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여쭙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생각이 모두 맞다고 생각하시나요?ㅎㅎ
'모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다비아에도 들어오고,
서울샘터교회에도 찾아오는 것을 보니
목사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문득 다비아가 웅덩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여 있는 웅덩이.
인문학적 성서읽기라......
처음에는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엇인지 나름 고민도 해보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사실은 '정용섭의' 인문학적 성서읽기이고 우리는 목사님이
인문학적으로 읽으신 성서를 반복학습하여 내것으로 삼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처음에는 저또한 인문학적 성서읽기
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음)
다비아 소개를 보니,
<대구성서 아카데미>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여러 방향에서 도움을 주려고 시작한 공부 모임이며 동시에 운동입니다.
라고 되어 있더군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한 방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운동'이라면 끊임없이 움직이며 역동하는
'진리 투쟁'이 되어야 할텐데,
다비아에는 정목사님의 '한'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정목사님의 잘못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목사님은 그냥 자기의 길을 유유히 가실 뿐이겠지요.
어쩌면 진리의 전권을 특정 개인에게 위임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저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는 정목사님과 대립각을 세우는 글들도 찾아보기 어렵지요.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다비아 초기보다 목사님의 진리론적 타당성이
대중들한테 증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처음에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시비도 많이
걸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는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목사님만이 옳기때문에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진리투쟁을 할, 아니 진리투쟁을 '지켜볼' 마음의 여유가
있나요?
다비아의 보수화는 목사님의 성장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결국 목사님의 생각만 어떻게든지 좇아가려는 순둥이들만 남게
하는데 고여있는 웅덩이에는 생물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떠나고 말것이고 웅덩이인지 모르는 사람들만 다시 찾아
오겠지요.
음악감상도 좋고(저도 많이 올렸고), 신변잡기적인 글들도
좋지만 다비아 운동이라는 본질을 놓치는 순간 그간의 모든
것들은 본질을 치장하기 위한 앞가림으로 드러나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고, 또 왔다가 사라지고
목사님은 그런 것을 신경 쓰시지 않으시지만
다비아가 역동하는 운동으로서 항상 새로운 샘물이 샘솟는
곳이라면, 진리(진리 정신)가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리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은 '다비아가 위기'라는 말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는지요?
다비아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그렇게 생각
하시면 됩니다.
저또한 다비아가 위기라고 단정짓지 못하여 물음표를
단 것 처럼요.
위기라고 생각지 않으신 분에게는
저의 글은 공중에 떠도는 소리일테고,
또 혹여나 위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께는
생각의 단초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원래 이런 글은 제목이 거창해야 사람들을
많이 낚을 수 있답니다.ㅎㅎ
마지막 문장, 제목'도'라는 표현을보며 캔디님의 기분이 좀
상하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시고
주일날 뵐께요^^
커뮤니티가 개방적이면 개방적일수록 좋다는 원론은 공감할 수 있지만 그 커뮤니디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정체성이 개방성과 충돌할 때에 정체성의 존립을 위해서 개방성을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훼손해가면서 개방이라는 원론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찬선씨 글에 대해서 농구,축구를 이야기 하셨네요?
농구와 축구를 이야기 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같은 농구를 하더라도 항상 그 감독, 코치의 요청에 따라서 경직되게 움직여가는 운동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으로 글을 올린것으로 개인적으로 이해합니다.혹은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로...
이런정도의 글들은 자유롭게 표현을 하며 가는 것이 건강한 다비아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이런 저런 모양으로 헌신하며 땀흘려온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았으면...
그리고 다른분들이 보는 관점에서 보면
'다비아 위기?'...
위기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위기를 잘 넘어서 건강과 행복을 향한 요청이라는 생각은 없는가봅니다.
오히려 입을 막으려는 것으로 느껴지네요.
모두를 위한 건강한 박수를 원하며...
지난 주 샘터교회에 나가지 못했네요.
본 교회 주기철목사 순교65주기 추모 예배가 있어서...
웃으며 봅시다.
콰미님. 지난주 왜 안오셨어요?
덕분에 좋은 책 잘 받았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농구를 하는 곳에 가서 왜 축구를 하지 않느냐? 하면 안되지요.
하지만 저의 문제의식이 이부분에 해당되는지는 또다른 문제이겠지요.
두 명의 굴뚝 청소부 얘기를 아실 것입니다.
정작 자기 얼굴을 닦은 청소부는 상대방 얼굴에 검뎅이를 보고
자기 얼굴을 닦는다는 이야기. 자기 얼굴은 깔끔해도 말이죠.
정목사님 없는 다비아는 '현재로선' 상상 할 수 없습니다.
정목사님의 신학과 다비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기서는 농구를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반합의 과정을 거칠때 정목사님의 생각이 더 잘 드러
나고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저의 댓글이 제가 올린 글과 모순처럼 들리시나요?
그러면 안되는데....^^
소개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고 목사님도 피곤한 일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비아 회원 본인들이 열심을 내서 타커뮤니티 예수 세미나, 세기연, 드림실험교회 등등의 멋진 싸이트에서
다비아와 그 싸이트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 어디까지 연계하고 어느 부분에선 투쟁해야 하는지 각자가
고민하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구박사님과 정목사님이 신학적 스펙이 같아서 논쟁을 벌이지 않는 게 아니랍니다.
그분들은 각자의 역할과 몫이 있습니다. 그 상황과 현실에 맞겠금 자신의 신학을 이야기 하고
자신들의 길을 가는거지요
계기를 제공하는 길은 열수 있지만 정목사님께서 비평을 통해서 지적하신 옥목사님의 제자훈련과 마찬가지로
신앙의훈련은 아카데미,신학과는 다른 차원의 길같습니다
옥목사님이나 정목사님 모두 신심으로 시작된 일은 틀림없지만
제자훈련과 다비아운동 모두 거쳐가는 길일테고 고지는 결국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수 있겠지요
그길은 분명 자신만이 알수 있고 지금 그길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자들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옥목사님의 다락방 성경공부 교제를 공부하면서 말씀의 신비를 처음 경험했고
그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목마름을 인지하고 또 이곳 샘터까지 오게하는 원동력이 됬었습니다
그래서 찬선군의 생각이 또다른 차원의 신앙의 길로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란 생각이 드네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글로 표현하고 가르칠수 있는 능력이 이곳에 있다면
그곳엔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자들이 가득하겠죠
그치만 그런 곳에도 역시 방해하는 자,지나가는자...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는 누구나 보이게 노출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것을 볼수 있을때 드러나는 것이 진리이라 각자의 의견이 분분할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모두가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풀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숙제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눈이 본질을 알아챌수 있기만을 늘 긴장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자 길은 아닐런지..
평안한 한주가 되기를....
이 글을 읽으면서, 강의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모르는 부분도 많은데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는 저를 깨웁니다. 정목사님은 모두 맞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 은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말 같습니다. 세상 어느 사람이 온전히 온전하겠습니까? 언제나 다비아가 열려있고 서로를 깨어있게 깨우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누구나가 그런 지는 모르겠으나 다비아를 처음 알게 되고 접할 때 저는
색다름의 충격,
무지를 두드리는 충격,
옛 것과의 충돌의 충격,
안존함이 깨어지는 충격,
은폐된 것으로 향해야하는 충격,
현미경에서 망원경으로 바꿔야하는 충격,
점상에서 방향성이 있는 선상에 있다는 속도감의 충격,
모든 것이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충격,
나무 붙들고 있다가 끝없는 숲을 대하는 충격
.........하여간 여타 각종 충격이 있었습니다.
공기의 밀도와 종류가 다른 곳을 진입할 때는
아시다시피 자체적인 충격의 열감과 진동이 있습니다.
그 이후 조정기간을 거쳐 그 공간을 호흡하는 때....
정반합의 논쟁들이 다이나믹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살아있슴을 느끼는 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다비아에 들어와서 가끔 그런 일이 있어서
사실 흥분 상태일 때도 있었으나
요즘은 빨대를 들고 여기저기 꼽아서 쪽쪽 거리며 빨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는 것이 더 벅찬 거 같아요.
너무 단단하고 맛없으면 금방 빼버리는 것도 있구요.
논쟁도 즐기지만 사실 먹는 거 좋아하는 저로서는
조용히 먹고다니는 것도 좋군요.
(결국 먹으면서 논쟁하는 거 재미나죠..그걸 바라시나요? ㅎㅎ)
찬선님, 제가 서울에 가면 다비아에서 먹는 거 말고
진짜로 맛난 거 사주셔야 해요...^^
2. 고여있는 웅덩이, 정용섭의, 운동,역동성, 대립각이없다. 시비가 사라졌다. 다비아의 보수화, 사랑채위주의 신변잡기 활성화
3. 이곳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분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지요. 같은 현상을 보고서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클 것입니다. 한 예를 들지요. 제가 예전에 대학원 입학을 했었습니다. 대학원 도서관을 가보고서 저는 실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기숙사 룸메이트는 좋다고 감동 먹었지요. 알고봤더니, 제가 좀더 좋은 학교를 나왔더군요. 다비아 위기를 보는 시각도 전이해, 지금까지의 사상적 배경 등에 의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여기 다비아도 자세히 보시면, 온갖 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나이브하신 착한 분, 기회주의자들, 권력추구자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분들 , 뻔뻔한 사람들 등등. 이런 다양한 부류앞에 동일한 말이 동일한 뜻으로 들리기는 만무합니다.
4. 고인 웅덩이는 정체성을 이제 다소 띄기 시작한다고 보여집니다. 정용섭의 단지 한 개인의 견해가 아니지요. 정용섭 안에는 판넨베르크, 몰트만, 바르트가 숨쉬고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나요? 한 개인을 넘어섭니다. 다이바가 한 개인 즉 정용섭의 통제하에 놓이는가를 예의주시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리 큰 염려하지 않아셔도 될듯합니다. 다비아의 보수화는 기존교회의 보수화를 생각하면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설교비평책에 나온 교회들에서 피부가까이 숨쉬며 정권핵심부에서 정권눈치보며 소위 종교성직자로 살아본 사람들은 보수화가 무엇인지 알지요. 사랑채위주는 학교의 쉬는 시간정도로 아량을 베풀면 어떨까요? 선진국학교일수록 쉬는 시간이 엄청길다고 들었습니다. 쉰다고 노는게 아닐것 같습니다.
5.저는 정용섭목사님의 책을 꼼꼼히 읽고 있는 많은 사람들중 한 사람입니다. 이와 함께, 바르트의 교회교의학도 꼼꼼히 읽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혹시 교회교의학이 어떤 책인지는 아시지요(절대 님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 페이지만 읽어보시지요. 절망 그 자체입니다. 도통 몰라서 이해가 안되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지요. 그 중에서도 알아듣는 한 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심령을 때리지요. 정용섭의 글도 그에 못하지 않습니다. 그의 지나온 삶의 궤적에서 길어진 신학적 통찰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쓴 바르트와 정용섭의 비교 글 검색해서 한번 보시지요. 물론 여기서도 정용섭의 지난 삶에 대한 "자기연민"에 빠져서도 안되기에 그만 두렵니다. 자기연민 아시죠? 정용섭 신학의 핵심키워드 중 하나지요. 현대의 우상-자기연민. 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의 폭발을 이렇게 라인지웁니다. 바울-어거스틴...루터-칼빈-바르트. 여기 한국에서는 이 라인에 정용섭이 들지는 않을까요? 후대가 판단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들것 같습니다. 꼭 정용섭의 설교비평과 설교집, 뭐꼬 꼭 읽어보십시오. 정독하십시오. 소설읽듯 마시구요. 다비아에 올라오는 질문 및 글들을 보면, 정말 정독해 읽는 분들 몇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정용섭의 책도 안 읽으면서, 도대체 정용섭과 가깝다고 정용섭에 동조한다고 정용섭을 안다고 말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안타까울때가 많습니다.
저는 집중해서 읽기위해 하루 한 챕터 이상 읽지 않습니다. 읽는데 옆에서 조금만 소음나면 마누라든 애든 가서 입막고 나서 읽습니다. 서정완 이란 분도 한번 읽어보시지요. "그리스도교의 실존론적 이해,1,2,"서정완, 성광문화사. 불트만, 허혁, 서정완 이런 라인인 것 같네요.
다이바의 위기 너무 걱정 마세요. 한 개인의 교조화로변질되지 않느냐 너무 걱정 마세요. 라크라메님 아주 정확한 통찰입니다. 외부 공부와 함께 내면 성화(생크티피케이션, 우리말로는 수도가 더 정확함, 수도사도 있잖아요)를 위해 애쓰지요. 제자운동과 정용섭은 정반대운동이지요. 제자운동은 또하나의 율법생활을 강조하는 공로 주입 운동이지요. 또 주저리 주저리 했네요. 죄송함다. 고호 일생의 마지막 그림이, 까마귀 그림이라는데, 왜 그런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까악 까악
정목사님의 기독교를 말한다나 기꼬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경의 구절을 봉독하고
그text 안에서 각자 받는 성령의 음성을 기조로 답변을 요하는 질문과 답변형식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제자 훈련이 지금의 율법적인 주입형태를 갖게된건
시스템화를 요구하게 되는 규모의 비대함으로 변질된 것이라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오정현 목사가 부임해오면서 전과는 또 달라진 것으로 압니다
저가 경험한 바로는 대한민국 어느 교회에서도 성경공부를 하는데 주입식 교육이 아닌곳을 본적이 없는데
만약에 그런 교회를 까마귀님이 알고 계시다면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 전의 모든, 길다면 길었던 지진한 신앙생활을 뒤덮고도 남는 내면의 힘과
개안의 기쁨을 맞본 자로서
또, 정목사님의 글에서 영성의 깊은 울림을 조금씩 눈치재는 자로서
찬선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더 세세한 생각들은 다를지 모르나 올리신 글안에서 그렇습니다
위 댓글에 있듯이
다른 배움이 열려있다하나
그 배움에 눈치가 보이고
다비아만의 정체성이라하나 보수의 끈적함이
큰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뭐 그렇다해도 다비아가 위기는 아니겠지요
그런 방향을 원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든지 있을테니까요
문제는 어떤 다비아냐 이겠지요
박찬선 님~~
오랜 만에 이런 글을 대하니 운영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습니다.
올리신 글을 읽고 제가 오랜 만에 접속통계를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4월 들어 오늘까지 제일 한가했던 날 접속인원이 624명(5일-식목일)이었고
가장 붐빈 날이 890명(8일)이더군요.
정목사님께서 설교비평 책을 내신 후 한참 언론에 거론될 때에 비하면
상당히 겸손한 통계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매일 접속자는 꾸준한 편입니다. 700명 내외니까요.
그리 나쁜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통계로 일희일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지만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노란 완장차고 활동하면서
여기 들어오시는 분들을 눈여겨본 결과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첫째, 어떤 분들은 등록하자마자 다짜고짜 뺨을 치고 발로 밟고 욕을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시더군요.
둘째는, 다비안들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드는 분들이 가끔 계셨어요.
다비아와 계속 허공치기를 하게 만들었지요. 신학적 베이스와 접근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보니 양자가 너무 피곤해지고 진도 나가기가 참 어렵더군요.
셋째는, 차분히 눈팅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대다수시지요. 댓글 달기가 좀 두렵다는
표현도 하시고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묵상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넷째는, 동반상승을 할 수 있는 좋은 대화와 토론을 열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제인가요? 손기철 장로님에 대하여 글을 써주신 분 말이예요. 운영자로서는
정말 고맙지요. 말이 통하는 분이니까요.
정리하고 보니 다 아시는 내용이네요 ㅎㅎㅎ.
대립각 때문에 제가 피곤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어요.
종각 다음으로 접근하기 힘든 게 대립각이 아닌가 싶어요.
네 번째 유형의 토론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으로 대립각이 잘 세워지지 않는 이유는 이제 다비아가 위기라서
이기보다는 나름대로 안정기에 접어든 게 아닌가 싶네요.
호기심 단계를 지나 나름의 색깔을 가진 곳 말이지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도 같아요.
뜨거운 것만이 다 좋은 것 같지도 않고요.
정중동(靜中動)!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요. 성숙한 토론과 대화를 할 준비 말입니다.
건설적인 글 고맙게 생각합니다.
샬롬!
봅니다. 저는 진도가 빠른 시와 그림님과 찬선씨의 수준에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진도가 더딘 분들의 입장을
헤아리다 보니 상황적 모순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을 단기강좌의 컨덴츠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전적으로 찬선씨와 시와그림님의 기준에 이미 서있습니다
(강좌의 참석하시는 분들의 성향과 수준을 고려하면서 준비하니까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그 컨덴츠에 대해서 불편해 하거나 부담스러운 분들
심지어 그런 활동의 무용성을 제기하는 분들까지 고려하면서 새삼스레 삶의 애매모호함을 느낀답니다.
아마 이 부분은 다비아의 방향성과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 아카데미 원장(정목사님)님의
의견을 기다려 보는게 좋을성 싶네요

아무래도 한 마디는 해야겠군요.
근데 별로 할 말도 없소이다.
말하기 시작하면 길고,
줄여서 말하기는 힘들고, 한 거 같소이다.
그냥 한 가지만 말하죠, 뭐.
다비아가 <보수화> 되는 것 같다는 일부의 주장은
크게 수정되어야 할 거에요.
지금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옛날에도 원래 그랬다고 보면 됩니다.
뭘 보고 보수적이라고 할까요?
그게 궁금하오.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입장,
남북 문제, 정치적 견해 등등,
이런 데서 우리는 늘 진보적인 스텐스를 취했어요.
실제로 행동을 취한 건 많지 않지만 입장이 그랬다는 거죠.
뭐가 보수고, 진보일까요?
아마 자유주의적 신학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두고 말한 것 같군요.
그런 이런 맥락과 전혀 다른 거랍니다.
다비아는 학문적인 진보성을 띄고 있는 거에요.
그것은 곧 기독교 신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역사적 예수를 찾자는 <예수 세미나> 같은 신학 운동은
제가 보기에 중심 신학이 아니에요.
신학의 시작도 그게 아니었구요,
앞으로의 가능성도 없어요.
오히려 과학신학이면 말이 되는 거지요.
오늘 대구오프 공부 모임이 있어서 이제 나가봐야 하는데,
할 말은 많이 남았으니, 어쩌지요? ㅎㅎ
이렇게만 말하면 되겠군요.
다비아와 샘터교회는 보수가 아니라 근본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비아를 떠난 사람들이 있다는 건
다비아가 폐쇄적이라는 말이 아니냐 하는 논리는
전후 사정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들이랍니다.
그건 오늘 그만 말할게요.
마지막으로, ㅎㅎ
다비아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지성적으로 열린 보수주의 평신도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2천년 영성의 중심을 전달함으로써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통치에
참여하고 그 연대성을 확보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비아는 그 정체성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어서
과거에 비해서 그 가능성이 넓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전인수인가요? ㅎㅎ
일단 대구오프가 끝난 뒤에 조금 더 보충할게요.
신앙은 보수적으로,
사회 참여는 진보적으로!
목사님!
다비아 보수화 논쟁은 결국 목사님을 향한 것일텐데요.
사회 여러 현안에 다비아가 진보적 입장을 취하신 것. 맞을 겁니다.
프락시스는 둘째 문제로 두고요.
다비아의 학문적 진보성은 제가 이쪽이 전공이 아니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맞겠지요.
목사님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비아가 결코 보수이지 않음을 얘기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성찰'의 측면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조국 교수의 책제목 '성찰하는 진보'가 생각이 나네요.
우리는 성찰하고 있는가. 우리 자리를 점검하고 있는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있는가. 남의 말을 수용하여 내것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목사님의 말씀.
"다비아가 <보수화> 되는 것 같다는 일부의 주장은
크게 수정되어야 할 거에요.
지금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옛날에도 원래 그랬다고 보면 됩니다.
뭘 보고 보수적이라고 할까요?"
저는 목사님의 '확신있는' 대답들이 불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대답들에 따옴표가 있지 않고 확신있는에 따옴표가 있는 것을 눈여겨 보세요.
보수화되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보수화되는 '방식'를 문제삼고 싶었고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느냐? 뭘 보고 그러느냐?
좀 더 생각해 볼께요^^
밑의 목사님의 댓글에 대한 저의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비아에서 견디지 못하는 분들을
자신들의 도그마를 절대화하여 그것을 프로파간다 하는데만
몰두한다고 단정짓기 보다
다비아가 다비아의 도그마를 절대화하여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뵐께요^^
--다비아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지성적으로 열린 보수주의 평신도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2천년 영성의 중심을 전달함으로써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통치에
참여하고 그 연대성을 확보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비아는 그 정체성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어서
과거에 비해서 그 가능성이 넓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에
동의합니다^^
제가 처음 다비아의 문을 열었을 때의 느낌은
'짜임새있는 신학적 스펙이 테트리스처럼 쌓여갈 것 같다' 였습니다.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 했는데
오래 여기서 놀다보니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이곳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나 다비아가 진보쪽에 있는 것이 맞는 거 같구요...
(박찬선씨는 보수적이라고 말하지만..)
다비아는 짧은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여기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이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짐)
옥한음 목사의 '평신도를 깨운다'보다 더욱 깊이 잠자는 평신도의 의식을 깨웠다고 생각합니다.
'고인 웅덩이 같다'고 하셨는데
조금 성급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비아 5년차인 제가 볼 때 다비아는 계속 살아서 움직이고 있거든요.
박찬선씨의 이런 낚시성 태클(?)에
눈팅족 꼬리가 걸린 걸 보면^^;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던 박찬선 님!
저는 여전히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를 읽을 때면
그 경계라는 것에 대해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경계는 대체 무엇인가요?
운동=투쟁 그 공식에도 동의하지 않아요.
분명 죽었어야 하는 예수교가 이천 년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그래도 가끔 이렇게 선정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도 괜찮아요. *^^*
졸다가 깜짝 하는 극효과를 가져 오니까.. ㅎㅎ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모했기 때문인 것 같네요.
제에게는 다비아는 옹달샘 같은 곳이지요.
옹달샘이 고여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늘 새로움으로 썩지 않지요~~
저는 다비아에서 "믿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종종 발견한답니다.
<믿음의 기쁨> 책 제목이기도 하군요.ㅎㅎ
특히 "라라 님"이 말씀과 성경공부를 하고나서 쓴 댓글들을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느낀 곤 합니다. 저는 "살아 있는 신앙고백이란 바로 저런 것이다"하고요...
저는 복잡한 것 잘 모르는 아주 단순한 달팽이입니다.
다비아는 늘 내 삶을 하나님통치와 그 분의 세계를 인도해 주는 길입니다.
수많은 길 중에 우연찮게 발견한 이 길에 대해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하나님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길은 끝이 없지만 인생의 항로에서,
나침반으로 가장 정확하게 우리가 찿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드네요..
힘내시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좀 더 크게 여유를 가지면서
천천히 같이 갔으면 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아까 쓰던 대글을 마무리 못해서 한 두마디 보탤까 합니다.
다비아에서 견디지 못하는 분들은
제가 보기에 한 가지 특징을 갖고 있어요.
계몽적 태도가 너무 강하다는 겁니다.
다비아를 자기의 생각대로 가르쳐 볼려는 생각말입니다.
여기서 보수냐, 진보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답니다.
자신의 도그마를 절대화하고
그것을 프로파간다 하는 데만 몰두하는 거지요.
이런 분들과의 대화는 낭비에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다비아가 한국교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랍니다.
다비아는 한국교회를 도매금으로 비판하는 사이트가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한국교회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다비아에 들어오는 것 같더군요.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일이년 전만 하더라도 황색저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유치한 비판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비아는 안티 기독교가 아니랍니다.
다비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미 위 대글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기독교 영성의 중심을 확보하는 일이랍니다.
그걸 알지도 못하면서 그 이외의 일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별로 지혜로운 일이 아니에요.
어쩌면 평생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중심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지 모르지요.
스퐁 주교의 책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저는 몰트만, 윙엘, 판넨베르크, 오트, 바르트, 에벨링의 책을 읽겠어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 국어도 제대로 못하면
영어를 배우겠다고 모든 정력을 소비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모국어를 잘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자들이 영적 현실 안으로 들어가려면
기독교의 중심 신학을 깊이 있게 학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비아는 그걸 하겠다는 거지요.
이런 공부가 끝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 다른 걸 제공하는 다른 사이트에 가서
그걸 공부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순간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기독교 신앙에서 초보자들이니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 초보 딱지를 떼기 힘들 거에요.
다비아는 한 우물만 파서 마시며 살다 죽겠다는 입장이랍니다.
그 우물은 지난 2천년의 역사에 뿌리를 둔
기독교 중심의 영성이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걸 학습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다른 데 눈을 돌릴 틈이 없군요.
주의 은총이.
정말 웅덩이가 맞다는 생각도 들구요.
역시 웅덩이...고인물...
얼마나 경험을 해야 자기의 걸음 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까요?
결국은 떠드는 사람들은 떠나라는 말씀...
왜 떠드는지...
떠들게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관심없으니
이젠 필요없다?
결국 숨이막히는 곳...
귀도 막히는 곳...
'말하는 입보다는 듣는 귀를 높은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문구가 생각이 나는군요.
남들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이유가 있는 로멘스가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다비아는 위기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으니...
다비아, 실망입니다.
아니 잘못알았을 수도 있구요.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었던 막연함
그저 애써 마음아파하다가 길을 떠나는 친구들을보니 서글퍼지네요.
다비아 병걸렸다니까요.
정말로...
머물러있으면 더 힘들어질까봐 어쩔수 없이 떠나는 이의 마음을 모르는 병
부모 상중에 철부지 자식들 잔치자리로 알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같은...
애정을 놓고가는 그 길...
후회없이 편히
어디서라도 마음 힘들어하지 말구...
좋은 모습으로 얼굴이나 봅시다.
길떠나는 친구에게...
늘 오늘처럼 그리워하며 기억하리...
언젠가 남은 길을 떠날 사람이
뒤 돌아보지 마세요.
서로 마음아프니까...
다비아 제발 정신차리셔요.
제발...
다만 위의 솔나무님의 반응은 조금 이해가 안되고 의외입니다.
제가 보기에 다비아가 절대 숨막히게 하는 곳이 아닌 것 같은데......
어쩼든 박찬선님의 문제제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 근본과 본질에 더 접근하기 위한 몸부림일 것입니다.

위기라는 말 웅덩이란 말은 정목사님을 자신의 의식 속에 어떤 위치로 두는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진리에 대한 여정은 근본적으로 혼자 걸어가야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길동무도 있고 안내자도 있으나 결국은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정목사님은 그 여정에 안내자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여기서 비판하는 보수교회들은 목사들 스스로 안내자 이상의 지위로 스스로를 격상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염증을 느끼고 문제를 느끼고 있던 사람들이 여기와서 정목사님을 자신 속에 그런 위치로 올려둔다는 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제 댓글이 원글과 약간 초점이 어긋난 것도 하긴하지만 설사 이곳이 어떤 의미에선가 웅덩이가 되어가고 굳어져가더라도 이곳을 안내자로 생각하고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진리의 향한 우리의 여정은 방해받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나이브해져가는 저 자신에게 좋은 자극이었습니다..
찬선님 감사합니다..
솔나무님과 캔디님 모두 자기의 의견을 내놓는 것은 좋으나, 상대방의 글에 댓글을 달때 감정적으로 반응하시는건..
좋치 못하네요.
각자의 인식의 깊이가 다르고, 원글을 읽고 생각하는 보는 기준도 다를 수 밖에 없지요.
늘 답답해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던 것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배우며 얻어갑니다.
큰 기쁨을 주는 다비아에 정목사님께 감사합니다.
아까전에 제가 캔디님 글 밑에 단 댓글 지웠다가
캔디님이 다시 올리라고 하셔서 올립니다.
"
아~캔디님 제발....
솔나무님을 보내면 안돼요~^^
솔나무님은 서울샘터교회 예배 후 저녁식사할 때
반주삼아 마시는 저의 유일한 막걸리 친구란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
그러니 간곡히 요청하건데 솔나무님을 보내지 마시고
다시 오시라고 하면 안될까요??^^"
이라고 올렸습니다.
저도 그렇고, 캔디님도 그렇고, 솔나무님도 그렇고
앞으로 계속 주일마다 서울샘터교회에서 볼 한 식구인데요.
솔나무님의 댓글은 향방없는 댓글이지만,
캔디님의 댓글은 솔나무님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쓰시면 두 분 사이도 불편해질테고 주위 사람들도 불편하게
느낄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려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캔디님이 적으신 측면도 있고요.
통화 후 캔디님의 생각을 확인한 후 제가 올린 댓글이 무의미 한 것 같아서 지웠고요.
건강한 공동체를 가늠하는 척도는 얼마나 다양한 생각이 공존할 수 있느냐 일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서로간 생각의 차이를 확인했으니
이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어떨까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라면 그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테니까요.

캔디님도
솔나무님도
우리 다 다비아 서울 모임 개척 동지들인데
왜 들 그래요.
나 비록 모임에는 안 가지만
다비아 무척 사랑 합니다.
댓글은 안 남겼어도 여기 매일 들어와서 눈팅 했습니다.
정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이 시대에 정목사님 같은 분 안 계셨더라면
기독교 영성과 복음에 대해서 아마 나는
회의론자가 되고 말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비아 초기 맴버들의 든든한 우애심도 좋았습니다.
캔디님은 성질이 급해서 표현을 근사하게 못한것이지
사실은 캔디님 처럼 진실하고 정확한 이성을 가진 분 없습니다.
솔나무 님도 그렇구요.
오래된 사람들 떠나지 마시고 계속 해서 존재 해야 다비아 가 더 다비아 다워 집니다.
늘 오늘님도 제발 성질 부리지 말고
다시 들어 오셔서 동참 하십시요.
그래야 나도 언젠가는 모임에 갈 것 아닌가요.
찬선님 잘 하셨어요... 가끔 이런 글 좋습니다.
전 거의 눈팅만 하는 수준이라...
댓글이 아래로 갈 수록 단결과 화합(?)으로 흘러가네요...ㅎㅎ
별 뜻 없는 글이니 혹시 오해 마세요.
그저 슬며시 붙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보수고 여럿이 함께 가면 진보아닐까요??
진보나 보수는 반대가 아니라 속도의 차이일 뿐이니...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중국집에서 난 짬뽕 먹고 싶은데
몽땅 자장면으로 통일해 버리는 획일주의의 '독재'가 아닐런지...
그런 점에서 다비아는 아직까지(?) 잘 굴러가는 곳이라 생각하는데요...ㅎㅎ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정수(精髓)를 향하여...
앞으로 뒤로가 아니라 깊이를 향하여...
클래식과 트랜드가 아니라 오리지널을 향하여...
묵음과 새로움이 아니라 정화(淨化)를 향하여...
이 길과 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향하여...
오늘 점심 메뉴는 칼국수였습니다...츠릅..
저는 왜 여기 모든 댓글들이 이해되고 공감되죠?
저의 회색주의적인 정체성이 들어 나는 것 같아요. ㅎㅎㅎ
찬선님 글, 정말 적당한 때에 귀한 글입니다.

저도 이런 제목으로 글을 올려야 할까 봅니다.
이렇게 많은 관심과 댓글들이...
제 글에는 별로 관심도 안가져주시더니..(관심가져주신 몇분이 더욱 더 고맙게 느껴지는군요.. 흑흑흑)
사람은 글 쓰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갑니다.
물론 글의 내용이 중요하겠지요?^^
전 수십번 읽어봐야 감을 잡을 것 같아 의견은 안적고 푸념만 하고 총총총...
서울샘터교회의 제임스-딘이 이곳에 등장하였으니 응원 글을 보내야겠네요.
월요일에 파주에 갔었는데 지나는 길에 한전이 있기에 들를까하다가 비도 오고 근무중일 것이기에 그냥 돌아왔습니다.
형제는 고민이 참 많은 사람 같습니다. 좋은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참에 1,2년 휴직하고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어때요?
먹고사는 것에 얽매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기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저도 3년을 사업 접고 그래봤는데, 돌아보면 끝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형제 같은 사람이 신학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하나님께 따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을 하니 교회가 세상에서 비실비실 할 수밖에요.
그런데,
형제의 고민이 투정으로 비춰진다고 말하면 서운하겠지요?
내 방식이 아닌 것에 대한 투정 말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구'라는 단어 때문에 금욕주의처럼 비춰진다면 '욕구'를 '고집'으로 바꾸겠습니다.
형제가 언급한 위기, 고인 물, 대립각, 옳고 그름 등등의 단어들에 형제의 고민보다 투정이 배어 있어 보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형제의 의견에 대해 '다비아는 농구장인데 여기서 왜 축구는 안하느냐는 주장과도 같다'는 콰미님의 댓글에 대해,
그것은 축구얘기가 아니라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농구의 질을 높이자는 차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농구와 축구가 '정'과 '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진정한 '합'을 이루기 위한 '반'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요?
무엇보다 '정'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의문에서 비롯된 발전적이고 구체적인 반론이어야겠지요.
그런 점에서라면 저의 눈에도 다비아에는 '반'이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정'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의 이론에 대해 '반'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론을 능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반'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매진해야 겠지요.
정목사님의 웃음소리가 들리나요?
가끔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하는 다비안을 볼 때 조금은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인문학적 표현은 넘쳐나는데 성서는 소외된 경우라고 할까요?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롭3:10)는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 본적이 있나요?
이 말씀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방법은 이런 것이겠지요.
이 말씀을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의미로 선포됐는지를 추적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추적만 하고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치열함이 드물어 보이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저는 인문학 자체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읽기의 방법과 도구는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정목사님은 그 중에서도 인간 삶의 심층을 아우르는 철학, 문학 등등의 인문학을 중요한 도구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공감하기에 다비아에서 그 인문학을 도구삼아 성서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신학자가 평생을 일궈놓은 것으로 차려놓은 상을 보고, 왜 내가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냐고 따질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목사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도그마(고집)를 절대화 하고 그것을 프로파간다(선동) 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주의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정목사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제가 정목사님의 메니아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러나 저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성경을 신뢰하는 이유는,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경은 인간에 대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고, 살아갈수록 그 고발이 타당하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의 계시자인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여기에 정목사님의 신학과 영성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토론보다는, '기독교가 뭐꼬?' 또는 '조직신학 해설' 그리고 '각종 동영상 강의' 등등의 정목사님 저서 내용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금과 같은 논쟁은 지루하고 소모적이며 유익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저의 글로 마음 상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 조만간에 시간을 내여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눕시다.
나누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정목사님이 즉문즉답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이든 그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역사가 있는 것이라고
폴틸리히의 신학, 칼 바르트의 신학.
그 사람들이 그렇게 신학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먼저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꼭 폴틸리히나 칼바르트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위의 글이 저 혼자만의 생각처럼 보이시나요?
오랫동안 다비아를 출입하신 분들이 공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위에 댓글을 다신 분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위와 같은 글을 쓰여졌을 것입니다.
다비아 보수화.
다비아 보수화란 말을 의미있게 듣는 사람은,
일단 오랫동안 다비아를 알고 지낸 사람들이겠지요.
이제 막 다비아를 알기 시작한 사람에게
변화를 뜻하는 보수화라는 말이 귀에 들릴까요?
오랫동안 다비아를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다비아 운동이라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보수화라는 말을 민감하게 생각하고 반응하겠지요.
마냥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다비아를 알고 지낸 사람은
변화를 민감하게 캐취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제가 변화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변한 건 없을지도 몰라요. 처음과 그대로인데
그만큼 처음엔 숨겨져 있다가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그렇다’라고 단정하지 않고 우려를 표시하는 정도로
글을 썼음을 다시 말씀드리고요.
심심해서 박승수님과 살람님의 회원정보를 보았습니다.
박승수님은 작년 11월 9일에 가입하셨네요.
저녁 6시 23분에 가입하신 것으로 봐서 하루일과를 끝내고
식사전에 가입을 하신 것 같고요 ㅋㅋ
살람님은..아이쿠..
올 초 2월 11일에 가입하셨네요. 11시 49분에 가입하셨으니
호빈이와 수빈이 학교 보내고 집안 정리하시고 가입하셨나봐요.ㅋ
아무리 눈팅족이라 하더라도 일단 회원가입은 해놓고 눈팅을 하는만큼,
두 분이 다비아를 알기 시작한 시점이 대충 가입 무렵이라고 추정해도
무리는 아니지요?
두 분. 다비아 초짜시군요 ㅋㅋ
한참 정목사님과 사랑에 빠져있을 시점으로 여겨집니다.
열심히 정목사님의 책을 탐독하시고 공부하세요.
제가 정목사님을 졸업했다는 말로 하는 얘기는 아니란걸 아시죠?
목사님의 저서에 대한 토론은 계속 진행되어야 할 기본이겠지요.
그것은 그것대로 죽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요.
그럼에도 이런 식(?)의 논의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 글을 올렸습니다.
양자 택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 오랫동안 다비아에 남아 있을 겁니다.
우리 몇 년 뒤에 다시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그때는 두분에게도 어느 정도 흐름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전 2006년 6월에 가입한 상병 5호봉입니다.ㅋ)
헉! 장교급 사병이란 점만 살짝 밝혀둡니다 ㅎㅎ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눈이 무척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자유로도 살짝 얼었던가 봅니다.
용산 부대에 미군 목사님이랑 차를 몰고 갈 일이 있었어요.
그분은 대위입니다.
'박! 눈오는 날 운전 해 봤나?'
'저기 저...(긁적긁적)"
'조수석에 타'
그래서 미군대위가 운전을 하고 일병이 조수석에 타고
JSA에서 용산까지 자유로를 타고 간적이 있습니다.
대위마크를 단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으니, 당연
조수석은 최하 소령이상이였겠지요?
초병들도 혼란에 빠짐.
여기까지 ㅋ
참고로 차량은 현대 그레이스 봉고차였음!
내 머리속은 항상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어요.
내가 뭔가 부족해서 그렇겠지요?
다비아 위기?
제목도 엄청 거창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