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한 것 기억납니까?
다 잊더라도 한가지는 잊지 말도록
따라합시다.
"내 육체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경험을 만끽하자."
그래요. 육체가 있을 때만이 고난을 이해할 수 있고
고난에 참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죽을 수 있고 부활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있을 때 죄의 종에게 복종시키지 말고
제대로 사용해 봅시다.
이건 세상 철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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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8.  23


솔로몬 왕 시대에 성전을 짓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솔로몬 아들인 르호보암에게 좀 살려달라고 말했다.
왕의 부친은 노역도 심했고 세금도 무거워서 너무 힘드니 좀 줄여 달다고 했다. 그렇게만 해 주면 왕을 섬기겠다고 했는데 르호보암은 정 반대로 나갔다.
르호보암왕은 부친 솔로몬왕을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은 듣지 않고 ,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꼬맹이들의 말을 들었다. 386보다 못한 애들 말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의 부친이 너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다고 불평이니.....그렇다면 나는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나의 부친은 채찍이었으나 나는 전갈로 다스리겠다”고 말하니
백성들이 열 받았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상관없다” 하면서 왕을 떠나갔다.
르호보암 왕이 설마하여 작업 감독 아도람을 보냈지만 돌로 쳐 죽였으니까 백성들이 얼마나 부친 때부터 고생했으며 또 르호보암으로 부터 실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10지파와 두 지파로 분리된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 전을 짓는데 너무 지친 나머지, 유다지파와 벤냐민 지파를 제외한 다른 10지파는 전을 짓는데 반대를 했다.
그래서 10지파는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가져갔고, 벧엘에서 단을 쌓았다.
이들은 숫자가 많으니까,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가져갔고,
나머지는 유다와 벤냐민 둘인데 그 중에서 유다가 숫적으로 절대적이니까, 유다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유다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여 머물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북쪽에 있고, 유다는 남쪽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북방 왕이 되었고,
       유대왕은 남방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갈라졌다.
북쪽의 열 지파 이스라엘은 성전 짓는데 너무 힘드니까, 더 증축, 완공을 반대하는 것이고,
남쪽의 두 지파 유다는 끝까지 완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반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꼭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든지, 진실한 곳에 계신다.’
‘그래서 산에서도 진실하게 예배하면 된다.’하는 것이고,
유다는, ‘아니다. 하나님은 신령하시다. 그런데 성전만 신령하다. 성전만 신령하니까 예루살렘에 있다.’
그래서 남방만을 고집한 것이다.
이렇게 북방 왕과 남방 왕이 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북방에서도 나왔고 남방에서도 나왔다.
선지자는 어느 한쪽 편만을 드는 것이 아니다.
남방에서 출현한 선지자는 남방 왕을 책망하면서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북방에서 출현한 선지자는 북방 왕을 책망하면서 남방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계속하여 회개하고 화해하기를 말했다.




예를 들면,
호세아 선지자가 외친 것은, ‘자기 아내가 가출하여 창녀가 되었다.’
그래 아내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 할테니 돌아오라’ 했는데,
이는 북방 왕을 창녀로 취급한 말이다.
두로왕과 화친한 북방왕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나?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루살렘 성전 짓는 감독을 죽이고 떠났던 것이다.
벧엘에 도착한 이들은 돈이 없다.
이스라엘 나라를 운영 할려니까, 민족의 제단을 쌓긴 해야 하겠고, 돈은 없고.




그러니까, 두로왕으로부터 차관(정부에서 쓰는 빚)을 내어 썼다.
그리고 도로 왕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두로왕의 딸 이세벨을 데리고 온 것이다.
이세벨이 올 때, 두로왕이 섬기던 우상을 가지고 왔다.(왕상16:29-33)
그 우상이 바알신과 아세라신이다.
바알신은 남신, 아세라신은 여신이다.
즉 성적인 신이다. 곧, 음란신이다.
이세벨이 이 신들을 이스라엘에 퍼뜨리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바알신과 아세라 신에게 완전히 취해버렸다.




그래,
호세아가 말한 것은, 너희가 음녀에게 완전히 취해 버렸다는 것이다.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지칭한 것은 북방 왕을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음란 신에게 가서 경배하게끔 화친한 일을 책망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여인 이세벨에게 가서 취해버린 일을 호세아는 자기 가정을 비유로 들어서 친 것이다.


예레미야서에도 보면,
“네가 보이느냐?”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북방에서 가마가 남방으로 기울어졌나이다”
“이것은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렘 1:13)했다.
이 말은 북방 이스라엘이 남방 유대나라를 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거에 어떤 사람은 북한이 남한을 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과 유대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약250년 가까이 갔다.
한쪽으로는 230여년 같기도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270몇년인가 갔으니 평균 따지면 250여년 갔는데
이 전쟁을 북방 왕이 나오고
          남방 왕이 나오니까
이북하고 이남을 말하는 줄 알고 남과 북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건 순 엉터리다.
우리가 구약 예언서나, 선지서를 취급하게 되면 정치적인 발언들이 나오게 되고, 정치적인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갈라졌기 때문에 자기네들 문제에 대해서 서로 왕래하면서 치는 것이지, 지금시대를 향해서 치는 것, 남북한을 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뭐라 말씀하시나?
사마리아 여인 말이, ‘당신들(남유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북이스라엘)의 말은 이 산에 있다 합디다.’
그 때, 예수께서 뭐라 말씀하시는가?
‘이 산(북)도 아니고, 예루살렘(남)도 아니다.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너희 조상들은 진정이 있어야 한다 하고, 유대인들은 신령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바로 이때다.’(요4:23,23)고 말씀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진리를 진심으로 찾은 것도 잘한 것이고,
        유대사람들이 신령한 예루살렘을 찾은 것도 잘한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것과 진정한 것이 함께 할 때가 바로 이때다” 하고 예수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예수 자신은 신령한 것과 진리가 함께한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신령하신 자요, 진리이시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분이다.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에 가서 진리를 사모하고 오직 진리만 있으면 된다.
하고는 건물을 생각지 않았고,
유대 사람들은,‘아니다. 예배는 성전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랬지만 유다가 구한 것도 예수이니 나를 구한 것이고, 이스라엘에서 구한 것도 나를
구한 것이다.는 뜻에서 이야기 하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이들(이스라엘과 유대)의 갈라진 것을 해결하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갈라진 것이 드디어 해결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오기 전에
이스라엘나라와 유대나라에 종말이 온 것은,
이스라엘은 주전722년에 앗수르의 사르곤에게 함락되었고,
유대는 - 주587 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이주시켰다.(마1:11)
바벨론은 그 후에 페르샤(성경에는 바사)에게 멸망 당했다.
바벨론과 페르샤의 전쟁은 지금도 이란과 이락의 전쟁으로서, 지금껏 계속되는 전쟁
이다.




유대를 바벨론이 먼저 먹었는데, 그 다음에 바사가 먹었다.
바사(페르샤)왕이 옛날 70년 전의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 사람들에게
특사를 내렸으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었다.
포로되었던 유대사람들은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학사들이 생겨났다. 왜 학사가 생겨났는가 하면, 우리가 왜 망했는지 조사해 보자. 하는 것이다.
택한 선민이 왜 이렇게 복잡하게 고난당하게 되었던가? 그 원인을 조사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학사 운동이 일어나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
제들을 지적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다.
무슨 범죄냐? 율법을 범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킨다면 우리의 이런 저주는 면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저주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솔로몬 그 이전까지만 있었지, 그 아들대 이후부터는 계속되는 분란이었다.
이렇게 불행해졌기 때문에 솔로몬의 영광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솔로몬의 영광이란 말은,
         솔로몬의 영광은 자기 혼자만으로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꽃은 수천 년이 지나가도 그 꽃은 다시 유지가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솔로몬의 그 영광이 다시 유지되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었다.
다윗이 나라를 세운 이후에 솔로몬 때에 한번 영광을 보고서는 계속 불행하다.
전쟁으로 계속 불행이었다. 얼마나 불행한지 아시는가?
남방왕, 북방왕.
마침내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끝이 났다.
바벨론에서부터 파사에 이르러서 거기서 해방되어 귀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는데
거기서 의견이 생기기를 우리 민족에게 왜 이런 저주가 왔느냐? 하는 거다.
수백 년의 영광은 다 사라지고, 70년 간의 순전히 고난만 있는 세월,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한 세월이 왜 오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혹을 역사하신 것이다 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십일조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혹으로 역사하신 것이다고 (사66:3-4)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또, 아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또 한편에서는 아니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긴이 계속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아니다. 이방인의 피를 섞었기 때문이다.(혼혈)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이런 것을 다 버리자.




그래서 --- 에스라는 귀국해서 성전건축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내용이고,
           느헤미야는 회개운동인데, 그의 회개 운동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호를 지키고,
                      우상을 버리고,
                      이방인과 피를 섞지 말자! 하는 회개운동이었다.




느헤미야가 페르샤에서 돌아온 다음에 원인 분석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분석해 내어서 지키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저주가 온다 이거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살만하니까 대뜸 누가 들이 닥치는고 하니 그리스의 알렉산더였다.
이때는 나라가 이미 없어진 다음이었다.
알렉산더가 들어옴으로 해서 예루살렘은 다시 수난을 겪게 된다.
알렉산더는 땅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문화로 천하를 통일한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점령지 왕을 뺏는 것이 아니라, 왕은 그 나라 왕에게 도로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이스 문화를 받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는 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철학이 땅에서는 훌륭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볼 것 없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 왕을 회피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살고 싶은 것이지, 지금까지 실패하여 저주 속에서 사는 것도 통탄스러운데, 이제부터라도 영적으로 더욱 철저히 살아야 하겠다 하는 것이다.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드리고,
성호를 찬양하고
우상 멀리하고
피를 섞지 말아야 하겠다 하는 것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개 운동이었는데,
갑자기 알렉산더가 들이 닥쳐와서 그리스 문화, 즉 헬라 문화를 집어넣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되는 이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면서 생각하는 거다.
겨우 페르샤에서 해방되었는데 왜 또 그리스에서 점령하는가?
이런 내용들은
신약과 구약의 중간사에 속하는 내용이다. 400여 년 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왜 저주가 또 생겨나는가?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해가 떨어지기 직전, 1초 전에라도 누가 안식일을 범했을는지 모른다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제는 아예 해가 한발쯤 남았을 때부터 안식일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특별히 조심하는데,
안식일에는 보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
1950미터 이상 보행하면 안되고,
겨드랑 밑에 땀이 나면 안된다.
그러나,  해가 한발이나 남았을 때부터 안식일을 지켜도 저주가 오니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해도 저주가 오는 것 보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가 또 안식일을 범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해서
한나절부터 지키기 시작한다.
한나절부터 지키려니까, 또 땀도 안 나도록 지켜야 하니까,  의욕 없는 모습이 된다.




알렉산더 아들이 왕이 되어서 보니까,
그리스 문화는 패기가 넘치는데..... 신앙 없이 오직 철학만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니까, 패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니까, 행동에는 의욕이 없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복주소서 한다.
철학은 ‘뭣인가 비젼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철학을 가지고 행동하니까 패기가 넘친다.
그런데 그리스 왕이 보니까, 안식일 지킨답시고 전날 대낮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이런 패기 없는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만약 저런 식이라면, 이 땅은 농사나 일도 못하게 되고, 저 사상이 지구상에 오염되면 지구상에는 전부 게으름뱅이만 있겠다 해서 ‘일하라’하고 쫒아 다니면서 흩트려 놓았다.




그러나  일하면 안식일 범하는 것이니까, 그리스 사람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갔다.
산에 가서 안식일을 지키게 된다.
산에가서 움직이지도 않고 안식일을 지킨다. 복 받을 줄 알고......
왕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이렇게 하는 것 볼 때 고약하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강압정책을 썼다.
방법은 ‘안식일 지킨다는 놈들은 전부 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굴속에 숨어 버린다.
안식일 지킨다고 이 모양이니 군대를 풀어서 안식일 지키는 사람을 찾는거다.
군인들은 말 타고 다니면서 이스라엘을 쫒아가고
이스라엘은 안식일 지키려고 땀 안 흘리면서 천천히 걸어서 피하고...
그러다가 1950미터 이내에서 멈추어 버린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100% 죽어가기 시작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율법 때문에 최고의 순교자 숫자를 기록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 헬라시대에 제일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막가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막가비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은 순전히 헬라왕 이때였다.
200년간 이 일이 계속 되었다.
그때, 로마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문제는 달라졌다.
로마는 그리스 처럼 신사적이 되지 못하였다.
로마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그러니까, ,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시 분석하자!”
너무 폭력으로 나오면서 죽여대니까 어찌할 수가 없다.
그들 중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자 해서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운동이 일어나서
                                               서기관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서기관이란, 글 쓰는 사람을 말한다.
서기관은 글을 읽고 쓰고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서기관들의 권위를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해석하는 것으로 인정들을 했다.
그런가하면 이 때 바리새인들이 나왔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 운동을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끝까지 지키는 운동이다.
서기관들은 아주 가난한 서민층에서 나왔고,
바리새인은 중간층에서 나왔고,
사두개인은 상류층에서 나왔는데, - -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돈 많은 사람이 당시에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의 보호를 받았다.
로마의 보호를 받는 사두개인은 미래도 없고, 내세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지금 내가 잘살고, 지금 내가 편안하고, 지금 내가 피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다는 것이다.




이 사두개인은 천사를 인정치 않고, 영혼이나 천국등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당장에 환란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고, 천사도 없다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것은 엄청난 타락이다.
그런가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 - -
서기관들은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 - -
그래서 이 서기관과
          바리새 운동과
          사두개인이 있었던 것이다.
사두개인은 구제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받는 일이다.
           천국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오늘날도 돈 많은 사람은 내세에 대한 꿈이 없다.
이 땅에서 잘 살면 그게 복이라고 생각한다.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
영적인 요소가 없는 사람들이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에 이런 세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이런 운동이 없었는데, 이러한 운동 분위기로 바뀐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구약에 없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란 말이 신약에 갑자기 나타나는데, 이는 구약 마지막부터 신약이 시작되기까지의 400년기간, 중간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사두개인은 안일주의.... 내세도 없고, 천사도 없는 세상 사람이니까 취급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자주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너희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행위로 깨끗, 거룩할려고 했지만 영적인 요소가 없다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도 율법 자체가 너희를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이지만,
율법 자체가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부딪혔는데,
그때마다 서기관은 성경 해석으로 부딪혔고,
         바리새인 하고는 안식일 문제로 부딪혔다.




그래 예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뭐라 하는고 하니,
“저희 서기관과 바리새인 갖지 않고, 권세 있는 자와 같더라”고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권세 있는 자, 곧 신과 같다는 말이다.
또는 임금과 같다는 말이다.
서기관 같지 않고 임금 같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에서는 늘 서기관과 충돌되고
바리새인들과는 안식일 문제에서 충돌 되고 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가? 그것만 볼려고 몸부림쳤다.
이런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신구약 중간에 생겨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하나의 영원한 노력들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미워서 그렇게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너희를 해방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더욱 그렇게 하신 것이다.




솔로몬 때로부터 수가성 여인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 제사를 둘러싼 역사는 죽 --이렇게 내려 온 것이다.
예수께서 이제 뭐라 말씀하시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는 바로 이때 라는 것이다.
너희가 이제까지 노력하던 그 모든 노력이 바로 이때까지인데 이제 이때가 왔다.
즉 나는 진리요, 나는 신령한 자다 하는 뜻이다.
이로써 예수까지 구약성경은 끝난 것이다.




만약에 구약 선지서를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무슨 문제가 나오는고 하니,
선지서 가지고 정치하는데 다 쓰게 된다.
지금 한국에도 민족주의 주장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서는 예수만 나타내는 곳이지,
민족 사상을 전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 3.1 운동 때,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은 공헌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자체가 그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그 운동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그  독립운동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것뿐이고,
오늘날 정치를 하더라도 한국 사람이 한국 정치를 하는 것이고,
그 정치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있다는 것뿐이지,
기독교 자체가 정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경을 다룰 때에 헛된 방향에서 다루지 말고
바로 다루어야 한다.
원래 이스라엘이란 국호는 북쪽에서 가져갔다.
정치적 국호는 이스라엘이라 하고,
종교적 국호는 유다 - - 라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고
유다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유다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의 모친인 마리아는 벤냐민에게서 나왔다. 바울 선생도  베냐민 지파다.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
전부 아랫쪽 유대 땅에서만 나왔다.
북쪽에서는 안나왔다. 우상 섬기는 곳에서는 안나왔다.
정치적 국호를 가진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다.
이건 예언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지금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고는 무지무지하게 피흘리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전세계에 나가서 다-잘 산다.
돈 벌고 산다.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을 이스라엘 사람이라 말하지 않고 유대인이라 말한다.
그들은 다 돈 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가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
이것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예언과 똑같다.
이스라엘은 끝없이 상처를 받고, 끝없이 피흘리고,
유다는 끝없이 축복을 받고 있다.




신구약 중간이 이 400년간이다.
신구약 중간사를 모르면 예수님의 비유를 모른다.
예수님이 사용한 비유를 알면 성경에 대하여 뚫린다.
그런데 신구약 중간사를 모르면 예수님의 비유를 모른다.
지금 예수님의 비유를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중간사를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그 비유는 누구를 상대로 한 비유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사를 알아야 한다.




신구약 중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려고 몸부림친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운동이다.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의 주장이 그릇되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은 중간에 발생한 것이니까!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을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했던 자들인가? 를 생각해야 된다.
이들은 신구약 중간에 이스라엘을 구제할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오셔서 그들을 상대로 한 비유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할 때 제대로 배워야 한다.
민족사상을 말하면 교훈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흐름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것은 놓치고 말게 된다.
예수님의 흐름은 어떻게 되었나?
신구약 중간이 끝났지만,
마태복음 1장에는 끝나지 않았다.
마1장에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예수까지 계속하여,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고 있다!
즉,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는 것이다.
마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끝나지 않고 중간시대에도 족보가 계속되고 있다.
예수까지 와서 예수님의 족보는 끝이 났다.
그럼,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의 족보도 어떻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약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약이 400년간의 공백 기간이 있지만,
예수의 세계(족보)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도 있지만 이스마엘은 말고 이삭에게로,
이삭에서는, 장남에서 말고 야곱에게로,
야곱에서는, 르우벤 말고 유다에게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길이라는 것은, 계통을 따라 내려오되, 장남만을 따라 온 것 아니라 엉뚱하게, 생각도 않은 방향으로도 내려가고 있다.
세계(족보의 흐름)에서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왔다갔다 했다.
그럼, 왜 이렇게 되었나?
아브라함에서 두 아들이 있지만 하나는 육체를 따라 정욕을 따라 낳았고,
그러나, 다른 하나는 믿음을 따라 낳았고,
이삭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믿음을 따라 야곱에게로 갔고,
야곱에게서는 다른 아들들 말고 유다에게로 가서 흘러 갔고---
이전에 유다의 자부 다말의 믿음을 적어서 인터넷에 뿌렸는데 .... 유다가 창녀하고 어떻게 한 것만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말대꾸만 자꾸 했다.
답답한 일이다.
전부가 이렇게 거룩함을 따라서 그리로 흘러갔고, 혹은 순정을 따라 흘러갔고, 이렇게 믿음을 따라 흘러 갔다.
믿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을 따라 내려 갔다.
바톤을 받은 다음 세대도 다-믿음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믿음을 따라서만 내려갔다.


요1:13에 의하면, “예수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즉 믿음을 따라 난 자들이라 했다.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란 말은 믿음을 따라 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났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어냐? 믿음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났다. 즉 믿음으로 났다.
그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믿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아셔야 한다.
예수는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났다.  즉 믿음을 따라 났다는 것이다.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요,
         이삭이 믿음의 사람이요,
전부가 믿음으로만 이어진 것이다, 되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 전달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정치나 윤리를 아는 이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예수의 믿음을 전하는 곳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 가슴에 믿음이 있다 할때, 우리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믿음이 누구냐?
예수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믿음이다.
예수가 믿음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믿음을 좇아 났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뭘 믿느냐?
          믿음의 대상이 있다는 거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목적이다.
요5:39에,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역사, 흐름이 있는 것이다.
줄이 있다.
창세기부터 끝까지 흘러가는 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예수까지 와서 끝이 난다.
여러분들이 족보를 생각하면 된다.
많은 갈래길이 있지만 한줄기만 흘러가듯, 줄쳐가면서 내려가듯,
그래서 예수께로 마침내 와서 닿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잘못 전하게 되고 믿음을 주기는커녕 세상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
차라리 세상에 그대로 있다가 다음에라도 제대로 잘 믿게 되면 좋겠지만,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사람을 작품 다 꾸겨 놓습니다. 그러면 회복되기 어렵다.
사람은 한 번 작품 만들어지면 다시 재생 시키기란 너무 어렵다. 차라리 자연인으로 그냥 놔두었으면 또 기회가 주어질텐데, 들어오는 사람마다 다 조져 버리면 안된다.
지금 사람들이 왜 꾸겨졌나?
교회 들어 온 사람들에게 성경을 잘못 전해서 잔뜩 교만하게나 만들고, 돈 잘 벌은 사람이 믿음 좋은 것인양 뻥이나 치고, 하나님을 돈벌이나 출세하는데 심리적으로 이용하기나 하고 , 세상 사람들에게는 빛이 아니라 어두움으로 인식 되었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말하기를,    “네가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 너보다 더 지독한 지옥 자식을 만드는도다 ” 했지만,
구원하다가 여기(교회)에다가 앉혀놓고 지옥자식을 만드는 수도 있다구요!
아담부터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노아때 다 죽고, 노아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가!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또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를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이외의 다른 것, 다른 족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하는 것이다.
가인의 부인 이름 찾아내는 것이 유명한 것이 아니다.
쓸데없이 이스라엘 전쟁에도 몰두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성경을 배운다 해놓고,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것을 많이 배우면 소용없다는 말이다.


성경이 주려고하는 것은 무엇을 주려 한다고요?
예수를 주려고 한다는 것이란 말이요.
요5:에서 우리 주님의 탄식을 한번 보세요.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네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공동)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 생각지는 말라.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오히려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47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그러니까, 너희가 찾는 것은 무엇을 찾는 것이냐? 하는 말씀이시다.
          너희가 무얼 찾는 것이냐? 하는 거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아노라.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면서도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취하지 아니하니--- 요 1:14에 뭐라 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 있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보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 목적인데, 예나 지금이나 하늘로부터 오신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부터 온 영광을 구한다 이겁니다.
엉뚱한 것을 구한다 이겁니다.
사람으로부터 온 윤리나 철학이나 자신들의 고행이나 자신들의 구제에서 올 영광이나 찾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혈통이 직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오셨다.
차자로도 오시고, 네째아들을 통해서도 이어지고, 상관 없다.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혈통은 장자로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오셨다.
믿음으로 오셨다.




우리 주기도문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했는데,
무엇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이다?
=믿음=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구하시는 것은 믿음이라 이겁니다.
곧 예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니까, 곧,
하늘로부터 온 믿음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또는
그 믿음 안에 오는 예수가 우리 안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곧,
“믿음이 하늘에서 시작한 것 같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이다.
이를 믿음이라고 바꾸어서 복창해보자.
<믿음이 하늘에서 시작함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속에 하늘에서 온 믿음이 있느냐? 이겁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믿음으로 믿는 것이지, 우리 믿음으로 믿는 것 아닙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다.”고 말씀했지요!
그래, 예수를 아는 믿음은 하늘에서 온 믿음이지,
땅에서 온 믿음이 아닌 것이다.
혈과 육, 즉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뜻”, “믿음”, “예수” 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 복 창 : 하나님의 뜻, 믿음, 예수 >>


그렇습니다.
이를 제일 잘 표현한 곳이 요한복음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 합니다.
왜 공관복음이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생애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확인한 것을 그대로 기록하되, 가감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견을 첨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도 자기 의견을 첨부하지 않고,
마가도 자기 의견을 써넣지 않고,
누가도 자기 의견을 거기에 써넣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실만 기록했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넣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이니깐요.


다시 말하면 공관복음은 역사속에서 시작했지만,
            요한복음은 역사 이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시작했습니다.
태초부터 시작한다 이말입니다.
하늘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말입니다.
하늘에서부터!
그래서 공관복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인 복음이지요!


태초부터 계신이는 하나님이시요, 그가 말씀이신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오셨다. 그런데
그 말씀은 영광이신데,
예수를 보니 그 영광이 있고,
말씀은 빛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오신 빛이 곧 예수다.
빛 속에는 생명이 있다.
그래서 예수는 생명이 있다.
요한 복음이 바로 그것 아닌가!


요한 복음 1장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요,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다.
그래 예수가 곧 말씀이요 빛이요 생명이다 하고 설명한 것이 곧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뜻과 믿음과 예수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공관복음에서 다루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믿음과,
        예수!


하나님의 뜻을 순전히 다룬 것은 요한복음!
믿음을 순전히 다룬 것은 요한복음!
순전히 예수의 이름을 다룬 것은 요한복음!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의 이름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냥, ‘인자’를 다룹니다.
육체로 오신 인자의 그 역사적인 일만 다룹니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다룬다 이겁니다.
예수라는 이름!


요한복음은 예수의 이름을 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 자녀되는 귄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한다.
하나님 뜻으로 난 것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또 다룹니다. 그리고
순전히 믿음에 대해서 다룹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한복음 이해 하려면 요한복음의 원칙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구절 구절을 말하면서 구절에서 나오는 생각가지고 다루면 안됩니다.
그러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을 알면 이해하기가 쉽지요.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전부 다루기 위해서 역사적인 것을 말하고,
요한복음에는 역사 이전, 하늘에서부터 죽- 시작해서 이러한 계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믿음)과 (예수)는 하나입니다.




믿는 자는, 곧 나를 보고 믿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믿는 자는 내가 한 것을 그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것도 하리라.
믿는 자는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믿는 자는 내가 그 안에 있다.
믿는 자는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11:47)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3;18)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네게 대하여 기록하였음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11:26)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11:27)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12:36)
자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12:4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4:1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17:20)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하나님의 뜻으로 -원문대조: 데레마로스)난 자들이니라. (1: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4:34)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6:38)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6:39)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6:40)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7:17)




또 이름!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2)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23)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8)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5:43)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10:25)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2:13)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12:28)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15:16 14:14 14:13)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14:26)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16: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16:24)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16:2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17:6)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17:11,12)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17:2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 (20:31)


하나님의 뜻, 믿음, 예수 이름.
이것이 요한복음의 원 기둥입니다.
하늘에 있는 이가 믿음을 통해서 이 땅에 왔다. 이것이 하나예요.


예수님은 여기에 와 계시는데 구약에 가서 더듬고 있다는 것은 뭡니까?
버스 지난 다음에 손들기와 같다 이말입니다.
예수는 이미 여기 와 계신데 오기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뭐죠?
성경은 예수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흘러가다 흘러가다 또 돌고돌다가 예수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까!
아담부터 쭉-나오다가 노아때 사람들이 다 끝나고,
노아부터 쭉- 다시 시작하는거요.
그러니까, 노아보다 그 이전 이야기는 그만두자 이거요.
그래 노아부터 쭉-나가다가 아브라함으로, 그 다음에 이스라엘로,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이야기는 그만두자 이거요.
유다로 쭉- 내려오다가 마침내 예수!
이제는 예수 이야기만 하자는거요.
이제는 누가 예수를 잘 알게 하느냐?
성령이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이!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 이야기만 가지자 이거요.
성경은 예수 이야기만 하자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검부락지처럼 지저분-한 과거 이스라엘 이야기 다- 가지고 있고,
또 엉뚱한 이야기 다 가지고 있고, 시간 다 보내고 - 정신없는 일입니다.


내가 아까 역사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는 다 잊어버리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 다 검부락지라 하는 겁니다.
뭐하러 그것 자꾸 더듬는냐? 이거요.
이제는 “오직 예수만 있더라“입니다.
결론은 복음인데....
예수가 복음서에 있는데 왜 새삼스러이 구약에 가서 더듬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우리가 가르치고,
          우리가 배워야 하고,
          우리가 믿어야 하고,---
그것은 이 복음서 밖엔 없다구요.


그러니까,
여기서 진짜 진수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복음서)이 진수지요.
이 복음을 모르는 자는 이런 얘기해도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런일을 했는데, 아브라함의 처가집이 뭣하고---
만약에 그런식으로 한다면,
아브라함의 부인은 사라.
사라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의 동생이거든! 배만 다르지 친동생이거든요.
그래,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애굽왕에게, “내 동생이라” 했는데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만약 그것을 강조하게 되면- 거기를 꼭 붙들고 설교하게 되면 친동생하고도 결혼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요.
만약 창38장을 강조하게 되면 며누리하고도 애기 낳을 수 있다고요.
그 모두가 예수를 소망으로 한 내용인데 엉뚱한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지나가자 이거요. 지나가 버리자 이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오직 예수만 알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이 성경을 이해하기가 쉽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오직 성경을 말하되, 성경이 말하려하는 것은 예수를 말하려 하는 것이니까,
예수만 말하면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성령은 예수를 말할 때만 역사하심!
이건 진리입니다.
율법을 말할 때는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율법만 열심히 배워 보세요. 성령의 역사 없습니다.
예수를 말할 때만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옛날 율법을 말하고 있을때 언제 성령의 역사가 있습디까?
갈라디아서에도 말하고 있지요.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을 통해서 받았느냐?
믿고 은혜로 받은 것이냐? 믿음으로 받았느냐?


그러니까, 율법을 말할 때는 성령의 역사란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어요.
오직 예수를 말할 때만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
예수를 말할 때만!
예수께서도 자기를 감추고 있을 때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지만,
그가 하늘로 가신 다음엔, 그가 내 이름을 증거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나타내리라.
예수를 말하기 시작할 때! 그때야 비로소 성령께서는 역사 하시는 겁니다.


반드시 예수를 말할 때 만이 성령의 증거가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요 5:8-12)
곧, 물과 피로 임하신 자요.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다 (물,피,성령).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분위기가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고난을 받았다! 해서 우리가 눈물을 짜내고 있다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그냥 감동이죠.
이 피를 마셔라! 했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 물과 피를 말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벧전1:18-25까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이란 이것이란 말입니다.


요새 말하면 그저 복음인줄 알고, ‘받아라!’ ‘받아라!’하고 박수하고
‘쉭-’ ‘쉬-’ 하면 이것은 은사집회라 하고--- 이런 식이요.
박수 좀 하면 은사집회라 하고,
그저 말로 조용히 전하면 복음을 말한다고 그러고- 진리집회라 하고-
진리가 무언지도 모르고 진리집회라 해요.
그래, 말로 하면 진리집회, 박수 좀 하면 은사집회.---
우리는 분명히 압시다.
성령은 예수를 말할 때만 역사하신다는 점을.


<< 복 창 : 성령은 예수를 말할 때만 역사하신다.>>




예수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하겠어요?
       예수라는 이름에는 반드시 물과 피를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때만이 성령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를 모르니까 성령의 역사도 없는 겁니다.


성경을 살펴서 예수를 알면 성령께서도 역사 하십니다.


루터도 종교개혁할 때 뭐라 말했는고 하니, “성령은 성경을 수레 삼고 오신다.”
                                         “성령은 복음을 수레 삼고 오신다.” 했어요.
복음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복음이 있는 곳에 성령이 일하신다.


그러니까,
성령이 일하시게 하는 길은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곧 복음을 알아야 됩니다.
곧 피를 알고, 그의 살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증거하신다.는 겁니다.


또,
롬 8:16에 뭐라 말했어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신다.
양자의 영이란 것은 복음입니다.


즉 복음을 받았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절대 예수를 말하지 않고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거에요.
구약 어디서 잡아가지고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 되어야 한다.
   욥은 순진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순진해야 한다.
   욥은 거짓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한다면,
이것은 도덕 강의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서 조심해야 할것이 무어냐?
인물론을 조심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다윗은 예수의 모형이라고 하는 모형학!
이 쓸데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뭐라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이라 한다는 겁니다. 믿음 때문에!
누구는 믿음 때문에! 누구는 믿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겁니다. 예수!
아까, 믿음과 하나님의 뜻과 예수는 하나라고 했지요.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 모른다. 그저 믿씁-니다.”
그러나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늘로서 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죠.
하늘로부터 온 믿음만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자기 자아발생한 믿음! 즉 심령! 그리고 신념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앙모했느냐?
        하나님을 앙모, 그리스도를 앙모.
모세가 무엇을 앙모했느냐?
그리스도를 앙모한 것이다.
모세가 그리스도 위하여 자기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고난 받는 것을 애굽에 있는 재물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가,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백성과 고난을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이것(고난)을 애굽에 있는 재물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했듯이,
그들은 전부가 예수를 말하고, 예수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인물에 치중해서 성격을 말하고 배경이 어땠다, 가산이 어땠다, 그래서 사상을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고 말한다면,
이것은 누구 닮으라는 이야기지,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성경은 인물 사전이 아니거든! 성경은 인물 사전이 아니요.
오직 성경은 예수를 말하는 것이거든!
또,
모형학! 모형학이란게 있습니다.
인물론보다 조금 발전했지요, 발전해서 모형학이란게 있지요.
‘다윗은 예수의 모형이요’
‘다윗은 타락한 교역자의 모형이요’
이는 어느 주석가가 주석으로 해 놓은 것도 있더군요.
그래도 이분을 유명한 학자라고 해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걸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예수의 모형이요.’
‘솔로몬은 타락한 교역자의 모형이요’
모세는 예수의 모형이요.
모세는 타락한 - - -의 모형이요.
아니, 갑자기 모형이 몇가지나 되는가 이거요.
책을 냈는데 거기 그래 놓았어요. 다윗은 예수의 모형이요.
                                다윗은 승리한 교역자의 모형이요.




여러분!
다 윗 은 예수의 모형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요.
솔로몬은 예수의 모형이 아니라, 예수를 찾는 사람이고,
모 세 도 예수의 모형이 아니라, 예수를 찾는 사람입니다.


히 11:24,25,26에 말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예수를 찾는 사람이라고---.
아브라함은 뭣한 사람이라 했어요?
아브라함은 예수를 찾는 사람이라고 요 8:56에 말하지 않았어요!
예수를 찾는 사람이라고!
이미 예수를 찾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도 엉뚱하게 ‘예--수의 모형이요!’
이 모형학 좋아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인물론)보다 한술 더 뜨는 것입니다.
인물론은 차라리  교양강좌는 될 수 있겠으나,
모형학은 더 더 엉터리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청년들도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따라 살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