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담론>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시작과 함께 손수 독일 코랄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창작하여 자신의 예배공동체에서 함께 부르도록 했다. 만약 루터가 예배 요소로서의 교회음악적인 그러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종교개혁 실행이 실패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전까지는 교회에서 찬양은 신적인 선택에 의해 특별히 정해진(신께 바쳐진) 찬양대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금세기까지 찬송곡 없이는 지금처럼 개신교신앙이 정립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찬송가책의) 찬양곡들은 음악사적,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경에 포함된 기록문서들을 제외하고는 인류 최대의 영적 / 감성적 "간증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찬송곡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게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예 찬송가 곡들을 폐기처분하고 예배에서 사용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 시대의 교계 현실이 되고 말았다.
찬송(찬미)의 중요성
1. 찬송의 역사성
우선, 복음서 기록상에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가기 전에 "찬미했다(sung a Hymn)"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와 있다. 예수께서 성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연도에 도열한 사람들이 소리 높여 주님 예수를 찬미했다.
2. 찬송의 당위성
요한복음 기록처럼 위(보좌)로부터 친히 “말씀”이 내려왔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화답으로 밑에서부터(즉 사람으로부터) 위를 향해서 찬송(찬미하는 노래)이 올라가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라고 말씀하시어 찬미에 관한 당위성을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3. 찬송의 본래적 성격
찬송의 실체인 찬양은 생명의 본질인 호흡을 정성껏 한데 모아 다시 그것을 내뿜어서 소리를 만들어 주께 드리는 것인데, 이러한 생명작용 자체가 곧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찬미하는 행위(의식)인 것이다.
좋은 곡조(훌륭한 음악)는 호흡을 충분히 모아서 소리내도록 요구하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좋지가 못한 곡조(부적격하고 질 낮은 노래)는 오히려 호흡을 사그러들고 흩어지도록 만들어버린다(즉 생명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다). 이 양자간의 이러한 특성은 말하자면 좋은 성악곡과 세속 유행가의 대표적 차이점 자체이기도 하다.
4. 찬송의 음악요소적 요건
물(Water)을 향하여 바하의 <골드베르그변주곡>을 들려주면 그 결정이 정확하게 육각인, 생명에 유익하다고 알려진 소위 육각수로 되지만, 똑같은 물에 한국 민요인 "아리랑"을 들려주면 그 결정이 변형되어 찌그러지는 이와 같은 놀랍고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문화 취향적인 이유에서 혹은 어떤 시험적인 이유로 아무런 성질의 곡조든간에 무조건적으로 찬양곡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5. 예배의 요소로서의 찬송의 중요성
나는 찬송을 금세기 개신교예배의 제1의 요소로 본다(절대로 설교자의 설교보다 하위에 속할 수 없다). 찬송을 함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그 본질이 변질되거나, 난해한 성질이 개입되거나 혹은 이질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 없다.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정성스럽고 감격스럽게 한가지로 부르는, 일치되고 통일된 찬양의 모습은 이미 '천국적인 모습' 그것이다.
기타, 찬송의 음악학적 분석 / 그에 관한 견해
간혹 서울시내 지하철이 어느 특정 역에 가서는 객실내의 도착 예정 사인을 국악 악기인 해금 연주음을 사용하여 객실내 방송하는 곳이 있다. 음악적 센스에 매우 민감한 내가 그것을 들을 때, 순식간에 바이오리듬적 반응에서 매우 불편한 그러한 자극 / 감정을 느끼게 된다. 국악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겠다는 의도는 참으로 넌센스적인 일일 뿐이다.
서양음악의 논리적 체계는 희랍시대 피타고라스의 평균율 이론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왔다. 음원(악기 혹은 사람의 성대)의 진동 사이클이 초당 440인 “A음”을 바탕으로 하는 현재와 같은 음높이(음정) 배열 체계로 정립된 서양음악의 “7음계” 기법은, 음계를 기초로 장.단.증.감음의 음정기법과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일정한 음높이에 1~6개 혹은 1~7개의 변화표( #.♭)를 사용하여 각 음계의 으뜸음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그에 따라서 생성되는 30개에 이르는 각각의 다른 음조들을 사용함으로써 실로 인간의 모든 미묘한 감정을 매우 유효적절하게 대응시켜 표현해 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 각각의 음조들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통일적으로 전달되는 그것들의 고유 감정이 내재돼 있다(음악의 이러한 특성이 바로 언어와는 다른 음악의 통일성 / 효율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동양음악의 “5음계(;궁상각치우)”는 그러한 성질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중국 등지의 동양음악이 서양음악에 비해 감정처리가 매우 부족하고 완성음악 요구적 관점에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그간 한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대다수의 찬송곡들이 비록 그것들이 서양음악적인 기법을 활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신앙감성의 명료하고 효율적인 표현의 실패 등, 음악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단지 국악풍을 겨냥한 회귀욕구적이거나 혹은 실험적인 수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동양음악적인 문화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달리 말해서,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 음악성의 부족 혹은 음악의 몰이해 탓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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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
1.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에 의한 <비바람이 칠 때와>
http://blog.daum.net/7gnak/15712022?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7gnak%2F15712022
* 국내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의 깨끗하고 좋은 연주이군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연주단체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만약 지금의 이 연주를 폐쇄된 스튜디오
(녹음실)가 아닌 음향 효과가 좋은 교회당에서 연주하고 녹음했더라면 듣기좋은 풍부한
반사음향에 의해서 연주 효과가 몇배나 더 향상됐을 것으로 판단되기도 합니다.
(들어가신 후 오디오단의 플레이버튼을 누르세요)
2. <빛나고 높은 보좌와> 국립합창단 연주
http://shym.org/bbs/view.php?id=hymn&no=1121
* 전반적으로 괜찮은 연주이지만 템포를 지나치게 빠르게 잡고 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합니다.
영국의 제7일 침례교회 목사 사무엘 스테넬(Samuel Stennett, 1727~1795) 가
작시한 찬송가로 승천하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노래했다.
작곡자 T. 헤이스팅스 목사
지금의 서양음악이 동양음악과 크게 다른것 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불과 14세기까지만 해도 서남아시아(중동지방)의 음악과 매우 유사했었다는 것은 음악사를 공부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고대 히브리 지역에서 사용되던 찬양의 음계에 대해서 공부해보신적 있으신지요? 현재 이스라엘과 북아프리카 등지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전통음악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런 음악을 한번 들어보시면 지금의 서양음악보다 오히려 동양음악에 훨씬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흔히 예배학에서 말하는 예배의 '기도적 기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 찬양이지요. 특히 회중에게 찬양을 돌려준 것은 진예수만님 말씀따나 가장 종교개혁스러운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만, 물의 결정을 통해 예시로 드신 소위 '에토스 이론'(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이론이라고 하더군요.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을 나누는 기준을 '조화'와 그렇지 않음으로 나누는, 뭐 그런거)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과학적 실험을 통해 '조화'의 긍정적 기능을 말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조화로운 찬양'만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긴 어려운 것이죠.(에토스 이론의 근거가 되는 물 결정 실험이나 식물재배 실험 등이 '찬양' 담론과 직결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의 위험성도 있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이라면, 그 '조화'라는 가치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조화와 질서가 '기도'로써의 찬양이 가지는 '역동성'을 억제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경우들도 많지요. 사실 중세 가톨릭 전통이 '우'를 범한 이유도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겠죠.)
또, 서양 음악을 동양 음악(특히 국악)보다 우위에 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찬양이 서약 음악을 통해서만 가능한가라는 부분도 좀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저도 궁상각치우의 5음계가 가지는 의미가 서양 음악 7음계의 그것과 비교해서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이구요.)
향린교회를 비롯한 '국악 찬송'을 사용하자는 움직임 역시 100년 한국 기독교 역사가 소홀했던 '고유성'에 대한 재발견을 추구하자는 의미가 있겠고, (비록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그 의미를 존중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소위 '요즘 노래'들을 교회 음악에 적극적으로 접목시키는 것도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토스 이론에 의거하자면 벼락맞을(^^;) 일이겠지만, 과연 찬양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시도도 필요한게 아닌가...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