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설교 비평에 답글을 두개나 올리며 님의 진지한
댓글을 기대했지만 오늘 올리신 글은 저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기에
이곳 사랑채에서 대화를 더 나누길 원합니다.

님께서는
"죄문제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지않고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라는 주장들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던가요?
죄라는 대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집안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신구약 전체의 핵심 사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고
이에 대한 근거 구절도 무수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의 성육신 더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는
분명 속죄의 문제 정점에 놓고 있으며 죄라는 대문을 통해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속죄라는 열쇠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로일 지언정
열쇠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명백한 본말의 전도 아닙니까?

그리고 님께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나라인데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이는 죄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속죄, 속량의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이를 실현하는 운동(movement) 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회적 부정과 불의의 내면에 인간의
탐욕스런 죄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이겨내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겠지요.

하지만 이땅의 아픔과 절망이 단순히 속죄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신 대상은
로마제국의 폭거와 종교기득권층의 횡포에
짓눌려 있는 '아나윔'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너희 죄를 용서받아라' 이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속량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않고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열쇠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죄 문제로만 뒤덮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이 두 부등관계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님께서는 다른글의 댓글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신학적 막가파 시대다.남녀분별을 말함에도,
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모든 부분에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질서를 말함에도,요즘은 그것도 차별이요
타파의 대상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여자목사제도가 생겨난 것도 지난세기의 일이다. 그것을 차별로 보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자 목사 제도가 차별에 대한 불평인지요?
어떻게 이것이 신학적 막가파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저는 이와 같은 말씀하시는 분들 앞에 답답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제가 입대하기전 소위 '기저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널리 공개된 mp3 파일에 의하면
그 사건의 장본인 되시는 목사님은 그날 총신대 신대원 채플에서
'이것이 보수 신학이고 말씀중심' (기억이 오래되어 축자적으로 정확치는 않습니다)라며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를 표하셨습니다.

분명 그에 대한 근거는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논술이겠지요.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여자는 조용하라' 같은 말들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의아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합동측을 비롯해서 여성 목사 안수를 금하는 교단들은
분명 여자전도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각 교회에서 정말 헌신적으로 사역하십니다.
대체 '전도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허용되면서 '목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왜 인정받을수 없는 것이지요?

교회의 편의에 따라 남자들과 다름없이 일은 시키면서
정작 그에 따른 권한과 권위를 감히 성경말씀을 들먹이며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명백히 남녀노소빈부의 차이가 없음을 (갈 3:28)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원칙론적인 사상입니다.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의 해당 구절은 당시 '상황'에 따른 기록일 뿐이고요

더군다나 구약의 전통에 따라도 사사 드보라는 말할것도 없고
요시야 왕때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제사장과 신하들이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선지자 훌다였습니다.
그외의 성경 말씀을 넘겨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남녀의 차별이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 어느 남성 못지 않게 충분한 신학적 준비를 갖추고 농어촌과 선교지 등지에서
결혼도 포기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하시는 여자 전도사님들이
단지 여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축도도, 안수도 할 수 없는
그 서글픈 현실과 눈물겨운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체 어떻게 이것이 차별이 아닌 분별이며
보수신학이며 말씀 중심입니까?
또 이에 대해 저항하는 각 교단 여성 신학생들과 전도사님들이
어째서 신학적 막가파입니까?

님께서는 여자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저희교단(통합) 신학이
인본주의라고 생각하겠지만 지독한 편견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더이어서 하겠습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편지글은 그야말로 감정만을 자극할 뿐이지
그에 따른 논리적 근거는 상당히 빈약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두루나타난 하나님의 모성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성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것이 신성모독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불러야 하는 것 역시 신성모독입니다.

님께서는 깔뱅사상의 전통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통과 정통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주류로 인정되어온 신학이라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상황(context)에서 재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해서 진리가(text) 훼손되어서는 안되지만
참된 재해석만이 진리를 더욱 진리되게하는 도구이지
익숙한 진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소 감정이 격해저 죄송합니다.
님의 글 곳곳에는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신학의 '앎'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때문에 쉽사리
다른 이들의 '앎'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고요...

그런데 저는... 성경을 다독하는 편임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아직 어린 나이지만 삶의 터널을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더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때문에 더욱 두 눈을 부릎뜨며 성경을 읽고
앞선이들의 고뇌가 담긴 신학책을 들추게 됩니다.

과연 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지금의 앎에 대해서 자신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겸허하게 다른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일단 충분히 경청한 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학문의 바른 순서가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흥분해서 긴 글을 쓰는 까닭은
총신, 고신 등 '보수 신학' 을 자임하는 학교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의 전형적인 그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네요.

무례하게 들리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님께서는 어쩌면 제 신학이 인본주의적 장신대
신학아래서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희 학교 주변 친구들은 제 '보수'적 신앙에
종종 걱정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등
집회 현장에 '운동권' 선배들과 찾아나서는 저를 보고
'진보'적으로 치우쳤다는 우려를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게의치 않습니다.
참된 신학은 '진보'혹은 '보수' 라는 특정이데올로기에
결코 메여있지 않으며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그 어디쯤이기 때문이지요

바른 신념과 대화 그러한 칼과 칼집의 위대한 역학관계를 통해
님의 신앙과 신학이 더욱 온전히 성장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