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알고 있거나 느끼고 있는 것처럼, 서기 4세기초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현재의 아르메니아공화국에서는 그보다 약간 앞서 공인됐다고 한다) 일정한 체제를 갖춰 교회들은 급속히 성장해 나갔는데, 성직자 계급과 그에 따른 운용 구조가 실질적으로 교회 "체제"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의 소위 개신교회 또한 이러한 양상은 비슷하게 이어져 내려 왔다.

     적어도 금세기 직전까지 신.구 교회들은 수나 양적인 급성장을 계속해 왔다. 특히 개신교회는 (세상적인 개념으로) 유능한 목사가 큰 교회를 만드는데 있어 거의 전적인 역할을 한 것인데, 이는 마치 기업체의 CEO역할 그것이나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결과 (한국적인 실태로 본다면) 개신교회는 이제는 사유화되기까지에 이르렀다. 

    근래까지 많은 수의 목사들이 그게 사회적인 것이건 아니면 종교적인 것이건간에 자기 역할을 해내고자 하는 의식에서 많은 수의 교회들을 개척하게 됐고 그 중 상당수는 외형적으로 본다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인데, 어찌보면 이러한 일들이 현재의 개신교계의 외형적 모습을 낳게 만든 가장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같은 이런 (외형적인) 성장세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유럽지역 교회들의 급속한 쇠락 현상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교회들도 교인 증가세가 멈추거나 오히려 뒤로 후퇴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지 않고 있으니 이를 보면 현재의 개신교회 존립이나 그 운용 방식이 어딘가 잘못된 일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신앙계 현실이 이렇게 되도록 작용한 근본 이유 중 하나로 이제는 사회 전반에서 목사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특히나 젊은세대들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는 이전처럼 교회 건물과 신도수를 무작정 늘리려 애쓰기 보다는 '교회의 본질'을 찾도록 하는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쇠락하는 기독교의 향후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고목나무가 썩어 고사하더라도 그 뿌리라도 남아있어야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롭게 교회의 '본질'을 찾는 최우선적인 방법은 다름 아니라 교회들의 지금의 비성경적인 성직자계급에 대한 정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전처럼 목사가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 같지가 않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이런 맥락에서 사고할 때 이제는 소규모 '자발적 교회'(가상개념) 형태로 교회들이 새롭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바, 필자는 이러한 견해를 지금까지 누차에 걸쳐서 밝혀온바 있다. 다름 아닌 이러한 형태로 존립되는 교회가 바로 소위 말하는 순수 '예배공동체'의 전형인 것이다.

      물론 이런 일종의 '자발적 교회'의 발현 사례들은 알고보면 이전에도 있었다. 일예로, 1956년도에 창립된 나의 고향 교회(감리교회)도  수십리 먼 다른 마을에 교회를 나가던 마을 신도 두 명이서 그 마을에서 새롭게 교회를 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이 일이 필자의 유아기 때의 일이다). 물론 창립 이후로 어쩔 수 없는 잠시 기간을 빼고는 목사든 전도사든간에 목회자를 항상 청빙하여 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떻든 지금의 소위 '메가처치'로 불리는 초대형 교회 전성시대가 저물면 교회들은 이제 '자발적 교회'로 거듭나야 할 판이라는 게 필자의 의식이다. 그와 동시에, 향후 언젠가 도래할 자발적 교회 시대야말로 현재의 비성경적인 성직계급이 본래의 성서 정신으로 되돌져야 할 때일 것이다.

      우스개소리지만, 신교든 구교든간에 지금의 성직자들은 계급으로 치면 예수님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신앙계가 어쩌다 이렇게 흘러 왔는지,  그에 관한 학습 자료가 아래 소개된 칼럼 기사에 있기도 하다.

 

(거듭 말하지만, 필자는 과거로부터 지금가지의 목회자분들의 교회 발전을 위한 각고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제 향후적인 교회사 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항상 이전처럼 똑같이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는 <뉴스앤조이> 기사로 게시된 교회 성직자계급이 비성경성에 관한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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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신약성경 빌립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씌어 있다. 여기에 씌어진 것처럼 지역 교회의 구성원은 3가지 분류의 사람들(성도들과 감독들, 집사들 )밖에는 없다. 만일 그곳에 오늘날처럼 성직자(교황, 추기경, 신부, 담임목사, 부목사 등)가 있었다면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감독들(복수)과 집사들(복수)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중약)

 

빌립보서 1장 1절을 보면 사도와 선지자나 목자(이곳의 '목사'는 오역) 등은 지역 교회의 직분도 구성원도 아니므로, 그러한 명칭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사와 직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다. 특히 개신교 목사들이 은사와 직분을 혼동하고 구분하지 못하여, 소위 '목사는 개교회의 대표자로서 신성하고 존귀한 직분을 가진 성직자'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교인들에게 자신을 성직자로 세뇌시키니 일반 교인들이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목사라는 성직자는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교회사를 통해 살펴보게 된다...

 

        (중약)

 

그리고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에베소서 4장 11절에 딱 한 번 나오는 '목사'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포이멘(ποιμην)'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로 된 신약성경에는 '포이멘(ποιμην)'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18번이나 나오는데 17번은 모두 '목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단 한군데인 에베소서 4장 11절에만 '포이멘(ποιμην)'을 '목사'로 바꾸어 번역해 놓았다. 그리스어 '포이멘(ποιμην)'의 뜻은 단순히 '목자(牧者)' 또는 '양치기'를 의미하는 말이지 목사(牧師)의 사(師)의 글자, 즉 선생(師)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그런데 17군데(마 9:36, 눅 2:8, 요 10:2, 히 13:20, 벧전 2:25 등)는 목자라고 번역해 놓고 에베소서 4장에만 목사라고 오역한 것은, 그 의도가 '성직자인 목사'에 대한 성경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기만적인 술책이었던 것이다.

 

         (후약)

 

               

          <뉴스앤조이  기사 링크안내>

 

                       1. 개신교회 성직자 관련 기사  보기 :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794  

               

                       2. 카톨릭교회  성직자 관련 기사  보기 :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791

 

         * 1번 기사에는 국내에서 계급화(기성화)된 성직자를 두지 않는 방식으 존립 운영되는 

               신앙공동체(교회)들의  대략적 실황이  소개되어 있으며,

            2번 기사에는 카톨릭교회 교리의 부당성 부수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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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편기사>

                     3. 성직계급이라는 일인 독재 체제 폐단이 결국 진정한 믿음의 성장마저도

                  가로막고 있다                                                              

 

성경에도 지역 교회에 일인 독재자와 성직자 제도가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삼서 11절에 나오는 디오드레베는, 그가 속한 교회에서 일인 독재자이며,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도 요한과 그 일행들의 교회 방문을 거절했으며, 더욱이 방문을 환영하는 참신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6절에는 '니골라'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뜻은 "백성을 정복하다 또는 일반 신자 위에 군림하다"라는 뜻으로, 한 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모든 일을 주관하는 사람인 '성직자'를 나타내고 있다. 학자들은 이 '니골라당'이 성직 제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과거, 인간들이 편의에 따라 고안해 낸 목사 제도는 비성경적인 것으로서, 교회 내에 일인 독재 체제로 제도화되어 말할 수 없는 폐단을 낳게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목사가 성직자가 되어 모든 성례를 주관하고 집행함으로써, 신자들에 의한 실제적인 만인 제사장직이 수행되지 못하고 원천 봉쇄되어, 신자들을 벙어리 제사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또한 목사 혼자서 설교를 독점하고 가르침으로써, 신자 개개인이 깨달은 성경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길이 차단됨으로써 믿음의 성장을 막게 했다. 그 외에도 신자들 각자가 다양한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일요일에 설교만 듣고 오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게 만들었다.                          

                                                                                                                            -  증편칼럼 내용중  -


 

                                                       기사전체 보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