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의 토론글  중 많은 내용이 신앙과 과학에 대한 문제들입니다.
과학으로 신앙을 부정하고자 하는 글들과 신앙이 비과학적이지 않음을 주장하는 내용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양자는 항상 대립적으로 보입니다.
무신론자들은 과학을 종교를 공격하기에 좋은 무기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또한 종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에 상대방이 결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으로 맞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신앙을 부정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점에 주목하여 종교인이 과학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얼마전 열린토론방에서 안티기독교인에 대한 토론을 하던 중 저의 글에 대하여 한 분의 목사님이 '신앙도 신이주신 선물이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토론의 시간이 정해져서 이 글에 대한 다른 댓글을 달지는 않았지만 몇 마디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이주신 선물로서의 '신앙'과 인간의 욕망으로 부터 출발하는 '신앙'을 구분할 방법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간에 표출되어 나타나는 신앙, 또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믿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유대교의 바리새인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 우르바도2세, 잔다르크를 화형에 처하게 한 피에르 코숑 주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하던 로마의 교황청, 교회건축을 위하여 교인들을 쥐어짜는 목회자들, 보수집회에 신자들을 동원하는 대형교회들, 4대강사업을 찬성하는 한기총.
이들의 신앙은 무슨의미를 지닐까요?
이렇듯 거창한 문제들이 아니더라도 개인이 가지는 신앙 역시도 이기적 욕망에 근거함을 우리들은 흔히 목도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에 목회자들은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며  욕망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입장은 종교나 신앙의 주체가 과학에 대하여 지녀야할 입장을 획정했던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들이 단순한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천동설과 이것을 교리로 고집하는 바티칸의 신앙엔 권력과 이를 기반해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등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재미있는 사실은 신앙은 신앙으로 검증되어졌던 것이 아니라  과학에 의하여 검증되어졌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신앙 또는 교리적 이유로 과학적 발견이나 증명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졌던 경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야 말로 신이주신 '선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과학과 신앙에 얽힌 역사를 볼 때 신앙인은 과학적 주장이나 발표앞에서 삼가하며 저어하고 매우 겸손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학이 가지는 불충분한 공간이 넉넉함에 우리의 모호한 신앙이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다.
그 공간은 과학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불확정함 입니다.
이는 우주와 양자, 그리고 인문의 인식 세계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모호한 신앙의 공간입니다.
모호함은 확정적이지 않지만 풍부함을 담보합니다.
풍부하지만 모호하기에 겸손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확정된 것 또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신앙을 확정해 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과학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신앙의 공간이 협소해지는 것을의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진보되어 나감을 의미합니다. 
우주는 아무리 드러나도 충분할 만큼 공간이 넓으며 양자의 세계 또한 보기보다는 무척이나 광활합니다.
논리의 세계 또한 빈구석이 많습니다.
신앙이 한 지점에 머무를 때  과학의 발견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영토화된 신앙이 아니라 항상 탈주하는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다.
이 때야 말로 '사람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을 신앙하는 오만과 오류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과학과 신앙이 상보되며 내면화되어 흐르는 흐름을 찾아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