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저 진 예수만과 다른 기독교인 두 사람간의 최근 대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정신'의 근간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그리고 이곳 커뮤니티 밖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신앙적 이상과 판단을 가지고 있는지를
함께 인식하기 위해서 여기 이를 단순 소개합니다.
-----------------------------------------------------------------------------------------------------
질문자 : 진 0 0 (이곳 필명 : 진 예수만)
지난번에 ㅁㅁㅁ님과 간단히 나눈 얘기는, 한국 개신교계 신앙정신(신앙양태)의 변질이 일제강점.해방.전쟁.민주화 과정 등 한국 근대사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됐을 것이라는 그러한 얘기였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한국 교회 신앙정신 변천에 있어서 어떠한 '역사적 분기점'이 됐거나 혹은 어떠한 동인(動因)으로 작용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은 그러한 시대적 요인들과 함께 기독교정신의 변질의 직접적인 近因은 실천을 도외시한 신앙 양태(신앙적 삶이 교회생활 이외에는 전혀 삶과 연계되지 못하는 일, 신앙의 관념화라고나 할까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을 머리로만 시인하는 그러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을런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 책임은 교계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도들 모두에게 똑같은 연대책임(공동책임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러한 "기독교정신의 퇴조"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의 것만은 아니었다고 판단되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그에 관해 깊이 연구해 본 일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대강 알려진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초대교회(기독교 공인 전까지의 교회)에서는 대체로 크리스찬들의 삶이 신앙 실천적인 것이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무상통"을 기조로한 일체화된 집단 공동체 생활, 이교도와 거의 유리된 삶(카타콤이나 카파도키아 같은 주거 모습) 등으로 그 실체가 인식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라고 제아무리 외치더라도, 실은 초대 교회의 그러한 삶은 거의 광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도 대안도 없이 "초대교회 회귀"를 주장하는 이들의 무책임성/사고의 피상성이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는, 지금 이 시대 그 누구도 그러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은 만약 지구상에 지금과 같은 기계화가 진행되지 않았었더라도 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편은 그러한 (상상하기 어렵도록 '광적인') 삶의 모습이 수년도 아니고, 무려 수백 년간이나 이 지구상에서 지속됐었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시골동네 나사렛의 이름없는 예수에게서 시작된 보잘것 없던 기독교의 역사적 번창이 바로 이러한 기적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기적적인 일이 단지 한 시대의 시대적 역사성만 지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기독교의 본래적(모범적인) 모습인지, 그에 관한 의문일 것입니다.
극도로 발달된 기계문명과 함께 자본주의 세상인 지금 이 시대는 "빈부격차"는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폐해를 줄일려면 전혀 다른 메카니즘을 가진 시대가 되어야만 할 것인데, 지구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러한 "회복"은 쉽지가 않은 것이로 보이기만 합니다. 지금의 이러한 모습으로 (적어도 우리시대 끝까지) 고착되고 말 시대적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과연 기독교적인 삶이 자라매김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맺음 말씀으로, 제 의문점은 과연 "올바른 기독교"와 그러한 삶의 구현이 지금과 같은 이 시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그러한 고민입니다.
-----------------------------------------------------------------------------------------------------------
답변자 : ㅁ ㅁ ㅁ
사실 어찌보면 그당시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은 진정한 코뮌(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공동체주의)의 형태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래서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서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그러한 시각에서 언급하는 경우도있긴 합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면만을 보면 그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그당시에는 그들의 최선의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날 절대적 모범으로서 따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내산 율법의 정신이 후대(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율법의 형식적 결과로 왜곡되었는지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규정된 교회공동체의 삶은 그러한 외형적인 삶의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엡 2:21-22)라고 규정합니다. 본문을 조금 보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 역시 무엇인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거창한 목표와 시도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늘 영웅을 기다리고 환영합니다만 교회에는 영웅이나 스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죽을 밀알과 희생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저 교회는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인격을, 삶의 방향성을, 목표를, 습관과 생각을 하루하루 바꾸어 가고 변화시켜 가며 자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샌가 교회는 정말 성경에서 말한 교회로서의 자격과 권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의 사조에 역행하는 교회의 모습, 아마도 그것이 오늘에 필요한 "초대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