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6
"헌신인가 매매인가!"
제기하는 문제는, 장로 집사 권사 ...
① 선출에 있어서 상당한 알력과 갈등과 경쟁이 있었습니다.
② 임직식에 앞서 전례란 미명으로 헌금을 요구합니다.
몸된 교회들이 큰 머슴으로 뽑혔습니다.
선출되신 분들에겐 수고가 기다릴 것이고
앞으로 뽑히실 분들에겐 아름다움을 기대합니다.
축하를 드린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꾼으로 뽑혔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선출된 것이 면류관을 쓰는 일이라면 마음껏 축하를 드렸을 것입니다.
앞으로 일꾼들을 정식으로 맞이하는 잔치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집안의 큰 잔치를 열려면 미리 연초에 예산을 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머슴의 사기를 위해서나 많이 부릴려면 마음을 흐뭇하게 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다른 예배당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곳에는 일꾼으로 일을 할려면 도리어 돈을 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례라는 미명으로, 큰 일을 하려면 필요하다면서. 아주 잘못된 코메디입니다.
예배당의 일꾼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과소를 막론하고 비용이 부과되면 진정한 감사는 사라집니다.
돈을 내고 샀다는 마음이 또아리를 틉니다. 소탐대실의 표본입니다.
담임목사위임식에서 위임목사에게 비용을 대라는 곳을 만나질 못했습니다.
미리 예산을 편성하고 모실 준비를 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잔치를 기다립니다.
설사 수 많은 예배당이 그렇게 할지라도 교회들이 모인 예배당은 몸부림쳐야 합니다.
면류관이 아니란 것을 선진들이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제 머리보다 훨씬 큰 개털모자로 인한 안하무인을 막기위해 그렇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마음을 선출되신 분들에게 기대하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다 꺼려하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내가 지겠습니다.
힘든 십자가를 피하기는 커녕 서로 지겠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선택되지않음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좋은 예배당임을 봅니다.
*요즘 교회의 장로, 안수집사, 권사로 피선이 되면 노골적으로 금액이 정해집니다.
자신도 전철을 밟은 관계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몸부림은 쳤습니다.
교회게시판에 많이 자제하며 오래 전에 올린 글이고, 아래는 오늘 기록한 일기입니다.
교회마다 임직이 다가오면 이런 저런 불미스런 말이 나돈다.
장로는 얼마, 안수집사는 얼마, 권사는 얼마? 소요경비라는 핑게를 대면서.
이런 저질스런 소이는 현대판 매관매직이고 사리진 중세의 면죄부에 다름 아니다.
관습이라면 지극히 악질적인 관습이고 관행이라면 비개혁적 관행이다.
그 발상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편리를 위한 얄팍한 수단일 뿐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도 예수공동체에서는 금해야할 사안이다.
세상에, 머슴을 시키면서 돈 내고 머슴하라는 곳이 어디 있는가?
이 작은 돈으로 말미암아 머슴의 자리가 군림하는 자리로 변함을 모르는가?
온 세상이 그렇게 할지라도 교회공동체는 그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임직을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면 예산편성에 항목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임직식에 대한 항목은 없었다. 그러면 집행되는 경비는 어디서 나오나?
틀림없이 관행이라는 허울로 임직을 받을 사람들에게서 받아내려는 알팍한 수순?
예를 쉽게 들어보자.
A라는 사람은 믿음은 모든 형제들이 인정한다. 그러나 가난하다.
B라는 사람은 믿음은 쥐뿔도 없다. 그러나 부자다. 그렇다면 누가 합당한가?
편한 말로 돈이 없으면 안 내어도 괜찮다?
그럼 그 경비를 내지않음으로 주눅드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예산으로 잔치를 열고 진정한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닌가?
어디 장로, 안수집사, 권사가 높힘을 받는 자리인가?
몇푼 돈으로 군림의 자리로 변질 시킬 것인가? 아주 질 나쁜 일이다.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교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지러고 있을까?
목사, 장로, 교인들이 피택자들에게 선물을 바라지않아야 한다.
아니 오히려 머슴될 사람들에게 교회가 선물을 드림이 마땅치 아니한가?
저질스러운 또 하나의 단면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짓을 쌓아간다.
제기하는 문제는, 장로 집사 권사 ...
① 선출에 있어서 상당한 알력과 갈등과 경쟁이 있었습니다.
② 임직식에 앞서 전례란 미명으로 헌금을 요구합니다.
몸된 교회들이 큰 머슴으로 뽑혔습니다.
선출되신 분들에겐 수고가 기다릴 것이고
앞으로 뽑히실 분들에겐 아름다움을 기대합니다.
축하를 드린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꾼으로 뽑혔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선출된 것이 면류관을 쓰는 일이라면 마음껏 축하를 드렸을 것입니다.
앞으로 일꾼들을 정식으로 맞이하는 잔치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집안의 큰 잔치를 열려면 미리 연초에 예산을 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머슴의 사기를 위해서나 많이 부릴려면 마음을 흐뭇하게 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다른 예배당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곳에는 일꾼으로 일을 할려면 도리어 돈을 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례라는 미명으로, 큰 일을 하려면 필요하다면서. 아주 잘못된 코메디입니다.
예배당의 일꾼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과소를 막론하고 비용이 부과되면 진정한 감사는 사라집니다.
돈을 내고 샀다는 마음이 또아리를 틉니다. 소탐대실의 표본입니다.
담임목사위임식에서 위임목사에게 비용을 대라는 곳을 만나질 못했습니다.
미리 예산을 편성하고 모실 준비를 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잔치를 기다립니다.
설사 수 많은 예배당이 그렇게 할지라도 교회들이 모인 예배당은 몸부림쳐야 합니다.
면류관이 아니란 것을 선진들이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제 머리보다 훨씬 큰 개털모자로 인한 안하무인을 막기위해 그렇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마음을 선출되신 분들에게 기대하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다 꺼려하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내가 지겠습니다.
힘든 십자가를 피하기는 커녕 서로 지겠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선택되지않음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좋은 예배당임을 봅니다.
*요즘 교회의 장로, 안수집사, 권사로 피선이 되면 노골적으로 금액이 정해집니다.
자신도 전철을 밟은 관계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몸부림은 쳤습니다.
교회게시판에 많이 자제하며 오래 전에 올린 글이고, 아래는 오늘 기록한 일기입니다.
교회마다 임직이 다가오면 이런 저런 불미스런 말이 나돈다.
장로는 얼마, 안수집사는 얼마, 권사는 얼마? 소요경비라는 핑게를 대면서.
이런 저질스런 소이는 현대판 매관매직이고 사리진 중세의 면죄부에 다름 아니다.
관습이라면 지극히 악질적인 관습이고 관행이라면 비개혁적 관행이다.
그 발상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편리를 위한 얄팍한 수단일 뿐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도 예수공동체에서는 금해야할 사안이다.
세상에, 머슴을 시키면서 돈 내고 머슴하라는 곳이 어디 있는가?
이 작은 돈으로 말미암아 머슴의 자리가 군림하는 자리로 변함을 모르는가?
온 세상이 그렇게 할지라도 교회공동체는 그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임직을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면 예산편성에 항목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임직식에 대한 항목은 없었다. 그러면 집행되는 경비는 어디서 나오나?
틀림없이 관행이라는 허울로 임직을 받을 사람들에게서 받아내려는 알팍한 수순?
예를 쉽게 들어보자.
A라는 사람은 믿음은 모든 형제들이 인정한다. 그러나 가난하다.
B라는 사람은 믿음은 쥐뿔도 없다. 그러나 부자다. 그렇다면 누가 합당한가?
편한 말로 돈이 없으면 안 내어도 괜찮다?
그럼 그 경비를 내지않음으로 주눅드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예산으로 잔치를 열고 진정한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닌가?
어디 장로, 안수집사, 권사가 높힘을 받는 자리인가?
몇푼 돈으로 군림의 자리로 변질 시킬 것인가? 아주 질 나쁜 일이다.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교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지러고 있을까?
목사, 장로, 교인들이 피택자들에게 선물을 바라지않아야 한다.
아니 오히려 머슴될 사람들에게 교회가 선물을 드림이 마땅치 아니한가?
저질스러운 또 하나의 단면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짓을 쌓아간다.
2007.02.12 16:31:00
장로니까 일반 교인들 보다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거라 생각하시는 그 부분은 돈에 의해 직분이 사고 팔리는 교회와 비슷한 생각이신것 같다고 봅니다.교회는 누가 누구에게 십자가를 더 지게하고 덜지게 할 자격이 누구도 없습니다.비슷하게 나는 편하게 교회 다니고 누구는 더 희생해서 또는 직분자가 더 신경씀으로 편하게 다니게 되었다는 생각에는 여러여러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직분자는 당연히 십자가가 더 무거우니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대부분? 자신의 의를 쌓아가며 강팍해 짐니다.
십자가가 직분에 따라서 누구는 덜 무겁고 더 무겁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어떤 분에 집중하지 않음에서 오는 생각이라고 봄니다.믿음안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신 분의 감사로 인한 각자 에게 멍에로서 주신 십자가는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봄니다.하지만 여기에서 각 지체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목사로서...교사로서...섬김 받는자로...멍에가 가볍다는 것 또는 각자에게 맞게 다르게 주신 것을 바라보는것 보다는 인간이란게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가면서 까지 자기 의를 더 챙기는 것이 인간입니다.십자가라도 자기 의를 보태는데 도움이 된다면 지겠다는 강팍인 검니다. 일단 지고 안 지고를 자기가 취사 선택할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생각함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를 세우고 교회의 직분을 뽑는 것은 은혜가 더 크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라고 봅니다.장로가 된 사람이 일을 잘하던 못하던 간에 누구도 자격을 따질수 없지만 사랑으로 책망하고 권면함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됨으로 주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늘 새롭게 느끼게 되는 것이겠죠.또 임직식을 통해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보다는 십자가가 가볍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한없는 은혜앞에서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나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워 질것입니다.
누구도 자격을 따질수 없고 누구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지만 장로를 세움으로 통해서 대접을 받는 사람도 대접하는 사람도 예수님의 희생이 가장 크심을 서로에게 고백됨으로 높임을 받는 분이 한분이였음을 고백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것입니다.지적하신 것처럼 돈으로 직분을 사고 팔고 장로가 되었으니 돈을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을 통해서 몸된 교회가 아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것입니다.교회가 돈이 필요해서 또는 주차장을 늘리고 교육관을 짓기 위해서 리모델링 비용을 위해서 장로와 권사를 세우기도 하지만 직분의 서열화와 희소성이 교인들에게 선한 영적 경쟁을? 부추기는 자극제가 되고 더불어 재정이 늘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수 있기에 목회를 장사 속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담을 서로 나누고 교인을 다루는 기술을 알게 모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으로 장로등의 임직을 세우더라도 직분을 사고 파는 교회에 비해서는 신앙의 성숙으로 바르게 뽑은 것이 좋은일이고 떳떳한 일이지만 그 떳떳함이 시간이 지나면 냉냉해지고 성문화된 교회법이 고쳐지면서 성경과 얼추 비슷한 권위를 가지고 붙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바르게 장로를 뽑는 교회이다! 라는 것이 주님앞에서도 떳떳함이 될수는 없지만 그런 떳떳함이 크다면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을 듣고 누리는 것 보다는 직분자를 통해서 좋은 교회 만들기! 직분자와 성도들이 합력하여 교회일 잘 해보기!에 열심이 되고 그 성과를 보고 기뻐하는 작은 왕국이 될 가능성도 크다고 봄니다.전부 떳떳하고...당당하고...상한심령은 찾아보기 힘듬니다.
음대교수가 교회에 새로 등록했다고 했을 경우 교회음악 관련 일을 해주었으면 하고 또 잘할것이다 기대를 할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사람이 교회에서 아무일도 안거나 안내위원을 하거나 주보를 접는일에 봉사를 하는것도 전혀 어색함이나 아쉬움이 있어서는 안될것입니다.아쉬움이 있는 자신을 통해서 사랑이 아닌 기능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 하려하고 또 누구는 어떤일을 통해서 봉사받는 것이 당연한듯 또는 감각이 없어짐니다.그럴듯한 눈물찡한 임직식 이후에는 사람으로 대하는것이 아니라 장로 라는 기능과 역활로서 구분지어 버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 장로를 뽑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욕심을 부릴수 밖에 없는게 인간입니다.음대교수가 주보를 접는일로 봉사를 하는것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은사의? 낭비가 아니라 넘치는 주님의 은혜가 더 커 보이는 것에 감사하게 될것입니다.
십자가가 직분에 따라서 누구는 덜 무겁고 더 무겁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어떤 분에 집중하지 않음에서 오는 생각이라고 봄니다.믿음안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신 분의 감사로 인한 각자 에게 멍에로서 주신 십자가는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봄니다.하지만 여기에서 각 지체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목사로서...교사로서...섬김 받는자로...멍에가 가볍다는 것 또는 각자에게 맞게 다르게 주신 것을 바라보는것 보다는 인간이란게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가면서 까지 자기 의를 더 챙기는 것이 인간입니다.십자가라도 자기 의를 보태는데 도움이 된다면 지겠다는 강팍인 검니다. 일단 지고 안 지고를 자기가 취사 선택할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생각함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를 세우고 교회의 직분을 뽑는 것은 은혜가 더 크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라고 봅니다.장로가 된 사람이 일을 잘하던 못하던 간에 누구도 자격을 따질수 없지만 사랑으로 책망하고 권면함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됨으로 주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늘 새롭게 느끼게 되는 것이겠죠.또 임직식을 통해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보다는 십자가가 가볍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한없는 은혜앞에서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나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워 질것입니다.
누구도 자격을 따질수 없고 누구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지만 장로를 세움으로 통해서 대접을 받는 사람도 대접하는 사람도 예수님의 희생이 가장 크심을 서로에게 고백됨으로 높임을 받는 분이 한분이였음을 고백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것입니다.지적하신 것처럼 돈으로 직분을 사고 팔고 장로가 되었으니 돈을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을 통해서 몸된 교회가 아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것입니다.교회가 돈이 필요해서 또는 주차장을 늘리고 교육관을 짓기 위해서 리모델링 비용을 위해서 장로와 권사를 세우기도 하지만 직분의 서열화와 희소성이 교인들에게 선한 영적 경쟁을? 부추기는 자극제가 되고 더불어 재정이 늘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수 있기에 목회를 장사 속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담을 서로 나누고 교인을 다루는 기술을 알게 모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으로 장로등의 임직을 세우더라도 직분을 사고 파는 교회에 비해서는 신앙의 성숙으로 바르게 뽑은 것이 좋은일이고 떳떳한 일이지만 그 떳떳함이 시간이 지나면 냉냉해지고 성문화된 교회법이 고쳐지면서 성경과 얼추 비슷한 권위를 가지고 붙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바르게 장로를 뽑는 교회이다! 라는 것이 주님앞에서도 떳떳함이 될수는 없지만 그런 떳떳함이 크다면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을 듣고 누리는 것 보다는 직분자를 통해서 좋은 교회 만들기! 직분자와 성도들이 합력하여 교회일 잘 해보기!에 열심이 되고 그 성과를 보고 기뻐하는 작은 왕국이 될 가능성도 크다고 봄니다.전부 떳떳하고...당당하고...상한심령은 찾아보기 힘듬니다.
음대교수가 교회에 새로 등록했다고 했을 경우 교회음악 관련 일을 해주었으면 하고 또 잘할것이다 기대를 할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사람이 교회에서 아무일도 안거나 안내위원을 하거나 주보를 접는일에 봉사를 하는것도 전혀 어색함이나 아쉬움이 있어서는 안될것입니다.아쉬움이 있는 자신을 통해서 사랑이 아닌 기능으로서 교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 하려하고 또 누구는 어떤일을 통해서 봉사받는 것이 당연한듯 또는 감각이 없어짐니다.그럴듯한 눈물찡한 임직식 이후에는 사람으로 대하는것이 아니라 장로 라는 기능과 역활로서 구분지어 버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 장로를 뽑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욕심을 부릴수 밖에 없는게 인간입니다.음대교수가 주보를 접는일로 봉사를 하는것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면 은사의? 낭비가 아니라 넘치는 주님의 은혜가 더 커 보이는 것에 감사하게 될것입니다.
2007.02.12 18:23:27
회원님들의 대부분이실 주류 개신교파 교우님들께 생소한 말씀을 계속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본래 신약성서의 장로란, 교회의 목회자인 사제직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뱅의 제네바 종교개혁에 이르러, 교회의 민주적 대의정치제가 시행되면서
평신도 직제로까지 확장이 된 것이고요.
(지금도 장로교에서는 목사를 '목회하고 가르치는 장로'로 규정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부목사도 장로들이 모인 교회 의결기구인 당회에 소속되어야 할텐데,
그런 장로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집사란, 성직의 3품 가운데 주교, 사제 아래의 부제를 말하는 것이구요. 평신도 가운데 뽑힌 봉사자로서,
설교권이 있으며 예배 때 복음서를 읽으며,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직제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성직 직제를(엄연히 성직입니다)
평신도들에게까지 확장시킨 건 나쁘지 않은데,
집사도 안수집사, 서리집사, 종류가 많지요?
권사라는 직분은 아예 초대교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새로운 직제라도 필요에 따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상황만 놓고 보면,
무엇 하는 직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장로도 그렇지요. 장로면 장로지, '원로장로'라는 호칭도 있더군요?
'장로'를 공동번역 성서에는 '원로'로 번역했습니다.
사실, 성서 번역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장로'나 '원로'나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원로장로'란, '장로장로', '원로원로'라는 말이니,
이런 위인설관이 어디 있습니까?
유럽의 장로교의 본고장에서는 평신도 장로를 임기제로 한다는데,
우리나라는 뭐...
하긴, 장로님들께서 교회 운영과 살림에 큰 봉사를 감당하시고, 헌금도 많이 내시니,
종교개혁을 하면서, 교회의 개혁과 민주적이고 평신도 중심적으로 가기 위해
새롭게 만들었던 평신도 직제들이,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요?
하긴, 직제'계급'이 높을수록 봉사와 헌금 부담분이 커지니, 의미가 없지는 않겠습니다.
뭐, 제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라고 다르지는 않습니다.
평신도 직제인 신자회장, 사제회장님은 사실상 타 개신교파의 장로님이고,
각 부서 장과 임원들께서는 여타에 해당하시겠지요.
이러한 어르신들께서 실제로 헌신과 봉사들을 많이 하시니, 나쁘게만 보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돈과 사회적 지위 등이 갖춰진 사람을 사회에 상응하게 교회도 대접해 주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은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거지요.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인가,
어느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찰집사님으로 봉직하시면서 온갖 궂은 일만 해 오신 교우께서
그 교회의 장로님으로 피선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이게 바로 초대교회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나마도 초대교회때 잠깐이요,
신약성서 사도서간이 집필될 당시,
제 2 바오로 서신(바오로의 친저가 아닌, 즉 약간 연대가 늦은 서신)들과 기타 사목서간들에도
교회 내의 분파와 빈부차별, 서로 대장 해먹겠다는 분쟁이 보도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고 삶의 본을 보이시다 십자가를 지셨겠지만,
아쉬움이 되풀이되는 것 같아 참 그렇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러한 세상, 체제의 일원이요, 그러한 부정적 모습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본래 신약성서의 장로란, 교회의 목회자인 사제직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뱅의 제네바 종교개혁에 이르러, 교회의 민주적 대의정치제가 시행되면서
평신도 직제로까지 확장이 된 것이고요.
(지금도 장로교에서는 목사를 '목회하고 가르치는 장로'로 규정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부목사도 장로들이 모인 교회 의결기구인 당회에 소속되어야 할텐데,
그런 장로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집사란, 성직의 3품 가운데 주교, 사제 아래의 부제를 말하는 것이구요. 평신도 가운데 뽑힌 봉사자로서,
설교권이 있으며 예배 때 복음서를 읽으며,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직제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성직 직제를(엄연히 성직입니다)
평신도들에게까지 확장시킨 건 나쁘지 않은데,
집사도 안수집사, 서리집사, 종류가 많지요?
권사라는 직분은 아예 초대교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새로운 직제라도 필요에 따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상황만 놓고 보면,
무엇 하는 직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장로도 그렇지요. 장로면 장로지, '원로장로'라는 호칭도 있더군요?
'장로'를 공동번역 성서에는 '원로'로 번역했습니다.
사실, 성서 번역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장로'나 '원로'나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원로장로'란, '장로장로', '원로원로'라는 말이니,
이런 위인설관이 어디 있습니까?
유럽의 장로교의 본고장에서는 평신도 장로를 임기제로 한다는데,
우리나라는 뭐...
하긴, 장로님들께서 교회 운영과 살림에 큰 봉사를 감당하시고, 헌금도 많이 내시니,
종교개혁을 하면서, 교회의 개혁과 민주적이고 평신도 중심적으로 가기 위해
새롭게 만들었던 평신도 직제들이,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요?
하긴, 직제'계급'이 높을수록 봉사와 헌금 부담분이 커지니, 의미가 없지는 않겠습니다.
뭐, 제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라고 다르지는 않습니다.
평신도 직제인 신자회장, 사제회장님은 사실상 타 개신교파의 장로님이고,
각 부서 장과 임원들께서는 여타에 해당하시겠지요.
이러한 어르신들께서 실제로 헌신과 봉사들을 많이 하시니, 나쁘게만 보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돈과 사회적 지위 등이 갖춰진 사람을 사회에 상응하게 교회도 대접해 주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은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거지요.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인가,
어느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찰집사님으로 봉직하시면서 온갖 궂은 일만 해 오신 교우께서
그 교회의 장로님으로 피선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이게 바로 초대교회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나마도 초대교회때 잠깐이요,
신약성서 사도서간이 집필될 당시,
제 2 바오로 서신(바오로의 친저가 아닌, 즉 약간 연대가 늦은 서신)들과 기타 사목서간들에도
교회 내의 분파와 빈부차별, 서로 대장 해먹겠다는 분쟁이 보도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고 삶의 본을 보이시다 십자가를 지셨겠지만,
아쉬움이 되풀이되는 것 같아 참 그렇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러한 세상, 체제의 일원이요, 그러한 부정적 모습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2007.02.12 18:33:43
또 하나 더,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사단이었는데, 새로 군종참모로 대위 계급의 목사님이 부임을 했더랩니다.
신실한 개신교인이었던 사단장님이, 긴히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군 계급을 떠나서, 목사님께 이렇게 청하셨다는군요.
"목사님, 제가 우리 사단 교회를 위해 봉사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에 목사님께서,
"사단장님, 그러시다면, 다음 주일 아침부터 정장을 차려 입으시고,
예배 전에 조금 일찍 교회에 나오셔서,
병사들에게 주보를 나눠 주시는 안내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사단장님의, 자신이 섬기는 사단 교회에 봉사하려는 마음과,
새파란 대위인 목사님을 목자로 경의를 표하시는 그 겸손함도 인상깊지만,
아무리 목사와 신도와의 관계라지만,
감히 별 두개를 단 까마득한 자신의 상관인 분께,
그러한 제안을 한 목사님 또한 대단하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제안을 들은 사단장님은,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즉시 눈치채고,
기쁘게 즉시 수락하셨답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과연 사단장님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마다 고개를 숙여 미소로 인사하며 주보를 나눠주셨고,
온 사단이 난리가 났다는군요.
그 뒤로, 사단 교회는 병사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데 말이죠.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어느 사단이었는데, 새로 군종참모로 대위 계급의 목사님이 부임을 했더랩니다.
신실한 개신교인이었던 사단장님이, 긴히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군 계급을 떠나서, 목사님께 이렇게 청하셨다는군요.
"목사님, 제가 우리 사단 교회를 위해 봉사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에 목사님께서,
"사단장님, 그러시다면, 다음 주일 아침부터 정장을 차려 입으시고,
예배 전에 조금 일찍 교회에 나오셔서,
병사들에게 주보를 나눠 주시는 안내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사단장님의, 자신이 섬기는 사단 교회에 봉사하려는 마음과,
새파란 대위인 목사님을 목자로 경의를 표하시는 그 겸손함도 인상깊지만,
아무리 목사와 신도와의 관계라지만,
감히 별 두개를 단 까마득한 자신의 상관인 분께,
그러한 제안을 한 목사님 또한 대단하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제안을 들은 사단장님은,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즉시 눈치채고,
기쁘게 즉시 수락하셨답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과연 사단장님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마다 고개를 숙여 미소로 인사하며 주보를 나눠주셨고,
온 사단이 난리가 났다는군요.
그 뒤로, 사단 교회는 병사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데 말이죠.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2007.02.12 18:45:18

ㅎㅎ
그래도 그 사단장은 열린 마음이라도 갖고 계셨네요.
저와는 좀 사정이 다르군요.
제 군종목사 시절..
억지로 병사들을 부대로 끌고오는 집사 여단장에게 찾아가
제발 어거지로 병사들 끌고 오지 말고
여단장님이나 집사로서의 모범을 보이라는 투의 언질을 주니까
곧바로 다른 부대로 저를 보내버리더군요..
덕분에 제 말년은 정말 편해지더군요.
거진 문제 목사로 찍히며 저 인간에게 잘못걸리면 같이 전역, 혹은 퇴역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인지
거진 방외자로 저를 냅둬 버리더군요.
물론 그때 보여준 동료 군목들의 모습도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후에 그 부대 출신 청년을 만났는데
저는 그 부대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하더군요.
'여단장에게 개긴 간 큰 목사'라고요..
전 정말 개기긴 커녕 사근사근 조용조용 목사로서 해줄 말은 해준 것 뿐인데..
그래도 그 사단장은 열린 마음이라도 갖고 계셨네요.
저와는 좀 사정이 다르군요.
제 군종목사 시절..
억지로 병사들을 부대로 끌고오는 집사 여단장에게 찾아가
제발 어거지로 병사들 끌고 오지 말고
여단장님이나 집사로서의 모범을 보이라는 투의 언질을 주니까
곧바로 다른 부대로 저를 보내버리더군요..
덕분에 제 말년은 정말 편해지더군요.
거진 문제 목사로 찍히며 저 인간에게 잘못걸리면 같이 전역, 혹은 퇴역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인지
거진 방외자로 저를 냅둬 버리더군요.
물론 그때 보여준 동료 군목들의 모습도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후에 그 부대 출신 청년을 만났는데
저는 그 부대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하더군요.
'여단장에게 개긴 간 큰 목사'라고요..
전 정말 개기긴 커녕 사근사근 조용조용 목사로서 해줄 말은 해준 것 뿐인데..
2007.02.12 19:53:47
내용이 이상하게 군대 이야기로 흘러갑니다만. 저도 군대 시절 이야기 하나.
이길용 목사님과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72년. 2학년 초에 입대하여 자대 배치된 곳이 영천 육군3사관학교.
저는 이등병. 학교장은 황모 소장. 부인이 엄청 신앙이 깊은...
장병들과 장교 부인들로 구성된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한 충성대교회.
주일이면 신사복 차림으로 교회에 와서 계급 상관없이 봉사하던 별 둘짜리 교장.
학교장의 열심이 넘쳐서 주일 오후에는 나환자교회인 오수동교회로 지휘하러 다니던 시절.
1년쯤 지내다가 1군단으로 옮기면서 저는 육군합창단으로 가서 육본에서 제대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교 부인들이 이등병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며 찬양연습 하던 믿음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신앙도 변하나 보다. 그 아름답던 시절은 지나고
세상보다 더 생존경쟁이 치열한 예배당 생활을 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높힘'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고...
더 높이, 더 넓게, 더 많이, 더 길게...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이길용 목사님과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72년. 2학년 초에 입대하여 자대 배치된 곳이 영천 육군3사관학교.
저는 이등병. 학교장은 황모 소장. 부인이 엄청 신앙이 깊은...
장병들과 장교 부인들로 구성된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한 충성대교회.
주일이면 신사복 차림으로 교회에 와서 계급 상관없이 봉사하던 별 둘짜리 교장.
학교장의 열심이 넘쳐서 주일 오후에는 나환자교회인 오수동교회로 지휘하러 다니던 시절.
1년쯤 지내다가 1군단으로 옮기면서 저는 육군합창단으로 가서 육본에서 제대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교 부인들이 이등병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며 찬양연습 하던 믿음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신앙도 변하나 보다. 그 아름답던 시절은 지나고
세상보다 더 생존경쟁이 치열한 예배당 생활을 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높힘'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고...
더 높이, 더 넓게, 더 많이, 더 길게... 더 더 더 더 더 더 더 더
2007.02.14 01:24:02
이길용 박사님이 군인교회에서 군종목사로 목회하던 시절의 군대이야기하니까 제 군대생활이 생각납니다. 제가 군복무한 부대는 지휘관들이 모두 그리스도교인들이어서, 연대장님과 대대장님은 개신교 신자, 사단장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이분들중에서 제가 존경하던 대대장님은 진보적인 그리스도교인답게 신앙생활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연대장님은 보수적인 분이어서 걸핏하면 신앙을 강요하고는 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강요식 전도에 반대해오던 저로서는 불만이 속으로 매우 컸습니다. 결국, 직선적이고 엉뚱한 제 성격상, 그분에게 한 말씀 올렸고, 덕분에 연대장이 제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 사병가 되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제대한지 7년이나 된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불만을 가져야 했던 것은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연대장의 너무 지나친 열성이 아닌, 열악한 군대교회환경이어야 했습니다. 이길용 박사님과 신완식 목사님은 잘 아시겠지만, 현재 군대교회는 성직자가 너무 부족하다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찬미예수 500이나 1000으로 그것도 모자라서 여러 사람이 한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문제는 비교가 될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어느 대대급 부대는 군종 목사가 없어서 연대의 군종장교가 돌아다니면서 목회했고, 제가 복무한 대대는 군종사제가 없어, 가톨릭 군종이 내무반에서 간단한 집회를 가지는 것으로 미사를 대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제대한지 7년이나 된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불만을 가져야 했던 것은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연대장의 너무 지나친 열성이 아닌, 열악한 군대교회환경이어야 했습니다. 이길용 박사님과 신완식 목사님은 잘 아시겠지만, 현재 군대교회는 성직자가 너무 부족하다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찬미예수 500이나 1000으로 그것도 모자라서 여러 사람이 한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문제는 비교가 될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어느 대대급 부대는 군종 목사가 없어서 연대의 군종장교가 돌아다니면서 목회했고, 제가 복무한 대대는 군종사제가 없어, 가톨릭 군종이 내무반에서 간단한 집회를 가지는 것으로 미사를 대신하였습니다.
2007.02.14 14:35:03

글쎄요.. 이런 말씀드리면 어찌 생각하실른지 모르겠지만..
전 교직자들이 구태여 군복을 입고 군대의 편제 하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부대 인근의 종교시설을 이용하거나, 근방의 교역자들을 부대로 초청하면 되지 않나요?
물론 이런 이야기 했다가 선배 군목들에게 엄청 욕을 얻어먹었기는 했지만..
'신앙전력화'
항상 군종장교들에게 요구되는 구호인데.. 저는 저 구호가 도시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가 교육하는 신앙이 타인의 생을 마감시키는데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고 생각하니
무척 끔찍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에 군종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전 교직자들이 구태여 군복을 입고 군대의 편제 하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부대 인근의 종교시설을 이용하거나, 근방의 교역자들을 부대로 초청하면 되지 않나요?
물론 이런 이야기 했다가 선배 군목들에게 엄청 욕을 얻어먹었기는 했지만..
'신앙전력화'
항상 군종장교들에게 요구되는 구호인데.. 저는 저 구호가 도시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가 교육하는 신앙이 타인의 생을 마감시키는데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고 생각하니
무척 끔찍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에 군종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비안들의 활발한 논의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