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없는 별들의 바다, 하늘 가득히 펼쳐진 은하수 너머의 광대함에 벅찬 감동을 받고, 백두대간을 달리는 장쾌한 산맥과 숲속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의 아름다움에 찬미를 하며 어린아이의 해 맑은 웃음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네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강변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줄 알라. 네가 보고 경배한 것은 법의 발현이신 시스템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계명 제2계명.:
끝 없는 별들의 바다, 하늘 가득히 펼쳐진 은하수 너머의 광대함에 벅찬 감동을 받고, 백두대간을 달리는 장쾌한 산맥과 숲속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의 아름다움에 찬미를 하며 어린아이의 해 맑은 웃음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네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강변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줄 알라. 네가 보고 경배한 것은 법의 발현이신 시스템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수탉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서 반박을 하거나 또는 글로 상처를 드리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그러나 한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교단도 없고 신학을 배운적이 없으신 분께서 글을 올리신 것을 보면 제가 이곳 다비아에서 나이를 떠나서 신학적인 경륜이 제일 미천한데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님께서 쓰신 글을 천천히 읽었는데 말씀의 논리가 처음과 나중이 맞지 않습니다.솔직히 의심이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인지 실례를 무릎쓰고요 여쭤본 것입니다.
종교가 어렵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어렵습니다.
또한 성경은 단순하게 해석하면 안될 뿐 아니라 신학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볼수 없는 책입니다.성경은 자기 확신만 갖고 접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수탉님께서 늘 말씀을 맺을때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끝을 맺지만 본인께서 적으신 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듯합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 분명히 배우셨는데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교단을 숨기시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아니시면 우리가 아는 기존교단이 아닐수도 있다는 저만의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교파도 없고 신학을 공부안했다는 분이 성경의 주제를 정하시고 수학공식처럼 일목요연하게 글을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수탉님이 적으신 글은 대부분 문자적으로 해석하시고 본인이 임의적으로 해석하셨죠)
이곳에서 저처럼 천천히 배우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신학을 배우신적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여기 신학마당과 성서마당을 읽으시고요 저와 같이 이곳에서 천천히 신학을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삼송님!
님의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자에게 질문을 하셔서
이해 받아야 하는거 아닌가요?
여기는 부담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고, 배우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개인이 해석한 성서이야기를 쓴 것이 다른분들과 다르다고 해서
자제 하라고 하시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듯이 누구에게서나 배울 점이 있다고 보아요
어떤 분(교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왜? 중요하고, 그것을 질문하고 답해야 하는지요?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그걸 스스로 삭혀 자기를 풍부하게 만들지요
에덴 나라님 제가 몰라서 질문할수 있습니다. 제가 바다가 아니라서요 죄송하구요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수탉님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자제 하라는 말씀은 제가 표현을 잘못했네요 수탉님께 사과를 드려야 겠네요
그리고 수탉님께서 적으신 글에 제가 반론을 하는 것보다는 어떤 교단이론인지 알고 싶어서요 수탉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에덴나라님에게 제가 질문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자고 글을 적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초보인데요
저도 처음에 여기 와서 정서에 맞지 않는 글을 적을때 오해 하시는 분들께 저의 교단과 제 배경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죠 이론상 모르면 질문할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적은 글이 에덴나라님께 불편을 드렸나요 왜 발끈하시죠!!
어떤 교단의 이론인지 질문해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틀렸나요
수탉님께서 적으신 글들을 보시면 에덴나라님은 이해가 되십니까?
에덴나라님 제가 다비아 대표 아니지요 여기 원장님은 정용섭목사님이시죠 저는 여기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저는 완전 초보 이지요 그래서 궁금한것이 있으면 직접 질문할수 있지요그리고 다른 분들께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할수 없지요 제가 위에 적은 글을 잘보십시요 이해가 안되니 당사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에덴나라님이 그질문에 끼어드십니까? 제가 이론을 말했나요? 궁금하면 직접 당사자에게 교단을 물어볼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에 에덴나라님이 왜 발끈하시죠 제가 에덴나라님에게 불만이 있어서 질문했습니까? 직접 부드럽게 솔직하게 하는 것이 대화의 기본 아닙니까? 위에 제가 적은 글이 수탉님께 싸우자고 한말이 아니였어요 듣도 보도 못한 이론을 수학공식으로 적으니 궁금해서요 그랬습니다.
삼송님..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삼송님께 나쁜감정이 없습니다. 제가 수탉님도 삼송님도 잘 알지도 못하구요
단지 삼송님이 올린 그 글에 대한 댓글이었습니다. 삼송님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올렸을 것입니다
다른 분의 글은 도배한 글에 대한 자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부분은 저도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너무많이 한꺼번에 올려지니 그렇게 말씀하셨겠구나 ~ 했습니다
정통신학자들의 이야기만 있는 곳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 곳이 좋은 이유는 여러님들의 이야기들이 올려져 그런 글들을 읽고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자유스러움이 다비아에 있다는 점이 매력이기도
하지요. 물론 저의개인적인 생각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삼송님께 나쁜 감정은 조금도 없습니다...^^*
에덴나라님!!!저에게 죄송하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끝에 가셔서 감정이 없다고 하시면서도 제가 자제하라고 한말에 대해서 반응을 집중하시는데요 제가 처음 수탉님께 댓글 단것을 자세히 보시면 감정적으로 한말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에덴나라님이 그렇게 반응을 보일만큼 제가 글을 잘못 쓰지 않았습니다. (에덴나라님과 저는 제가 쓴 자제라는 표현에 서로 소통이 잘안되고 있습니다.)
제가 위에 수탉님께 소속교단을 물어보고 조금 글을 제지하는 듯한 말을 드린 이유는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지으신 "설교는 무엇인가? "라는 책이 지금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등 모든 신문에 기자들이 지금 싣고 있습니다. 이때에 다비아도 많이 알려지고 또 이곳에 오시는 분들도 많겠지요 그런데 일반적인 정치적인 논쟁이나 신학적인 질문이 아니고 위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본인께서 신학도 전공하시 않으셨다고 하시고 (저는 솔직히 다른 부분에서 느낌이 옵니다)교회도 다니시지 않으시는 분께서 도배성글을 올렸는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학적으로 솔직히 족보가 없지요 글을 보니 저같이 보수교단인지 아니면 개혁교단인지 구분이 안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실례를 무릎쓰고 수탉님께 교단을 여쭤본 것입니다.
기존에 저보다 이곳에 계신 분들께서 이런 부분을 말씀을 안하셔서 제가 다비아에 막내같은데요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리고 수탉님께 싸움을 건것은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 모를때 저를 이곳에 정착시키고자 애쓰신 분들이 많으신데요 그분들이 저를 붙들어 주시고 책도 주시고 지금도 신학적인 도움을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다비아 이 공간이 좋습니다. 모든 분들의 글을 보며 장점을 배우고 싶지요 에덴나라님도 쓰신 글을 보면 오직 올곧은 신앙 선배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수탉님께서 쓰신글은 저같이 보수교단(감리교 성결교 고신측 세교단에서 신앙생활 했지요)에서 30년이상 배운 사람도 전혀 이해를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탉님의 글을 보면 교회를 다니지 않으신 분이 신앙적인 자기 확신이 생길지 그런 것도 사실 의심이 들어서요.
그래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적인 신학토론도 물론 중요하지만요 말씀에 비추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될때를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여러분께 허락도 없이 수탉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하구요 제 진정성을 살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상숭배란 무엇일까요?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간 유대민족의 이야기와 그로 부터 탈주해 나온 이야기는 누가나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 입니다.
이들의 통치자는 모세입니다.
광야로 나온 유대민족은 아마도 갈등기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믿었던 신들을 다시 믿기 시작하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미신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통하여 출에굽의 당위성과 정당성이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모세의 통치력도 약화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를 회복할 체계와 권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시내산에 들어가 10개의 법조항과 신의 권위를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이 10계명입니다.
10계명에 대한 신의 개입의 유무는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합니다.
모세만 알 뿐입니다.
이는 아마도 현대의 법들도 차입하는 당위성의 형태입니다.
사실 모세가 야훼신 외의 다른 신에 대하여 우상으로 규정했지만 야훼신이 본래 부터 유대인이 믿던 신인지에 대해서도 명확치 않으며 이 야훼신 또한 이집트의 신들이 가진 모습과 닮아 있는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은 무엇이 우상인지에 대해서 모호해집니다.
오히려 모세가 유일신의 범주를 유대민족의 신으로 한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나 모세가 유대인속에 그들만의 우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우상을 가지고 유와 무를 지배하고 유대의 세상만이 아닌 존재하는 모두에 내재하는 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상징하는 수 많은 우상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큰 우상은 자기 육체 입니다.
애굽은 하나님 백성이 노예살이 하면서 파라오를 섬기는 죄악세상을 말하지만,
육체에 갇혀 뱀 같이 간교한 육체를 섬겨야 하는 “나”를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의 인도를 받아 홍해를 건넌 히브리백성들, 모든 육체가 죽을 때에 여호수와와 갈렙만이 법궤를 메고 요단을 건넙니다. 이는 인류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로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룰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법궤 안에 보관된 10계명 두둘판은 12사도 12선지자가 보호하는 지성소에 보존되니, 갈빗대 안에 감추인 “폐”가 두둘판 형상으로 우리 몸에 존재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뱀 같이 간교한 우리 몸을 죽일 때에 우리 몸은 성전이 됩니다.
가장 큰 우상은 “뱀”인 우리 육체 입니다.
두서없는 답변입니다.
"人格神"이라. 그리고 '인격신이라는 제한된 인식에 의한 우상숭배적
종교 의식화'라.
그렇군요. 우선 상당히 의미 있는 개념설정이요, 그에 따른 가능한 한
가지 논란이거나 혹은 문제제기이기는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실로 아주 쉽거나 아니면 너무 어렵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인데,
종교가 너무 어렵다고 볼 때는 종교를 개념짓고, 논하고, 해석하려 시도할 때이고,
반대로 종교가 내게(혹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것으로 될 때는 곧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할 때입니다.
그래서 신학자이거나 혹은 신학자 비슷하게 되려는 그런 이들 사이에서는 종교가
끝없는 쟁논의 소재이지만, 종교적 삶을 실천하려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쉽고
편한 어떤 길잡이가 될 뿐이지요.
'인격신' 문제가 제기 가능한 개념이라고 해서, 그렇다고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일종의 '무종교주의'혹은 '종교 무용론'을 말하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 점이 좀 우려스럽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인격신을 너무 의식하고 그걸 배격하다 보면 무종교주의 라는 함정에
빠지는 길로 접어들기 쉬워요. 물론 가능하면 우리 모두가 좀더 고차원적인 종교적 인식을
가지면 좋겠지만, 사람이 손 바닥과 손 등을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 손을 관찰해 보면 그 구분선이 명확하지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학 공식처럼 분명히 구분되는 일이란 실제로는 없어요. 그게 바로
생명을 가진 인간 인식의 한계이며, 그에 따른 영원한 난제요 고민거리이지요.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조금 참고 있으면 훗날 주님이 온전하게 해결해 주실 겁니다.
그걸 신뢰하는 그런 믿음,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런 어떤 본질이지요.
우리 모두는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모르는 것은 손에 쥐고 있어도 그게 뭔지 몰라요.
우리 인간들이 다 알아내겠다고 날뛰는 것은 그저 주님앞에 '오만'일 뿐일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오만입니다.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주님 앞에 오만이라는 죄목은 용서받지 못해요.
종교는 필수 입니다. 살아 숨 쉰다면 죄인 아닐 수 없으니 자유를 위해 종교를 해야 합니다.
종교를 하려면 “왜 믿어야 하나?”, “누구를 믿어야 하나?”, … 등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겠죠.
제가 남긴 도배 글 중에는 비슷한 주제가 있습니다. (물론 비난 받는 이유도 됩니다 만…)
① 하나님 – 누구를 믿어야 하나?
② 천지창조 "죄의 빅뱅" --- 왜 종교가 필요한가?
등 등
신은 피조물의 초월적 존재가 이니라 피조물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세상은 신 또한 자연이라고 애매한 표현을 하였는데
이 말은 범신론자들의 의견과 다를바 없을것 입니다.
하나님을 자연속에서 묵상하거나 그 분의 권능과 존재의 가치를 실감할수는 있겠지만
자연이나 세상자체가 곧 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제대로 표현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것 입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뜻과 지혜와 의지를
가지신 그런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이라는 피조세계에 갇히지 않을뿐더러 자연이 곧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만드시고 그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갈 인간과, 각종 모든 생물을 만드신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신, 우리로서는 감히 측량하기가 힘든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 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유추할수 있을뿐
결코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이나, 대자연을 하나님과 동일시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아름다운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신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무한하신 영광과 거룩함을 가지신 신이십니다.
세상자체가 신이아니라 세상에 내재해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주에 내재해 있는 신의 섭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한계는 아마도 여기까지 일 것입니다.
초월자로 신을 이야기 하지만 인간은 초월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 영역조차 넘어설 수도 없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주에 흐르고 있는 내재성조차도 자신을 침전시켜 보지않는다면 느끼기에 힘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초월적 신을 이야기하는 순간 이는 인간이 초월했다고 상상하는 인격신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사람들이 초월적신을 이야기 하려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조차 초월적이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마땅한 구조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서에서 많은 초차연적 내용들을 접합니다.
이것은 후대 기자들의 신화적내용을 통한 현혹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러한 내용을 접할 때 눈이 아닌 시선을 가지고 봅니다.
성경 또한 얼굴이 아닌 표정으로 우리를 대합니다.
시선과 표정에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의도는 종교적 권력화 입니다.
눈으로 얼굴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에서 만들어진 우주, 우리가 무를 상상해 보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무에는 무엇인가가 항상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공간입니다.
무한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유한의 확장일 뿐 결코 무한영의 영역으로 넘어설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무한하신 영광과 거룩함을 가지신 신'은 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기 힘들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무의미해 집니다.
신은 우리속에 내재해 있음으로 알 수 있을 뿐 이렇듯 내재성을 초월한 신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인들이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명확히 유한한 인간의 영역에 한계지우는 것이 되기때문입니다.
존재자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한다함은 그 역시도 유한의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무로부터 유를 창조했다함은 무과 유을 아우르기에 신이 존재인지 비존재인지에 대하여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게됩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을 섬기는 것, 우주를 보존하는 것이 산 제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섬기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주일 행해지고 있는 형식적 예배의 의미도 있겠습니다만 삶의 현장과 현실에서 피조세계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일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영역에 가두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 인간의 자유로움을 위하여 애쓰는 것, 권력화 되는 것들을 파괴하는 것, 지구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심지어는 자식을 낳아 생물학적 구성원을 생산하는 것도 이에 포함될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강변보다는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사람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 그러면서 그속에 흐르는 신의 내재성을 느끼는 것 이것이 예배가 아닐까요?
이 때에 진정으로 종교와 사회가 화해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들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읏을 사랑한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머물면서 "그래 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들이 되고 그들이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예수의 죽음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메시아로 초월적 성자로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과 로마인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인간적 죽음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차가운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 어떤 종교적 이유를 붙이더라도, 아무리 현학적으로 이야기 하더라도 이러한 죽음은 초월적 존재자의 모습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산제사의 의미를 알게될 때 참다운 예배가 나오고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떡진머리님
수탉님이나 떡진머리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
남을 가르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데요.
그냥 쓰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저도 그냥 자유롭게 쓴 글인데
바로 제 글에 대해서도 가르치시니... ㅠㅠ
이왕 말 나온김에 저도 자유롭게 글 한번 써보렵니다.
떡진머리님의 방식에 따라...
떡진머리님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분명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경적인 지식과 말씀하시는 것들로 보면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임에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성경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나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종교인' 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등에서 말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업적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업적의 자체가 교만이지요.
인간이 완전히 바르게 살아, 율법을 완전히 지켜, 무엇인가를 아주 잘해서 등등 말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이지요.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삶 전체가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지요.
그런면에서는 님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님의 말씀이 업적의에 치우시는 것같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여쭙지요.
님께서는 완전히 바르게 살 자신이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합니다.
잘못하고 또 회개하고...
그렇다고 님보다 더 잘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 욕 먹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바르게 살아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님께서는 범신론주의자겠지요.
가르친다는 것, 교육이란 권력화 과정에 대한 순응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 체제에 순화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런 가르침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사물이 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 부터 탈주하는 이들이 제법 많이 때문입니다
나는 배신을 이야기 하고 탈주를 이야기합니다.
질서를 벗어나고 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이런 뜻에서 저의 글은 가르치기 보다는 내말 좀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설득입니다.
물론 님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입니다.ㅎㅎㅎ
'바르게'라는 표현은 저의 표현이 아닙니다.
종교인들이 쓴다는 표현이지요.
저는 그렇게 '바른' 인간이 못됩니다.
제가 쓰는 거의 모든 글에는 '바르게' '참되게' 같은 기표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바르게'라는 말이 바로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기표에는 잉여적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화와 코드화 과정에 순응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르게'사는 것 중에는 인사를 잘하는 것도 있겠습니다.
우리들은 시중의 차량의 뒤창에 붙어있는 표어를 흔히 볼수 있습니다.
"인사를 잘 합시다." '바르게 살기 국민 머시기'
잉여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서열을 잘 확인합니다.'라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와 같이 인사에는 서열확인의 의미가 잉여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과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잉여적 의미가 지배적으로 자리잡아 있다는 것입니다.
표정이 얼굴을 가리게 됩니다.
"바른말을 씁시다."나 '먼저 인사합시다."도 같은 선상의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관변단체나 보수적인 단체들이 이러한 '바른' 표어를 이야기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상이 '바르지' 않는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업적'을 말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님께서 눈이 아닌 시선으로 저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저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이 느껴지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날마다 회계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제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신하고 탈주하고 반역합니다.
이것이 인류의 흐름을 이어왔고 역설적으로 이것 때문에 사물이 발전해 왔습니다.
이것을 굳이 '죄'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담, 카인, 모세, 사울, 솔로몬, 요나, 베드로의 삶은 신에 대한 배신과 신에 의한 포섭의 역사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
하지만 이 버림과 배신이 있기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삶에 속해 있습니다.
끊임 없이 탈주하고 포섭되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눈이 싸아하고 가슴이 찡한 감사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과 다른 종교적 표현을 굳이 빌린다면 아마도 님의 표현대로 '죄'짓고 '회계'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다르다는 것은 이것을 스스로 '죄'와 '회계'로 표현하지 않는데 이 속에서도 종교 권력의 잉여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글을 씀에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잘난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의 글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저 역시도 잘난척 하는 맛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글을 쓰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잘난척에 함께하는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 받는 것 바로 자존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은 꼽더라도 그것만을 너무 많이 보지는 마십시요.
마음속에서 하고자 하는 좀더 맛있고 멋있는 다른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비조로 댓글을 단 것 맡습니다.
그것은 님의 댓글이 시비를 걸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음이 좁은 이유도 있겠지만 밤잠 설쳐가며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데 초치는 말씀을 하시니 살짝 열이 받았습니다.
위에 댓글을 달고 이야기를 해온 이들은 한참 불따오르고 있는데 물을 확 뿌린다면 토론할 맛이 나겠습니까?
눈사람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렇게 댓글이 주렁주렁 달리는 토론은 일년에 몇번 않됩니다.
그것이 공중에 부양해 있는 이들의 공중전이던지 땅위에서 내공없이 벌이는 생사박투이던지 간에 이렇듯 나름 치열한 대결은 열린 토론방의 생명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보고 기독교인이 아닌듯 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분나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와 비종교의 사이를 걸어 갈려고 합니다.
그 사이에 흐르는 내재성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현재화 되어 있지는 않지만 드러나는 순간 현재화 되는 내재화의 흐름을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양자와 같습니다.
나타날 때만 그 존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는 50여년간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3대를 내려오는 기독교인이고 자녀들을 통해 4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목회자의 아들입니다.
'확신'이 아닌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흔들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힘을 줍니다.
그 힘이 종교와 비종교의 사이의 접속점들을 가게 만들고 탈종교의 고원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제가 별 이상한(?) 비종교인들의 글에 열심히 댓글을 달고 참여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종교인들의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이를 난도질 하며 새로운 탈주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제가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열린 토론방에 쓴 글중 '예수의 죽음-들뢰즈적 사유' 와 '탈주의 신한-신학의 탈주'라는 글에 이러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야기 하는 어조가 강해서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가 나온 구절에 따옴표가 빠져서 또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조의 강함은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것은 저의 실 수 입니다.
만남이 서먹하다 해서 앞으로도 서먹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화해와 사랑으로 서로를 잘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인터넷은 표현들을 까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쓸모 있기도 합니다만 우의와 사랑을 나누는 데는 잰병인 것 같습니다.
직접 만남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친밀감을 형성 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위에 저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저를 알게 함 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 해보고자 하는 조금의 노력입니다.
가끔씩 다비아에서 일어나는 님과의 만남이 화기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을 누가 알겠습니까...만은....
아무리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조금 이라도
알고 있다고 해야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순서도 이유가 있는것 같습니다.
'수신제가'는 어려우니 '치국평천하'부터 하자는 것 같군요. ^^;
아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 '확신에 찬 믿음'으로 자리잡을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가 잘 인용하는 도덕경에 나오는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석해 보면 "학문을 하면 날마다 얻게되고 도를 하면 날마다 잃게된다. 잃고 또 잃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무위에 의하여 안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알려거나 얻으려고만 하는 것에 대한 좋은 경구인 것 같습니다.
살면서 채우기도 하고 비우기도 하겠습니다만 아는 것을 비우는 자세가 더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불규칙한 반복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웃과 잘(?)지내는 것, 섬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과 싸우기도 하겠고 때로는 어루러지기도 하겠지만 함께 희노애락을 느끼며 그들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속에서 사람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잃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 때에야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까 여겨집니다.
인용하신 도덕경 내용에 입각하여
님은 인용하신 이 도덕경을 인용만 했지 님께서는 실천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안다고, 인용한다고 하여 꼭 실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천을 강조하시는 님의 글들에 의하면
님도 어느 정도의 실천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목사님 아들이시고 4대째 믿음을 이어가시는 분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제 눈이 삐뚤어져 있을까요?
님의 말씀에서도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를 걸어가신다 하니
제 느낌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님께서는 아버님께로부터 올바른 믿음을 이어받지 못하셨고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믿음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또한 저의 삐뚤어진 시각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떡진머리님과 시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님께서 자꾸 탈그리스도인이 되려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이곳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탈그리스도인으로 유도하는 느낌의 글들을
많이 쓰시기에 감히 미천한 제가 님께 글을 올린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말씀하시지만
자꾸 인본주의적인 말씀을 하시거나 온갖 혼합주의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스스로도 아시리라 여겨집니다.
어떠한 글을 남기시건 님의 자유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님의 글에 반항(?)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저에게 어떠한 험담을 하신다 하여도 전 그에 대해 기분나빠하거나 님과 언쟁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님께서 계속 여러가지 현학적인 말로 탈그리스도를 부추긴다면
전 이에 대해서는 같은 댓글을 달 것입니다.
한가지 부탁드립니다.
이책 저책 보시는 것은 너무나 좋은 자세이지만(저도 금강경, 화엄경을 비롯하여 여러 책 독파했었지요)
그로인하여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님께서 그리스도를 읽어가시는 것 같아서 ...
이건 순전히 제 느낌이기에 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당근 아닌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가 기우를 하는 것이 되겠구요.
저의 기우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
님의 시각에 입각해서 '너는 이런 사람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별로 잘 알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마음대로 제단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개인사가 어떠한지를 모르시는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 겁니다.
저의 탈종교에 대한 개념은 본회퍼의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과 접속을 형성하고 있고 성서적 이해는 볼트만의 '비신화화'개념에 접속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들뢰즈의 탈주가 접속됩니다.
이 사이에서 생성되는 것이 저의 생각들 입니다.
들뢰즈 역시 본인이 인정하듯이 형이상학자라는 범주에 놓여있기에 신과 관련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러하기에 저의 생각들이 보수적 종교관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달갑지 않을지는 몰라도 제가 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리잡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고 보아집니다.
물론 저는궂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범주에 저의 자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님은 느낌이 정확한 것인지를 이야기 하기 전에 저의 글을 정확히 읽지 않고 계십니다. 보다 분명하게는 정확하게 인용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저의 탈종교화에 대한 개념을 '탈그리스도'로 바꾸는 일을 하고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도적이 아니라면 아마 님은 그리스도인과 종교로서 기독교인에 대한 개념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저의 글 어디에도 '탈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제가 잃어가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종교입니다.
정확하게는 잃는 것이 아니라 탈주하는 것입니다.
이는 피동적 상실이 아니라 의도적 도발이자 반역 입니다.
이는 변증법적 구성이 아닌 '리좀'적 체계입니다.
이러한 도발이 기독교의 현실이 관련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비안 여러분 중에도 지금의 종교적 현실을 썩 마땅해 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바로 이런 현실을 탈출할 방법과 대안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비안과 접속되어 있는 샘터교회는 이런 면에서 의미가 생성되어 있습니다.
특정 교단에 속해있지 않은 탈교파적 교회입니다.
물론 이것이 탈교파를 벗어나 탈종교화까지 밀고갈 수있을 지는 온전히 스스로가 새로운 종파가 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샘터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영토화하는 것으로 부터 탈주함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탈종교의 노력이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라면기독교의 현실로 부터 벗어나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본회퍼의 '비종교'도 같은 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쓴 글에 대하여 핵심적 내용을 잘못 인용하고 계시고 탈종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해 주시지 못하는 것 같아 몇자 적어봤습니다.
떡진머리님께서 탈종교화와 탈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 보다 보수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예수는 그리스도라라는 케리그마를 인정하신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판단하시는 것은
솔직히 이해불가네요. 설령 떡진머리님께서 안병무 박사님처럼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을 정죄하고 비판할 당위는 그 어디에서도 확보 되지 않습니다.
다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와우, 떡진머리님의 진솔한 댓글 잘 읽었습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고, 이해 못하는 부분도 있는데(^^;)
어쨌든 이런 글들을 통해서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참 좋습니다.
콰미님!
감히 제가 누굴 정죄할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도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타 종교인들에 대해서 전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제가 글을 잘 못쓰는 것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저는 떡진머리님의 글들(성경의 권위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들을 포함하여)을 읽으며
느낀 점을 썼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떡진머리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여도 제가 그분을 비판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를 잊어버려가고 계신 분께는 잊어버리시지 마시라고 권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에 입각하여 여쭙고 글을 쓴 것입니다.
제가 권한다고, 제가 전한다고 달라질 것이 전혀 없을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겠지요.
저는 떡진머리님의 글에서 그리스도를 떠나계시다는 것을 느껴서
아픈 마음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 네가 아파할 필요가 없다 " 라든가 " 네가 아파해야 할 이유가 전혀없다 "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라도
저의 마음은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토론 자체를 하지 말자라든가 글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떡진머리님 !
탈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으시면 그것으로 된것이지요.
제 글이 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저의 진심을 헤아리셔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
답답하게도 님은 자신의 신앙적 범주에서 다른이의 신앙을 평가하고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중 한가지가 제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저의 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표현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표현한 적도 없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가지는 '흔들리는 믿음'은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님은 자신의 신앙적 범주에 저의 믿음을 끌어다 넣어버린 것입니다.
이 전의 댓글에서도 님은 매우 중요한 실수를 하고 계십니다. - 이 말은 제가 지난번 글에 꼭 이야기 하고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말입니다.
아랫글은 저의 개인사를 이야기 한 것에 대한 님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님께서는 아버님께로부터 올바른 믿음을 이어받지 못하셨고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믿음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 대한 개인적 이해를 돕기 위하여 쓴 글이 부모와 자식을 함께 욕먹이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자식에게 믿음을 전해주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믿음을 이어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것이죠.
님의 '생각'만으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님은 다른 이들의 신앙을 비판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지만 이 글에는 나의 신앙에 대하여 찌푸린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계시지 않습니까?
'올바른 믿음'이라는 가르침을 주고자하는 의무감에서 말입니다.
님이 자신의 믿음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런 확신이 없이 다른 이의 믿음을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적어도 제가 가진 신앙은 저의 것이지만 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아버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것이 큽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의 일부는 저의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고 있겠지요.
저와 아버님은 서로가 가지는 신앙과 성경에 대한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님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아버지와 저는 신앙에 대하여 본질적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님의 '생각'은 자신의 신앙관으로 저의 믿음을 판단하기 위한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느끼는 문제는 저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않고 당신의 틀안으로 끌어들여 일단 제단한 후 '생각'이나 '느낌'이라는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더 최악인 것은 '그렇지 않으면 말고'라는 식으로 꼬리를 빼는 것이죠.
내가 이야기 한 것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말한 후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는 정중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약올리는 형식입니다.
제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저나 다른 이에게 전도의 사명감을 님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이는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전 본 댓글에서 전도의 사명을 이야기 하는 분에 대한 정목사님의 이야기 입니다.
물론 계기가 있을 것이니 억지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정목사님의 권위를 빌리는 것은 이 말씀에 동의하기 때문이고 이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 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도에 질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 하는 것은 님은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여기에서 서로에 대하여 대화하는 것을 감히 가르치고자 합니다. 이는 대화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통하여 많은 토론을 해봅니다만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난독증'을 가지신 분들과의 대화입니다.
도무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말한대로 이해하거나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서 또박또박 읽어야 합니다.
특히 다비아의 토론방 처럼 주제가 무거운 경우에는 더 그렇고, 말하는 이의 개념 사용이 엄밀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개념에 대하여 이해도 하지 못한 채 기표의 형식조차 바꿔서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글로 토론하는 기본적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탈주'라 던지 '탈종교' 같은 개념을 한자어 수준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요.
적어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이것이 가지는 철학적의미를 살펴보고 이야기 하십시요.
이것이 제가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 입니다.
거침없고 매몰차게 이야기해 미안합니다.
정말로 제 신앙적 범주에 님을 끌어들인 것일까요?
제 신앙적 범주가 아니라 님께서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시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범주가 아닐까요?
제가 실수를 하고 있는 건가요?
과연 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계신가에
저의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님의 말씀에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것도, 안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라고 하셨지만
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기에
다시 한 번 감히 여쭙겠습니다.
님의 말씀을 이해 못해서도 아니고 님의 신앙을 판단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님도 아시고 계시잖아요.
물론 님께는 중요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사실이 자꾸 님께 말을 거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떡진머리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시는지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계신지요.
답은 안해주셔도 됩니다.
자문만 하셔도 됩니다.
제가 님께 답을 요구할 권리는 당연히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는 탈주가 제 눈에는 왜 이렇게 위험하게 보이는지...
그래서 감히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저의 근시안적인 사고가 문제겠지요?
제가 댓글 단 이후에 글을 바꾸시면 저는 어떻게합니까^^
저는 댓글 안바꾸렵니다.
굳이 한말씀 드리자면 꼬리 뺀 적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램을 적은 것이지요.
님의 글을 제가 몇번씩 읽어보았는지 외울지경이 되었다면
띄엄띄엄 읽은 것은 아님이 증명되었는데
외울지경이 되었으면서도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미우시지요?^^
님의 글들을 다시 또 읽다가 발견하여 쓸데없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무라지 말아주시길..(2011-02-11. 17시 00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관입니다.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금의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이러한 신앙관이 과연 '올바른'것인가에 대해 반문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이항적 선택을 강요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항적 선택은 어느부분으로 영토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들 입니다.
동일자화 하는 것에는 항상 이항적 선택이 강요됩니다.
이속에서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가 노정되는 것이죠.
제가 선택하는 방식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생성되는 수 많은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가지는 신앙이고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보느냐는 개인의 자유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시든 제가 감히 관여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세상으로 지경을 넓히신 예수님께서나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나
모두 하나님께, 하나님 말씀인 성경으로 올바르게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성경에서 벗어나시려는 것 같아 그럽니다.
제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계속 글을 쓰고 있는지 진정 모르시는지요.
저는 현재 우리나라의 교회를 비롯한 일반 성도들의 잘못되어 가고 있는 신앙관에
심각하게 우려를 하고 있고,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에 다비아를, 이곳 저곳 개혁사이트에 다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으로부터의 탈주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으로 다시 올바르게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작금의 교회나, 수많은 일반 성도들에 대해 저와 님의 생각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다.
이미 기독교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함께 깔려있는 것이니 논외로 하자는 얘깁니다.
많은 지식 여행을 하시더라도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기도합니다.
눈사람님 아델포스입니다.
두 분 사이에 잠시 끼어들어 봅니다.
눈사람님께서 우려하시듯 떡진머리님의 신앙은 제가 볼 때는
그다지 무리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하실 수도 있지만요.
탈주의 개념을 많이 우려하시는 듯한 데
떡진머리님의 탈주는 눈사람님께서 우려하시는
그런 마구잡이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
떡진머리님의 탈주는 밝히셨듯이 들뢰즈의 개념을 차용해 쓰시고 계십니다.
얼마 전 들뢰즈의 유목을 두고
천규석 선생께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해서
이정우 선생이 발칵하셨죠.
사실 들뢰즈의 유목을 천규석 선생께서 철학적 개념이 아닌 상식선에서 판단하셨거든요.
그래도 그게 맞는 건지도 몰라요.
아인슈타인의 어거지가 나중에 오히려 맞는 걸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결과는 아무도 이정우 선생의 편을 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이정우 선생을 나무랐죠.
천규석 선생의, 행동으로 보이신 그 분의 삶을 모두 존중하거든요.
그 분은 비철학자이기 때문에 좀 잘못 짚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얘기들도 곁들여졌어요.
그래도 잘못된 부분은 짚고 가긴 해야 했지요.
들뢰즈 철학은 거진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결자로 보이죠.
저의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요.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굉장히 위험하죠. 어찌 보면요.
그래도 대세잖아요. 시야를 확 넓혀줘요.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깡그리 해체해 버린다고 보여 지죠. 진리조차도요.
물리학에서조차 진리의 개념을 마지막으로 수호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어요.
그 유명한 상대성 원리로요. 그 이후론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대세예요.
(중요한 예기가 있었는데 이 부분은 자진 삭제할래요. 오해 사기 싫어서요...)
아인슈타인은 꺼져 가는 이성의 불을 밝힌 칸트 같죠.
그래서 각광받는지 몰라요.
신학에선 신을 다시 살린 칼 바르트라고 보이네요.
요즘 바디우가 그 역할의 중심에 서려하죠. 쉽지 않으니 좀 변형시키죠.
들뢰즈 철학이 (누군가는 가타리는 왜 빼냐고 불만스럽게 말하지만요...)
해체주의의 종결자이긴 하지만 사실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개념은 별로 없다 평하죠.
속된말로 짜깁기의 천재죠.
숨은 보석들을 찾아 정교히 짜깁기하죠. 숙련된 장인이죠. 정말 매력적이긴 해요.
많은 사람들이 껌벅 죽었어요.
요즘 나오는 철학책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들뢰즈 관점이 녹아 있어요.
들뢰즈 철학의 후계자들이 대세인가 봐요.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베르그송을, 니체를 새롭게 해석해요. 들뢰즈식이죠.
굉장히 신선해요.
제게 신선하다는 것은 눈사람님께는 위험한 것으로 보일 순 있겠네요.
그런데 그런 우려를 넘어 들뢰즈 철학은 이미 신학에서 차용하고 있어요.
들뢰즈 철학을 사건의 철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건의 신학이죠.
사건의 신학이란 그 간의 실체 중심의 신학 혹은 주체 중심의 신학에서
관계 중심의 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근데 이때 관계 개념을 조심해야 해요.
기존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계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관계는 주체를 배제하죠. 주체를 배제하게 되면 자칫 관계는 굉장히 상대적인 게 돼요.
이걸 극복하려 들로즈는 스피노자의 내재, 역량 같은 개념을 도입하죠.
내재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예요.
떡진머리님은 들뢰즈 철학에서 탈주 부분에 관심을 두세요.
저도 떡진머리님과 이 탈주에 대해 정리 좀 해 볼까 해서 토론에 끼어든 적 있었어요.
기독교를 탈주로 푸는 걸 보고 싶어서요.
탈주하니 바로 두 가지가 생각나더군요.
하나는 모세의 엑소더스에요.
모세의 엑소더스를 탈주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건 쉬울 것 같아요.
애굽에서의 피압박 민족의 노예 생활을 접고 새로운 자유, 해방을 찾아 출발하잖아요.
하나님의 약속, 계시에 따라서요.
영락없이 탈주예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요즘말로 탈주의 종결자죠.
하나님의 계명을 오직 사랑이라는 하나로 바꿔 버리잖아요.
그야말로 들뢰즈가 말하는 절대적 탈주예요. 그러면
눈사람님께서 우려 하시는 것과는 달리 탈주의 선구자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되시겠죠.
오직 사랑으로 그 모든 계명과 율법을 대치하시잖아요.
정말 우리에게 탈주를 가르치신 분은 예수라 해도 무방하겠죠.
게다가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탈주하라고 명령까지 하시고 계시죠.
깨어 있으라 하시잖아요. 그게 탈주의 의미이거든요.
저는 떡진 머리님의 탈주 계획에 관심이 많아요.
모세의 엑소더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탈주 외 또 어떤 새로운 탈주를 계획하고 계실까.
혹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더 새로운 탈주 개념을 잡아내실까.
그렇게까지야 라고 생각은 해요. 그렇다고
떡진머리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요.
그 쯤 되면 이단 소리 들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사실 우리 모두는 탈주를 꿈꿔야 한다 생각해요.
그게 늘 깨어 있으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시거든요.
그런데 저부터 게을러 안돼요. 안 되고 있구나 알면서도 또 안돼요.
오히려 눈사람님은 부지런하시니 저보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아무도 안 읽겠어요.
글이 길면 글의 내용 파악 잘 안하잖아요.
하하하
아델포스님 안녕하세요.
사실 제가 이단의 문턱앞에서 간당간당하니 서 있지요.
제가 스키를 매우 좋아하는데 속력의 내면서 타고 내려오다 보면 이러다 골로가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비슷한 것 같아요.
물론 슬로프 상태 때문에 한번씩 넘어지는데 뚝뚝 털고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병원신세 좀 지면 되겠지요.
철학하는 것도 같은 마음으로 합니다.
58년 개띠시죠.
저는 58년 개띠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사사하던 선배님들이 거의 77학번 58년 생이시거든요.
컴퓨터가 정보전달자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정보를 머리에 담아두고 계셨는데 뉴욕 맨하튼 어느 거리의 땅값을 물어보면 그 지역의 상황부터 정확한 땅값을 이야기 하는 분도 계셨지요.
지금은 컴퓨터가 발달해 많이 쓸모없이(?) 되어벼렸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델포스님 또한 철학에 조예깊고 아직도 왕성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보니 그 때의 선배님들을 보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이야기들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탈주와 시간의 존재를 화두로 가지고 갑니다.
두개가 밀접하게 연결된 지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아직은 좀더 공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적유물론에 배치되어 있는 시간의 항.
맑스주의의 근대성이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의 존재.
종말론의 시간성 등이 그것입니다.
인류의 가장 엄청난 탈주가 시간으로 부터의 탈주일지 모른다는 사고가 이 모든 것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에서 조금씩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아델포스님 !
저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셔서 글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지 충분히 감이 잡힙니다.
제가 계속 같은 말로 떡진머리님께 글을 드린 이유와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단 이곳에 있는 글때문만은 아닙니다.
떡진머리님께서는
"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당연시합니다.
성경은 왜 당연시 되어야 합니까?
누구의 권위로 그것을 위임받은 것입니까?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들의 혼란함은 신의 계시적 표상물로 자리잡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주고 있으며 그것을 채택한 이들의 권위 또한 누가 부여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경을 책택할 만큼 권위있고 정당한 카톨릭은 왜 타락할 수 밖에 없었을까? 라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타락해 종교개혁을 유발한 카톨릭의 정경채택의 권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다른 내용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성경이 매우 인간적으로 쓰여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귀하가 대안으로 제시하듯이 '신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쓴 성서의 내용으로 신을 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런 글도 쓰셨습니다.
성서가 인간이 쓴것이고 인간의 사고와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개입되었다는 등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우리 다비안들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기에
이에 대한 것은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글에서 아무런 위험(이건 제가 느끼는 위험이지요. 떡진머리님을 비롯하여 다른 분들은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으실지라도...)도 느끼지 못한다면.
글쎄요.
이곳은 방황하는 그리스도인, 막힌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등 다양한 분들이 방문하지요.
위의 글에 아무런 말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낫겠지요.
이 이유는 제가 떡진머리님께 글을 쓴 진정한 이유에 대하면 새발의 피지만..
이것도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쓴 댓글로 이만 물러나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성경으로 부터의 탈주'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님의 입장에서 이야기 해보면 정확하게는 '성경으로 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성경을 보는 시선'으로 부터의 탈주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동일한 텍스트를 보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성경도 '성경무오류설', '축자영감설' 등 기존의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성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의 비신화'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시선도 있겠지요.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님이 보시는 성경에 대한 시선은 내가 탈주하려는 성경의 시선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성경으로 부터 탈주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님이 벗어나 있는 것인지는 모호합니다.
저는 지식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 유희를 즐길만큼 한가하지도 못합니다.
사유의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님의 이야기 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 없이 떠나기 위해섭니다.
제자리에 있고자 하는 님은 아마도 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제가 공부하는 것은 수 천년의 세월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것이 수 천년 전 부터 그 이후의 철학자들이 고민해왔고 답을 얻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의 토대 위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잡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지 못할 답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공부입니다.
'탈 그리스도', '탈 성경'으로 끊임없이 저의 사고를 변환시켜주는 님의 노력 덕분에 그에 따르는 넒은 사고를 시켜줌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의 생각에 우려를 하시는 것도 고맙습니다만 님의 생각에 우려를 한번쯤은 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막연히 제가 '탈 그리스도'적이가나 '탈 성경'적이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어떤 부분이 그렇게 보인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 그리고 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공평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역시도 님의 그런 입장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밖에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면 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회사를 안정되게 경영하려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물이 변하기 때문에 머르르는 것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관계가 있겠지요.
어느 시점에 성경을 해석하는 시선은 그 시대에 머물렀던 관점입니다.
성경을 보는 눈에 절대적이란 없습니다.
님에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성경을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십시요.
님이 저에게 하는 우려를 저도 동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떡진머리님 !
많은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님에 대해 막연히 탈그리스도적, 탈성경적이라고 생각한 것 아님을
님께서 더 잘아시리라 여겨집니다.
위에 아델포스님께 쓴 댓글에 님께서 쓰신 글의 일부만 가져와서 써놓았지만
님의 글 많은 곳에서 느꼈습니다.
아니라면 제가 잘못 느낀 것으로 하면 되겠지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님께서 탈그리스도적, 탈성경적이 아닌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성경을 보는 저의 시선에 대해서 우려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님께서 우려하지 않으셔도 될만큼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들으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들이나 친한 성도님들이 저를 이상한 놈 취급할 정도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현재 진형형입니다.
이쯤에서 이번 주제에 대한 님과의 대화를 멈추렵니다.
충분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되니까요.
서로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십시다.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다른 주제로 또 만나게 되겠지요.
항상 하나님안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밥갑습니다. 수탉님!! 수탉님의 이때까지 쓰신글은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가 잘되지 않는데요 우리나라 어떤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시고 어떤 신학자에게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성서를 공식화해서 쓰시는 분은 저도 신앙생활 오래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도 여기에 방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본인께서 여기 사랑채의 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못보는 신학이론을 적는 곳은 아니고요 신앙생활과 삶에 나누고 싶은 일들,전통있는 신학자분들의 좋은점과 배울점과 사회적인 이슈등을 나누고 서로 질문하며 배우는 장소입니다.
여기 다비아에 글을 쓰시는 분들은 목사님, 현직 신학 교수님도 계시고요 ,신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평신도분들도 거의 대부분이 신학 전공하신분들 이상으로 신학 지식이 정말 풍부하신 분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님의 글쓰시는 부분은 조금 그렇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자제 하심이 좋으실 듯합니다. 제가 이곳에서는 제일 막내격인데요 제가 이런이야기를 하는 것은 간섭하는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