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해석에 관하여

요한은 요한복음 끝장(21:25)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이 세상에 다 두기에도 부족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말해야 한다는 제 소견입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성서를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신학자의 말이라도, 하나님을 말하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라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해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말, 말, 말들은 온전하지 못한, 즉 온전을 향하여 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의 사상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민과

혼란에 빠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해결 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기양 신앙으로 밀어부쳐놓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또 섭리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섭리가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르게 혹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겠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중세시대의 컨텍스트에서 하나님을 말할 것입니다.
예컨데, 로마의 사람들은 로마에서의 삶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말할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과 그 시대 상황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의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 포스트모던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서,  한국의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의 에덴나라는 21세기의 컨텍스트에서, 에덴나라가 깨달은 바의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성서라도 중세에서의 성서해석과 21세기의 성서해석은 시대와 상황이 다르므로
다르게 말하여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두기에도 부족할만큼 많은 것이고,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누구의 이야기가  틀린 것이고, 누구의 이야기가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도 판단 내릴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예수님을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이것을 악용하는 나쁜 종교공동체가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은 시대와 컨텍스트를 중요시 하지않고,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누구의 신학사상만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신학사상을 따르지 않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도 온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말하면서,
예수님을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자신이 따르는 학파만을 따르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많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폭넓게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이 세상에 두기에도 부족할 만큼 많은 예수님의이야기 중에 하나인 것에

불과한 것이고, 온전한 것이 아니기기 때문에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워서

온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온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에는 개인이 성서를 깨닫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짐에따라,

기독교안에서 보편화된 것이라 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되, 이제는 한국기독교 안에서

신봉되어지고 있는 그것들(학파, 교리 등등)을 뛰어 넘는 대안의 하나로서

성서해석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필자는 성서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개토론장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토론장에 나와
기탄없는 성서 속에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하게 하는 장을 마련해보면 어떨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