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성경에서 나온 종교인가? (5)

그동안의 글을 통해서 기독교가 플라톤의 사상을 기반으로 창설된 종교이며
그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기위한 방편으로 성경을 이용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극소수에 불과한 의인들을 통하여 성경과 복음이 전파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짐승, 즉 기독교를 사용하여 성경과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실 것임을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짐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평생을 본능적으로 먹을거리와 번식을 위해 살아갑니다.
기독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을 찾아 지사를 만드는 자들과 뭐가 다릅니까?
등에 달아놓은 쪽지를 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둘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와 같은 의인들을 통한 전파만을 계속 진행하셨다면
그러한 분들이 받아야 할 고통은 상상초월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파의 진실이 아닙니까?

플라톤을 추종하는 기독교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플라톤의 사상을 지지하는
경전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플라톤을 지지하는 다른 경전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종교들이 만들어 놓은 경전은 그 기록 안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과
오류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고, 특히 동물이나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하여
숭배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플라톤의 신관과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플라톤 추종자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권위가 담겨있었고, 긴 역사가 있는 훌륭한 경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사상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삼위일체 vs 유일하신 창조주
“나는 여호와로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와 같은 문장이 최소 1300회

플라톤의 영혼 불멸 vs 죄 지은 자들에 대한 사망
“그 영혼이 죽으리라”와 같은 문장이 다수 있음

플라톤 영혼 불멸에서 비롯된 지옥 vs 심판 후에 악인과 고통의 소멸
“다시는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 있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문장 다수 있음

이러한 내용들은 기독교가 변개한 일부 성경의 문장들과 그들이 심어준
선입견이 없이 성경을 본다면, 누구나 쉽게 차이를 알 수 있는 성경 밖의 교리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있어, 다른 목적이 없이 하나님을 찾으며
꾸준히 통독을 하면 기독교의 만행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라고는 항상 교회 안에서 인간의 교리로 무장한
목사나 신부의 설교를 접할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말 지독하게도 성경을 직접 읽지 않습니다.
들고 다니는 시간의 100분의 1도 성경을 읽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본 성경은 읽은 것이 아닙니다.
남의 입을 통하여 인간의 사설을 붙여 전해들은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기독교인들이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경을 10번이나 통독했어!”

근사해 보이고 신실해 보이는 이 말이 사실은 과시하기 위하여 입은
명품 옷이나 귀금속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늘 성경을 곁에 두고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는 사람이 성경을 읽은 시기와
횟수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최소한 백번은 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어!”가 정답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큰마음 먹고 읽으면 하루나 이틀만에도 통독이 가능합니다.
침착하게 읽어도 한 달에 한번 이상 통독이 가능합니다.

저는 대망이라는 25권짜리 책을 이틀 만에 읽은 기록이 있습니다.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로도 성경의 세배는 되는 양을 2~3일 만에 읽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처럼 독서를 해 보신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재미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도 영생에 관한 문제를...

나중에 무엇으로 하나님께 이 사실에 대하여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얼마나 읽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심중에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편1장 중에서...)

혹시 “나는 깊이 묵상하며 읽기 위해서 10년에 한 번밖에 못 읽었다.“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연인이 준 편지 한 장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깊이 생각하느라 일 년 만에 읽었다고
한다면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일입니까?

단순히 빨리 읽으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성경에 대한 진정한 열의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탄에게 속해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를 결코 과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언 6:4~5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기적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성직자가 되었다.”라는 주장 속에는
“나 이런 사람이야~ 무조건 복종해~”를 강조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축구를 이겼거나, 좋은 대학에 갔다거나, 남보다 좀 잘 살거나...

제발 이런 일로 은혜라도 받은 듯이 남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척 하지 마세요.
“나는 은혜 받은 자요 너희는 은혜도 못 받은 한심한 인간 군상이구나!”라는 교만과
가증스러운 속마음이 드러날 뿐입니다.

썩은 벽지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보인다?
성경에서 그렇게 하찮은 일들을 기적이라 말하는지 꼭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기적 체험이나 간증은 신도들을 발아래 두려는 간사한 삯꾼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축구를 0대 11로 싸워서 이겼거나, 백지를 냈는데 만점이 나왔거나,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돈이 줄지 않는 금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일이며 단순한 인간의 노력에 결과일 뿐입니다.

그냥 범사에 감사하고, 진심으로 감사할 일이 있다면 혼자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에 대하여 말하자면, 상황이 무엇이든 기독교인의 99%는 성경을 통독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의 설교를 통해 듣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니라는 사람들 중에 성경을 읽는 경우는 통독 횟수를 세어가며 자랑삼아 과시용으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암송하는 구절이 상당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암송하는 문장 수보다 성경 통독 횟수가 적다면 이 또한 자랑삼아 과시용으로
암송하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교훈을 암송하는 것 보다, 그 중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더 필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 교훈을 마음에 담고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노력하라고 남겨주신 것입니다.

남들이 보면 욕부터 나오게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성경 구절은
하나님을 욕보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탄도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욕보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는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욕보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다.”라는 성경 문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성경 말씀은 저마다 예언을 풀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에 대한 경고가 될 수는 있어도
스스로 열심히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절대로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곳곳에서 계시록을 풀었다고 서로 다른 헛소리를 하며 설교하는 기독교가 들어야 할
소리입니다. 어떻게 한 성령이 그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알려준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성경은 스스로 읽을 때에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책임을 알려줍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혼자 성경을 보면 위험하다?
남을 위해서 해주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토록 성경과 반대되는 주장만 해온 탐심의 헌금종교인 기독교가
성경에 어떠한 짓을 하였다가 발각이 되었는지 중요한 것들만 몇 가지 나열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어지는 내용들은 어디에서나 확인이 가능하며, 모두 기독교가 공인하는 것으로
저 혼자서 사사로이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성경의 판매로 이득이 발생하는 일부 기독교의 광신도들 중에는 아래의 사실들에 대하여
“초기 성경에 빠진 중요한 내용들을 몇 백 년에서 ~ 수 천 년이 더 지난 후에
기독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추가한 감동적인 기록이다“라고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주장은 초기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성경에서 빠뜨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들의 조상들이 플라톤의 사상을 지지하기 위하여 성경에 가했던
불의한 사실들을 지금부터 몇 가지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이 삼위일체와 영혼불멸, 그리고 영혼 불멸을 지지하는 지옥에 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영혼불멸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세월 그토록 기독교가 꼭꼭 숨겨왔던 단어입니다.

에스겔 18:4
[과거]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사람은 죽으리라.“

[현재]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아직도 그대로인 성경이 존재]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 공동번역



에스겔 18:20
[과거] “범죄하는 그 사람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

[현재]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

[아직도 그대로인 성경이 존재]
“죄짓는 사람, 그가 죽을 것이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죄를 감당하지 않을 것이고 ...”
(우리말성경)

왜 기독교는 그동안 영혼이 죽는다는 표현을 모두 바꾸어 감추었을까요?
플라톤이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변개를 스스로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죽이실 수 있습니다. 아닙니까?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지옥(게헨나)에 멸하신다는 말씀의 참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게헨나는 쓰레기 소각 장소입니다.)

이 문장들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단어는 모든 사본에 지옥이 아닙니다.
단순한 이스라엘의 한 지역인 “게헨나”로 전 세계의 남아있는 모든 사본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사용된 지옥은 기독교가 “무덤”을 변개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시편30:3)

기독교가 교묘하게 지옥을 강조한 이 문장조차, 설사 지옥이라는 장소가 있다 하여도
“살리사”라는 단어를 통해 죽어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장에서 지옥과 무덤이 사본에는 한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한 번은 무덤으로 또 한 번은 지옥으로 임의해석된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옥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라는 문장은, 만약에 지옥이 있다고 하여도
그 상태가 죽어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지옥”이라는 단어 “시올”의 실체는 단순한 무덤입니다.
그 외에 어떠한 다른 뜻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지옥이라는 사상을 성경에 주입하기 위하여 강제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혹시 가장 완전한 언어라는 히브리어에는 “지옥”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기독교의 주장을 수용하면 지금도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시올”이나 “하데스”가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시올
요셉의 시올
홍길동의 하데스
...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 앞에 지옥이라는 푯말을 붙였다는 것입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 지옥이라는 단어는 무덤을 뜻하는 히브리어 “시올”과 헬라어 “하데스”라는
똑 같은 단어들과 지역명인 게헨나 등에서 거의 절반인 30 여개에 대하여 플라톤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제들이 단지 회의를 통하여 지옥이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지옥은 성경에 없습니다. 히브리어에도 없습니다.
플라톤의 영혼불멸과 이방 신앙과의 조화를 위하여, 그저 사제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지옥”으로 바꾸어 표기하자!“고 결의하여 성경에 주입된 단어입니다.

용서 받기 어려운 이러한 성경의 단어 변경은 돈 주고 목사가 된 자들을 제외하면
삯꾼들도 신학자들도 모두가 다 아는 공인된 사실입니다.

이처럼 영혼불멸과 지옥에 관한 조작의 근거자료는 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종교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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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플라톤의 삼위일체는 어떻게 성경에 주입되었나 하는 것을 알아봅니다.

기독교가 성경에서 가장 확실하게 내세우는 삼위일체의 근거는
요한1서 5장 7절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증언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니라. 또한 이 세 분은 한 분이시니라.“ (한글 흠정역)

한 눈에 봐도 삼위일체가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오래된 사본으로 가면 갈수록 나타나지 않다가, 12세기 이전의
사본에서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중세에는 사제들이 가필로 메모하여 놓은 것이나, 관주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일반인에게는 성경의 소유를 금지시키고, 자신들이 성경을 낭독할 때에는
원본을 대신하여 이 가필을 읽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후에 성경 본문에 직접 삽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여 확인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최신판 성경에는
이렇게 정정이 되었습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거의 모든 최신판 성경)

두 문장을 함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늘에서 증언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니라. 또한 이 세 분은 한 분이시니라.“ (한글 흠정역)
vs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거의 모든 최신판 성경)

기독교가 삽입한 문장은 타 사본들과 형식, 표현, 필체 등의 모든 점에서
변개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아직 일부 성경장사들이 자신들의 성경이 특별하다고 강조할 때에만 변개된 문장이
더 진실이라고 주장하거나 후대에 성령감동으로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개가 필요했던 이유가 뭘까요? 진실이라면 조작이 필요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조작은 거짓을 진실로 보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지지하도록 조작한 것으로 밝혀진 문장이
적어도 70여 곳이 넘습니다. 제대로 배운 기독교 성직자들도 잘 알면서
쉬쉬하는 것뿐입니다.

대표적인 곳을 몇 개만 더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8절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러한 성경을 통하여 7절과 8절을 이어서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느끼지 못하면 바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감동되어 성경을 기록하신 분들은 수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을
문장 중간 중간에 사용합니다. 찾아보시면 수 백회가 넘습니다.

계시록 1장 8절은 이러한 성경의 특징을 잘 아는 기독교가
백분 활용한 변개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장 많이 사용된 수법입니다.)

이 시대에는 누구에게나 공개된 오래된 사본들이 기독교의 거짓됨과
성경의 진실을 그대로 알려줍니다. 그래서 “나는”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바뀝니다.

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거의 모든 최신판 성경)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또한 신뢰할 수 있는 많은 사본에서는 이 문장에서 제거 된 단어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표기 하였습니다.

“I am The Alap and The Tau, says THE LORD JEHOVAH God,
he who is and has been and is coming, The Almighty.“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거한 것입니다.
정말 치밀하고 사악한 의도가 보이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성경에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바꾸려는 기독교의 시도는
다른 곳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개정개역/개역한글 모두)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al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확실한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두말 할 것이 없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본의 “깁보르(강력한)”라는 단어를 “샤다이(전능한)”로 바꾼 전형적인
기독교의 간사한 조작이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성경이 아래와 같이 바로잡게 됩니다.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KJV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NIV

“For a child will be born to us, a son will be given to us; And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전능을 뜻하는 almighty 와 강함을 나타내는 Mighty 의 차이는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전능자와 단지 강한 자가 같을 수 있습니까?

모든 나라가 정정을 하였고,
이제는 한글 성경에만 그 조작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볼 것이냐?”고 물어보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죄송하지만 “하나님(대문자GOD)”이라는 단어도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정말 설명하기도 어렵고 답답하며,
심각한 문제이지만 명백한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사용하는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능력이나 권위가 높은
존귀한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엘“, ”엘로힘”이나 헬라어 “데오스”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기독교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서 무작위로 바꾸어 붙인 단순한 명칭일 뿐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성경에는 “하나님(GOD)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원래의 단어들은 왕이나 군주인 인간들, 사탄, 우상들에게도 아주 많이 사용된
단어 들입니다.

이 사실은 어떤 기독교 신학자도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어에서 번역자들의 주관에 따라 “신”, “님”, “우상”, “하나님” 등으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기독교 내에서도 번역기관에 따라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
것이며, 그들의 선택에 따라 각각 어떤 “엘로힘”은 “신”이 되고 어떤 것은 “우상”이 되고,
어떤 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신에게도 우상에게도 붙이는 “엘로힘”은 그저 존칭 “엘로힘”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도 사탄에게도 붙이는 “데오스”는 그저 “데오스”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누가 이 한단어로 인간과 신과 우상과 하나님을 정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은 단어 하나가 아니고 스펠 3개만 달라도 사본을 폐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GOD)”라는 단어가 창조주를 말하는 단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너무나 간사하고 사악한 그들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GOD)”이라는 단어와 “주(LORD)”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창작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YHWH”가 나오는 약 8,000단어를 “주(LORD)”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알리는 단어에 “하나님(GOD)”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헬라인들이 “담무스”와 같은 우상을 부를 때 사용하던 “주(Lord)”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 곳마다 쏙쏙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엘로힘”이나 “데오스”같은 존칭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골라서 “하나님(GOD)”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들의 행위를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졌어도 플라톤을 추종하는 기독교의 조상들부터 지금의 기독교까지
이 행위를 옹호하고 정당하다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창조주와 동급으로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깊이 알아야만 성경을 정상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디 수천 년 동안 치밀하게 진행되어온 기독교의 만행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플라톤 추종자들이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하며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삼위일체, 영혼불멸을 만들어 창조주께서 유일하심과 또, 그분께서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부인하고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말한 사탄을 숭배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아들 예수님을 창조주로 높여 우상숭배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그들의 목적하던 것은 이미 다 이루어 졌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기독교인들은 이 문장을 보면서 100% 예수님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사도께서 앞으로 나타날 배도한 멸망의 아들이라는 적그리스도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1)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2)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이 인물...
온 세상 사람들이 창조주라 믿는 그 인물...
교회를 지배하면서 창조주로 추대 받고 있는 그 인물 ...
온 세상이 창조주 보다 더 창조주라고 믿고 있는 그 인물...
교회가 성전이라고 믿는 곳에 앉아 있을 그 인물...
사도께서 그 당시부터 얼마 후에 나타나리라 예언한 그 인물...
기독교가 만들어 낸 그 인물 ...

그 배도한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그분을 그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구세주의 자리에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시록에 나타난 그 두려운 어린양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꼭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분명하게 그 사실을 알려주며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짓 성직자들을 따르며, 거룩하고 착한 척이나 강요하는 기독교의
신도놀이는 그만 해야 할 때입니다.

이 공개된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결코 재물과 함께 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악한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