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최윤희 합참의장 후보자가 골프를 쳤다고 하여 그의 자질에 대해 이야기가 오간다.

당연히 국가의 안위를 중요시 하는 이들이야 그의 그런 자세를 비판해 마땅하겠지만 왜 '진보적'이라고 칭하는 이들 까지 이런 비판에 동참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이런 비판을 통해 국가적 혼란을 야기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정말로 강직한 군인과 굳건한 군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최윤희란 사람은 북핵위기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드러내준 인물이다.

북핵위기의 강조는 작은 실재상황과 훨씬 큰 훈련 상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위기상황의 조성을 통해 국가에 기대게 하는 훈련과정이 실재상황 보다 중요한 것이다.

최윤희의 골프야 말로 이것이 훈련이자 훈육의 과정임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다만 그는 눈치가 없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이런 눈치를 보지 않는 배짱을 가졌거나, 너무나 좋아하는 욕구를 참아낼 만한 자제심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중 어떤 것도 부덕(不德)한 것이 아니다.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에너지총회에 송전탑건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국가의 위상을 추락시킨다."고 기사를 쓴 기자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개념 없는 언론인이라고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것은 송전탑건설 반대에 대해 비판적인 기자에 대한 비난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는 국가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근거 하에서 어떤 이는 보다 다양한 소리가 나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다면 당연한 비판일 것이다.

하지만 드높여야 할 것이 '국가의 위상'이 아니라면, 다양한 소리나 비판이란 것이 국가의 안전이라는 틀 속에서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다양함'으로 포장된 비판이 국가를 보호하는 완충제일 뿐이라면, 그 다양함은 국가라는 범주를 넘어가지 않는 단일함일 뿐이다.

이런 위장된 다양함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난 단순함이 국가를 흔드는, 그야말로 국가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강력한 비판이 아닐까?

이 단순함의 연쇄 말로 진정한 다양함이다.

국가라는 틀 속에서 행하는 비판이란 '개념 없는 언론인'의 맞상대로 '개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나는 과정일 뿐이다.

 

 

국가라는 범위 속에서 출제된 문제만을 풀고 있는 것 같다.

그 문제의 정당함이나 풀어야 할 이유를 묻고 있지 않다.

마치 칸트에 대한 니체의 비판같이 '정당함을 판단하는 법정 자체의 정당함'에 대해서는 묻고 있지 않는 것처럼 이런 비판들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기준을 돌아보거나 평가할 줄 모른다.

그 기준이란 것이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온 것처럼 착각하고 사용한다.

이것이야 말로 단순히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의해 이용되는 것이다.

“언어의 놀이 감이고, 언어에 놀아난다.”는 라캉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말했지만 어찌 보면 “무의식은 국가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표상의 대표’로서 기표를 의미하지만 ‘표상의 대표’야 말로 근대에 와서는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직한 군인’, ‘국가적 위상’ 같은 것들이야 말로 국가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제한된 사유와 구조화된 언어들은 국가의 욕망으로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자기에 대한 무능력함은 국가를 항상 안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