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dabia.net/xe/mark/673168#comment_674936
매일묵상 '하나님을 본 사람, 요한복음 묵상(11)'에 달린 블루군님과의 댓글에 이어서,
여기로 옮겨왔습니다.
주고 받았던 댓글을 다 옮겨 올까 하다가...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주소 링크만 했습니다.

이 주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차이
그리고 일반 계시의 범위에 관한 논쟁 같네요
정목사님은 구약의 계시와 예수를 통한 계시가 다르다는 전제로 묵상의 밑밥?을 던지신 것 같네요
직접 경헙=특별 계시
간접 경험=일반 계시
개인적으로 일반 계시는 성경 이외의 모든 경험과 지식적인 깨달음도 포함하는가에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범신론인지 아닌지의 중요한 관점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한 깨달음은 일반 계시=간접 경험이라 정의 할수 있는 건가요?
이부분에 관해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계시6啓示 명사
계시[ revelation , 啓示 ]
- 신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보이는 것.
계시란 말은 원래 ‘자기를 현시하다(apokalypsis)’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어떤 종교도 각기 제나름의 형태로 계시가 있다. 그것은 특이한 환상적 영상(映像)에 의하여 나타낼 수도 있고, 또한 지적 ·윤리적으로, 정신적 내면의 소리로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계시는 역사적인 객관적 사건으로 일어난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야훼신의 소리를 들었다든지, 훗날 교회의 성자(聖者)가 하느님(또는 예수)을 보았다고 하는 사실도 넓은 의미의 계시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계시란 천지창조에 의한 계시와, 하느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받아 이 지상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둘로 한정된다.
천지창조에 의한 계시는 창조된 자연을 통하여 현재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적 계시’ 또는 ‘일반계시’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초자연적 계시’ 또는 ‘특수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계시를 특수계시와 더불어 강조하면 신의 인격성과 초월성이 약해질 우려가 있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만을 그리스도교 본래의 계시로 인정하려는 견해도 있다. 이 1회적인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오로지 객관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밝힌 증거에 따라서 ‘현재적(顯在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주체적인 사건이다. 또한 계시는 인격적인 신이 인격적인 방식으로, 인격으로서의 인간을 ‘너’라고 부르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계시의 주체성과 인격성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계시는 ‘신의 말씀’이라고도 한다. 말씀이란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하여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신(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라는 말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쓰이고 있다.
두산백과의 저작권은 doopedia(두산백과)에 있습니다.
계시
[ 啓示 ]
정의
신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이해되는 종교 현상.
내용
특히,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신에 의한 창조물, 역사, 인간의 양심, 그리고 성서를 통하여 나타난 계시라고 이해함으로써 이를 인간적인 경험이나 사유에서 유추된 진리와 구분하고 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전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는 계시를 일반 계시와 특수 계시로 나눈다. 일반 계시는 삶의 모든 현상 속에 내재하여 있는 신의 의도를 지칭하는 것이고, 특수 계시는 신의 말씀인 성서와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현실화된 구원의 섭리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구속사(救贖史)를 뜻한다.
이러한 이해에 근거를 두고 절대 존재이고 창조주인 신을 신앙하면서 그의 의도나 섭리를 파악하고, 그것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종교들을 일반적으로 계시종교라고 부른다.
힌두교의 전통에 의하면 베다(Veda)는 성선(聖仙)이 신비한 영감에 의하여 기술한 천계문학(天啓文學)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에서처럼 진전되지는 않았다. 이슬람교에서는 계시를 영감과 구분함으로써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사 일반에서는 계시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신탁(神託)이나 미래에 대한 예견, 점복(占卜)·현몽(現夢) 등도 등도 이 범위에 속한다 이하 생략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에 대한 사전적 정의도 사전 출처에 따라 다르네요
묵상글을 쓰신 정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1.말씀 하신 직접 경험과 다음의 두가지 경험은 다른건가요?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경험,광야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의 경험
2.예수님의 통해 하나님의 현현과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의 경험은
직접 경험이라 정의 하시는지요?
3.2번의 질문도 간접경험이라 생각하신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직접과 간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건지 판단의 기준을 알고 싶습니다
엔크리스토님/ 제 글만 올리려다가 게시판의 형식상 너무 떨어져서 전문을 같이 올립니다.
1. '보다'는 단어 자체가 '직접 경험'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보다'라는 '요한복음의 표현'이 하나님 '직접 경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 보다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영광의 궁극적인 면을 보다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저도 위의 글들을 통해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구요. 이 부분은 범신론적인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용인 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뭐 인격신으로 대입하자면 절대자인 여호와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은 요소겠네요.
2.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는 것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직접 경험'이란 무엇인가요?
제가 '직접 경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정 목사님의 글에서와 같이 '궁극적인 생명을 보다(혹은 인식하다)'는 의미입니다. 블루군님이 직접 경험이라 말씀하시는 모세의 하나님의 영광 체험도 결국 단어 사용만 다르지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생각이 되네요. 블루군님도 모세의 체험을 '궁극적인 생명을 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다 생각됩니다.
블루군님은 직접 경험을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자체'라는 생각을 바탕에 둔다면(!) 직접 경험이란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다는 뜻일 테지요.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보았다(혹은 인식했다)'는 것이고요.
- 저 역시 모세가 얼굴을 못 보았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면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앞의 논의에서도 이를 부정한 적이 없구요.
다만 위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면까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자체가 없다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부분까지 경험한 이는 없다’라는 표현이라면 옳지만 위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궁극적인 부분까지 들어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궁극적인 부분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더라도 영광을 '직접적으로' 체험했죠. 음성을 듣고 그 영광을 체험한 일을 간접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나요? 경험은 무조건 그 궁극까지 경험해야만 경험인가요?
그래서 제가 본 사람이 없다는 것(궁극까지 경험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궁극까지는 아니더라도)경험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 한 겁니다.
정목사님의 표현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이야 오류가 없지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경험하는 사람)이 없다’는 진술은 오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어느정도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진 것 같이 모세의 경우도 하나님을 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을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경험 한 것을 가지고 궁극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경험을 부정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음성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와 그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시대(세례를 받을 때 음성)를 이어주는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어떤 계시가 직접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음성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을지라도 최소한 직접적 계시는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직접적인 경험이지만 궁극까지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지 못한다와 경험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다르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그 자체라는 표현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또는 하나님의 의지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나와있지도 않거니와, 위의 논의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는데(그것이 직접적이라고 주장하든, 간접적이라고 주장하든) 그 계시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계시가 그 자체라는 주장은 틀린게 됩니다. 계시가 하나님이라면 그 계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참여한다는 소리가 되어 인간인 이상 죽어야 되는 결과가 나옵니다. 마주한다는(계시를 받아들인다는) 자체가 간접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마주한다라는 말 자체는 접촉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거든요.
계시 자체가 하나님이라면 그 계시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계시라는 것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죽어야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죠.
3. '자연상태에서의 깨달음' '간접 경험' 이런 단어에도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게 된 것도 혼자만의 착각이나 상상이나 스스로의 생각이였고, 성경은 그것을 문학적으로 '미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어떠한 경험(체험)이 있었겠지요. 그 경험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것이고요. 다만, '궁극적인 생명을 인식'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직접 경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신'이라는 것은 신의 고유한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직접 경험'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인격신'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경험이 어떻게 주어졌을까를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야 말씀을 보면서 깨닫는 방법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수 있지만(저는 이 부분도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세오경이 나오기 전의 시대에 이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동의하시다시피 저는 이들이 단순히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지가 둘 밖에 없습니다. 자연에서의 깨달음, 아니면 신의 직접적인 계시. 저는 신의 직접적인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직접적인 계시는 환상이든, 음성을 듣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났을 거구요. 성경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서 분명히 진술하고 있는데 이를 없다라고 할 수는 없죠.
다만 모세오경 이후라면 그 계시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오는 묵상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세오경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죠.
그러면 신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한 경험을 (후세의 우리가) 신의 궁국적인 면을 못 보았기 때문에 그 경험이란 없던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정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모세도, 여러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라고 하여 아예 경험 자체를 문학적 요소로 하락시켜 버립니다. 궁국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모세의 경험자체를 문학적인 요소로 내리면서 부정하고 있는겁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부정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단지 궁극적인 면에 완전히 다가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구약에 한번 나오고 신약에서 이를 인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위의 부정하는 표현을 근거로 나머지 경험에 대해서도 모두 부정하는 것은 그리 좋은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 문학적 수사로 '미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네요.
음.. 고조선 시대에 비행기를 본 사람이 있었다 해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비행기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생물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죠. 그 사람이 친구에게 그 경험을 전하며 '천둥소리를 내는 새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문학적 수사'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상상한 것을 있었다는 것 마냥 '미화'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한계로' 인하여 그렇게 밖에 표현을 못 한거죠.
-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사람의 인식의 한계로 인한 문학적 수사라고 주장하기에는 뒤에 있는 구절은 너무 단정적입니다. 어느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인식의 한계로 인해 음성을 듣는 것으로 표현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면 음성과 같은 요소가 가능하다고 주장을 해야지 인식의 한계로 인한 요소에 대해서 완전히 차단해서 음성을 들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사과라는 과일에 대해서 잘 몰라서 배처럼 묘사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사과가 아닌 배를 묘사했으므로 사과라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과라는 실체가 있었기에 배라도 묘사를 했을텐데 배가 사과랑 다르니 사과라는 실체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셈인거죠.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라는 근거는 찾을 수 없구요. (음성을 들을 수 없다라는 근거를 저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요.)
이미 앞서 논의 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면을 보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받은(경험한) 성경의 인물들에 대해 성경이 음성을 들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음성을 들은 사람이 없다’라고 주장하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앞서도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보지 못했다는 궁극적인 면에 다가서지 못했다는 의미이지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음성을 들은 사람이 없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라크리메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그 창조원리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가 깨닫는 것을 일반계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구속하시고자 하는 의지를 깨닫는 것을 특별계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특별계시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그 기록으로 인해 완료 되었으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성령님을 통해 깨닫는 것도 특별계시의 연장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계시 자체가 신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니 우리가 비록 시간적 차이가 있더라도 성경을 통한 말씀을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한다면 이는 특별계시를 (간접적이더라도) 받는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미 구속사역 자체는 성경을 통해 완료 되었기에 현시대에 있어서 특별계시 자체를 직접적으로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영감의 떠오름이나 기타의 인도하심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속에 깃든 원리를 통해 우리는 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데 이를 일반계시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을 통해 신이 역사하심을 느끼는 거죠. 하지만 이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구속사적인 면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성경의 내용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반계시를 통해서 구속사적 원리까지 파악하려는 시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와 같고, 따라서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려는 시도인거죠. 이 경우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범신론의 하나님이 되게 됩니다.
에밀브루너와 칼바르트의 '자연신학 논쟁' 중 계시부분과 비슷한 토론 같네요.^^
브루너는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었죠. 계시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눠 블루군님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칼바르트의 견해는 이랬습니다.
"만약 피조물을 통한 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지 반문한다. 어떤 계시는 희미해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게
하고, 어떤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곧 계시를 이렇게 단계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성령을 통하지 않는 자연을 통해 인식한 신이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반문한다."
물론 브루너는 자연인이 아닌 신앙을 가진 자만이 일반계시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계시도 있을 수 없지만, 있다해도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그것이 계시라는 것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반계시 특별계시를
나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림한 그리스도 이전의 구약성서도 유일한 계시인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계시로 인정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상 불루군님이 주장하는 이런저런 주장도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된 신앙으로인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구속사역이 완료됐다." "계시를 직접적으로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있다."
이런 식의 완료형 주장은 자칫하면 불루군님이 마치 하나님의 뜻을 모두 파악했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 는 성경이겠죠. 앞에서 정목사님과 몇몇 분들과 주고 받은 대화를 봤습니다만 다른 거 보다 먼저
성경 형성사라든지 정경화 과정을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작은나무님/
사실 계시부분은 제 주요 관심분야가 아니기에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토론을 통해 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인식이 바뀔 가능성이 큰 분야이기도 합니다.
1. 말씀하신 부분에서
칼바르트는 말년에 교회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말씀이지만, 창조는 그의 영광을 나타낸 수많은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입장을 다소 브루너 쪽으로 돌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야 바르트가 말했다는 사실이나, 부르너가 말했다는 사실이, 혹은 칼뱅이 말했다는 사실이 제게 아무런 작용을 못하기에 그냥 넘어가는 편입니다. 사람의 의견이야 다양할테고, 그 중에서 자신이 성경에 비추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일테니까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개혁신학에 가까운 제 입장에서는 신정통의주신학자이긴 하지만 브루너와 사고하는게 비슷하긴 합니다. 저의 경우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개혁주의 조직신학)적 입장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벌코프도 브루너의 계시관점은 개혁주의와 유사하다고 하네요.
2. 구속사역이 완료되었다, 계시를 직접적으로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료되었다, 따라서 구속사적 의미에서 더이상 특별히 직접적으로 계시될 것이 없다. 성경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면 제가 생각을 바꿔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특별계시와 다른 일반계시가 있다. =>
로마서 1장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2장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안녕하세요 소목님
계시의 얘기로 전환 된 것은 제가 정목사님이 모세의 경험이 '직접 경험'이 아니다라고 표현 한 것에 대해
이 '직접 경험'이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지 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 신학적 용어인' 계시'라는 단어를 제시한 것입니다
얘기하신 것 처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그리스도의 빛을 통한 계시로 정의 한다면 차이를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모세의 경험(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을 그리스도의 빛을 통한 경험으로 정목사님이 간주하는지는 아직 알수가 없네요
만일 모세의 경험을 그리스도를 통한 경험(특별 계시)로 본다면 이구절을 문학적 수사라고 정의하는 것은 분명 오류입니다
정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적 수사라 표현 하신 것'이라 저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부분에서 두분의 의견차가 생긴 것 같구요
만약 제 판단이 틀렸다면 두분께서 요약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거 괜히 전문가들 토론에 끼어든 느낌이 듭니다. ^^
아직 신학에 대해서는 초보자로서 이제 겨우 몇몇 책들을
읽었을 뿐이며, 라크리매님의 주장을 옳다. 그르다. 할 만한
신학적 통찰을 충분히 갖고 있질 않습니다.
다만, 제가 구약성서가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기독교 계시로
인정 됐다는 이야기는 구약의 특정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맥락 즉,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경험한 모든 하나님 경험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간접경험이라 게 제 견해입니다.
부활 이전까지의 모든 하나님 경험은 간접 경험일 수밖에 없으며 만약
직접 경험이 있었다면 제 생각이지만 굳이 성서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직접 경험을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정목사님 글 중 '문학적 수사' 언급에 있어서 저는 옳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언어와 문자로 전달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써,
의미부여 입니다. 문학적 수사이든, 직접적 표현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천한 답변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크리매님을 포함 여러 다비안들의
글로인해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평안하십시오.
ps. 라크리매님께 쪽지로 보냈던 내용입니다. 댓글로 달아 주시라고 해서.....

블루군님,
제게 주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대게 의견의 일치를 확인한 것 말고 두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1. "계시 자체가 하나님이라면 그 계시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계시라는 것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죽어야 된다는 소리입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동의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계시'라고 할 때 '궁극적인 경험'을 말하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만큼(계시하신 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므로 계시를 마주하는 순간 '죽어야한다'고 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2. "정목사님의 표현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이야 오류가 없지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경험하는 사람)이 없다’는 진술은 오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블루군님도 문자 그대로 '음성'에 한정시키진 않으시니, 괄호 안의 말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원 글을 읽어보아도 '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경험하는 사람'조차 없다고 하신 적은 없어보입니다.
분명(!), 어떠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겠죠. 다만, 그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고대근동의 대표적인 '신 경험의 표현방식' 가운데 하나인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서술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신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이 그런 식이었으니깐요. 다시 말하면, 음성을 들었다고 표현한 '문학적 수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험'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 그 경험이 없다 혹은 창작한 '문학'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크리매님,
일반계시-특별계시, 계시와 자연, 계시와 역사, 브룬너와 바르트의 논쟁
이런 것들이 최근 제 관심 분야입니다만, 아직 너무 어렵고 갈 길이 머네요.
굳이 이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논의가 계속 될 수 있다는게 미숙한 제 생각입니다.
일반계시-특별계시 논의를 하자는 라크리매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저는 이 부분에
관하여는 관전만하며 학습하겠습니다.
엔크리스토님/
1. 무한수와 정수를 더하면 무한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무한하신 하나님 그 자체라면 그 무한수의 일부분을 정수인 우리가 접하더라도 우리는 무한수가 되고 맙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궁극에 마주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신 하나님을 보면 죽는거겠죠. 정수인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테니 말이죠. 그런데 계시가 하나님이라면 계시라는 본질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데 죽지 않잖아요.
2. 요 1:18절은 좀 심각한 내용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도, 여러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원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거나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앞서 논의 했듯이 우리는 모세에게서 어떤 경험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모세에게 어떤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이 모세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모세가 직접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보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진술은 옳지만, 모세가 직접 경험도 하지 못했다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평행선이겠네요.

블루군님,
1에 관하여는 각자의 하나님에 대한 표상 차이가 있으니,
각자의 차이를 우선 인정해도 될 것 같아요. 저도 더 고민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2에 관하여는
님과 제가 사용하는 '직접 경험' '간접 경험'란 단어의 개념차이가 있어서
'경험'이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만,
"모세가 직접 경험도 하지 못했다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고 말씀하시네요.
블루군님께서 사용하는 단어에 의하면, 저도 "직접 경험"했다고 동의합니다.
이 부분은 원글의 내용도 님의 생각에 반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님은 "문학적 수사"라는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