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목욕탕에 갔다가 어린 아이와 '소아마비'가 있는 아버지가 함께 목욕 온 것을 보았다.
사우나에 함께 앉아서 보노라니 한쪽의 다리가 약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것 보다는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굵고 튼튼한 다른 쪽의 다리가 더욱 시야에 들어왔다.
한쪽이 약한 것이 아니라 다른 쪽이 유독 튼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목욕탕의 맨몸으로부터 온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걸쳐진 옷, 착용된 어떤 것,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지워진 채 벌거벗은 신체로 다가섰을 때 우리는 약한 다리가 아닌 튼튼한 다리를 볼 수 있는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거리의 나무가 부러져 옹이가 생긴 것을 보고 우리는 '장애'라 부르지 않듯이 사람의 신체도 이와 같이 '장애'라 부르지 않을 순 없을까?
부러진 나무는 이미 다른... 가지들이 생기거나 튼튼해져 대신하고 있으며 가지가 부러진 자리의 옹이는 풍파를 겪은 세월의 징표로서 멋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조차 한다.
정치·경제적 숲에 있지 않는, 노동할 필요 없는 자연에서 나무에게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장애가 세상의 풍파를 겪은 멋있는 표징이 되지 못함이 어디에 있을까?

'장애'란 분명히 지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장애를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신체는 이미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장애'는 이미 그러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우리는 그것이 정치와 경제의 영역과 분리된 지체에 대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뒤따라 지체의 '장애'가 있기에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제외되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장애'로부터 오는 차별에 대한 평등의 주장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차별이 당연한 것이라는 의식이 포함되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바뀌어져 사유되어져야 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제외되어 있기에 그곳으로 부터 장애는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동정적 시선의 출발조차 단순한 지체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인 것에 있다.
자명하게 '장애'는 신체적 문제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경제적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장애'란 신체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자 표현일 뿐이다.

'장애'를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시선은 노동의 시선이다.
노동만이 유일하게 세상을 창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바로 이런 '장애'를 양산 해 낸다.
'부실한 노동'을 통해 '부족한 가치'만을 만들어 내는 신체는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노동하는 자이고 이것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는 자라는 생각은 노동하는 자 만이 인간이라는 관념을 드러낸다.
'노동의 인간학', '혹은 '노동의 가치론'이 기반하고 있는 '휴머니즘'이란,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를 '부실한 신체'로, 그것의 당사자를 '장애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장애우'라고 아무리 표현한 들 이런 가치가 전복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동정'을 넘어설 수 없는 시선이고 표현일 뿐이다.
'노동의 인간학'이 '노동의 가치'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의 '값어치'와 결합될 때 양적 가치의 창출에 장애가 있는 부족한 인간이 바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자본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력에 대한 가치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특정한 역사와 무관하게 모든 시대를 떠나서 형이상학적으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정확하게 자본주의적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애'란 바로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가치의 측량이자 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