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6
(한국의)교회가 예수 이외의 요소들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신학을 공부하고 하바드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는 도올 김용옥씨도 역시
"(지금의) 한국 교회들이 사도 바울(혹은 그의 경험 ; 체험)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 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에서 물질이 풍부해지고 삶의 비중이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실은 지금의 "교육"도 경제
적 삶의 측면에 부수되는 개념의 것일 뿐이다)으로 쏠리게 되면서,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정신에 절박감과
순수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그에 따라서 이처럼 진행되어온 현상인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적 그 때는 교회에서 '예수의 피'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주로 많이 언급했으며,
사도바울에 관해서는 그다지 자주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와 함께 구원에 관한 문제인 천당과 지옥을 참
많이도 언급했었다. 그때는 분명히 그랬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제는 전반적으로 '예수의 피'의 언급은 거의 사라져버렸거나 아주 생소
하게 들리는 분위기이고, 천당과 지옥에 관한 얘기는 이미 구시대의 설화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그 대신
에 사도바울이 주로 조명되거나 혹은 '제사와 축복'에 관한 분위기가 강한 구약적인 테마에 주로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성서의 모든 장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라고 언급한 워치만 니의 관점처럼,
구약과 신약이 절대로 별개의 것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어떻든 현실적으로는 본래의 뜻에 반하여 그런 식
으로 편협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즉 강단의 설교자가 필요한 부분만 적출해서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
고 있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설교자들이 사도바울을 언급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아마도, 목사님들이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이 실은 예수이기보다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교자인 바울이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대체로 구약(혹은 유대교)적인 모습으로 비쳐지는 축복에 관한 문제는, 물질을 삶의 문제 비중에서 제
일로 다루게 되는 요즘 시대, 보다 대중 선호적인 의제 혹은 그러한 테마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하기야 지금 그렇게 딱딱한 원론적인 설교를 일삼다가는 재미없다고 교인 다 떠날지도 모를
일이니 이 땅에 그렇게 용감 무식한 목사님이 어디 계실지 ...)
워치만 니는 이러한 양상을 가리켜서 "유대교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바 있는데, 매우 적절하고도 의미 심장
한 지적의 말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하나님 = 예수님' 이라는 교리상의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은 우리의 눈에는 늘상
그리스도 예수 : 예수님의 모습 - 그분의 말씀하시는 모습, 말씀을 선포하고 병든자를 돌보시기 위해 여러
지역들을 열심히 순회하고 계시는 광경, 가련하고 애처로운 민중들로 인해 안타까워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모습, 육신의 피로로 인하여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는 그분의 모습, 그분의 영적인 의지와 그에 따라 나타나
는 그분의 표정들, 절망감이 엄습할 때의 그분의 수용자세,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모습, 그리고 그분의 마지
막 십자가 상의 모습,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 말이다 - 이 이미지 업되어 우리의 뇌리와 눈에 떠오
르는게 정상이고 또한 그것이 지금 이시대 우리의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런지를 생각해 본다. 또한,
바로 그것(그러한 모습)에 관해서 조명하고, 말하고, 듣고, 또한 그분을 흠모하고 숭배하는 바로 그것이,
유대교도 혹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기독교(그리스도교)가 아닐런지. 이러한 개념은 꽤나 차원높은 신앙
사유 소재의 하나에 해당할 것이다.
'"거룩"은 다름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라고 정의한 워치만 니의 견해는 참으로 놀라운
영적 지각이며, 온전하여 한치의 오류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관점은 신학을 공부하고 하바드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는 도올 김용옥씨도 역시
"(지금의) 한국 교회들이 사도 바울(혹은 그의 경험 ; 체험)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 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에서 물질이 풍부해지고 삶의 비중이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실은 지금의 "교육"도 경제
적 삶의 측면에 부수되는 개념의 것일 뿐이다)으로 쏠리게 되면서,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정신에 절박감과
순수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그에 따라서 이처럼 진행되어온 현상인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적 그 때는 교회에서 '예수의 피'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주로 많이 언급했으며,
사도바울에 관해서는 그다지 자주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와 함께 구원에 관한 문제인 천당과 지옥을 참
많이도 언급했었다. 그때는 분명히 그랬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제는 전반적으로 '예수의 피'의 언급은 거의 사라져버렸거나 아주 생소
하게 들리는 분위기이고, 천당과 지옥에 관한 얘기는 이미 구시대의 설화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그 대신
에 사도바울이 주로 조명되거나 혹은 '제사와 축복'에 관한 분위기가 강한 구약적인 테마에 주로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성서의 모든 장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라고 언급한 워치만 니의 관점처럼,
구약과 신약이 절대로 별개의 것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어떻든 현실적으로는 본래의 뜻에 반하여 그런 식
으로 편협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즉 강단의 설교자가 필요한 부분만 적출해서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
고 있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설교자들이 사도바울을 언급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아마도, 목사님들이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이 실은 예수이기보다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교자인 바울이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대체로 구약(혹은 유대교)적인 모습으로 비쳐지는 축복에 관한 문제는, 물질을 삶의 문제 비중에서 제
일로 다루게 되는 요즘 시대, 보다 대중 선호적인 의제 혹은 그러한 테마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
되기도 한다. (하기야 지금 그렇게 딱딱한 원론적인 설교를 일삼다가는 재미없다고 교인 다 떠날지도 모를
일이니 이 땅에 그렇게 용감 무식한 목사님이 어디 계실지 ...)
워치만 니는 이러한 양상을 가리켜서 "유대교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바 있는데, 매우 적절하고도 의미 심장
한 지적의 말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하나님 = 예수님' 이라는 교리상의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은 우리의 눈에는 늘상
그리스도 예수 : 예수님의 모습 - 그분의 말씀하시는 모습, 말씀을 선포하고 병든자를 돌보시기 위해 여러
지역들을 열심히 순회하고 계시는 광경, 가련하고 애처로운 민중들로 인해 안타까워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모습, 육신의 피로로 인하여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는 그분의 모습, 그분의 영적인 의지와 그에 따라 나타나
는 그분의 표정들, 절망감이 엄습할 때의 그분의 수용자세,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모습, 그리고 그분의 마지
막 십자가 상의 모습,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 말이다 - 이 이미지 업되어 우리의 뇌리와 눈에 떠오
르는게 정상이고 또한 그것이 지금 이시대 우리의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런지를 생각해 본다. 또한,
바로 그것(그러한 모습)에 관해서 조명하고, 말하고, 듣고, 또한 그분을 흠모하고 숭배하는 바로 그것이,
유대교도 혹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기독교(그리스도교)가 아닐런지. 이러한 개념은 꽤나 차원높은 신앙
사유 소재의 하나에 해당할 것이다.
'"거룩"은 다름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라고 정의한 워치만 니의 견해는 참으로 놀라운
영적 지각이며, 온전하여 한치의 오류도 없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2009.12.07 20:24:34
흔한 말로 <삼위일체론>을 많이들 들먹이는데, 그게 도대체 뭘까요?
성경에는 "무슨 무슨 논"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셋도 아닌 게 삼위일체론적인 원리 아닙니까?
그걸 다른 사람이 설명(이해 강요)해서 고개를 끄떡거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모르는 건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삼위일체론>은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설"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초등(애들말로 '초딩')이던 시절에는 그것으로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은 했었지요.
무슨 무슨 논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고, 그냥 쉬운 말로 "다 같은 분이시다. 일단 그렇게 이해 해두면 좋다"
초신자에게 그 정도로 얘기하고 지나가는 게 차라리 훨씬 솔직한 말이요 효과적일 겁니다.
나는 그러한 "논"들이 절대로 절대적인 것일 수 없으며, 단지 영성이 부족한 수많은 사람들(불특정
대중)에게 보다 보편타당성있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어떤 방편에 불과한 것이며,
절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못된다고 봅니다(삼위일체론의 문자적 한계성을 절감합니다).
실은 제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교리들이 대부분은 성직자군이 아니면 성경을 볼 수 없도록
엄격히 금했던(참으로 가당치 않은 일이지요) 로마 교회에서, 개개인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그 대신에 어떤 주입식 신앙강요를 위해서 만든 것이지요.
주님에 대해서 그러한 도식을 써서는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없다 라는 게 그러한 논리<교리>들의
큰 문제점이지요. 요한 사도가 어떠한 추가적인 것도 덧붙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事後적인(즉 성경 기록을 완성한 이후에 만든) 교리들도 어찌보면 요한의 경고의 말을 위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어떠한 종류의 "논"을 들이대더라도 그것에서 주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논"자체가 모순에 모순을 낳고 결국은 심한 도그마에 빠지게 만들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실은, 나도 신학을 좋아하던 (그저 괜히 동경하던) 사람이지만, 신학은 그저 고상한 학문분야의 하나
일 뿐일 것입니다. 신학이 도구이어야지 목적으로 되어서는, 주객전도가 생길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음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고(만약 베토벤이 지금처럼 음대에서 공부했다면 어떤 한계성에
스스로 도착되어 그렇게 훌륭한 음악을 절대로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호는 미대
출신이 아니며, 베드로나 요한은 체계적인 학문을 접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지요.
성경에는 "무슨 무슨 논"이라는 것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셋도 아닌 게 삼위일체론적인 원리 아닙니까?
그걸 다른 사람이 설명(이해 강요)해서 고개를 끄떡거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모르는 건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삼위일체론>은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설"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초등(애들말로 '초딩')이던 시절에는 그것으로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은 했었지요.
무슨 무슨 논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고, 그냥 쉬운 말로 "다 같은 분이시다. 일단 그렇게 이해 해두면 좋다"
초신자에게 그 정도로 얘기하고 지나가는 게 차라리 훨씬 솔직한 말이요 효과적일 겁니다.
나는 그러한 "논"들이 절대로 절대적인 것일 수 없으며, 단지 영성이 부족한 수많은 사람들(불특정
대중)에게 보다 보편타당성있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어떤 방편에 불과한 것이며,
절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못된다고 봅니다(삼위일체론의 문자적 한계성을 절감합니다).
실은 제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교리들이 대부분은 성직자군이 아니면 성경을 볼 수 없도록
엄격히 금했던(참으로 가당치 않은 일이지요) 로마 교회에서, 개개인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그 대신에 어떤 주입식 신앙강요를 위해서 만든 것이지요.
주님에 대해서 그러한 도식을 써서는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없다 라는 게 그러한 논리<교리>들의
큰 문제점이지요. 요한 사도가 어떠한 추가적인 것도 덧붙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事後적인(즉 성경 기록을 완성한 이후에 만든) 교리들도 어찌보면 요한의 경고의 말을 위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어떠한 종류의 "논"을 들이대더라도 그것에서 주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논"자체가 모순에 모순을 낳고 결국은 심한 도그마에 빠지게 만들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실은, 나도 신학을 좋아하던 (그저 괜히 동경하던) 사람이지만, 신학은 그저 고상한 학문분야의 하나
일 뿐일 것입니다. 신학이 도구이어야지 목적으로 되어서는, 주객전도가 생길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은 음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고(만약 베토벤이 지금처럼 음대에서 공부했다면 어떤 한계성에
스스로 도착되어 그렇게 훌륭한 음악을 절대로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호는 미대
출신이 아니며, 베드로나 요한은 체계적인 학문을 접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지요.
2009.12.08 00:56:35
수단의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으로서 지향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차라리 "통찰"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신학은 색안경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부정적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신학은 도그마틱에서 내려와
학문의 자리에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신학이 고상하든 안고상하든
일단 학문의 자리만 잘 지키고 있다면
최소한 헛소리는 하지 못할 겁니다.
도그마가 연역적인 것 같지요?
그런 시대도 있었어요.
하지만 도그마 생성 자체가 귀납적이었죠.
그래서 언제나 생동있게 사멸되거나 생성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치열하게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는 학교에 대한 신뢰가 필요할 겁니다.
도그마의 적용에는 다른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 또한 강압적으로 적용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닙니다.
비판하고 분개하는 것은 이해하나
일단 잠시 판단을 중지하시고
다비아의 글들을 들여다보심이 어떠실지요?
다비아가 모든 것은 아니나
좋은 길잡이로서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목적으로서 지향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차라리 "통찰"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신학은 색안경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부정적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신학은 도그마틱에서 내려와
학문의 자리에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신학이 고상하든 안고상하든
일단 학문의 자리만 잘 지키고 있다면
최소한 헛소리는 하지 못할 겁니다.
도그마가 연역적인 것 같지요?
그런 시대도 있었어요.
하지만 도그마 생성 자체가 귀납적이었죠.
그래서 언제나 생동있게 사멸되거나 생성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치열하게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는 학교에 대한 신뢰가 필요할 겁니다.
도그마의 적용에는 다른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 또한 강압적으로 적용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닙니다.
비판하고 분개하는 것은 이해하나
일단 잠시 판단을 중지하시고
다비아의 글들을 들여다보심이 어떠실지요?
다비아가 모든 것은 아니나
좋은 길잡이로서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2009.12.07 22:28:36
어떤 이론이든지 초창기부터 완전한 형태로 나온것은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점점 그 형태가 구체화 되어 가는 것이지요. 성경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초기의 신앙은 순수한 것이고 후대의 것은 변질된 것이냐?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에서 점차 더 구체화 되고 좀 더 세밀한 묘사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형태로 구체화 된 것이며, 그러한 고뇌의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물들을 도외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신학은 그저 "고상한 분야"에 속하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처절한 고통의 부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론만 하더라도 초대교회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론이지만 그것이 후대에 도출되었던 이유는 그만큼 피를 튀기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은 그저 책상머리에서 밥먹고 할일없는 사람들이 끄적거리면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신앙만 올바르고 후대의 신앙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없는게 아니거든요.
베토벤이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연습했던 내용을 돌아보신다면 오늘날의 음대교육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람들이 지식없이 복음을 전하던 것은 초대교회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그러한 방식이 통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서만 한정된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니까요. 또한, 지금의 기독교를 정립한 것은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깊고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었으면 초대교회는 벌써 영지주의나 아니면 이상한 사이비 종교로 전락해버렸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너무 이상적인 사회로 바라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신학은 그저 "고상한 분야"에 속하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처절한 고통의 부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론만 하더라도 초대교회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론이지만 그것이 후대에 도출되었던 이유는 그만큼 피를 튀기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은 그저 책상머리에서 밥먹고 할일없는 사람들이 끄적거리면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신앙만 올바르고 후대의 신앙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없는게 아니거든요.
베토벤이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연습했던 내용을 돌아보신다면 오늘날의 음대교육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람들이 지식없이 복음을 전하던 것은 초대교회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그러한 방식이 통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서만 한정된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니까요. 또한, 지금의 기독교를 정립한 것은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깊고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었으면 초대교회는 벌써 영지주의나 아니면 이상한 사이비 종교로 전락해버렸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너무 이상적인 사회로 바라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구원" 이라는 것을 "지옥 안가고 천당가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구원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 (천국)" 은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지금 너희들 가운데 있다"고 하셨지요. 구원론, 종말론,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 대해서 정용섭 목사님이 쓰신 글들이 "신학마당" "성서마당" 게시판의 주옥같은 글들속에 흩어져 있으니 찬찬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