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구름님이 퍼오신 이ㅇㅇ 목사의 글을 보면, 고린도 전서 14장의 여자는 ‘잠잠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여성 목사제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세윤 교수가, 이 구절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했다 하며,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 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토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되는 지루하고 긴 글을 통해, 여성 목사제도 반대를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며 (그 이의 말 그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목사들 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글의 해석학적, 논리적 근거의 빈약성은 다른 분들이 많이 지적하셨으니, 저는 고린도 전서 14장의 문제에 대해 제가 생각했던 바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타나는 여성사역에 관한 바울의 입장을 살펴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입장을 한 서신서에 담고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에서는 여성사역을 허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14장에서는 금지하는 입장을 보인다는 거지요.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있는 이유를 연구한 학자들이 고전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김세윤 교수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론, 사본학과 문서비평을 연구하는 (미국의) 신약학 학자들 가운데, Mainline ‘자유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물론, Evangelical ‘보수주의’ 계열의 학자들까지도 이 견해를 폭 넓게 받아들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 근본주의 계열은 제외하구요.)

먼저 고린도 전서 11:2-16절을 보면, 4절에서, 남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라고 하며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이어 5절에서 여자 역시 기도나 예언을 할 때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여자로서…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이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바울이 공동체의 예배 중에 여성의 기도와 예언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기도와 예언은 공중 앞에서 행하는 공적 사역으로 오늘 날의 설교와 마찬가지임을 말하는 것이구요.

다만, 여성은 (아마도 수건으로 여겨지는 것을) 머리에 쓰고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에서는 여인이 대중 앞에 나아갈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품위 있는 예법이었습니다. 또한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던 고린도에서는 약 천여명의 신전 창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배의식 속에서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에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저급한 여자임을 표시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교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신전창기의 역할로 머물렀고, 바울의 배경이었던 유대교에서는 여성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던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 받고, 여성의 공적인 역할이 허용되지 않던 당시의 상황에서, 바울은 가히 급진적일 만큼 여성의 공적예배의 역할을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전제로 여성의 역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린도 전서 14:34-35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바울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이 구절은 앞 장과 다르게 교회의 예배가운데 여성의 역할을 금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앞 절인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라는 말로 예언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단어의 헬라어를 찾아보면 11:5에 언급된 ‘예언’과 같은 어근을 가진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두 가지 다른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 본문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살펴 본 보수적인 학자들이 쓴 주석서를 보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바울은 여성의 공적인 교회 사역을 금했다는 것이고,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목사제도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ㅇㅇ 목사의 입장도 그런 것이구요.)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예가 칼빈이지요. 칼빈주석을 보면, 이 구절은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함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기에, 여성이 복종하는 위치에 있다면 공적으로 가르칠 권위 또한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F.W. 그로샤이데가 쓴 NIC 주석을 보면, “모든 성도들의 교회에서”라는 말을 바울이 했기에,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향해 주어진 명령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한 W. 바클레이 역시 바울은 여성사역을 금했다고 말하며, 그 이유가 바울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사회의 배경을 벗어날 수 없었던 문화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 구절만을 주석할 뿐, 11장과의 충돌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C. 핫지는 11장은 오직 “너울을 쓰지 않고” 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고, 14장은 “공중 앞에서 말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바울은 “여성사역에 대해서”는 14장을 통해 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교회 내 여성사역을 제약하는 전형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명백히 여성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11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14장과의 차이를 온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이 구절이 여성 사역이나 여성 리더십을 금했던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예배 중에 질서를 문란케 하는 발언만을 금한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지침이며, 11장에서 여성사역을 허용하는 바울은, 이 구절에서는 예배의 질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의 약점은, “모든 성도의 교회”라는 34절이, 단순히 고린도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여성 기혼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S. 피오렌자는 기도와 예언이 허락되는 사람은 독신여성이었고, 결혼을 선택한 여성은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기에 조용해야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두 본문간의 모순을 11장은 독신여성을, 14장은 기혼여성을 가르키는 것이라는 설명으로 해결해 주긴 하지만, 브리스길라나 유니아와 같은 기혼 여성도 바울 공동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과 모순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이 구절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삽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윤리적 비젼’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듀크신학교의 신약학 교수 R. 헤이스는 (복음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입니다) 이 가설을 그의 고린도 전서 주석서에서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신약의 윤리적 비젼’에도 이 부분이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전제는 11장에서 여성사역을 허락하는 바울이 몇 장 뒤인 14장에서 금지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 겁니다. 둘째는 문맥상의 문제로, 14:31-40 단락을 살펴보면,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일을 말하던 중 갑자기 여성의 말하는 문제로 34-35절이 등장하는데, 이 구절을 제거하고 나면 단락 전체의 흐름이 더욱 부드러워 진다는 겁니다. 또한 34절의 “모든 성도의 교회”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전체 서신의 의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셋째, 사본학적으로 몇몇 고대 사본이 (3개의 그리스어 사본과 몇몇 라틴어 사본에) 34-35절을 33절과 36절 사이에 두지 않고, 해당 장의 끝 부분에 두었는데 그것이 삽입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헤이스는 사본학자 페이네가 이 증거를 6세기의 Fuldensis사본에서 확인했는데, 이에 따르면 34-35절은 카푸아의 Vicotor감독에 의한 삽입으로 추정합니다. 우리말로도 번역된, 사본학자 바트 어만의 논쟁을 불러 일으 킨 책 '성경 왜곡의 역사'를 보면 (331-340) 위의 헤이스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바울 사후의 '매우 이른 초기'에 이 구절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 가설의 약점은 34-35절이, 문맥이 뒤바뀐 곳은 있으나, 생략된 사본이 현존하는 것 중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가설이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음에도 특별히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진영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여 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위의 네가지 입장중에 어떤 해석을 취해야 할까요? 보수진영의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14장과 디모데 전서 2:11-12의 “여자는… 종용히 배우라”는 구절을 근거로 여성목사제도를 반대합니다. (디모데 전서의 문제는, 고린도 전서 14장과 마찬가지로 2:11-12이 후대에 의한 삽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디모데 전서 자체를 바울이 쓰지 않은 ‘위작’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지만, 이 것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뵈뵈와 (롬 16:1) 유니아 (롬 16:7) 등의 여성을 동역자로 가르키고 있고, 사도행전은 브리스길라 (행 19:18-28) 또한 바울의 동역자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 말씀을 통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여성과 남성의 사역적 동등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자유케 된 자들을 말할 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 서신서를 보면, 어느 구절은 여성사역을 명백히 허락하고 있고, 어떤 구절은 고전과 딤전처럼 여성사역을 금하고 있는 모순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신 분열증을 앓았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후대의 삽입과 같은) 논리적 설명이 더 합당할까요?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겠지요. 다만, 성경에는 여성사역의 허용과 금지가 동시에 등장하기에, 여성은 ‘잠잠하라’는 말을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목사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은, 여성사역을 보여주는 구절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만을 드러내는 주장입니다. 소위 ‘정통’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쓰는 ‘성경적’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는 말이지요. 같은 구절을 놓고도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인데, 자신의 주장만이 ‘성경적’이라니요..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독단일 뿐입니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쉽게 내 뱉기 보다는, ‘나의 성경 해석은 이러하기에 이렇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직한 학문과 신앙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입니다만, 김세윤 교수님은 제가 다니는 미국의 Fuller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는 분들은 알다시피 Fuller는 신학적으로 Evangelical을 지키려는 중도보수로 분류되는 학교입니다. 그런 학교에서 김세윤 교수님은 또한 보수적인 학자로 평가 됩니다. 그런 학교가 여성 목사제도를 반대하면 교수직을 허락하지 않고 있고, 그 학교의 보수적인 학자가 고린도 전서 해석을 ‘삽입’으로 이야기 합니다. 여성안수와 ‘삽입’과 같은 성경해석에 철저히 반대하는 한국의 보수는 과연 어떤 보수일까 궁금하군요. 근대 이후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여전히 전 근대를 살아가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