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인 신앙이 과학 / 이성의 범주에 속박되는 것이라면 인류는 또다시 메시아적 구원 소망을 송두리째 잃고 말 것이다. 만약에 과학적 이성을 중시하겠다면, 신앙적 시도보다 차라리 그것을 사용하여 보다 용이하게 돈을 벌 수 있는 한가지 방편이 있으니, 바로 현대 디지털 관련 산업이다. '디지털'은 대단히 획기적이고 논리적이며 또한 합리성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만일, 돈을 벌고자 꿈꾸며 그에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과학적 논리가 곧 교리요, 자신의 신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도 하나의 어떤 "신앙"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부를 획득한 사람도 "과학과 이성과 재물을 숭배하는 하나의 '성공한 신앙인'"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성서적 관점에 입각한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건강한 신앙인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신앙을 사유(思由)함에 있어서는 과학 혹은 이성주의적 사고에 얽매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것들에 얽매이는 것 자체가 이미 비신앙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이성"은 눈으로 인식한 형상이나 귀로 인식한 소리처럼,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하나의 의식적인 결과일 뿐이다. 우리 육의 눈이나 귀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그걸로써 신을 인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직 영적인 눈, 영적인 귀로써만 가능할 뿐이다. '自己 인식'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 누구든 이를 불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는 신앙의 길에 올바로 안착하지 못한 것이리라. 아니 이미 '이성적 추구' 그렇게 하다가 기독교가 쇠락과 실패의 길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니, 특히 서구의 기독교가 그러한 '실패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성주의'를 버리든가 아니면 신앙의 길을 포기하든가, 그 둘 중에서 분명하게 택해야만 할 것이다.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걸 강요받는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버리면..."(요한계시록 22장)

우리 모두는 이러한 요한의 경고에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이성으로써 "의심"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또 다른 의심을 연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사탄적인 시험은 지식이나 이성에서 올 수도 있을 것이니, 그게 바로 어떤 도그마적인 모습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놓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이것을 슬기롭고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신비롭기까지도 하다.


비이성적인 어떤 신비로움은 그 옛날 예수와 관련된 것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 수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으며 주님의 일을 했다고 알려진 '기도의 사람' 죠지 뮐러(1805~1898)와 관련된 얘기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죠지 뮐러 자신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기도응답의 일화들을 단지 우연적인 일들일 뿐이라고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고 신앙과 기도응답의 실재로 보든지, 아니면 아예 거짓으로 치부하든지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일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가지는, 이성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하나의 "인위적 허구" 이고, 또한 거짓된 신조다.

"신앙"은 그 자체가 과학적이거나 혹은 이성적인 방식으로써 검증이 불가능한,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의 어떤 "사상"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