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정목사님꼐 메일로 드리려고 했는데 다비아 분들도 같이 보셔서 개념을 명료화 하는게 좋다고 생각하여 사랑채에 올립니다.

조직신학해설 25page를 참조하면 세계의 궁극적인 리얼리티 를 바라보는 관점을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가장 궁극적인리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가지 이다 하나는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실체론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것은 있을수 없다는 운동론이다.....26페이지까지 계속"-이 부분인데요

일단 이 부분의 기본적인 요지는 맞지만 개념적인 구분에서 실패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철학에서 실재성(Wirklichkeit)(Reality)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눠지는 부분은 '실체론'과 '운동론'이 아니라 '존재'Being과 '생성'Becoming입니다. 운동은 물리적 위치 변화를 주로 의미하는데 반하여 생성Becoming은 생성 소멸하는 변하는 모든 흐름Flux를 포괄하는 말이기 때문에 더 근원적인 개념으로 분류됩니다. 실체라는 개념도 너무 부분적입니다. 실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은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인데 그 근원적인 모티브는 생성Becoming과 대비되는 존재Being에서 나왔거든요.

여기서 실체론의 선구자로 데모크리토스를 운동론의 선구자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들었는데, 운동을 넓은 의미에서 생성을 포괄하는 단어로 이해해준다면 후자는 봐줄수 있겠습니다만 실체론의 선구자는 데모크리토스가 아닙니다. 실체론을 정립시킨사람은 후대인 아리스토텔레스이고 헤라클레이토스와 대비되는 실체개념의 선구적인 원형을 제시했던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개념의 선구적인 원형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던 존재Being입니다. 따라서 존재론의 파르메니데스와 생성론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철학사적으로 올바를 대립쌍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만물의 근원Arche에 관한 대답으로서 의도된 것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근원적으로 일자이며 불변하며 동질적이고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존재being자체만이 존재하며 근원인 arche라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와 반대로 항상 변화하는 흐름Flux로서 생성Becoming이 arche라고 봅니다.
 
그리고 실체론과 생성론은 실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양립가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실체를 '이것' '저것'으로 지칭가능한 문장의 궁극적 주어 즉 기체로서Substratum 개별자로 볼 경우 그 개별자는 그개별자의 속성에 비해 변화하지 않지만 그 개별자가 사라지면 실체는 생성의 흐름속에 내맡겨집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론은 조화시켜보려는 시도중 하나입니다. 플라톤은 생성의 세계(감각적 세계)와 존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를 나눔으로서 이 둘을 양립시키려했죠. 그런점에서  실체와 유사한 이데아는 생성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데아 즉 Eidos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개별자의 형상Eidos으로 차안화시킨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실체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생성과 양립될수 없는 실체개념은 데카르트에 의해 주어집니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 그 어떤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립유로서 정의함으로서 신을 실체로 놓고 생성과 엄격히 대비시킵니다.

정목사님의 글은 그 언급에 실체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데카르트의 그것이 명백히 구분되지 않고 쓰여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감각될 수 있으나 데카르트이 실체개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정목사님은 절대성과 실체성을 혼동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에서만 실체성은 절대성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영미철학에서 스트로슨 같은 사람들은 상식적인 세계관의 우위성을 인정하며 실체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물론 이때의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실체이겠죠.

또한 심지어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실체도 생성과 전혀 조화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헤겔이 보여주듯이 실체로서의 신은 자기를 부정하고 외화하며 운동하는 변증법적 주체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유명한 명제가 있지 않습니까 '실체는 주체다'

이렇게 생각할때 정목사님의 언급과는 달리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 실체는 신을 이해하느데 아주 적절한 개념입니다.

중세철학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신을 실체중의 실체 혹은 Eidos의 Eidos 즉 순수형상으로 이해합니다.

철학적으로 볼때 정목사님설명과는 반대로 실체는 신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애용되었던 개념입니다.

멀리는 크세노파네스부터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헤겔까지 신은 항상 실체로서 정의되어았습니다

루이스 벌코프가 쓴 조직신학을 펴보면  첫장에 신은 자립유 즉 실체이다 라고 쓰여있을 정도로 신학에서도 실체는 신과 연관된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러한 실체 혹은 존재와 생성간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자한 것이 바로 하이데거 입니다.

하이데거는 실체로서 존재를 이해하는것은 결국 존재신학에 불과하다면서 존재를 존재 자체로서 이해할 것을 주문하죠

이럴 경우 존재와 생성의 대립이 새로운 존재이해 앞에서 허물어지죠.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서 다루는 존재는 생성까지 포함하고 있는 존재자체입니다.

정목사님의 언급에서 문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실체개념이 혼동되어 쓰이고 있다. 2. 실체성을 절대성과 혼동하고 있다. 3. 존재로서의 실체개념과 생성간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단순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