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는 언제나 이슈가 되는 내용이라 식상할수도 있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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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심판의 탄생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
기독교인들은 “심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면 “신이 심판한다.”라고 말하며 모두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실제로 심판은 그들이 하면서도 말이다. -니체-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지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과는 따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의 꼬임에 넘어가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따먹지 않았던 선악과를 갑자기 따먹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4~6)
결국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그 죄는 세상에 들어옵니다.(로마서 5:12) C.S 루이스는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담 이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사람들은 신의 영역에 제멋대로 침범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인양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판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냅니다. 인간은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 얼토당토않은 심판은 그만두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는 다음 구절들에서 남에게 죄인이라 말하는 자 역시 도덕적으로 더 잘난 것이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단지 사랑할 자격만 있을 뿐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마태복음 5:21)
"‘간음하지 말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마태복음 5:17)
예수에게는 율법조차 사랑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였습니다. 율법의 효용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스스로 낮아져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분명, 자기 자신이 낮아지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낮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섬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의 최종 목표는 사랑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 -> 자신의 죄를 깨달음 ->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낮아짐 -> 섬김의 사랑
바리새인의 실수
불행히도 예수가 살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지만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했고, 거꾸로 다른 사람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높아져 사랑과 멀어져버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교묘히 위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를 만들어 그 뒤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간음한 여자를 심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3~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레위기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여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위장된 욕망’을 눈치 챕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율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로 남을 정죄하는 사람도 그만한 죄가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율법주의와 그 뒤에 숨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일침을 가합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복음 7:1~5)
예수의 가르침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망까지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구약성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심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도 않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허탈할 정도로 손쉬웠습니다.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심판했듯이, 신약성경도 문자적으로 해석해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자주의는 신약성경까지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문자주의 해석은 ‘성경적’이라는 말과 같아져서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보호받았습니다. 이 기준에 맞추어 심판이 시작되었고 자연스럽게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동성애자와 진화론자입니다.
<계속>
하랑. 좋은 글 잘 읽었어^^
어떤 의미로 심판이란 말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엄밀하게 판단과 구분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애.
판단은 잘잘못에 대한 결정내리는 것이라면,
심판은 그 이후 책임까지 묻는 것이겠지.
대충 이렇게 어설프게 정의를 해놓고 보아도 이 두가지가 칼로
무자르듯 구분되지는 않겠지.
어떤 사태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내리게 되면 자연스레 책임으로 연결이
될 테니까.
하랑이 말하는 심판은 잘잘못은 따지는 것조차 하지 말라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 이유로 심판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결과라는 것이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잘잘못을 따져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되지 않을까?^^
사회 생활도 그렇고. 교회 내에서도 그렇고.
성도 중 누가 절도를 했어. 잘못했다고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법에서 정당한 책임을 묻기를 기대해야겠지.
심판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건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판단과 책임 묻기를 희석화 할 수 있는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다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
심판하지 말라는 말이 자폐적으로 들리는 측면이 있다네.
바리새인들이 남을 심판한 것 그 자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바리새인들 자신이 교만했든, 마음이 불순했든 누군가가 잘못했다면
잘못이라고 얘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지.
간음한 여인 사건이 그래.
바리새인들의 실수라고 한다면 심판했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에 그쳤기 때문이지
않을까?
적어도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양심의 기준에서든, 율법의 기준에서든,
간음한 여인이 잘못했다라는 공통된 인식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하랑은 돌로 쳐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움직임이 문자주의에 기초한 율법주의라는
말이지? 그렇다 하더라도 간음한 여인이 잘못했다라는 판단과 거기에 따라 책임을
묻는 태도는 필요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
예수의 정죄하지 않음이 ‘간음한 여인이 한 행위는 잘못이 아니다’가 아니라 법적인 판단(칭의)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예수에게서 판단은 그리고 심판은 그 기저에 작용하고 있었겠지.
예수의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심판행위 자체에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완악한 마음을 문제 삼는 것일테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고 단지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좀 맹목적으로 들려. 사랑에 대한 환상이 엿보인다는 것이지. 오히려 사랑은 두 눈을 감는 것이아니라
두눈을 부릅뜨고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면 비난 또는 정죄(심판 또는 판단)를 대립항에 놓기 보다 그 기반위에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심판’에 대한 너와 나의 원이해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글 전개에도 기대를 갖습니다.
오늘 글 가운데서도 마음에 와닿는 주장이 있으니,
‘율법 -> 자신의 죄를 깨달음 ->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낮아짐 -> 섬김의 사랑’ ^^
뜻에 공감하면서도, 논리적으로는 모순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판단. 심판하지 말라는 심판.
하나님처럼, 심판하지 말고, 사랑하라시는, 하나님. ㅋㅋ^^;
현실적인 모순은,
심판하는 지배자들과 심판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존재하는 구도에서,
판단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는 자는 누구고, 그걸 지켜야하는 자는 누굴까요?
꼬이는 말을 정리하겠습니다. ㅋㅋ^^
어차피 누구나 (그 파워의 차이가 현격하긴 하지만) 판단/심판을 합니다.
다만, 제대로 합시다. 사랑에 비추어,, 공정하게,, ^^*
사랑이 모냐구요? 음, 잘 판단해보시자구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