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기독교가 신앙이지만 민주주의도 신앙이다. 아니 민주주의가 신앙이지만 기독교도 신앙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신앙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필요없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할 수없이 모르는 사이에 “그” 신앙을 “더” 섬긴다. 종교다원주의 위험을 얘기하지만 우리는 기독교도 섬기고 민주주의도 섬기는 데 이는 종교다원주의에 속하지 않는다. 맨날 말에 속아 살면서 그런지도 모르고 속아 산다. 민주주의, 즉,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종교의 특성은 “용인(tolerance)”이다. 남의 자유도 보장해야하니 용인이 필요하다. 죄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유민주주의. 평등과 자유라는 대립된 모순을 내재하고 가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니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용인해야하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하나님도 하나의 국민이다: 다 평등한 한 자유민주주의 멤버이다. 이를 용인한다. 그런데 무엇을 용인 못할까? 전쟁? 우리는 용인한다; 사람들에게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슨 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할까? 용인이라는 단어의 뜻도 몰랐던 그 어린 시절부터 용인하고 살았다. 그렇게 "하나뿐인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로 섬기지 못하면 성경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부모의 죄를 대대손손 치르는 것이다.
오늘 날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목사님들이 보았을 때도) 피를 토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라는 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미 “다른” 종교를 섬기기 때문이다(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종교는 “완성된” 종교라 종교라는 단어 서비스도 필요없다. 종교안에서 신학자들이 건강하건 비건강하게 토론이나 피터지게 싸울 때에 그 완성돤 종교들은 웃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종교 절대 완성 안된다고 말이다.
성경의 인문학적 이해? 반어적 표현 결석한채로 정말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이는 인문학의 이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 없습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인문학 안 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못한 사람들이 그래서 아직 인문학에서 인문학 가르칩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정말 인문학을 제대로 배우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사람인 우리는 무지를 순수함과 친절로 포장해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물론 유혹은 큽니다: 옆에서 박수까지 쳐주는데요. 그러나 그 유혹에서 느는 것은 화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로도 포장을 합니다. 그 포장들을 우리는 다 용인합니다.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길잃은 양에게 자유가 무슨 의미일까요? 말씀의 힘까지 빌려 길잃은 양들에게 길잃는 면허증을 파시는 괜찮은 목사님들도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오시지만 예수님을 파신 분들은 경찰처럼 옆집아저씨처럼 "목자"처럼 오시는가? 종교가, 신앙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기독교가 신앙이지만 민주주의도 신앙이다. 아니 민주주의가 신앙이지만 기독교도 신앙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신앙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필요없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할 수없이 모르는 사이에 “그” 신앙을 “더” 섬긴다. 종교다원주의 위험을 얘기하지만 우리는 기독교도 섬기고 민주주의도 섬기는 데 이는 종교다원주의에 속하지 않는다. 맨날 말에 속아 살면서 그런지도 모르고 속아 산다. 민주주의, 즉,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종교의 특성은 “용인(tolerance)”이다. 남의 자유도 보장해야하니 용인이 필요하다. 죄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유민주주의. 평등과 자유라는 대립된 모순을 내재하고 가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니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용인해야하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하나님도 하나의 국민이다: 다 평등한 한 자유민주주의 멤버이다. 이를 용인한다. 그런데 무엇을 용인 못할까? 전쟁? 우리는 용인한다; 사람들에게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슨 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할까? 용인이라는 단어의 뜻도 몰랐던 그 어린 시절부터 용인하고 살았다. 그렇게 "하나뿐인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로 섬기지 못하면 성경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부모의 죄를 대대손손 치르는 것이다.
오늘 날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목사님들이 보았을 때도) 피를 토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라는 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미 “다른” 종교를 섬기기 때문이다(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종교는 “완성된” 종교라 종교라는 단어 서비스도 필요없다. 종교안에서 신학자들이 건강하건 비건강하게 토론이나 피터지게 싸울 때에 그 완성돤 종교들은 웃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종교 절대 완성 안된다고 말이다.
성경의 인문학적 이해? 반어적 표현 결석한채로 정말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이는 인문학의 이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 없습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인문학 안 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못한 사람들이 그래서 아직 인문학에서 인문학 가르칩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정말 인문학을 제대로 배우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사람인 우리는 무지를 순수함과 친절로 포장해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물론 유혹은 큽니다: 옆에서 박수까지 쳐주는데요. 그러나 그 유혹에서 느는 것은 화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로도 포장을 합니다. 그 포장들을 우리는 다 용인합니다.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길잃은 양에게 자유가 무슨 의미일까요? 말씀의 힘까지 빌려 길잃은 양들에게 길잃는 면허증을 파시는 괜찮은 목사님들도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오시지만 예수님을 파신 분들은 경찰처럼 옆집아저씨처럼 "목자"처럼 오시는가? 종교가, 신앙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2007.02.14 20:30:06
여러 번 밝힌 대로 다비아는 소통을 하는 곳이지 배설을 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럽니다.
내 마음이 글로 남에게 잘 전달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논리 아니겠습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라면서...
내 마음이 글로 남에게 잘 전달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논리 아니겠습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라면서...
2007.02.14 20:37:21
우리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 것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다비아에서는 익숙치 않게 친절한 글이 아니어서 그럴 것입니다(친절한게 목적이 아닙니다). 논리의 전개? 어떠한 새로운 내용의 소개글이라고 해두지요. "거기"까지만 쓴 것은 제가 지금 영어로 집필하는 책을 쓰면서 온 인사이트의 한 기본은 다비아에서만큼은 나누어야 했기에 익숙치않은 글이라도 분명 전달되는 부분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란 글입니다. 논리적인 글이 지향하는 바, 논리자체가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은 논리로는 불충분하고 논리자체보다 중요합니다. 가능하다해도 논리로 그것을 전달하자면 책 몇권 써야합니다.
글의 제목과 논리의 전개 그리고 결론?
그것 너무 친절하게 하면 먼지털다가 잎이 떨어집니다.
명확하게 쓰는 글, 제가 예전에 전통과 정통이란 주제로 사랑채에 쓴 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못써서 이렇게 쓴 것 아닙니다.
즉시의 이해와 독해만을 너무 구하지 마세요.
익숙치 않아도 분명히 전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글"은 "show"하는 것이지 "tell"하는 것이 아닙니다: Show, don't tell.
연속극, 논리 전개 잘 됩니다.
운영자님의 질문 삭제할 때의 저의 이 덧글을 삭제해도 됩니다.
왜냐고요? 지금 "tell"하고 있잖아요; "show"하는 것아니라 말입니다.
물론 그냥 놔두면 제가 의도한 글이 아니라 다른 글이 되겠지요.
송구스럽지만 질문이 너무 성급하셨다고 생각됩니다.
글의 제목과 논리의 전개 그리고 결론?
그것 너무 친절하게 하면 먼지털다가 잎이 떨어집니다.
명확하게 쓰는 글, 제가 예전에 전통과 정통이란 주제로 사랑채에 쓴 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못써서 이렇게 쓴 것 아닙니다.
즉시의 이해와 독해만을 너무 구하지 마세요.
익숙치 않아도 분명히 전달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글"은 "show"하는 것이지 "tell"하는 것이 아닙니다: Show, don't tell.
연속극, 논리 전개 잘 됩니다.
운영자님의 질문 삭제할 때의 저의 이 덧글을 삭제해도 됩니다.
왜냐고요? 지금 "tell"하고 있잖아요; "show"하는 것아니라 말입니다.
물론 그냥 놔두면 제가 의도한 글이 아니라 다른 글이 되겠지요.
송구스럽지만 질문이 너무 성급하셨다고 생각됩니다.
2007.02.14 20:41:22
시가 논리없는 배설입니까?
소통을 하는 형식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서 외모같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소통을 하는 형식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서 외모같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2007.02.14 21:27:56
민주주의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자유민주주의는 그 가운데 하나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학적 상식조차도 전제되지 않은 글 같은데 말이죠. 무시해도 될 듯 합니다. 설마, 이런 의견도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개진이니, 존중해 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만약 그러신다면 본문과 상반되는 자가당착일테니까.
2007.02.14 21:29:27
"배설을 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럽니다"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운영자"에게 사과를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첫 덧글에서 친절하게 "글의 제목과 논리의 전개 그리고 결론이 잘 연결이 안 돼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가
확 잡히질 않네요." 하시고 갑자기 "배설을 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럽니다"로 하시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그리고 이러한 성급한 질문을 하시고 이어지는 것은 시간을 내서 여기 다비아에 글을 올린 저의 본 의도에 어긋납니다. 말씀드린대로 운영자님의 첫 덧글을 지우실 때에 저의 그에 대한 답변 덧글 지우시십시요. 제가 운영자의 덧글을 지울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운영자님이 그렇게 성급하게 질문하셨으니 정말 회원입장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난감합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확 안잡힌다고 하셨지만 운영자께서 정말 "배설"이라고 처음부터 이해되고 독해되었다면 그 "목소리"는 존중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목소리이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운영자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확 잡히질 않네요." 하시고 갑자기 "배설을 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럽니다"로 하시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그리고 이러한 성급한 질문을 하시고 이어지는 것은 시간을 내서 여기 다비아에 글을 올린 저의 본 의도에 어긋납니다. 말씀드린대로 운영자님의 첫 덧글을 지우실 때에 저의 그에 대한 답변 덧글 지우시십시요. 제가 운영자의 덧글을 지울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운영자님이 그렇게 성급하게 질문하셨으니 정말 회원입장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난감합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확 안잡힌다고 하셨지만 운영자께서 정말 "배설"이라고 처음부터 이해되고 독해되었다면 그 "목소리"는 존중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목소리이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운영자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2007.02.14 21:38:27

아니예요.
뉴욕님은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겁니다.
사유의 틀이 좀 다르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글은 아닙니다.
저는 십분 뉴욕님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뉴욕님은 단순히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세계관적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도 하나의 종교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은
정당하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거침, 혹은 건너 뜀을 좀 인내하고 다시 한번 정독하신다면
뉴욕님이 보여주시는 글의 뜻을 새길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뉴욕님 위에 운영자께서 사용하신 단어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운영하는 입장에서 기계적으로 보인 반응 처럼 읽혀집니다.
추신) 지금 뉴욕님의 심정 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런 심정이거든요 ㅡ.ㅡ;;
뉴욕님은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겁니다.
사유의 틀이 좀 다르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글은 아닙니다.
저는 십분 뉴욕님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뉴욕님은 단순히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세계관적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도 하나의 종교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은
정당하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거침, 혹은 건너 뜀을 좀 인내하고 다시 한번 정독하신다면
뉴욕님이 보여주시는 글의 뜻을 새길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뉴욕님 위에 운영자께서 사용하신 단어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운영하는 입장에서 기계적으로 보인 반응 처럼 읽혀집니다.
추신) 지금 뉴욕님의 심정 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런 심정이거든요 ㅡ.ㅡ;;
2007.02.14 21:40:48
More님,
"의견"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이해하자는 노력에서 "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라는 형용사를 쓴 것입니다. 님의 콘멘트의 다른 부분은 답할 필요가 없네요. 형용사에서 걸리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지 운영자님이 그렇게 질문이 나오면...참....
나보코프의 로리타라는 소설도 나이 먹은 아저씨가 어린 여자아이를 성의 노예로 쓴 "형용사"가 주제이겠네요.
제가 숙제를 하나드리지요.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첫 문장이 이해가 되는 지 읽어보세요. 제글이 그렇게 읽혔다면 그 첫 문장 이해가 안 올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읽어 보라는 빅힌트와 그 책이 "고전"이라는 권위의 무게가 성급함을 줄이기는 하겠지요.
그나마 비건설쪽으로 흐르기 쉬운 이 덧글의 시작을 건설 쪽으로 돌리기 위함인데..
"의견"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이해하자는 노력에서 "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라는 형용사를 쓴 것입니다. 님의 콘멘트의 다른 부분은 답할 필요가 없네요. 형용사에서 걸리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지 운영자님이 그렇게 질문이 나오면...참....
나보코프의 로리타라는 소설도 나이 먹은 아저씨가 어린 여자아이를 성의 노예로 쓴 "형용사"가 주제이겠네요.
제가 숙제를 하나드리지요.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첫 문장이 이해가 되는 지 읽어보세요. 제글이 그렇게 읽혔다면 그 첫 문장 이해가 안 올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읽어 보라는 빅힌트와 그 책이 "고전"이라는 권위의 무게가 성급함을 줄이기는 하겠지요.
그나마 비건설쪽으로 흐르기 쉬운 이 덧글의 시작을 건설 쪽으로 돌리기 위함인데..
2007.02.14 21:49:43
-자유민주주의도 신앙처럼 믿음의 대상이 될수 있다는 말씀에 동감함니다.
-좀더 추가해서 자유민주주의 그것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힘은 마치 살아움직이는 주식그래프처럼 한국교회에서도 진실하게 보여집니다.
어느 교회가 뜬다...어느 목사가 뜬다...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는 주식시장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은혜는 다 챙기고 천국에서도 소유할수 있는 나만의 것을 누가 더
담력있게 깔끔하게 말씀까지 근거로 해가며 전하는가에 따라서 이미 자본이 몰리고
사람이 몰립니다.나도 한표 목사도 한표 예수님도 한표 이런곳 말입니다.
-좀더 추가해서 자유민주주의 그것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힘은 마치 살아움직이는 주식그래프처럼 한국교회에서도 진실하게 보여집니다.
어느 교회가 뜬다...어느 목사가 뜬다...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는 주식시장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은혜는 다 챙기고 천국에서도 소유할수 있는 나만의 것을 누가 더
담력있게 깔끔하게 말씀까지 근거로 해가며 전하는가에 따라서 이미 자본이 몰리고
사람이 몰립니다.나도 한표 목사도 한표 예수님도 한표 이런곳 말입니다.
2007.02.14 22:27:20
제가 무성의하게 쓱 훑어보고 선입견에 따라 재단했던 점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드립니다.
민주주의, 다원주의의 동기 및 지향하는 목표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인, 나보다 타자를 더 낫게 여기라는 그러한 발로에서의 다원성, 민주주의이냐, 그 정반대인, 자신의 이기적 욕망 충족을 합리화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도구로서의 다원주의, 민주주의이냐를 심각하게 성찰하고 고민해야 되라라 봅니다.
저 또한, 끝없는 이기적 욕망 추구로만 치닫고, 그것을 부추겨 재생산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 다원주의의 미명으로 포장하는 현대 사회, 특히 작금의 한국 사회의 풍조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김영완님께서도 지적하셨고, 뉴욕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자유민주주의'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결합인데, 이기적 욕망 추구를 민주주의라는 제도로 고상하게 포장하지만, 실상 그 속내는 저 옛날 루소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다원주의, 민주주의 안에서의 자율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으로 합리화시킨, 대단히 위선적이고 모순인 사회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껏 제가 이해하기로, 민주주의와 다원성은 '상생', 즉 생명의 문화를 위해 추구해야 될 가치로 여겼습니다만, 뉴욕님의 말씀을 다시금 차근히 곱씹어보니,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 아래에서의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는 실상, 상살, 즉 죽임의 문화가 아니냐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생명의 문화를 위해 민주주의와 다원성을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교마저, 뉴욕님의 지적처럼 자신의 욕망 추구를 위해, 이기적인 속내를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로 포장한 위선과 죽임의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에 함몰되어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인간 사회, 특히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다원성, 자본주의는 대세겠지요. 그러나, 사회 구성원, 특히 종교인은 이것의 맹점들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견제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다원주의의 동기 및 지향하는 목표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인, 나보다 타자를 더 낫게 여기라는 그러한 발로에서의 다원성, 민주주의이냐, 그 정반대인, 자신의 이기적 욕망 충족을 합리화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도구로서의 다원주의, 민주주의이냐를 심각하게 성찰하고 고민해야 되라라 봅니다.
저 또한, 끝없는 이기적 욕망 추구로만 치닫고, 그것을 부추겨 재생산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 다원주의의 미명으로 포장하는 현대 사회, 특히 작금의 한국 사회의 풍조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김영완님께서도 지적하셨고, 뉴욕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자유민주주의'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결합인데, 이기적 욕망 추구를 민주주의라는 제도로 고상하게 포장하지만, 실상 그 속내는 저 옛날 루소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다원주의, 민주주의 안에서의 자율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으로 합리화시킨, 대단히 위선적이고 모순인 사회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껏 제가 이해하기로, 민주주의와 다원성은 '상생', 즉 생명의 문화를 위해 추구해야 될 가치로 여겼습니다만, 뉴욕님의 말씀을 다시금 차근히 곱씹어보니,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 아래에서의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는 실상, 상살, 즉 죽임의 문화가 아니냐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생명의 문화를 위해 민주주의와 다원성을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교마저, 뉴욕님의 지적처럼 자신의 욕망 추구를 위해, 이기적인 속내를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로 포장한 위선과 죽임의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에 함몰되어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인간 사회, 특히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다원성, 자본주의는 대세겠지요. 그러나, 사회 구성원, 특히 종교인은 이것의 맹점들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견제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7.02.15 00:22:51
자유민주주의가 기독교의 적이라니!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신앙의 적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주장인가요?
뉴욕님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셨군요.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
민주주의, 즉,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의가 어디서 온 걸까요?
뉴욕님은 민주주의를 하나님을 반역한 천상의 반란으로 보시나요.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민주주의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예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압살하는 독재자를 겨냥하고 있어요.
무솔리니, 히틀러, 박통, 전통,노통 그런 사람 말입니다.
저 위쪽에 있는 김씨도 마찬가지겠죠.
다시말하면 권력이 일인독재자에게 있는게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거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그런 뜻 아닌가요?
그걸 인정하고 따르는 체제가 민주주의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니요?
뉴옥님은 글을 쓸 때 이미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군요.
그러니 오류가 있을 수 밖에.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독재자로부터 독립만세예요.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는 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모독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신앙의 적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주장인가요?
뉴욕님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셨군요.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
민주주의, 즉,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민주주의의가 어디서 온 걸까요?
뉴욕님은 민주주의를 하나님을 반역한 천상의 반란으로 보시나요.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민주주의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예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압살하는 독재자를 겨냥하고 있어요.
무솔리니, 히틀러, 박통, 전통,노통 그런 사람 말입니다.
저 위쪽에 있는 김씨도 마찬가지겠죠.
다시말하면 권력이 일인독재자에게 있는게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거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그런 뜻 아닌가요?
그걸 인정하고 따르는 체제가 민주주의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니요?
뉴옥님은 글을 쓸 때 이미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군요.
그러니 오류가 있을 수 밖에.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독재자로부터 독립만세예요.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는 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모독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02.15 00:41:19
교회안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건
하나님을 제쳐놓고 인간이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짐이 곧 법인 담임목사의 전제적 목회행위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인간이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짐이 곧 법인 담임목사의 전제적 목회행위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표현입니다.
2007.02.15 00:44:29
몇 시간 지나고 보니 논의가 뜻 밖의 상황으로......
New York 님께서 배설이라는 표현에 그런 반응을 하신 것은 저의 댓글을 잘못 이해하신 때문입니다.
님의 글이 배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쌍방간의 소통과 대화 보다는 일방적인 선전포고나 훈계 및 교육과 같은
방식으로 여기에 글을 쓰는 분들을 향한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최근에 그런 사례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그리고 제가 배설이라는 표현을 하기 전에 님께서 저의 첫 번째 댓글에 답하는 글을 쓰셨다가 후에 첨가하시는 바람에 마치 제가 뜬금없이 배설이라는 표현을 바로 한 것 처럼 댓글의 순서가 뒤바꿔져 있군요. 제가 연속으로 두 번 댓글을 단 게 아니라 님의 두 번째 댓글에 대해 답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배설을 이야기한 것으로 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님의 댓글 순서가 갑자기 뒤바뀌는 바람에 성질 급한 운영자가 되고 말았군요.
배설이라는 표현은 N.Y.님을 향한 게 아니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립니다~~~
New York 님께서 배설이라는 표현에 그런 반응을 하신 것은 저의 댓글을 잘못 이해하신 때문입니다.
님의 글이 배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쌍방간의 소통과 대화 보다는 일방적인 선전포고나 훈계 및 교육과 같은
방식으로 여기에 글을 쓰는 분들을 향한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최근에 그런 사례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그리고 제가 배설이라는 표현을 하기 전에 님께서 저의 첫 번째 댓글에 답하는 글을 쓰셨다가 후에 첨가하시는 바람에 마치 제가 뜬금없이 배설이라는 표현을 바로 한 것 처럼 댓글의 순서가 뒤바꿔져 있군요. 제가 연속으로 두 번 댓글을 단 게 아니라 님의 두 번째 댓글에 대해 답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배설을 이야기한 것으로 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님의 댓글 순서가 갑자기 뒤바뀌는 바람에 성질 급한 운영자가 되고 말았군요.
배설이라는 표현은 N.Y.님을 향한 게 아니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립니다~~~
2007.02.15 02:27:19
이길용님의 변호를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N.Y.의 글쓰기는 기본기가 안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 스타일이지,
학자의 어휘력/글전개라고는 도저히,,,
그냥 미국에 계시라니까,,,
N.Y.의 글쓰기는 기본기가 안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 스타일이지,
학자의 어휘력/글전개라고는 도저히,,,
그냥 미국에 계시라니까,,,
2007.02.15 23:58:55
너무들 쉽게 흥분하시는 것 같은데
그 모습들 마저도 뉴욕님의 글에 예언되어진 것 같습니다.
느는 것이 화 밖에 없다시잖습니까? ㅎㅎㅎ
저도 실은 이길용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많이 생각하게 만든 글이었고
생각해 볼수록 긍정하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독재에 대해서는
그 반대적 위치에서 그 역활을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기독교 신앙 자체에서는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 속에서 보이는 실제적인 모습은
뉴욕 님이 지적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이고 있음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하게 짚어 보아야 할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뉴욕님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지금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그 모습들 마저도 뉴욕님의 글에 예언되어진 것 같습니다.
느는 것이 화 밖에 없다시잖습니까? ㅎㅎㅎ
저도 실은 이길용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많이 생각하게 만든 글이었고
생각해 볼수록 긍정하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독재에 대해서는
그 반대적 위치에서 그 역활을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기독교 신앙 자체에서는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 속에서 보이는 실제적인 모습은
뉴욕 님이 지적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이고 있음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하게 짚어 보아야 할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뉴욕님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지금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2007.02.16 00:36:17
저의 독해력이 부족해서인지
서너 번을 읽고난 후 비로소 감을 잡았습니다.
님께서 소개하시고자 하는 그 어떤 "새로운 내용"을 말입니다.
N.York님!
글이 아무리 'Show'하는 것이라해도
소통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리고'
마지막 단락 '성경의 인문학적~'부터는
이곳의 다비아 운동 자체를
약간 cynical하게 보고 계신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혀 아니셨다면...양해를 구합니다.
서너 번을 읽고난 후 비로소 감을 잡았습니다.
님께서 소개하시고자 하는 그 어떤 "새로운 내용"을 말입니다.
N.York님!
글이 아무리 'Show'하는 것이라해도
소통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리고'
마지막 단락 '성경의 인문학적~'부터는
이곳의 다비아 운동 자체를
약간 cynical하게 보고 계신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혀 아니셨다면...양해를 구합니다.
2007.02.17 01:00:22
힌트 1: 한국 대학생들의 문화내지는 가치관을 두고 보았을 때에 독재정권이라는 보이는 적이 있었을 때와 민주주의 “승리”로 독재정권이 물러나간 이후에 오늘에 이른 때를 비교해보라. 한국에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말의 일반화가 가능해진 민주주의의 문화? “부자되세요” 만큼 반기독교적, 반예수적, 반 성경적 발상이 있나를 생각하게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혼동하지 말자: 예를 들어 우리나라 독재시절에도 경제체제는 자유자본주의이였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유자본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정부의 존재: 니체가 말하는 정부(state)의 혹은 정부라는 거짓말 참조).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는 삼성이라는 회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비아는 민주주의이다: 서로의 의견과 무식(혹은 유식?)을 존중하라는 민주주의의 신앙, 아니 정통(정통이 신앙이 되어버리는 단체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이 이미 기독교보다 더욱 깊게 우선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지적할 수 있지만 다비아의 성경의 인문학적 접근은 절대 그렇게 지적한 것이 아니다(위의 구도자의 댓글에서 처럼). 성경의 인문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렇게 정말 하냐 말이다(“can you?”가 아니라 “do you?”). 즉, 미국에서는 골프가 대중화되어있고 지난 한 10년간 가장 인기가 올라간 스포츠가 있다면 골프이다. 그러다보니 “일요일”이라는 황금날에 골프를 치는 교인들의 질문: 골프장에서 예배보면 안 되나요? 왜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냐” 말이다.
(어느 한인교회인가 어딘가에서 골프장에서 예배를 본다는 기사를 어디서 수년전에 읽은 것같다. 이는 예외이다: 예외는 표준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예외적인 경우도 계속 되었는지 의문이다).
More님이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저는 그렇게 지적한 바가 없습니다.
모어님이 사과하셨는데 사과를 받는 제 입장을 떠나서라도 그 “덕”이 존경스럽스럽습니다. 그 의미에서 제 입장을 떠나서 모아님의 덧글내지는 다른 글에서 보이는 것 하나만 지적하겠습니다. 쓰시고 있는 큰 단어와 용어에 대한 이해부족입니다; 원칙적으로 용어(jargon)나 무게가 있는 “큰” 단어를 쓸 때에는 극히 조심해야 하고 아예 안 쓰는 것이 가능하면 정답입니다("글"이라는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신학교의 정통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정의에 의해서. 우리나라 청소년 채팅문화의 “암호”의 문제점.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정통”을 깨부신 것인데 기독교는 다시 정통을 세우고 있음.
힌트 2: 기독교의 최고의 적: 기독교
힌트 3: 윗글이 어렵게 읽힌다면 다비아에선 인문학을 실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은폐된 것이 많은 책이다. 즉, 인문학을 하는 곳은 없다(학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말기): 그래서 다비아가 소중하다. 다비아에서 인문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발목을 잡는 것? 민주주의(다시 위의 본문참조). 한국(다른 나라도)의 기독교 사회가 아직 민주주의를 수용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않다.
힌트 4: “소통이 어렵다.”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에서 소통이 어렵게라도 된다면 기적. 다행히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이 이를 문화적이슈로라도 대두시킨 것은 잠시나마 다행이었음.
힌트 5: 결론은 혼자 깨달음을 얻어서 내기 예수님이 직빵으로 명확히 얘기 않고 비유한 이유
힌트 6: 성인이 글을 쓰지 않는 이유.
힌트 7: 책을 읽는 이를 위해서 글을,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힘들다. 책을 읽지 않는 이를 위해서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함: 그러므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책은 책이 아닌 출판물, 상품임. 책을 읽지 않는 이를 위해서 책을 쓰는 불가능을 갖고 싶은 허영버리기.
힌트 8: 다비아의 글들에서 지적하는 기독교문제, 신학교문제, 교회문제를 체계화시킨, 이미 조직화시킨, 사회화, 현실화시킨 배후의 문제점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그들이” 우리보다 어리석어서 못나서 그렇게 사는 것 아니라는 겸손함 갖기내지는 자만심 버리기. 그러면 답이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음.
사이비 교주?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님: 이미 종교는 너무 많음.
시간상, 내용상 존칭 생략했습니다. 윗 본문에 대하여 제대로 된 질문은 정말 기대합니다: 그것이 답의 형식을 빌리더라도. 그 맥락에서 이길용님의 질문: “저는 십분 뉴욕님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리키고 있는 “곳”에 “가서” 생각하기.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혼동하지 말자: 예를 들어 우리나라 독재시절에도 경제체제는 자유자본주의이였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유자본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정부의 존재: 니체가 말하는 정부(state)의 혹은 정부라는 거짓말 참조).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는 삼성이라는 회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비아는 민주주의이다: 서로의 의견과 무식(혹은 유식?)을 존중하라는 민주주의의 신앙, 아니 정통(정통이 신앙이 되어버리는 단체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이 이미 기독교보다 더욱 깊게 우선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지적할 수 있지만 다비아의 성경의 인문학적 접근은 절대 그렇게 지적한 것이 아니다(위의 구도자의 댓글에서 처럼). 성경의 인문학적 접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렇게 정말 하냐 말이다(“can you?”가 아니라 “do you?”). 즉, 미국에서는 골프가 대중화되어있고 지난 한 10년간 가장 인기가 올라간 스포츠가 있다면 골프이다. 그러다보니 “일요일”이라는 황금날에 골프를 치는 교인들의 질문: 골프장에서 예배보면 안 되나요? 왜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냐” 말이다.
(어느 한인교회인가 어딘가에서 골프장에서 예배를 본다는 기사를 어디서 수년전에 읽은 것같다. 이는 예외이다: 예외는 표준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예외적인 경우도 계속 되었는지 의문이다).
More님이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저는 그렇게 지적한 바가 없습니다.
모어님이 사과하셨는데 사과를 받는 제 입장을 떠나서라도 그 “덕”이 존경스럽스럽습니다. 그 의미에서 제 입장을 떠나서 모아님의 덧글내지는 다른 글에서 보이는 것 하나만 지적하겠습니다. 쓰시고 있는 큰 단어와 용어에 대한 이해부족입니다; 원칙적으로 용어(jargon)나 무게가 있는 “큰” 단어를 쓸 때에는 극히 조심해야 하고 아예 안 쓰는 것이 가능하면 정답입니다("글"이라는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신학교의 정통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정의에 의해서. 우리나라 청소년 채팅문화의 “암호”의 문제점.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정통”을 깨부신 것인데 기독교는 다시 정통을 세우고 있음.
힌트 2: 기독교의 최고의 적: 기독교
힌트 3: 윗글이 어렵게 읽힌다면 다비아에선 인문학을 실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은폐된 것이 많은 책이다. 즉, 인문학을 하는 곳은 없다(학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말기): 그래서 다비아가 소중하다. 다비아에서 인문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발목을 잡는 것? 민주주의(다시 위의 본문참조). 한국(다른 나라도)의 기독교 사회가 아직 민주주의를 수용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않다.
힌트 4: “소통이 어렵다.”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에서 소통이 어렵게라도 된다면 기적. 다행히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이 이를 문화적이슈로라도 대두시킨 것은 잠시나마 다행이었음.
힌트 5: 결론은 혼자 깨달음을 얻어서 내기 예수님이 직빵으로 명확히 얘기 않고 비유한 이유
힌트 6: 성인이 글을 쓰지 않는 이유.
힌트 7: 책을 읽는 이를 위해서 글을,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힘들다. 책을 읽지 않는 이를 위해서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함: 그러므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책은 책이 아닌 출판물, 상품임. 책을 읽지 않는 이를 위해서 책을 쓰는 불가능을 갖고 싶은 허영버리기.
힌트 8: 다비아의 글들에서 지적하는 기독교문제, 신학교문제, 교회문제를 체계화시킨, 이미 조직화시킨, 사회화, 현실화시킨 배후의 문제점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그들이” 우리보다 어리석어서 못나서 그렇게 사는 것 아니라는 겸손함 갖기내지는 자만심 버리기. 그러면 답이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음.
사이비 교주?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님: 이미 종교는 너무 많음.
시간상, 내용상 존칭 생략했습니다. 윗 본문에 대하여 제대로 된 질문은 정말 기대합니다: 그것이 답의 형식을 빌리더라도. 그 맥락에서 이길용님의 질문: “저는 십분 뉴욕님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리키고 있는 “곳”에 “가서” 생각하기.
2007.02.17 01:42:31
제가 위에서 쓴, "지적하셨다시피"라는 말은 김영완님의 말씀을 지칭한 것이었고,
"뉴욕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라는 부분은,
뉴욕님께서 사용하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필이면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하신 데
저는 주목한 것이지요.
용어 사용의 정확성 결여를 제게 지적하셨는데,
자유민주주의란, 서구 근대 이후의 부르주아 시민혁명 이후의 입헌민주주의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경제적인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형성,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민주주의 내지 다원성과,
경제적 자본주의 및 그에 내재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용어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 저의 글들에서 보인다 하셨는데,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상세하게 댓글 또는 쪽지, 메일로 구체적인 지적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안 보셨을지 모르겠으나, 저는 개념과 명칭의 정확성을 누구 못지않게 중시하거든요.
그리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의는 짐작하겠사오나,
이렇게 긴밀성이 떨어지는 성긴 언어를 구사하시면, 소통이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제가 위에 단 댓글은, 뉴욕님의 파편화된, 그러나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요한 바를
미루어 짐작해 나름의 생각과 함께 다시 정리해 보려 한 시도였는데,
부정확한 개념 이해를 지적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에는 저 또한 진심으로 한탄어린 동감을 표하고 싶습니다만,
소통이 잘 되고 못 되고의 여부는 사회에만 달려있지는 않고,
개인 차원의 적절한 언어 조탁과 직조도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뉴욕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라는 부분은,
뉴욕님께서 사용하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필이면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하신 데
저는 주목한 것이지요.
용어 사용의 정확성 결여를 제게 지적하셨는데,
자유민주주의란, 서구 근대 이후의 부르주아 시민혁명 이후의 입헌민주주의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경제적인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형성,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민주주의 내지 다원성과,
경제적 자본주의 및 그에 내재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용어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 저의 글들에서 보인다 하셨는데,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상세하게 댓글 또는 쪽지, 메일로 구체적인 지적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안 보셨을지 모르겠으나, 저는 개념과 명칭의 정확성을 누구 못지않게 중시하거든요.
그리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의는 짐작하겠사오나,
이렇게 긴밀성이 떨어지는 성긴 언어를 구사하시면, 소통이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제가 위에 단 댓글은, 뉴욕님의 파편화된, 그러나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요한 바를
미루어 짐작해 나름의 생각과 함께 다시 정리해 보려 한 시도였는데,
부정확한 개념 이해를 지적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에는 저 또한 진심으로 한탄어린 동감을 표하고 싶습니다만,
소통이 잘 되고 못 되고의 여부는 사회에만 달려있지는 않고,
개인 차원의 적절한 언어 조탁과 직조도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2007.02.17 01:51:05
뉴욕 님 글은 9.11을 겪으셔서 그런지 무슨 소리인지 척 한번 봐서는 정신이 없네.
마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아서.
그러나 추상화는 보는 사람의 느낌이 중요한 것이고
자꾸 보면 다르게 해석되고 그런 거 아닙니까?
하무튼 정물화 같은 글만 있는 다비아에 서양화 추상화가 등장하니 훨씬 다채롭네.
그런데 혹시 뉴욕님은 2년 전에 목 매달아죽은 죽은 MIT의 천재 양신규 교수를 알랑가 몰라?
왜냐하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은 겁나게 하거든요.
장님이 지팡이 집고 헤메는 글이었습니다.
마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아서.
그러나 추상화는 보는 사람의 느낌이 중요한 것이고
자꾸 보면 다르게 해석되고 그런 거 아닙니까?
하무튼 정물화 같은 글만 있는 다비아에 서양화 추상화가 등장하니 훨씬 다채롭네.
그런데 혹시 뉴욕님은 2년 전에 목 매달아죽은 죽은 MIT의 천재 양신규 교수를 알랑가 몰라?
왜냐하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은 겁나게 하거든요.
장님이 지팡이 집고 헤메는 글이었습니다.
2007.02.17 02:14:53
뉴욕님,
아직 여기 초년병인 제가 뉴욕님이 어떤 분이신가 궁금해서,
(위의 본문 글을 뵈오니 분명 범상한 분은 아니시더라구요)
예전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혹, 일전에 올리셨던 [전통과 정통 그리고 "편협한 기독교"]를 기억하시는지요?
보편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인간의 한계라 할 수 있을테고,
사회적, 즉 조직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그 근사치로 정통성을 설정해 살기는 합니다.
보편성을 붙잡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정통성이 함몰되는 위험성,
늘상 지적되는 문제인데, 참 날카롭게 논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론 안 나는 주제이고,
그럴진대, 그러한 현실에 터해 논의를 전개하셨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뉴욕님은 정통이 준거화, 권력화되는 인간 세상의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셔서 좀 그랬습니다.
그렇게만 보시면 대책이 안 서거든요.
하지만, 그 글은 참 매끄럽고 치밀했습니다.
그때 그 글과 같은 정도의 문장을 구사해 주신다면,
저와 같은 후배들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뉴욕님은, 글은 "show"하는 것이지, "tel"의 용도가 아니라 하셨습니다만,
문자언어 역시 음성언어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기호인데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음성언어와 진배없는 도구이지요.
(제가 하는 공부가, 신학과 더불어, 언어와 국어교육입니다)
게다가, 여기 이 게시판은 '쟁토', 즉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간 아닙니까?
외람되고 송구스럽사오나, 글에 좀 더 조탁과 정리를 가하신다면,
훌륭한 내용이 더 잘 받아들여지지 않겠습니까?
아직 여기 초년병인 제가 뉴욕님이 어떤 분이신가 궁금해서,
(위의 본문 글을 뵈오니 분명 범상한 분은 아니시더라구요)
예전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혹, 일전에 올리셨던 [전통과 정통 그리고 "편협한 기독교"]를 기억하시는지요?
보편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인간의 한계라 할 수 있을테고,
사회적, 즉 조직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그 근사치로 정통성을 설정해 살기는 합니다.
보편성을 붙잡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정통성이 함몰되는 위험성,
늘상 지적되는 문제인데, 참 날카롭게 논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론 안 나는 주제이고,
그럴진대, 그러한 현실에 터해 논의를 전개하셨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뉴욕님은 정통이 준거화, 권력화되는 인간 세상의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셔서 좀 그랬습니다.
그렇게만 보시면 대책이 안 서거든요.
하지만, 그 글은 참 매끄럽고 치밀했습니다.
그때 그 글과 같은 정도의 문장을 구사해 주신다면,
저와 같은 후배들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뉴욕님은, 글은 "show"하는 것이지, "tel"의 용도가 아니라 하셨습니다만,
문자언어 역시 음성언어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기호인데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음성언어와 진배없는 도구이지요.
(제가 하는 공부가, 신학과 더불어, 언어와 국어교육입니다)
게다가, 여기 이 게시판은 '쟁토', 즉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간 아닙니까?
외람되고 송구스럽사오나, 글에 좀 더 조탁과 정리를 가하신다면,
훌륭한 내용이 더 잘 받아들여지지 않겠습니까?
2007.02.17 02:29:07
위의 힌트는 이해가 "시작"된 분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특히 이해가 시작되어서 덧글을 "못" 쓸 수 밖에 없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분이 한 분이라도 말입니다.
"저는 개념과 명칭의 정확성을 누구 못지않게 중시하거든요."
중시하는 것과 중시해서 쓰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로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 절대음감을 중시할 수는 있지만 의지로 가질 수 없는 것처럼. 혹독한 연습으로 개념과 명칭은 가능합니다.
사회과학차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차원에서 보더라도 아닙니다: 추천책: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사회과학 차원에서는 그 정도 쓰면 엄청 잘 쓴 책이지만 "글"차원에서 보자면 글도 아님. 참고로 그 책은 90년 초에 출간되어 인용지수 1위가 될만큼 그 위치가 최고임에도 그러함. 글이라함은 예로 김용옥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에 대해서 글쓰는 사람입니다: 김용옥도 이렇다는 것 자신이 암: 그래서 자꾸 딴 짓하는 것임.
글을 쓰는 것에는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음: there is much more to writing than writing.
위의 힌트 덧글은 형식을 포기하고 내용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해가 시작 안되신 분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내용이니 형식은 말 할 것도 없지요. 형식을 갖기 위해 내용을 포기한 대표적 작가가 헤밍웨이입니다.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모어님의 직접적인 질문에는 답을 하실 회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critical writing 추천작: society of the spectacle by guy debord
참고로 윗책은 제가 95년에 한국가서 후배의 후배에게 그 책이 한글로 번역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누가 그것을 물어보냐고 서울대사회학과 조교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정도엿고 만났지요. 지금 번역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영어로는 번역이 아주 뛰어나게 잘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노트: 하는 일이 그래서 저는 한국인을 제 생활동선에서 교류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뉴욕 근교에 한국가장이 저 한 사람인 곳은 아마 저의 동네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가면 가까운 친구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혼자 작업하기에는 유혹이 너무 많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풍류를 워낙 즐겨서 말입니다. 결론: 다비아는 저에게 교회만큼 소중한 곳입니다. 위의 본문의 수위를 맞추는 것은 고심하고 맞춘 것입니다. 제가 다비아의 회원으로 책임으로 느끼고 말입니다. 제가 저이기에 저도 부분인 다비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말입니다.
"저는 개념과 명칭의 정확성을 누구 못지않게 중시하거든요."
중시하는 것과 중시해서 쓰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로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 절대음감을 중시할 수는 있지만 의지로 가질 수 없는 것처럼. 혹독한 연습으로 개념과 명칭은 가능합니다.
사회과학차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차원에서 보더라도 아닙니다: 추천책: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사회과학 차원에서는 그 정도 쓰면 엄청 잘 쓴 책이지만 "글"차원에서 보자면 글도 아님. 참고로 그 책은 90년 초에 출간되어 인용지수 1위가 될만큼 그 위치가 최고임에도 그러함. 글이라함은 예로 김용옥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에 대해서 글쓰는 사람입니다: 김용옥도 이렇다는 것 자신이 암: 그래서 자꾸 딴 짓하는 것임.
글을 쓰는 것에는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음: there is much more to writing than writing.
위의 힌트 덧글은 형식을 포기하고 내용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해가 시작 안되신 분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내용이니 형식은 말 할 것도 없지요. 형식을 갖기 위해 내용을 포기한 대표적 작가가 헤밍웨이입니다.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모어님의 직접적인 질문에는 답을 하실 회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critical writing 추천작: society of the spectacle by guy debord
참고로 윗책은 제가 95년에 한국가서 후배의 후배에게 그 책이 한글로 번역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누가 그것을 물어보냐고 서울대사회학과 조교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정도엿고 만났지요. 지금 번역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영어로는 번역이 아주 뛰어나게 잘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노트: 하는 일이 그래서 저는 한국인을 제 생활동선에서 교류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뉴욕 근교에 한국가장이 저 한 사람인 곳은 아마 저의 동네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가면 가까운 친구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혼자 작업하기에는 유혹이 너무 많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풍류를 워낙 즐겨서 말입니다. 결론: 다비아는 저에게 교회만큼 소중한 곳입니다. 위의 본문의 수위를 맞추는 것은 고심하고 맞춘 것입니다. 제가 다비아의 회원으로 책임으로 느끼고 말입니다. 제가 저이기에 저도 부분인 다비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말입니다.
2007.02.17 02:37:59
글을 쓰는 것과, 글에 대해 글쓰는 것, 개념을 중시하는 것과 개념을 중시한 글을 쓰는 것,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짧고, 아직 인격적인 성숙도 얕은 터라,
아직 피부에 절실히 와닿지 않고, 지식적으로도 온전히 이해는 못했사오나,
아주 어렴풋이, 지금껏 뉴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감이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하고, 나아가서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의 태도에도
일침을 주시는 말씀이었구요.
정말 감사합니다. 주신 본문과 댓글, 따로 담아서 다시 꼼꼼히 정독하겠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짧고, 아직 인격적인 성숙도 얕은 터라,
아직 피부에 절실히 와닿지 않고, 지식적으로도 온전히 이해는 못했사오나,
아주 어렴풋이, 지금껏 뉴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감이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하고, 나아가서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의 태도에도
일침을 주시는 말씀이었구요.
정말 감사합니다. 주신 본문과 댓글, 따로 담아서 다시 꼼꼼히 정독하겠습니다.
2007.02.17 03:37:51
아참, 권해주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학부 시절에 강의를 들으면서 인상깊었습니다. 신학교 때는 [트러스트]를 강의 때 발제한 적이 있는데, 지금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보는 시각은 날카롭고 생각의 창의성은 있으나, 뭔가 불만이 남고, 견해에도 찬동하지 못해 나름의 비판을 퍼붓고 발제를 마친 것 같습니다.
뉴욕님 말씀을 듣잡고 보니, 뭐라 해야되나, 야구에서 '볼끝이 살아있다'고들 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곡의 연주들이 많지만, 맥아리를 꿰뚫은 그런 연주가 명연이라고 생각하는데, 글쓰기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신앙 역시 마찬가지일테구요.
많은 음악평론가들이,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는 연습 또는 근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성서가 말하는 '지혜'라는 것도 이같은 범주가 아닐까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혹독한 연습'이라는 말씀도 그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바는 아닌 것 같네요.
언어의 속성과 그 이면(그게 무엇인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만)을 꿰뚫어 보시는 안목에 놀랄 따름입니다.
뉴욕님 말씀을 듣잡고 보니, 뭐라 해야되나, 야구에서 '볼끝이 살아있다'고들 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곡의 연주들이 많지만, 맥아리를 꿰뚫은 그런 연주가 명연이라고 생각하는데, 글쓰기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신앙 역시 마찬가지일테구요.
많은 음악평론가들이,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는 연습 또는 근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성서가 말하는 '지혜'라는 것도 이같은 범주가 아닐까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혹독한 연습'이라는 말씀도 그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바는 아닌 것 같네요.
언어의 속성과 그 이면(그게 무엇인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만)을 꿰뚫어 보시는 안목에 놀랄 따름입니다.
2007.02.17 03:46:21
New York 님의 글을 읽으면, 불교쪽의 선객들이 생각납니다.
불교쪽에서도 선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무애행을 살았던 원효라는 분도 계셨지요.
어느쪽이 나았는가? 줄세우는 것은 사치일 겁니다.
학자는 치밀하고 엄밀한 글을 써야 하지만,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소통의 이유도 적고, 소통이 어려울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오히려 사기꾼들이 소통을 잘 하지요. 세상은 속여지기를 바라니..
잡설이었습니다.
불교쪽에서도 선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무애행을 살았던 원효라는 분도 계셨지요.
어느쪽이 나았는가? 줄세우는 것은 사치일 겁니다.
학자는 치밀하고 엄밀한 글을 써야 하지만,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소통의 이유도 적고, 소통이 어려울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오히려 사기꾼들이 소통을 잘 하지요. 세상은 속여지기를 바라니..
잡설이었습니다.
2007.02.18 04:53:43
riveroad님 양쪽 다 가능합니다. 즉,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야 너는 지 가족하나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정치하겠다고"의 일변도로 이해하는 데에 있었던 착각이 그 "어느 쪽"이 나았는가를 나누는 착각에 빠트립니다. 언제 수신하고 제가한고.. 그 차례대로 하면 그거 할 수 있는 것 불가능하다는 깨달음; 수신할 수 있는 순간 천하를 다르릴 수 있는 순간. 양쪽 다 가능합니다.
"학자는 치밀하고 엄밀한 글을 써야 하지만"
학자를 글을 위한 도구로 놓느냐 그 반대냐에 따라 의미는 하늘과 땅차이
이미 선입견이 담긴 글: 글 쓸 떄, 글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지만 이것도 "당장"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님
내 사촌처제가 아마 텍사스 그 대학에 신랑하고 있다든가..
가끔 그나마 건질 책의 작가가 오스틴 대학교수인 것을 기억합니다.
건질 것만 건지고 쓰레기는 분리수거해서 잘 버리고 오세요.
쓰레기도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전에는 쓰레기 아니였음(시대가 갈 수록 더 그러함).
학교의 쓰레기통 같음에 쓰레기가 묻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자주 씻으면 됨니다.
홍정수씨한테는 언어쪽 가르침만 건지고 빨리 졸업하기를 바랍니다; 거기도 불가피하게 쓰레기가 있음.
"학자는 치밀하고 엄밀한 글을 써야 하지만"
학자를 글을 위한 도구로 놓느냐 그 반대냐에 따라 의미는 하늘과 땅차이
이미 선입견이 담긴 글: 글 쓸 떄, 글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지만 이것도 "당장"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님
내 사촌처제가 아마 텍사스 그 대학에 신랑하고 있다든가..
가끔 그나마 건질 책의 작가가 오스틴 대학교수인 것을 기억합니다.
건질 것만 건지고 쓰레기는 분리수거해서 잘 버리고 오세요.
쓰레기도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전에는 쓰레기 아니였음(시대가 갈 수록 더 그러함).
학교의 쓰레기통 같음에 쓰레기가 묻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자주 씻으면 됨니다.
홍정수씨한테는 언어쪽 가르침만 건지고 빨리 졸업하기를 바랍니다; 거기도 불가피하게 쓰레기가 있음.
2007.02.18 05:16:13
New York님, 답글을 바라고 올린 댓글이 아니었는데
답글을 주셨네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대한 말씀, 동감합니다.
쓰레기란 말도 공감하는 바는 많군요.
저는 공학쪽이지만, 분야는 (대기)화학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요.
페이퍼 이것저것 다 보면 길 못 갑니다.
쓰레기는 과감히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실존적으로, 취함과 버림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겠지요.
한국을 떠날 즈음, 생태학을 하는 이도원 교수 왈,
"읽을 가치가 있는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을 가려 읽을 줄 알아야 살아남는다"고
하시던데,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지요.
저의 이력을 좀 아시네요.
제가 홍정수, 지성수, 정용섭 목사님의 영향을 제법 받고 있지요.
다만, 삶의 자리가 어차피 다르니, 카피는 별 쓸모가 없겠지요.
그럼, 건강하시길..
답글을 주셨네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대한 말씀, 동감합니다.
쓰레기란 말도 공감하는 바는 많군요.
저는 공학쪽이지만, 분야는 (대기)화학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요.
페이퍼 이것저것 다 보면 길 못 갑니다.
쓰레기는 과감히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실존적으로, 취함과 버림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겠지요.
한국을 떠날 즈음, 생태학을 하는 이도원 교수 왈,
"읽을 가치가 있는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을 가려 읽을 줄 알아야 살아남는다"고
하시던데,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지요.
저의 이력을 좀 아시네요.
제가 홍정수, 지성수, 정용섭 목사님의 영향을 제법 받고 있지요.
다만, 삶의 자리가 어차피 다르니, 카피는 별 쓸모가 없겠지요.
그럼, 건강하시길..
2007.02.19 05:32:34
그 쓰레기만 보인다는 것은 이미 쓰레기에 많이 눌려있다는 것인데...
다음에 글 올릴 때(한글로 글 쓰는 리듬이 필요할 때) 그 부분 커버하도록은 해야하는데...
정말 조심하십시요. 그 쓰레기 학교에서 나와서 씻은 것에 성공한 사람? 있었나? 평생 쓰레기에 자신이 눌리고 있는지 대부분은 모르고 삶(수퍼수퍼엘리트포함: 그나마 머리 쓸 줄 아는 사람 그 쓰레기 이용해서 돈과 권력을 가짐: 미국 CIA가 어떻게 생긴 진짜 노우하우 배경 공부가 힌트; 참고: 그 당시FBI가 있어서 구태여 CIA가 필요없었음). 그것은 모르고 세상이 왜 이렇게 요지경이고.., 예수님이 "아직" 이해 안되고... 예수님에서 게임 끝났는데... 그것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니 어쨌느니...
죄 지으면 머리 나빠진다는 것 모르는 죄인; 머리 나빠져서 또 죄로 죄를 상쇄하는 머리나쁨 악순환: 그래서 예수님 오심. 머리나쁜 사람들의 유명한 질문: 왜 나의 믿음이 자라나지 않지??? 힌트: 다비아에 "참여"하세요. 그리고 바뀌는 자신을 보세요. 물론 다른 데도 "참여"해도 됨. "참여"에 관한 힌트:
"죄인"의 가장 첨단을 걷는 미국공부: 미국사람들의 새로운 obsession(이것 한국말 적당한 뉘앙스의 단어 찾기 힘든; 도와줄 사람 환영): privacy, 프라이버시. 죄인의 첨단: 돈하고 프라이버시만 있으면 됨(지금 "참여"에 관한 힌트 나가는 중). 첨단 힌트: 기독교 안밖에 있는 사람들이 인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 가르침 도덕적으로 이해하면 차라리 이해가 더 안되고 머리 더 나빠짐.
다음에 글 올릴 때(한글로 글 쓰는 리듬이 필요할 때) 그 부분 커버하도록은 해야하는데...
정말 조심하십시요. 그 쓰레기 학교에서 나와서 씻은 것에 성공한 사람? 있었나? 평생 쓰레기에 자신이 눌리고 있는지 대부분은 모르고 삶(수퍼수퍼엘리트포함: 그나마 머리 쓸 줄 아는 사람 그 쓰레기 이용해서 돈과 권력을 가짐: 미국 CIA가 어떻게 생긴 진짜 노우하우 배경 공부가 힌트; 참고: 그 당시FBI가 있어서 구태여 CIA가 필요없었음). 그것은 모르고 세상이 왜 이렇게 요지경이고.., 예수님이 "아직" 이해 안되고... 예수님에서 게임 끝났는데... 그것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니 어쨌느니...
죄 지으면 머리 나빠진다는 것 모르는 죄인; 머리 나빠져서 또 죄로 죄를 상쇄하는 머리나쁨 악순환: 그래서 예수님 오심. 머리나쁜 사람들의 유명한 질문: 왜 나의 믿음이 자라나지 않지??? 힌트: 다비아에 "참여"하세요. 그리고 바뀌는 자신을 보세요. 물론 다른 데도 "참여"해도 됨. "참여"에 관한 힌트:
"죄인"의 가장 첨단을 걷는 미국공부: 미국사람들의 새로운 obsession(이것 한국말 적당한 뉘앙스의 단어 찾기 힘든; 도와줄 사람 환영): privacy, 프라이버시. 죄인의 첨단: 돈하고 프라이버시만 있으면 됨(지금 "참여"에 관한 힌트 나가는 중). 첨단 힌트: 기독교 안밖에 있는 사람들이 인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 가르침 도덕적으로 이해하면 차라리 이해가 더 안되고 머리 더 나빠짐.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속에서 하고픈 말을 우리 말로 표현하시기가 좀 어려우시죠?
글을 읽었는 데 요점 정리가 잘 안 돼서 그럽니다.
저의 독해 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요......
글의 제목과 논리의 전개 그리고 결론이 잘 연결이 안 돼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가
확 잡히질 않네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