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권선거가 끝이 났다.

대중들의 추종에는 마치 동물적인 어떤 본능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갔다.

그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성’이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런 동물적 본능이 직접 드러나는 것을 창피해 하기에 ‘인간의 정신’과 같은 고상한 언어로 위장하지만 그 정신의 맨 밑바닥엔 동물의 본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본능은 바로 ‘공포’다.

이 공포는 야생의 늑대를 계약이전에 이미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이고, 바로 야생의 투쟁을 포기하게 만든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근대의 이성을 탄생시킨 중세의 공포는 마치 유신시대의 공포와 닮아 있다.

중세의 가혹했던 기억의 신체화는 혁명이란 한 번의 폭발로 해체되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의 국가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런 공포의 마음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이성이란 발명품은 만들어 졌다.

폭력이 사용되지 않고도 고분고분해졌다.

아마도 대중들의 박근혜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지지는 박정희의 공포정치에 대한 기억의 소산일 것이다.

이 기억은 대중들이 박근혜에 더욱 매달리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박정희라는 연결의 고리는 이런 공포의 기억을 더욱 강하게 연상시킨다.

 

 

지지란 공포의 외적인 표현에 다름이 아니다.

 

 

중세시대 공개처형장의 대중들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사형수에 대한 조롱과 야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사형수와 다른 존재로 자신을 증명해 보여주기 위한 과정이었다.

사형수와의 적대적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공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한 장이 바로 이 공개처형의 장이지 않을까?

그곳은 군주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장소이기도 하며 군주 또한 이런 대중의 드러냄을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치 이번 보궐선거가 이런 공개처형장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런 폭력의 확대재생산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란 증폭 속에 스스로의 파멸을 준비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처형장의 사형수를 대중이 동정하는 날 또한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렁임’을 통한 폭동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의 동요는 그 사형수의 무죄나 군주의 폭력이 부당함을 알았을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형수의 공포가 자신들에게 옮겨왔을 때,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낼 용기가 생겼을 때 생성되는 것이다.

사회의 영역에서 이런 공포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생각해 봐야만 한다.

‘국가의 보호’란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생존을 의심케 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복지’의 강화 또한 이런 국가의 보호를 강화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국가의 범주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한, 국가의 안전으로 귀속되고자 하는 한에는 국가의 공포란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국가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야생의 공포를 맞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귀속되는 공포가 아니라 미지로 열려있는 공포이며 스스로 결정하는 공포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국가의 공포에는 고통과 순명의 안도가 함께한다면 여기에는 고통과 함께 자유의 쾌락이 존재한다.

 

 

공포는 국정원, 국군사이버사령부, 보훈처 등의 댓글과 이념공세에 대한 ‘정당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코 투쟁의 주체들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투쟁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정당성’이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싸울 수 있다는 용기 단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