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위기와 알파코스

근래들어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는 목회자들은 이로 부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교단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명확한 분석이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작금의 현실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얼마 전 부터 급속이 셀목회와 알파코스가 결합된 방법들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신자들을 직할 관리할 수 있는 셀목회 방식이 보다 효율적이고 목회에서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당회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이라 이를 선호하고 채택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교회의 위기에 유일하게 제시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인지지는 모르겠습니다.
셀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생각할 때  교회의 역사에서 카톨릭과 교황의 아집과 독재로 부터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서  중간자인 신부와의 관계를 해방시킨 종교개혁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회는 교황과 신부의 권력을 교회의 다수의 대표들에게 분산시킨 조직입니다. 물론 민주적인 조직과는 제법 거리가 멀지만 당회와 사무총회는 그나마 교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유일한 조직입니다.
셀목회가 혹시 당회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일반교인 전체로 전이시키는 민주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져보았지만 그것은 다시금 목회자에게로 집중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다시금 신의 대리인으로의 위치를 탐내는 것 같습니다.
알파코스 또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성령을 강제로 이입시키는 듯한 진행이든지 그리고 이과정에서 방언을 억지로 행하게 하는 방식들은 신앙이 강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을 신과 나와의 실존적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은 헛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알파컨퍼런스에서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유치함이 극에 달해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래의 이가 금니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전도를 하겠다면 아마도 유치원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할 것입니다.-하지만 기독교인 중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을 나쁘게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고민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이러한 현상이 최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는 박태선의 전도관이 각광받던 시절 그 곳의 집회에 가서 열광하며 은혜받았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이 부지기수이며 할렐루야기도원을 다녀오고  신유의 체험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았다고 뿌듯해 하던 목회자와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들이 그 또한 그 얼마였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물론 저 개인은 이단의 구분을 조금은 달리합니다만 너그럽게 적용하는 저의 기준에도 충분히 기준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집단들이 이제는 이단으로 규정되어버린지 오래됩니다.
제가 아시는 친한 목회자분들 중에도 셀목회와 알파코스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목회에서 제법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알파코스가 매력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를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말씀을 받아들임이 성령의 임재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이러한 적그리스도적 행태는 충분히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심하게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해서 오히려 충격을 받으실 수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이성을 잃게하고 광적인 상태로 몰아간다면 충분히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는 ALPHA의 알파벳이 의미하는 다섯가지 방식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11주과정과 특히 주말수양회 같은 것에서 초신자를 전도하기위한 능력전도 등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액스터시(ecstasy)는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샤머니즘에서 더욱 발달하여 있으며 이 상태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슬람의 수피즘에도 이러한 경향은 존재합니다.
유명한 부두교에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무속에도 신내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방언도 기독교만의 전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파코스의 성령의 이입도 이러한 액스터시에 이르는 샤머니즘적 방법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반복된 동작, 춤과 노래 그리고 고행 등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알파코스에서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닌 어떤 말이라도 하게 하는데 이러한 의미모를 말을 반복하다보면 방언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바로 액스터시적 상황으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성을 잃고 광적인 상태로 치닫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위기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기독교와 개 교회의 상태에서 위기를 느끼는 목회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으나 이를 비기독교적으로나  발전하는 사회를 직시하지 못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커다란 문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긍정적 방법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법론을 찾는데 매우 게으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해 있는 현대사회와 발전할 미래의 사회에 대하여 방법을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왜 한국기독교가 전래초기부터 급격한 성장을 이룩했는지를 사회적 관계속에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되었다고만 생각하지 성력의 역사사 사회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물의 전래입니다.
조선시대 아직 봉건사회와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에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의 문화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기독교의 교리를 전래하는 것과 더불어 봉건사회로 부터 벗어난 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전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평등한 인적관계와 서구로 부터 전해진 문물들은 새로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제 봉건사회의 한계로 부터 변화를 모색하던 조선사회에 무섭게 파고들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와 서구의 문물은 한국이 전쟁을 겪고 이를 극복하며 이후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아마도 80년대 까지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시대까지 기독교의 대표권은 KNCC로 나타나던 진보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국사회가 이제 선진문물을 더이상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접어들면서 그리고 어느정도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보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의 보수성이 급격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기독교의 표면적 대표성도 이제는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세력에게 넘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이 교회의 보수적 권력을 형성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의 발전에 오히려 위기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개신교의 침체와 카톨릭의 성장세가 함께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문제에서 헌금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부담이 신자들을 개신교를 떠나 카톨릭으로 이동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입니다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개신교회가 교인들에게 헌금문제에 부담을 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오래전 부터 지속해왔던 문제이며 결코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히려 교회에 헌금을 하는 의미와 이유를 상실한 것으로 부터 오는 것으로 부터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더 이상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어떠한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데서 새로운 층들의 유입이 중단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세에 대한 문제를 떠나서 더 이상 한국교회가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발전하고 있는 사회와 미래 그리고 기독교

새롭게 태어나는 세대는 기본적으로 진취적입니다.
아마 이러하기에 역사가 발전을 해나온 것일 것입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세상의 발전은 지금의 우리가 변화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커나오는 세대들이 지금의 우리가 되어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듯이 새로운 세대는 지금의 우리보다는 항상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고 진부한 젊은이들도 많이 보입니다.
가슴아픈 일입니다만 흔하게는 지금 한국교회들의  청년회에서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미래의 트랜드를 포용해주지 못하는 이상 미래사회를 담보할 젊은이들은 한국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한국사회가 미래사회의 매가트랜드를 읽지 못한 것과 대형화한 교회가 엄청난 경제력으로 미자립교회와 해외의 선교사들에게 자금을 뿌려대면서 개신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양새로 기독교의 판이 형성되면서 급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소교회들 또한 이러한 행진에 정신없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사회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상 더 이상 교회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발전을 앞장서서 끌고가지는 못하더라도 발전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한다면 아마도 제2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분명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유럽사회의 근대적 사회발전을 가로막던 중세적 기독교가 종교개혁에 의하여 변혁된 사례를 우리모두 염두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있었던 카톨릭의 반성은 아마도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카톨릭은  발전하는 사회의 트랜드를 파악하고 있으며 이와 잘 융화되고 있습니다.
환경과 인권 등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그것입니다.
카톨릭 전체가 친환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각각의 성당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녹생운동과 정의구현 사제단 등의 사회참여와 인권운동에 대해 한국카톨릭은 묵과해 주거나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미래사회 트랜드의 일부라는 점에서 시사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나 IT에 의한 네트워크 사회의 구성, 환경, 인권, 통합된 학문 등 미래사회의 매가트랜드는 성서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는 좀더 연구해보야 할 것입니다만 적어도 창조된 세상이 아담과 이브 이후로 지금까지 변화 발전해온 것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또한 해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학교에 미래학문이나 학문간 통섭교육의 필요성은 고민해볼 문제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카톨릭의 환경참여 등은 많은 이들을 참여시키면서 성장의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카톨릭이 세계화 되어 있기에 먼저 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환경캠페인에 대한 참여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의 친환경 작물의 재배와 이를 도시의 교인들에게 공급하는 시스템 등이 구축되어 있어 상호간의 경제적 이익과 생태적 이익의 도모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읽어내야 합니다.
이러한 안목속에서 지역사회의 역할에 대해 천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가 가야할 길과 모양새를 갖춘다면 양적인 면에서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의미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은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교회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목사님도 셀목회를 추구하고 계십니다.
물론 당회에서는 이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 신도들이 목사님의 셀목회 방식에 동조하다가 다른 교인들의 사늘한 시선에 교회를 떠나버리고 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봉산문화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주위에 주상복합건물이 몇몇 들어서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역에 거주민이 적은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최근들어 대예배의 교인수가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숫자의 교인이 고령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교회는 주변 주상복합아파트 지역에서 노방전도를 한다든지 하는 방식과 알파코스의 새신자영접방식 등을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매우 미미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가 지역에서 문화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하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바로 제가 위에서 언급한 지역사회의 역할을 찾고 형식을 갖춘다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즉 교회가 문화선교센타가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프로듀싱하고 이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봉산문화거리와 지척에 있어 이는 매우 유용한 방식이 될 것입니다.
갤러리도 만들고 콘서트홀도 운영하며 다양한 문화컨텐츠를 제공하는 그런 교회가 된다면 아마도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대상이 될 것이며 실제 교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역할도 할 것입니다.
지탄받는 기독교에서 귀감이 되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일을 전담하는 교역자들과 사무인력이 문화선교의 마인드를 지녀야 할 것이며 실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개 교회가 처한 위치와 역량에 따라 각가 다른 방식들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선도적 문화를 전파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교회가 바로 그 모습일 것입니다.
아직 까지는 몇몇의 상상입니다만 이러한 상상이 현실이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알파코스에 참여하는 몇몇 교역자들이 이단시비에 휘말려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교단에서는 참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이 힘을 얻게된다면 슬며시 이단시비는 없어질 것입니다.
오래전 순복음교회가 예장통합측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가 힘으로 정규교단에 편입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단시비는 매우 편협한 기성교단의 이기주의적 산물이기도 합니다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보수우익의 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는 제2의 순복음과 한기총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기독교인에 대한 극진한 영접과 이들의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기독교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방식은 이미 이단으로 지목받았던 많은 교단에 의하여 행하여 졌던 일입니다.
그리고 알파코스가 부흥의 길을 잃어버린 한국기독교에 초교파적으로 번지고 있음은 이러한 방식이 이단을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이단으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고민해 봅니다.
발전의 길은 신비로운 무엇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고민으로 부터 찾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