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기독교가 신앙이지만 민주주의도 신앙이다.  아니 민주주의가 신앙이지만 기독교도 신앙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신앙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필요없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할 수없이 모르는 사이에 “그” 신앙을 “더” 섬긴다.  종교다원주의 위험을 얘기하지만 우리는 기독교도 섬기고 민주주의도 섬기는 데 이는 종교다원주의에 속하지 않는다.  맨날 말에 속아 살면서 그런지도 모르고 속아 산다.  민주주의, 즉,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종교의 특성은 “용인(tolerance)”이다.  남의 자유도 보장해야하니 용인이 필요하다.  죄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유민주주의.   평등과 자유라는 대립된 모순을 내재하고 가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니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용인해야하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하나님도 하나의 국민이다: 다 평등한 한 자유민주주의 멤버이다.  이를 용인한다.  그런데 무엇을 용인 못할까?  전쟁?  우리는 용인한다; 사람들에게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슨 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할까?  용인이라는 단어의 뜻도 몰랐던 그 어린 시절부터 용인하고 살았다.  그렇게 "하나뿐인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로 섬기지 못하면 성경에서 뜻하는 바와 같이 부모의 죄를 대대손손 치르는 것이다.

오늘 날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목사님들이 보았을 때도) 피를 토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라는 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미 “다른” 종교를 섬기기 때문이다(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종교는 “완성된” 종교라 종교라는 단어 서비스도 필요없다.   종교안에서 신학자들이 건강하건 비건강하게 토론이나 피터지게 싸울 때에 그 완성돤 종교들은 웃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종교 절대 완성 안된다고 말이다.

성경의 인문학적 이해?  반어적 표현 결석한채로 정말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이는 인문학의 이해가 선행되어야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 없습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인문학 안 합니다; 인문학 제대로 이해못한 사람들이 그래서 아직 인문학에서 인문학 가르칩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정말 인문학을 제대로 배우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사람인 우리는 무지를 순수함과 친절로 포장해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물론 유혹은 큽니다: 옆에서 박수까지 쳐주는데요.  그러나 그 유혹에서 느는 것은 화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로도 포장을 합니다.  그 포장들을 우리는 다 용인합니다.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길잃은 양에게 자유가 무슨 의미일까요?  말씀의 힘까지 빌려 길잃은 양들에게 길잃는 면허증을 파시는 괜찮은 목사님들도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오시지만 예수님을 파신 분들은 경찰처럼 옆집아저씨처럼 "목자"처럼 오시는가?  종교가, 신앙이 예수님을 죽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