데 없는 도그마에 함몰"되었다 평하신 것은,
사회의 현실과 현상, 그리고, 그것이 있게 한 환경적, 역사적 변인들을 도외시한 견해 같네요.
"이념적으로 안정적"이라서 "한나라당을 찍었"다,
'안정'이라는 유권자들의 판단 또한 깊이 분석해 봐야할 테지요.
아무튼, 사회는 결코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점,
('중층적'이라고도 말씀드렸거니와,
굴절과 이해관계, 상황, 취향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복합적 결과물이지요)
정치 현실을 예로 드시니, 저도 한 마디 하고 싶구요,
이 맥락에서,
개별자(개체 인격)보다는 일반론적인 접근을 우선시하는 입장에서,
불임 부부나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이 자녀를 갖게끔 해 주니,
그들의 '불행'을 해소하여 '행복'하게 만들어 줄 연구 성과 내지 기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단지, 이 이상은 말할 수 없거나, 말하려 들지 않는, 그런 차원의 것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일반론적인 행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선적 추구 대상이겠죠.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리스도교계가 발표하는 생명윤리적 입장(통일된 것은 아니나)에,
호모포비아적 편견이 깔려 있다고 보는 볼테르님의 견해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불행'을 해소시켜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이, 과연 이것 뿐이겠는지의 문제,
그리고, 이 방법으로 '불행'을 해소시켜 주면, 과연 '행복'하게만 될까라는 결과론적 의문,
또, 이러한 측면들을 모두 다 보편화, 일반화시켜 도매끔으로 분석, 논의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회의,
-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공리주의적 접근은, 개별자를 억압하고 개별 상황을 무시하는 또 다른 거시담론이 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와 권력과의 결탁에 대해서는, 볼테르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구요.
그래서, 공리주의가 과연, '진정한 행복'('가치론'적이죠)을 가져다주는 방편이 될 수 있겠는가,
현실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리주의적인, 즉, 지극히 현실적인 사유도 해야겠지만,
그것으로만 나아가는 게 과연 그리스도교적 설득력을 갖추는 방법이겠는가,
저는, 볼테르님께 묻고 싶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계량적 경제 논리와 권력이 주도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미래학적 예지의 목소리를 사회 속에서 낸다 하더라도,
그것에 귀기울여줄까 자괴감도 듭니다만,
(가시적, 물화(物化)적 영향력이 없으니 당연할 겁니다)
어차피, 종교가 행정, 경제 등의 영역에 직접적 영향력을 끼치려 드는 건,
과거 그리스도교 패권주의의 쓸데없는(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잔재라고 보구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철학은 표상적 사유이고, 과학은 계량적 사유라구요.
계량에 있어서, 그 계량의 대상이 지극히 당연한 현실체로 상정되어 있지만,
표상적 사유에서는, 그 대상이, 세계가, 당연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계 자체가 의문의 대상인 것이죠.
관념적, 종교적, 규범론적 도그마를 강요하자는 게 아니라,
공리주의, 과학주의의, '당연시'하는 안일함이 불만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상의, 가시적으로 체감하고 측정할 수 있는 측면까지 성실히 탐구해야겠고,
본회퍼가 꼬집은 바 '작업가설의 하느님'을 갖다붙이는 안일도 경계해야겠죠.
그러나, 타자의 대상화란, 위험합니다.
더욱이, 측정과 계량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위기의 원인이랄 수 있겠구요.
미국이 세계를 향해 강요하는, '미국화'로서의 '세계화'도 연상되는군요.
볼테르님이 말씀하시는(아마도, 사유 체계 속에서 지향하시는) '행복'이,
'행복'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저만의 생각일런지요.
제가 가진 몇 권 안 되는 책들조차 박스 안에 묶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참조 불가능이네요-.-
제 거처 바로 앞이 저희 학교라, 학교 도서관에서 더 좋은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겠지만,
(이럴 때면, 그 녀석의 강권에 순응해서,
그냥 교회 쪽에서 일할걸~ 하는 후회도 들어요^^)
볼테르님이 일부러 가치론적 사유 내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괄호 안에 꽁꽁 묶어두고 있는 의중은,
저도 어느 정도 헤아립니다.
종교 언어란,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이랄까, 게토 언어 중에서도 자기도취적인 성격이 강하죠.
이것 탈피하기가 참 힘듭니다.
저도,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을 괄호 안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늘 강조합니다만,
신앙 그 자체가 자아의 사유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는 말이지요.
'원리'의 수준도 넘어, 아예 '언어'지요.
볼테르님이 파악한, 천주교회의 생명윤리적 입장은, 충분히 그렇게 볼 소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지엽적인 문제라고 봐요.
천주교회가, 성체줄기세포냐, 배아줄기세포냐라는 구분으로, 생명과학 연구를 양분해서 가치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배아줄기세포에 의한 연구가, 여성 및 여성의 난자를 소모품화하고,
그 난자로써 수정란을 인공으로 만들어, 거기서 줄기세포만 체취하여 죽여버리는 근본적인 부도덕성 때문에,
이같은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지지하는 것일 뿐,
이것이, 질병 치료의 목적이 아닌, 생명 복제로 넘어갈 경우에는,
배아든, 성체든, 다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천주교회는, 지금까지 생명과학의 연구와 사회의 맥락 가운데서,
배아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배격하고, 성체줄기세포에 의한 연구를,
생명윤리적으로 문제가 없고, 현실성과 가시적 유익성도 있다고 지지, 후원했기 때문에,
볼테르님과 같은 시각으로 판단하게끔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설령 교회라 하더라도,
대사회적 홍보는, 심도있고 진지한 논의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적하는 바는,
볼테르님께서, 배아냐 성체냐라는 범주화를 시켜놓고,
(이것은 천주교회의 잘못일 수도 있겠으나, 말씀드렸다시피, 대중 홍보의 한계입니다)
거기에 따라 사유를 전개하시니까, 그같은 이의를 제기하시는 것이라 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셨다는 저의 딴지가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논의되는 생명윤리에 대하여,
"허술하고도 쓸모없는 기독교측의 생명연구에 대한 미봉책같은 윤리적 준거는 그동안 기독교를 위시한 규범윤리학 측의 "가치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 하신, 단언은,
너무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 볼테르님 자기 판단의 강요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이죠.
(볼테르님,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니, 노여워 마시고^^,
신학 계통의 생명윤리 논의에 대하여 좀 보셨나요?
보긴 했니? 라고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저도 별로 본 게 없어요.
하지만, 윤리신학 역시, 일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학문이고,
바티칸의 신학자들조차, 예상되는 상황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적 고려를 한다네요.
하지만, 앞서가는 현실에 소극적으로 뒤따라가기 급급하다는 아쉬움은 크죠.
근대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 전반의 위기가 아닐까요?)
일단, 영국국교회의 공식 발표문과, BBC의 논평 The Times의 기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기사의 인용만으로 판단하는 건 넘어가십시다.
사실, 영국국교회와 BBC, 해리 무어 교수의 언급은,
위의 텍스트에서 생략해도 좋은, 부수적 사안입니다.
(참고로서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참고로서도, 전체 그리스도교계의 반응도 아니고,
한 언론사와, 비판적인 생명과학자 한 사람의 논평일 뿐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죠)
제가 물었던 것은,
"독일 괴팅겐대학과 뮌스터대, 하노버대 공동 연구팀이 인간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로부터 정자로 자라날 부분을 분리,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는 사실에 대하여, 회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였습니다.
위의 텍스트의 주어는 바로 이 대목이죠.
영국국교회니, BBC니, 해리 무어니, 이런 것들은, 없어도 되는 단순 수식 성분입니다.
규범윤리학이, 철저히 탈신화화된 '솔직한' 현대 사회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당연합니다.
그제와 어제 사이에, 사랑채 게시판에서 New York 선생님께서 'Politically Correct'을 소개해 주셨기도 합니다만,
비가시적 주관의 영역인 가치론적 측면이,
이미 사회 지배 이념이 사라지고, 복잡하게 중층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킬 위험도 크고,
이 지배 이념 대신, 고도의 자본주의화, 산업화(정보화도 결국 산업화의 진화된 연장 아닐까요)의 원리가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시적이고 계량적인 공리주의적 윤리학이 실제 정책 수립 과정과 행정의 집행에 준거로 초빙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비단 도그마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즉, 계량적 내지 논리적(논리실증주의에서 말하는 식의)으로 규명할 수 없는
모든 개념과 사유들은, 개인의 취향에 정초되었겠지요.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자연과학조차도 이 점은 완전히 피해가기 어렵지 않나요?
(여기서 쿤의 주장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요. 이 대화의 대목이, 그럴 맥락도 아니고)
그리고, 행위에 따른 결과 또한, 후행 행위의 원인이 되는데,
결과만을 놓고, 순수하게 계량적으로 윤리적 측정, 판단이 가능하겠느냐 의문입니다.
(제가 윤리학 또는 윤리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솔직히, 대화를 이어나갈 추동력이 딸립니다 -.-)
볼테르님이, 가치론적 사유를 괄호 안에 유폐시킨 점에 대하여,
저는 굳이 '적극적 배제'로 보지 않습니다.
볼테르님과 초면이라면 그렇게 보고도 남았겠지만,
매 주일마다 볼테르님을 보면서 살아왔던 내 처지에, 어찌 그렇게 보겠습니까~
(솔직히, 그래서 더 신기하고,
야고보 네가 하는 말에 성급히 대꾸하려 들지 않는 것이야~^^
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으이구 저 인간~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만 ㅋ)
다만, 저는,
현대 사회의 지배 원리와, 현대 사회를 지배, 제어하는, 정치와 자본의 논리에, 동의해야만 되겠는가,
그런다면, 그들의 주술에 함몰되는 꼴이 아닌가 의문이 들구요,
그러나, 그러한 논리와 담을 쌓고만 사는 태도는, 더 시대착오적일 것입니다.
이에 관한 얘기는, 조금 아래에서 더 할 수 있을테지요.
결과론적, 현실적 차원에서, 줄기세포를 이용한 인공 정자와 난자 배양은,
불임 부부 및, 사회적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에게 가장 직접적인 사안인 점은 당연합니다.
다만, 제가, 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의 우려 표명 속에,
호모포비아적 도그마가 깔려 있다고 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여쭈었냐면,
여기에까지 교회의 생각이 미쳤겠느냐,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미국성공회, 미국장로교회 등처럼, 동성애자 서품/안수를 시행 또는 가결하는 등,
동성애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적 입장을 표명하는 교파라 하더라도,
인위적인 생명 복제와 조작에 관하여, 용인하는 입장은 표명하지 않을 것 같기에,
왜 굳이, 그리스도교가 고수해 온 호모포비아적 편견까지 들먹여야 하느냐는 딴지를 걸었던 게지요.
나아가 부연하자면, 전통적으로 존속해 온 그리스도교에 관한 볼테르님의 불만이,
(이 불만에 대해서는 저 역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좀 지나치게 파급된 것 아닌가 싶고,
이 지나친 파급은, 말씀드렸다시피,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 원인이 있고,
이 첫 단추 잘못 끼움은, 볼테르님의 경험론적, 계량적으로 정향된 사유 체계에
(아직까지는 그렇게 판단했음.
그러고보니, 지금껏 서로 익숙하게 보며 지냈던 것 같지만,
속깊은 얘기는 서로 별로 안 하고 살았구먼)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정치 및 대중 여론에 있어, 계량적으로만 접근하는 게 대단히 순진하다는 건 볼테르님도 아실텐데요.
그런데, "쓸데 없는 도그마에 함몰"되었다 평하신 것은,
사회의 현실과 현상, 그리고, 그것이 있게 한 환경적, 역사적 변인들을 도외시한 견해 같네요.
"이념적으로 안정적"이라서 "한나라당을 찍었"다,
'안정'이라는 유권자들의 판단 또한 깊이 분석해 봐야할 테지요.
아무튼, 사회는 결코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점,
('중층적'이라고도 말씀드렸거니와,
굴절과 이해관계, 상황, 취향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복합적 결과물이지요)
정치 현실을 예로 드시니, 저도 한 마디 하고 싶구요,
이 맥락에서,
개별자(개체 인격)보다는 일반론적인 접근을 우선시하는 입장에서,
불임 부부나 결합 관계의 동성애 연인이 자녀를 갖게끔 해 주니,
그들의 '불행'을 해소하여 '행복'하게 만들어 줄 연구 성과 내지 기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단지, 이 이상은 말할 수 없거나, 말하려 들지 않는, 그런 차원의 것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일반론적인 행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선적 추구 대상이겠죠.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리스도교계가 발표하는 생명윤리적 입장(통일된 것은 아니나)에,
호모포비아적 편견이 깔려 있다고 보는 볼테르님의 견해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불행'을 해소시켜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이, 과연 이것 뿐이겠는지의 문제,
그리고, 이 방법으로 '불행'을 해소시켜 주면, 과연 '행복'하게만 될까라는 결과론적 의문,
또, 이러한 측면들을 모두 다 보편화, 일반화시켜 도매끔으로 분석, 논의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회의,
-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공리주의적 접근은, 개별자를 억압하고 개별 상황을 무시하는 또 다른 거시담론이 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와 권력과의 결탁에 대해서는, 볼테르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구요.
그래서, 공리주의가 과연, '진정한 행복'('가치론'적이죠)을 가져다주는 방편이 될 수 있겠는가,
현실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리주의적인, 즉, 지극히 현실적인 사유도 해야겠지만,
그것으로만 나아가는 게 과연 그리스도교적 설득력을 갖추는 방법이겠는가,
저는, 볼테르님께 묻고 싶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계량적 경제 논리와 권력이 주도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미래학적 예지의 목소리를 사회 속에서 낸다 하더라도,
그것에 귀기울여줄까 자괴감도 듭니다만,
(가시적, 물화(物化)적 영향력이 없으니 당연할 겁니다)
어차피, 종교가 행정, 경제 등의 영역에 직접적 영향력을 끼치려 드는 건,
과거 그리스도교 패권주의의 쓸데없는(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잔재라고 보구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철학은 표상적 사유이고, 과학은 계량적 사유라구요.
계량에 있어서, 그 계량의 대상이 지극히 당연한 현실체로 상정되어 있지만,
표상적 사유에서는, 그 대상이, 세계가, 당연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계 자체가 의문의 대상인 것이죠.
관념적, 종교적, 규범론적 도그마를 강요하자는 게 아니라,
공리주의, 과학주의의, '당연시'하는 안일함이 불만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상의, 가시적으로 체감하고 측정할 수 있는 측면까지 성실히 탐구해야겠고,
본회퍼가 꼬집은 바 '작업가설의 하느님'을 갖다붙이는 안일도 경계해야겠죠.
그러나, 타자의 대상화란, 위험합니다.
더욱이, 측정과 계량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위기의 원인이랄 수 있겠구요.
미국이 세계를 향해 강요하는, '미국화'로서의 '세계화'도 연상되는군요.
볼테르님이 말씀하시는(아마도, 사유 체계 속에서 지향하시는) '행복'이,
'행복'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저만의 생각일런지요.
2007.04.18 20:56:32
아...한시간에 걸쳐 쓴 내용이 날아갔습니다. 몇번 느낀 거지만 여기 참 이상합니다. 제가 컴퓨터란 놈에 무지해서 그런건지....매번 답글을 쓸 때마다 분명히 로그인 한 상태에서 글을 써도 정작 업로드를 하려치면 사용할 권한이 없으니 다시 로그인하라는 메시지가 나오고....그러다가 오늘 정말 열심히 쓴 제글이 날아가버렸네요....
허탈하기도 하고 화도 납니다...막 쓰기 싫어지네요...군대있으면 좀 소심해져서 그런가...암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몇번이나 이런 경우를 당했거든요..이사이트에서 말이죠...쩝...어차피 다른 분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제가 휴가 나가는 날 만나서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시죠.ㅋㅋㅋ 공리주의에 대한 형님의 편견이 조금 심하신 것 같은데...ㅋㅋㅋ
허탈하기도 하고 화도 납니다...막 쓰기 싫어지네요...군대있으면 좀 소심해져서 그런가...암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몇번이나 이런 경우를 당했거든요..이사이트에서 말이죠...쩝...어차피 다른 분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제가 휴가 나가는 날 만나서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시죠.ㅋㅋㅋ 공리주의에 대한 형님의 편견이 조금 심하신 것 같은데...ㅋㅋㅋ
2007.04.18 21:26:44
저도 군대에서 날밤까며 야근해놓고 다 날려먹고, 그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답니다.
여기 다비아 사이트가 약간 좀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편견, 무지하니까 그렇겠지요^^
무식과 편견은 바로 옆 동네 이웃지간 아닌가?
이렇게 해 보시우:
http://dabia.net/bbs/zboard.php?id=dis
- 이렇게, 쟁토방 주소로 들어가서 로그인을 해 봐봐요.
그러면, 훨씬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로그인이 지속된다구...
그나저나, 볼테르씨를 감당할 재간이 나로서는 부족한데,
왜 다른 분들께서는 말씀들을 안 하시나요...
정말 중요한 주제인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그리스도교가 다른 분야 뒷꽁무니만 따라다니며,
볼테르씨 말마따나 '꼰대' 노릇이나 해야 되는지...
같이 고민해 보십시다.
휴대폰은 죽여 놯죠? 당연하겠지만...
내 전화번호와 거처는 그대로이니, 나오면 연락하시우^^
여기 다비아 사이트가 약간 좀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편견, 무지하니까 그렇겠지요^^
무식과 편견은 바로 옆 동네 이웃지간 아닌가?
이렇게 해 보시우:
http://dabia.net/bbs/zboard.php?id=dis
- 이렇게, 쟁토방 주소로 들어가서 로그인을 해 봐봐요.
그러면, 훨씬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로그인이 지속된다구...
그나저나, 볼테르씨를 감당할 재간이 나로서는 부족한데,
왜 다른 분들께서는 말씀들을 안 하시나요...
정말 중요한 주제인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그리스도교가 다른 분야 뒷꽁무니만 따라다니며,
볼테르씨 말마따나 '꼰대' 노릇이나 해야 되는지...
같이 고민해 보십시다.
휴대폰은 죽여 놯죠? 당연하겠지만...
내 전화번호와 거처는 그대로이니, 나오면 연락하시우^^
2007.04.19 12:01:14
ㅎㅎㅎ...아마 다음달에 길~게 나갈 것 같습니다...
충분히 회동을 가질 수 있을겝니다...ㅋㅋㅋ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어제 쓴 게 너무 아깝네요...
그래서 다시 생각나는대로나마 정리해서 올려보죠...
논문도 아니고, 뭐 어차피 지워진 글도 생각나는대로 썼으니....ㅋㅋㅋ
군대생활 1년에 "삽질"이야 이골이 난 상태라...ㅋㅋㅋ
-야고보-
충분히 회동을 가질 수 있을겝니다...ㅋㅋㅋ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어제 쓴 게 너무 아깝네요...
그래서 다시 생각나는대로나마 정리해서 올려보죠...
논문도 아니고, 뭐 어차피 지워진 글도 생각나는대로 썼으니....ㅋㅋㅋ
군대생활 1년에 "삽질"이야 이골이 난 상태라...ㅋㅋㅋ
-야고보-
2007.04.19 13:34:11
후훗~ 드디어 형제 상봉의 날이 다음 달로 다가 왔네요.
죄 없는 두꺼비들 몇 마리 제물 되겠군. ^0^
님들의 고담준론 숨죽이고 경청하다가 발자국 남깁니다.
죄 없는 두꺼비들 몇 마리 제물 되겠군. ^0^
님들의 고담준론 숨죽이고 경청하다가 발자국 남깁니다.
2007.04.19 19:55:16
에고...감사합니다...제 첫글에 환영인사 남겨주신 첫 회원님이신데...^^
홍두깨 같은 면이 좀 있더라두 이해해주십시오...
아마 실존적 신앙의 문제에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처지인지라
보시기에 글이 좀 횡설수설 할 겁니다..^^;
변명같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1. 군복무중인, 따라서 인신적 자유가 속박된 상태에서 사고가 정치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 만연체로 글을 쓰는 것이 너무 고역입니다..ㅋㅋ)
데카르트는 군복무 중에 cogito ergo sum을 생각해내고 비트겐슈타인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포로수용소에서 tractatus를집필했다는데 저는 당장 "내일도 무사히..."라는 아메바보다 조금 나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있기에...^^;
2. 제 소개도 할겸 다른 이유도 대보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순 억지인데요...외롭게 혼자 근무하는 제 처지를 감안하시고 그동안 얘기 나눌 사람이 그리웠다는 제 심경도 헤아려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제 성공회 세례명은 야고보입니다. 신약성서 "야고보의 편지"의 저자 야고보죠. 워낙 동명이인이 많아서...
세례명은 제 담당 신부님이 직접 지어주셨는데...제 신앙만큼이나 제 수호성인이 복잡한 인물이더라구요..^^;
일설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으로써 성모님이 성 요셉과의 사이에서 낳으신 육친의 자식이랍니다.
형이 그리스도라고 세상을 떠돌고 있는 동안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먹여살리는 가장이었다고 하네요.
예수 사후,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그의 위치는 베드로와 바우로의 그것보다 높은 위치로,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공의회 (형태의 논의라고해야 정확하겠지만)를 주재하고 결론을 내는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예수님과 용모가 놀랍도록 빼어닮아 그의 말의 권위가 더욱 살아났다고 하는 풍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선 성모님이 잉태되었을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동정을 지키셨으므로 육친의 자식같은 건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없었으며 그는 예수의 사촌형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수제자는 초대 교황성하이신 베드로이므로 야고보의 위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무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해내고 예수의 동생으로서의 야고보의 존재여부와 그가 교회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 역사-신학적 유추들이 담긴 책이 세상에 나와 가톨릭계와 개신교계, 고고학계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으므로 이 요상한 인물에 대해서 신부님이 "알면서도" 저에게 지어주신 이유가 궁금하여 하루는 주일에 시간을 내어 여쭤보았죠.
"신부님 왜 하필이면 야고보에요?"
신부님의 대답은 걸작이었습니다
"어...그냥 국수먹다가 생각했는데..??"
전 분명히 신부님께서 선문답을 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 중요하냐. 어느 야고보이던지 니가 살아가는 인생이 새로운 야고보의 길이 되는거지."
네...여러분
지금까지 야고보였습니다...^^
홍두깨 같은 면이 좀 있더라두 이해해주십시오...
아마 실존적 신앙의 문제에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처지인지라
보시기에 글이 좀 횡설수설 할 겁니다..^^;
변명같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1. 군복무중인, 따라서 인신적 자유가 속박된 상태에서 사고가 정치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 만연체로 글을 쓰는 것이 너무 고역입니다..ㅋㅋ)
데카르트는 군복무 중에 cogito ergo sum을 생각해내고 비트겐슈타인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포로수용소에서 tractatus를집필했다는데 저는 당장 "내일도 무사히..."라는 아메바보다 조금 나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있기에...^^;
2. 제 소개도 할겸 다른 이유도 대보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순 억지인데요...외롭게 혼자 근무하는 제 처지를 감안하시고 그동안 얘기 나눌 사람이 그리웠다는 제 심경도 헤아려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제 성공회 세례명은 야고보입니다. 신약성서 "야고보의 편지"의 저자 야고보죠. 워낙 동명이인이 많아서...
세례명은 제 담당 신부님이 직접 지어주셨는데...제 신앙만큼이나 제 수호성인이 복잡한 인물이더라구요..^^;
일설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으로써 성모님이 성 요셉과의 사이에서 낳으신 육친의 자식이랍니다.
형이 그리스도라고 세상을 떠돌고 있는 동안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먹여살리는 가장이었다고 하네요.
예수 사후,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그의 위치는 베드로와 바우로의 그것보다 높은 위치로,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공의회 (형태의 논의라고해야 정확하겠지만)를 주재하고 결론을 내는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예수님과 용모가 놀랍도록 빼어닮아 그의 말의 권위가 더욱 살아났다고 하는 풍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선 성모님이 잉태되었을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동정을 지키셨으므로 육친의 자식같은 건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없었으며 그는 예수의 사촌형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수제자는 초대 교황성하이신 베드로이므로 야고보의 위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무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해내고 예수의 동생으로서의 야고보의 존재여부와 그가 교회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 역사-신학적 유추들이 담긴 책이 세상에 나와 가톨릭계와 개신교계, 고고학계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으므로 이 요상한 인물에 대해서 신부님이 "알면서도" 저에게 지어주신 이유가 궁금하여 하루는 주일에 시간을 내어 여쭤보았죠.
"신부님 왜 하필이면 야고보에요?"
신부님의 대답은 걸작이었습니다
"어...그냥 국수먹다가 생각했는데..??"
전 분명히 신부님께서 선문답을 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 중요하냐. 어느 야고보이던지 니가 살아가는 인생이 새로운 야고보의 길이 되는거지."
네...여러분
지금까지 야고보였습니다...^^
2007.04.19 21:29:53
ㅎㅎ..야고보 형제!
나도 약 20년 전에는 '미카엘라' 자매였다우.
천주교 신앙경력 6년..^^*
다비아 무대 데뷰 겨우 한 달 지난 형제가
쟁토방 논객으로 급부상하는 걸 보고 흐뭇했지요.
더구나 젊은 과학도가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날선 논객 무명재님과 필적하는걸 보니~
breeze님과 더불어 마음껏 한 번 놀아들 보시구려.
나도 알고 님도 알다시피 난 끼어들 깜량이 못되니
그저 옆에서 구경하다가 혹 치고 받을 일 생기면,
몽둥이 들고 말리러 들어 오리다.ㅎㅎㅎ..
나도 약 20년 전에는 '미카엘라' 자매였다우.
천주교 신앙경력 6년..^^*
다비아 무대 데뷰 겨우 한 달 지난 형제가
쟁토방 논객으로 급부상하는 걸 보고 흐뭇했지요.
더구나 젊은 과학도가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날선 논객 무명재님과 필적하는걸 보니~
breeze님과 더불어 마음껏 한 번 놀아들 보시구려.
나도 알고 님도 알다시피 난 끼어들 깜량이 못되니
그저 옆에서 구경하다가 혹 치고 받을 일 생기면,
몽둥이 들고 말리러 들어 오리다.ㅎㅎㅎ..
2007.04.19 21:57:12
흐으음, 내가 야고보에게 두 가지 큰 실수를 했어요.
군에서 시집살이 하는 사람을 여기다 불러놯으니,
그대의 상황은 안중에 두지 않고 내 처지에서만 생각한 것이 첫째 실수요,
감당이 불감당인 만만찮은 친구를 불러다가, 부른 나도 쩔쩔매니 이것이 둘째 실수외다.
(안 부를껄, 씨이~~
그래도, 잘 왔어요^^~*)
사도 야고보는,
사도 바오로가 놓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의, 균형추 역할을 하시는 분 아니겠소?
(야고보서가, 진짜로 사도 야고보의 저작일지는 논란이 있겠으나)
어찌 되었건, 야고보 형제의 스승과 도움 되는 주보성인이시니, 힘써 본받아 사시오^^
求道者 선생님께서도,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옮겨오신 것이,
미카엘 천사와 연을 끊으신 것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알기로는, 미국의 경우, 주보성인 등, 종교개혁 이전의 관습들을 철저히 폐지했던 장로교회들이,
도리어 성인들 존함을 교회 이름에 더 많이 사용한다는군요^^
쟁토방은 유난히 묵직한 얘기거리들을 골라 올리라고 만든 게시판이라,
회원님들께서 좀 덜 찾는 곳이니,
사랑채 게시판에도 더러 가벼운 글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군대 안이니, 인터넷에 올리는 글에 대한 통신보안! 유념하시고^^*
군에서 시집살이 하는 사람을 여기다 불러놯으니,
그대의 상황은 안중에 두지 않고 내 처지에서만 생각한 것이 첫째 실수요,
감당이 불감당인 만만찮은 친구를 불러다가, 부른 나도 쩔쩔매니 이것이 둘째 실수외다.
(안 부를껄, 씨이~~
그래도, 잘 왔어요^^~*)
사도 야고보는,
사도 바오로가 놓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의, 균형추 역할을 하시는 분 아니겠소?
(야고보서가, 진짜로 사도 야고보의 저작일지는 논란이 있겠으나)
어찌 되었건, 야고보 형제의 스승과 도움 되는 주보성인이시니, 힘써 본받아 사시오^^
求道者 선생님께서도,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옮겨오신 것이,
미카엘 천사와 연을 끊으신 것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알기로는, 미국의 경우, 주보성인 등, 종교개혁 이전의 관습들을 철저히 폐지했던 장로교회들이,
도리어 성인들 존함을 교회 이름에 더 많이 사용한다는군요^^
쟁토방은 유난히 묵직한 얘기거리들을 골라 올리라고 만든 게시판이라,
회원님들께서 좀 덜 찾는 곳이니,
사랑채 게시판에도 더러 가벼운 글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군대 안이니, 인터넷에 올리는 글에 대한 통신보안! 유념하시고^^*
아담과 이브가 과일 따 먹은 것 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제 생각엔 위와 같은 일은 결국 벌어집니다.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 후에야 대책 강구에 대한 경각심이 발동되겠죠.
핵무기가 그렇고, 지구 온난화가 그렇고, 자연 생태 보존이 그렇듯이 -----.
사회, 문화적 분위기가 어떻든, 속된 말로 '크게 당하기 전 까진 갈 수 있는데 까지 갈 것 같다' 는게
제 견해입니다. 너무 비관적, 운명론적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