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으로 본 성서 - 상징계, 실재계, 그리고 하나님
1. 무력상태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갓 태어난 새끼 캥거루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엄마 캥거루의 젖이 있는 주머니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동물의 새끼들은 배고픔을 비교적 ‘스스로’ 해결합니다. 반면, 인간의 아기는 유감스럽게도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캥거루처럼 엄마 젖을 먹으로 기어갈 수도,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아기는 ‘무력 상태’인 것입니다. 대체로 아기는 엄마가 젖을 먹임으로써 배고픔을 해결합니다. 괴테의 어떤 시처럼 “어머니는 나를 두 번 살리는” 것입니다.
2. 큰타자와 상징계
아기가 울어댈 때 어머니들은 “아유 얘가 또 배가 고프구나.”라는 말을 합니다. 어머니들은 아기가 배고플 때 울어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갓난아기의 울음은 “배가 고파요.”라는 언어와 같습니다. 즉 무력상태의 아이는 언어로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두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자의 자리입니다.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어 문법과 체계가 우선 필요하듯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 체계가 이미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는 수신자의 자리가 있다는 전제 하에 말하여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혼잣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또는 ‘빈 공간’이라는 수신자의 자리가 전제된 채로 말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경우에는 대체로 아기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가 그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주체가 절대화되는 자리입니다. 라캉은 이 자리를 <큰타자>라고 부르며 그것이 이미 주체 밖에 존재하는 상징적 체계, 즉 상징계로 연결시킵니다. 따라서 인간 주체가 <말하는 주체>인 한, 주체는 <큰타자>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상징계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주체로 거듭납니다. 멜라닌 클라인의 <딕Dick>의 사례(딕은 멜라닌클라인이 유도한 상징화 놀이를 통해 모든것에 무심하던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납니다.)나 프로이트의 <Fort - da놀이> 사례(아기가 실패를 굴리고 실패가 되돌아오는 것으로 어머니의 외출을 상징화하면서 실재 어머니에서 느끼던 향락을 실패놀이의 또다른 향락으로 대체합니다.)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큰타자>는 빈자리일 뿐이니 주체는 무(無)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실재계
실재계는 말과 동시에 언어 바깥으로 추방되는 것입니다. 즉 말은 사물의 살해를 전제합니다. 노자에서 도가 도라고 말해지는 순간 도가 아니라는 말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도라는 말에는 도의 살해가, 어머니라는 말 속에는 실재 어머니의 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 주검으로 다가왔다.”(빅터 프랭클)
실재계는 언어 바깥으로 영원히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로는 도저히 표상하기 불가능한(impossible) 것입니다. 말로 그것을 표현하는 한, 우리는 그것이 실제인지 거짓인지, 허구인지 사실인지, 심리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확정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실재계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재계의 존재를 추측 추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재계는 상징계가 파괴되어 구멍이 생겼을 때 그 자리를 메우러 옵니다. 이것이 정신병으로 실재계가 환상과 죽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들의 환상과 망상은 실재계의 도래와 관계가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실재계는 환상과 향락을 통해서만 재현할 수 있습니다.
4. 실재계와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실재계이면서 상징계 자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올라갔을 때, 덤불 숲 한 가운데서 여호와의 천사가 불꽃에 휩싸인 채 나타납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그 주위를 둘러보려고 합니다. 그 때 야훼가 말합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신발을 벗어라. 네가 있는 곳은 신성한 땅이다.> 모세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내립니다. 모세는 야훼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나를 보냈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야훼가 모세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있는 자이다.”그리고 다음과 같이 반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라. <나는 있다>가 나를 당신들에게 보냈다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사물처럼>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라캉의 실재계의 정의와, 실재계가 도래할 때에 주체가 느끼는 공포 -정확히 말하면 <Unheimliche섬뜩함>- 와 일치합니다. 라캉은 실재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실재계는 특히 주체를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고, …(《에크리》,388)
하나님은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그것 저것으라고 할 때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자기 존재와 동일자로 존재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그것은 즉자적 존재를 연상시킵니다. 왜냐하면 다 알다시피, 즉자적 존재는 사물의 존재 양태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냥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 상징계와 하나님
다른 한편, 하나님이 상징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서의 구절 -<요한복음> 1장 1절-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in principio erat verbum)말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말은 곧 하나님이었다.” 말과 하나님을 등가로 놓고 있는 세 번째 구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상징계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라캉은 라틴어의 <Verbum>에 대한 번역어로 <Verbe>나 빠롤<Parole>을 포기하고 랑가쥬<Langage>를 선택합니다. “태초에 랑가쥬(언어)가 있었다.” <Verbe>와 <Langage>의 거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계에 엄청난 파문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Verbe(말)>는 그것 밖에 있는 화자, 즉 하나님을 가정하고 있는데 반해, <Langage(언어)>는 <Verbe>를 떠받치고 있는 보편적 체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화자(즉 하나님)이전에, 화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화자는 언어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화자는 언어에 의한 효과로 탄생할 뿐 아니라, 언어 문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언어가 화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계속해서 희랍어로 된 원전에서 그에 해당하는 말은 <Logos>였음을 강조하면서 <Langage>로 번역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랑가쥬는 아마 파롤 이전에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천지창조의 ‘신의 의지’ 이전에 있었다. 랑가쥬가 있은 연후에 신은 파롤을 사용해서 ‘빛이 있어라’라고 말한다.(《에크리》)
그에 따라, 이제 하나님은 성서의 화자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말이 전제될 때의 화자는 하나님이지만, 언어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문법 체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입을 가진 다른 인간적인 화자에 의해 말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말하는 존재라면, 성서도 불경처럼 <如是我聞(나는 이렇게 들었다)>으로 시작해야 화자의 진정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라캉의 번역에 따라,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 체계 또는 법(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문법) 자체입니다. 따라서 라캉에 따르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를 <태초에 언어(또는 상징계)가 있었다>로 재번역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이 곧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언어(또는 상징계)는 곧 하나님이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참고 : 임진수. 정신분석 세미나 모음
왜냐하면 소쉬르와 프로이트에 대한 어느정도의 선이해가 없으면 읽히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도 별로 없습니다.ㅡㅡ;;)
라캉에 대한 공부를 원하신다면 프로이트부터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제대로된 번역서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을 권합니다.
<늑대인간>같은 사례부터 시작하신다면 나름대로 재미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의 책은 논리적으로도 치밀할 뿐더러 문학적인 느낌도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늘오늘님 안뵌지 꽤 되었는데 잘 지내시는지요?
가까운 때 한 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랑 드림-
라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프로이트를 우선적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개론적 수준의 이해에 목표가 있다면 (라깡의 후계자라 자임하는) 지젝이 쓴 <How to 라캉>이 그나마 괜찮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김석 선생님이 쓰신 <에크리>, 김상환 선생님, 홍준기 선생님 등이 쓴 <라캉의 재탄생>에서 저는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20년대 이후의 프로이트 저작 <쾌락원칙을 넘어서> 이후의 글들이 (라캉이해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상당히 흥미롭지 않은가 합니다. 20년대 저작들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문학적이고 많은 통찰들을 보여주는 재밌는 글들이지요. 다비아에서 혹시 프로이트 읽기 강독 같은 것은 안할까요? <프로이트 20년대 저작 읽기 모임> 이라는 제목의 모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겠는데요~
사족 죄송합니다.
제 부족 때문이기도 하곘으나 글쎄요, 현대철학의 '현대'가 애매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철학에서 현대의 시작은 어딜까요? 많은 철학사가들이 후설/하이데거가 저수지라고들 하지만 역시나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닌듯 합니다. 어쩌면 아직 우리는 근대가 아닐까 하기도 하구요. 왜냐하면 소위 '첨단' 철학자인 들뢰즈가 헤겔에서부터 얼마나 많은 철학적 자양분을 암묵적으로 끌어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헤겔을 그 시작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요? 이게 참 애매한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유럽철학의 밑그림을 그리기 좋은 책을 꼽자면,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도서관 이용이 가능하시다면) 한나래에서 나온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흐름을 읽어주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요한 독일, 프랑스 사상가들 이를테면, 데리다/레비나스/리쾨르/마르쿠제/가다머 등등 철학사상가를 비롯해서 문학/정치 사상가들과 상당히 깊이 있는 대화를 담고 있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주요한 철학가들의 입장과 맥락을 이해하기에 참 좋은 책이에요. 그리고 같은 저자(리처드 커니)가 쓴 <현대유럽철학의 흐름>도 신뢰할만한 책입니다. 두 책이 공통으로 다루는 이들이 많은 만큼 함께 읽으면 좋을 듯 하네요. 문제는 번역입니다. 전자의 책은 몇 명의 공역이라 번역 수준의 편차가 상당히 심합니다. 철학 파트는 좀 읽을만한데 그래도 눈에 잘 안들어오는게 흠이지요.
만일 여유가 되신다면 김상환 선생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나 <해체론시대의 철학>을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김상환 선생님은 전공은 프랑스철학이어도 독일철학에도 해박하셔서 독서에 즐거움을 주시지요. 체계적인 이해를 얻기에는 좀 힘들겠지만 현대철학의 쟁점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큰 도움을 드리지는 못한 듯 하여 죄송합니다. 혹시 더 좋은 책이 떠오르면 다시 남기겠습니다.

저 정신분석학자는
무의식에 언어체계를 끌어들였느니 어쩌니 하더니
드뎌, 하나님을 '문법'으로 만들었군요~^^
'랑가쥬가 파롤을 사용해서' 또는
'추상적 문법체계가 인간적인 화자에 의해' 말을 한다...
뭔가 말이 되는 거 같기도 하네요~
요한복음의 저자, 그러니까 <큰타자>는 요한"공동체"일텐데요.
그 공동체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는 건 당연한 것이고,
결국 요한복음을 읽고 따르는 독자인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말, 랑가쥬로부터 <주체>를 얻을 수 있었겠고요.
그런 것이라면,
요한 공동체가 의도한대로 읽어야지, 말(로고스)을 하나님이라고 하는건...
좀 어딘지 맞지 않는 것 같네요.
그냥 성서 껴맞추기 아닌가...
여기서 로고스(logos)는 개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런 의미를 떠나서
간단히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겁니다.
요한공동체가 그렇게 수용한 것이지요.
랑가쥬가 하나님보다 상위에 있다면, 그럼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상위라는 의미일까요?
좀 뒤죽박죽으로 들려서요.
아무리 새롭게 읽어도 이걸(로고스=성자)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 싶은데...
더욱이 라깡의 (어쩌면 임진수, 혹은 하랑님) 설명대로
저자(들)의 <큰타자> 됨을 인정하고 그 <언어체계>를 새겨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좀처럼 위의 글이 이해가 되질 않네요. 어쩜 짧은 소개글이라 그럴지도...
요한복음1장
v.1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고, 로고스는 신과 함께 있었으며, 신은 로고스였다.
v.2 이것은 태초에 신과 함께 있었다.
v.3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났으며, 그가 없이는 만들어졌을 [그래서 현재에 존재할] 것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v.4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v.5 그리고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어둠은 그 빛을 끄지 못했다.
그리고 큰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큰타자는 상징적 체계의 한 <자리>일 뿐이며 그 자리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말이 있기 전의 언어체계이며 수신자의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미 주어져 있는 주어의 <자리> 서술어의 <자리>에 '나' 라는 단어와 '사랑한다' 는 단어를 끼워넣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이 없으면 그 자리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즉 말은 큰타자로부터 생기지만 말이 없으면 큰타자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큰타자 이야기는 소개해주신 것을 적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말한 "저자"는 뚜렷한 대상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역사비평들을 통해 얻어진 바이구요. 차라리 저는 큰타자 이야기가 그렇게 적용되면 어떨까 싶네요. 요한복음의 저자, 혹은 공동체, 그 무엇은 신앙(고백언어)이 있기 전의 "신앙(고백언어)체계"라구요. 신앙(고백)하는 이인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그 자리는 알려지는 것일테고, 어쩌면 그 자리는 말씀대로 빈자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은 문학비평적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2천년간 같은 신앙고백을 해온 것은, 단지 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앙고백 자체가 -고백문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가 아닐까요. 그런 생각이 윗 글을 읽다가 든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빛이 있으라"함에..라는 말에서 이 "빛이 있으라"를 언어로 본다면
도대체 수신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이것은 성경의 기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인화 시킨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위의 글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문학적인 사고를 성경에 적용할 때에는 성경 그 자체는 문자적으로 대하는 것을
상당히 자주 만나게 됩니다. 아이러니 하다고 할까요 ?
이글 결론에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언어,문자가 아닌
언어적 체계, 문자적 체계를 창조한 존재로 봐야 한다는 글로 보여집니다
실재계에서 노자의 도의 비유는
인간의 문자안에 ' 하나님이 가둬지는 것' 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
즉, " 하나님을 말로 표현할 때, 이미 그말은 하나님을 가르킬수 없게 된다 " 이런 의미로 봅니다
우리는 문자란 기호와 말(언어)을 통해서 타자와 나의 외부과 소통을 하게 되는데
이 기호 체계가:(지금의 문자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체계를 말하진 않습니다)
이미 성경이 쓰여지기도 훨씬 전에(문자의 형태로 인간이 기록하기 전에)
태초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을 시드니님이 말씀 하신대로
성경의 저자가 지금의 언어적체계 방법을 가지고 인간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구요
윗글은 소통 체계 자체, 소통을 이끄는 힘( 이것을 verbe > langage의 확대로 표현하네요)
소통 체계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이다"를 말하는 것은
문자를 넘어선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 저는 받아들였는데요
이 말은 "스스로 있는자"의 표현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네요...쓰고보니 전달이 잘 될런지 걱정스럽네요~
저의 언어사용 능력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는 말은 빛과 어둠의 비대칭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상징계의 효과이듯 어둠은 빛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상징계가 말에 의해서 알려지듯이 빛은 어둠에 의해서 알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과 기호학에서는 이것을 기호의 비대칭성이라고 합니다. 기호학(롤랑 바르트)에서는 0과1이 이와 같습니다. 즉 0이 먼저고 그 후 1이 생겨나지만 1이 없으면 0이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무> 에 의해 <유>가 창조되지만 유가 없으면 무가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신화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화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 것이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이 글에 댓글 달다가 머리 뽀개질 뻔.
우선, 이 글이 전문은 아니죠? 요약하신 건가?
몇 가지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2번 항목의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어 문법과 체계가 우선 필요하듯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 체계가 이미 전제되어야 합니다...라는 표현.
여기서 정확히 "사용"의 정의가 무엇인지.
좀더 세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언어 체계가 전제되지 않아도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즉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인지적 구성주의자인 삐아제의 경우)도 있습죠.
저런 전제는 글쎄요....
또한 5번 항목에서 말과 하나님을 등가로 놓고 있는 세 번째 구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상징계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말과 하나님을 등가로 놓고 있다는 표현이 모호한데,
요한이 성서를 기록할 당시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말씀"으로 정의한 것이 아닐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물리적인 아들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나름의 장치는 아니었을지.
오히려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를 인식한 요한이 하나님을 명명하는 데 있어 나름의 고민 후
차선책(?)으로 "말씀"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지.
이름을 부를 때 주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불러야만 하는 숙명 내지 한계를 담담히 인정한 것은 아닌지.
신의 의지 이전에 랑가쥬가 존재했다는 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앞선 논의에 따르면 하나님이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가정(어쩔 수 없는)에 불과하듯
추상적인 문법 체계라는 정의 역시 가정에 불과할텐데(뭐.. 저러한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저런 구분이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하랑님께서 짧은 글 속에 라캉의 주요개념을 잘 녹여내신 것을 보니 상당한 수준의 분이시리라 짐작됩니다. 저는 라캉을 깊이 알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계-상징계-실재계 도식을 '신이해'로 옮기는 것은 많은 차이를 유사성 아래에 함몰시키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라캉의 도식이 주체의 탄생과 해체의 변증법 구도에서 설명되는 만큼 차라리 라캉적 주체(?)를 그리스도인과 유비하여 설명하는 편이 더욱 유익한 글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징계를 랑가쥬로 해석한 라캉의 이해를 신은 랑가쥬 그 자체, 랑그 그 자체라고 보는 입장에는 반대입니다. 만일 신을 랑가쥬 그 자체라고 본다면 데리다, 포우론 <도둑맞은 편지> 해석 이후에 라캉이 언어를 실재의 살해자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군요. 그러면 로고스인 신울 신 자신의 살해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인지요?
안목사님,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 공동체와 유비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왜냐하면 주체-대타자 의 관계가 요한복음-요한공동체(텍스트-텍스트의 저자)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체와 요한복음이 같은 항에 놓이는 것은 무리가 좀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주체적'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차라리 이 구도에서는 주체-대타자/요한복음의 독자-요한복음이 더 알맞은 구도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텍스트 읽기라는 것은 구조주의자들에게는 거의 '환상'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에 요한공동체(저자)를 결코 대타자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은빛그림자님~ 삐아제가 그런 말을 하기도 했군요. 저는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만일 삐아제의 주장, 언어 이전에 사고가 선행한다는 말을 정당하게 논증할 수 있다면 벌써 구조주의자들, 데리다나 라캉 혹은 들뢰즈까지도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었을텐데요.(물론 언어가 사고에 선행한다는 것 역시 자명한 명제는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삐아제가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고 한 것이기라기보다 논리적 사고가 언어의 의존하지 않음을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논리적 사고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과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는 것은 다르지요. 사고가 언어에 선행한다는 것은 언어없는 사유가 현실적으로는 아니라도 최소한 논리상 가능하다는 것인반면, 논리적 사고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의 정초가 언어의 문법적 작용에 기초한다는 말이 아니기에 언어 없이 사고가 가능하다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삐아제의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제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까페에 올리기에는 좀...^^)
그리고 라캉에서는 실재계가 아닌 상징계가 랑가쥬입니다.
실재계는 언어(랑가쥬)로부터 떨어져나간 <실재(그 무엇)>입니다.
언어라는 상징화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실재>이지요.
즉 언어에는 실재의 살해가 전제되어 있겠죠.
라캉은 그래서 실재계를 impossible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로 인해 어떤 실재 역시 해체되어 버렸는데
라캉은 실재와 <진실>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차원이지만 주체와 관계하는 <어떤 무엇>에 대한 진실성에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차이만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횡포를 라캉으로 다시 되돌려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캉과 데리다가 갈라지는 점이 있다면 데리다는 기호의 미끄러짐이 끝없이 흘러가는 반면(차연),
라캉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빈 공간이 있지요.
그 빈 공간이 진실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를 "얻었다"는 말에서 오해를 하신 듯 하네요. 복음서가 주체일 수는 없지요.
아마도 복음서가 "텍스트"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제게는 신앙고백, 혹은 신앙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서 텍스트인 복음서의 역할은 극소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지요.
빈자리로서의 요한공동체의 (원)신앙이
우리에게 신앙의 <주체>를 부여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냥 윗 글에 대한 나름의 적용일 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상당히 보편적인 것일텐데 알려달라고 하셔서 잘 못 알고 있나 고민을 좀 했는데요,
읽어보시고 잘 못 파악한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삐아제는 인지발달(사고)이 언어의 발달에 선행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먼저 경험을 갖게 되며 이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어린 아동의 자기중심적 언어의 사용은 그의 자기중심적 사고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아동이 점점 성숙해 감에 따라서 더욱 정교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고 과정이 먼저 정교해졌기 때문이라는 거죠.
흔히 알고 계시는 삐아제의 인지발달 단계를 참고해 보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감각동작기(0~2세)에도 목적성취에 대한 의식이나
대상영속성(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인지하는 것) 등의 사고가 진행된다고 하니
그는 언어보다 사고가 선행된다고 본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제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또한, 철학본색 님께서 말씀하신 "논리적 사고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습니다만 사고와 언어가 독립적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고츠키의 견해와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치만 지적하신 것처럼 스키마가 부재한 까닭에 윗글의 전체 맥락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궁금했던 2번 항목도 사실 촘스키에 관한 부분을 찾아서 읽다보니 문장을 잘 못 이해한 것 같고요.
오늘 이 내용으로 친구와 몇 시간 토론을 하다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ㅠ.ㅠ
상당한 내공자인 늘오늘 옵하께서 책을 집어던졌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끌...
혹시 흡연하실까 싶어서..... 아는 대로 말씀을 드려봅니다요.ㅎㅎㅎ
(아... 전문가가 좀 나서 주시면 좋으련만...ㅠ.ㅠ)
사실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의견을 주장한 사람들이 삐아제와 비고츠키가 아닐까 싶은데요,
삐아제는 사고가 먼저이고 그 사고를 담아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는 입장이지요.
비고츠키는 언어와 사고는 독립적으로 발달하다가 2세쯤에 그것이 서로 관련을 맺어서
이후로는 쭉~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인지발달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따른다면 언어의 발달이 사고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흔히 배울 때는 삐아제와 비고츠키를 대척점에 놓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고츠키는 언어의 발달을 사고 발달의 동력으로 보고 있지만
사회적 상호작용 관계(대화를 통한)에 의해 사고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기에
언어와 사고의 선후 관계에 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살짝 벗어난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
관점을 약간 바꿔서 언어 발달에 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는데요,
스키너는 언어는 순전히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학습론적 입장) 주장을 하니까
촘스키는 스키너의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언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득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논쟁이 크게 있었고,
최근에는 이 둘의 의견을 절충한 사회적 상호작용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언어발달에 생득적인 경향이 있음을 수용하면서 인간적 접촉이나 상호작용의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질문하신 내용을 두고 학부 때 친구들과 토론했었던 생각이 나는데요,
선천적 장애도 인지 장애 혹은 발달 장애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인지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듣고 말하는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경우엔
언어 발달 단계가 상당히 늦고 힘들기는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잘 알려진 헬렌켈러도 그런 경우일테구요.
문제는 인지 장애(흔히 지적 장애인이라 하는데)의 경우인데요,
흠......... 촘스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들은 LAD(언어획득장치)가
선천적으로 부족하거나 없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또한 인지발달 단계에 따라 언어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한다면
인지 장애의 경우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지능 수준에 따라
특정 연령 수준에 언어가 머물러 있는 것이 증명이 되는 셈이구요.
그런데 이 부분은 사실 상당히 복잡한 메커니즘이 얽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자들 의견도 그 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지능과 정신의 역학 관계, 지능과 언어, 정신과 언어, 심리와 언어..........
아.. 머리 아포...ㅠ.ㅠ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요.-_-
도대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 돼서 일단 라캉에 대해 배워보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다보니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가 상식 수준 밖에 안 되는 저로서는 상당히 어렵더라구요.
무의식도 언어 구조처럼 구조화 되어있다는 전제를 깔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전개해 나가는 바람에
큰 틀에서 언어학과 철학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완전 토 나오게 어렵다는..ㅋㅋ
그래서 일단 훔볼트부터 차례로 공부해 보고 뭔가 알게 되면 브리즈 박.사.님.께. 꼭 가르쳐 드릴테야요.ㅋ
아! 글구, 주저하지 마시고 정리하실 여력이 있으면 꼭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사와요.
과학이라면 진짜 토 나오게(여러 번 나오네ㅋ) 싫어하는 제가 브리즈 님께서 올리시는 과학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단 말이지요. 요전번 올리신 신경과학에 관한 글도 흥미를 갖고 읽었습니다.
당췌.. 댓글을 달 수준이 안 돼서 그냥 지나갔지만요. 댓글 없다고 안 읽는 것 아닙니당~~
자, 그럼 저는 이제 브리즈 님 완벽한 금연을 위한 이벤트 구상에 들어가야 하기에 바빠서 이만.^^*

말씀하시는 언어란 것은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어떤 의지를 이루는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봤는데요.
시편 19편에서와 같이 자연도 소리로서의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는 개념도 여기에 해당될 것 같구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런 개념은 오히려 그러한 의지/상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말'로서 받아들일 때
'말'한다는 개념이 성립되기 때문에 또한 청자종속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말할때 실제가 살해되고 들으면서 말한 것이 다시 살해되는 군요 ^^;;;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저에게 쉽지 않은 글과 토론이었지만 유익하게 잘보고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어체계와 소통체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참 명료해서 좋네요
라캉이 언어의 형태적 본질을 설명하는 방법이
언어를 기호학적 본질로 바라보는 데리다와 공통점이 많아보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그런데 저위에...임진수님은 정신분석학자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