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다비아를 보수로 규정할 만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역동성과 민주주의와 개방을 미덕으로 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항상적으로 진보의 내용을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보수가 단순히 폐쇄와 독단과 침묵의 정숙함으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과 상대적으로 등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에 다비아에서 느껴지는 반론의 부족 등이 역동성의 범주에 대한 이야기로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나 진보의 프레임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려는 것은 그리 타당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비아에 글을 싣고 있는 필진들의 글을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만 그것조차 쉬운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이루어진 좌익과 우익의 문제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진보의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으로 규정했던 고전적 구분방법은 사회주의의 몰락 등으로 그 의미의 힘을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구분이 최근 진보와 보수의 딱지를 붙이는데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든 현실적으로 항상 변화하는 그 구분의 선상에서 명확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데에서 발생하곤 합니다.
또한 그 선을 적용하고자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세 카톨릭적 오류에서 이러한 문제의 우려는 가중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좌익이니 진보주의자니 하고 몰아붙이는 것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나아가 사회당 등 좀 더 좌측에 있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어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구분의 선을 그어놓고 다비아나 정용섭목사님을 단정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무력해 지기는 했지만 고전적으로 명확히 학문적이고 역사적으로 그어진 진보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그 현실적 가변성으로 인해 무의미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그러한 혼란과 아니면 자신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 주관적으로 놓여지는 이러한 틀은  세상의 발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평가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잣대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즉 자신이 가지는 이러 이러한 평가의 기준에서 어떻게 벗아나 있음을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좀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세상을 존속.유지.발전 시키고자 하는 것이 진보의 출발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출발선의 기준만으로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모두 무마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고전적 구분의 틀을 잣대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세밀한 눈금이 그어진 잣대를 아직까지는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고는 있는데 눈금이 희미하게 그어진 자라고나 할까 뭐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눈금은 하나하나 채워나가면 될 것이기도합니다.
이것은 저의 고민의 화두이기도 하며 삶의 과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비아의 역동성 부족에 대한 느낌은 괴리와 아쉬움 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목사님과 그 외 필진들의 글들은 매우 학문적이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글과 문장의 빈약함과 짧음이 아쉬움을 남김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조차 양으로 모아진다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상대적으로 고민과 노력과 공부가 부족한 글들이 많은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글들에 필적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모이기에 의미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세월은 짧았던 글들을 길게 만들어 줄 것이며 지식에 대한 투자는 빈약해던 문장을 풍부하게 해줄 것입니다.
다비아 초기의 반발세력들(?)은 떨어져 나가고 목사님의 입장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이 남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조직에서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몇 개의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혼재되고 타협되어 있는 저의 기준에서 정목사님의 글은 현실에 대하여 충실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충분히 진취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목사님의 세밀한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할 준비가 시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글들을 꼼꼼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랜만에 들려서 글을 남기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사님 생각은 아주 자주 하고있습니다.
정용섭목사님, 김종두 목사님 저와 인연을 가져던 귀한 분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하지 못하는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의 원죄(?)의 굴레로 인하여 의미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해 이제 초탈해 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타협의 이유가 그야말로 핑계이기도 합니다만 원죄의 한계는 너무나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초탈했다고 위로삼으로 그 타협과 한계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주들러서 이야기도하고 듣기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염병이 우려되는 이 때 다비아의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